〈 16화 〉 16화
* * *
라이라는 방금 전 다녀간 사내를 떠올렸다.
이상하리만치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
오드웰 연합군 소속의 인간. 대륙에서 흔히 보기 힘든 검은 머리카락.
그리고 왠지 모르게 라이라를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흐음.. 신기한 사내야."
다프닐이 점령당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을 텐데.
여기를 어떻게 찾아온 걸까.
정보를 얻을 방법이 따로 있었나?
곰곰이 생각하던 라이라는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다프닐에 그녀의 고객은 한 손에 꼽을 수 있었으니까.
그녀의 고객들은 전부 우량 고객이라 정보를 흘릴 리가 없었다.
정보를 줬다? 목숨이 아깝다면 그렇지 않았을 텐데.
라이라는 느긋하게 담배를 입에 물었다.
'오히려 그게 아니려나.'
자신이 생각하는 루트에서 벗어난 방법으로 정보를 얻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도 쉽지는 않을 텐데.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수록 수렁에 빠지는 느낌이다.
라이라는 종이를 들어올렸다.
길드원이 가지고 온 한 장의 종이는 강한윤의 정보가 적혀있었다.
한 장밖에 없다고? 혹시나 뒷 페이지에 뭐가 적혀있나 확인했지만 없다.
라이라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 사내에 대한 정보가 이게 다야?"
"예. 최선을 다해서 모아보았지만 이 정도입니다."
심지어 그 한 페이지마저도 제대로 채워지지 않은 내용이다.
우리 길드의 정보력이 이것밖에 안되나?
실망한 라이라는 종이의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강한윤 중위
오드웰 연합군 임관 전 기록 없음.
그가 임관하고 루드밀라의 지휘관 에리엘 대령이 1년 만에 작전을 수립.
루드밀라의 지휘관 에리엘이 군대를 이끌고 다프닐을 함락.
특이사항 : 다프닐의 성벽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림.
"흐음.. 이상한데.. 제대로 조사한 게 맞다고?"
"예. 맞습니다."
이게 뭐야. 정말 이 내용이 맞다고?
이상하기 짝이 없는 내용에 라이라가 담배에 다시 불을 붙였다.
검은색 머리칼이라면 특이해서 정보가 없을 리가 없다.
그가 부대에 합류한지 얼마 안 되고 다프닐을 점령했다고?
'우연의 일치... 그게 아니라면...'
다프닐의 성벽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는 내용이 검은 머리의 사내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마지막의 이 정보 확실해?"
"예. 목격자가 많습니다."
"장비나 마법을 사용한 건 아니고?"
"폭음이 들렸다곤 하지만 마나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다프닐의 남쪽엔 민가가 몰려있으니 목격자가 많은 건 당연하다.
따로 조사를 한 것을 보면 길드에서도 이상하다고 생각을 한게 분명했다.
하지만 특별히 장비를 동원한 것도 돈을 쏟아부어 마법을 쓴 것도 아닌데.
성벽을 어떻게 무너뜨렸을까.
곰곰이 생각하던 라이라가 미소를 지었다.
'재미있네.'
무언가에 이 만큼의 흥미를 느낄 수 있다니. 라이라에게는 몇 년 만의 일이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긴다면 이 사내에게 발생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이라는 강한윤의 정보가 적힌 종이를 들고서 작게 읊조렸다.
"강한윤."
마치 그 이름을 기억하려는 것처럼 말이다.
***
루프란의 북서쪽.
파프닐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보급 마차에는 이상이 없고 주변에도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은 보이지 않았다.
혹시 숲 속에 뭔가 있는 게 아닐까 하고. 마나를 퍼트렸지만 주변에 걸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대로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보급에 성공할 터.
일이 잘 풀린 다는 것에 기분이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불편했다.
보급 마차를 하루 종일 습격하던 적들이 자신이 있는 지금은 공격하지 않는다?
마치 적들에게 조종당하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낀 파프닐은 기분을 전환하기 위해 길가의 돌을 걷어찼다.
보급을 받기 위해서 며칠 간 이어진 호위다..
곧 있으면 끝나지만 파프닐은 찝찝함을 느끼고 있었다.
이 숲만 지나면 루프란인 만큼 적들이 무슨 짓을 해놨을 거라 생각했지만.
계속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찝찝하긴 하지만, 이대로 루프란까지만 도착하면 된다.'
파프닐은 루프란의 상황을 떠올렸다.
식량 부족으로 시작해서 복합적인 문제가 터져 나왔지.
하지만 보급을 한 번만 성공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 이후로는 상황을 잘 풀어나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한 파프닐이 눈을 번뜩였다.
파프닐이 소드마스터에 오른지 10년이 넘었다.
하지만 지난 10년 동안 크게 발전하지 못했다는 것을 떠올렸다.
이게 재능의 한계라는 것을 인지했다. 그러면서도 검을 휘둘렀다.
다른 한편으로는 욕심이 생겼다.
힘을 얻지 못한다면, 다른 것을 얻고 싶다는 욕심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최선을 다해 전투를 하고 군대를 이끌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크지 않았다. 허물 뿐인 돈과 명예.
파프닐은 재산이 축적되는 동안 공허함을 느꼈다. 이런 원하는 게 아니었다.
카니안 남작이 영지를 다스리는 것을 지켜보던 어느 날.
파프닐은 깨달았다.
돈이 아니라 자신 만의 세력을 가지고 싶다는 것을.
마음속에 그런 욕심이 들어앉았음을 깨달아버렸다.
나만의 세력을 구축하고 싶다...!
본인만의 세력! 그것만을 갈구하고 있었다.
자신이 다스리는 영지. 자신이 지휘하는 군대. 파프닐은 그것들을 원했다.
검의 한계를 알아버린 파프닐에게 힘의 욕망은 다른 식으로 방출되었다.
'지금이 나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다.'
카니안 남작과 바로브 자작이 아무것도 못하고 자멸해가는 지금.
공을 세운다면 왕으로부터 작위를 받게 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돈도, 기반도, 가문도 없는 파프닐이지만 검은 아직 날카로웠으니까.
군대의 지휘권을 요구한 것은 무례하다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루프란의 상태를 떠올린 파프닐은 주먹을 꽉 쥐었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
루프란을 이끌고 승리를 쟁취하려면 천성 군인이자 기사인 자신이 아니면 안 된다고 확신했다.
겁쟁이 바로브 자작.
입만 산 카니안 남작이 아니라.
전장에서 검을 휘두르는 자신이 아니라면 불가능하다고 말이다.
마차는 계속해서 루프란에 가까워졌다.
그럴수록 파프닐의 신경은 날카로워져갔다.
적이 기습을 하는 건 아닐까? 마차 길에 무슨 짓을 해놓은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던 파프닐의 신경에 걸린 것은 소음이었다.
루프란 쪽에서 들려오는 자그마한 소음에 파프닐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상대가 루프란을 총 공격이라도 한 건가?
이쪽의 생각을 꿰뚫어 본건가?
그렇다고 하기엔 마나의 유동이 느껴지지 않았다.
루프란에서 전투가 일어났다고 하기엔 마나가 너무 잠잠하다.
하지만 루프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은 확실했다.
루프란에 다가갈수록 소음은 점점 커졌으니까.
긴장한 파프닐은 땀이 난 손을 옷에 대충 닦아냈다.
"파프닐 대장님. 이거...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습니다."
다른 병사가 입을 열었다. 소음을 눈치 채고 불안함을 표출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거냐...'
파프닐은 루프란으로 향하면서 다양한 상상을 했다.
적이 침투했거나, 몬스터가 루프란을 헤집었다면.. 큰일이다.
그런 상상을 하며 당장이라도 검을 뽑을 수 있도록 마음을 다잡았다.
"대장님! 뭔가 이상합니다!"
보급 마차가 성문으로 다가가자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병사가 아니었다.
검과 창 대신 농기구를 들고 있는 영지민이 보인다.
그들에게 마차가 다가가자 길을 막으면서 소리치는 중이었다.
"보급이다!"
"이 망할 놈의 군대! 다 뺏어 가놓고 얼마나 더 수탈하려고!"
"너희들이 가져간 만큼 돌려줘!"
"내 아들을 죽게 내버려둬? 이 망할 새끼들..."
크게 당황한 파프닐이 고민했다. 영지민이라고? 검을....
뽑아야 할까. 말아야 할까.
대충 보이는 숫자만 해도 백은 되어 보인다.
겁도 없이 다가오는 영지민들을 보면서 호위 병사들이 검을 뽑았다.
"대장님 저희 어떻게 합니까?"
"저들은 영지민입니다! 싸워야 합니까?"
"이 씹새들...! 너희들이 그러고도 사람이야!"
"우리들에게 가져갈 건 다 가져가 놓고서 칼을 뽑아?"
파프닐은 상황을 빠르게 파악했다.
농기구를 든 영지민들과 검과 창을 든 병사들의 대치상황.
내분이다. 내분이 일어났다... 망할.
여기서 칼을 뽑는다면 적이 아니라 같은 편인 영지민들과 싸우게 될 터.
안 뽑는다면 원만한 해결이 가능할까?
그건.. 불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입구의 영지민의 숫자가 이렇다면, 루프란 내부 상황이 짐작이 가는 상황이다.
이를 악문 파프닐의 마음이 흔들렸다.
영지민 수백을 죽여야 한다고?
그렇게 된다면 루프란을 지키는 게 의미가 있는 것인가?
싸운다. 안 싸운다.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문제였다.
고민하는 와중에도 영지민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결정을 해야할 때라고 느낀 파프닐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보급 마차를 지킨다. 저들을 적으로 간주한다."
***
"와우."
파프닐이 검을 뽑는 것까지 망원경으로 지켜본 뒤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소드마스터가 검을 휘두르면 처참한 광경이 연출될 테니까.
콰광!
안 그래도 루프란 내부에서 난리가 나는 지 큰 소리가 들려온다.
루프란은 여러모로 몰려있다.
모든 문제가 복합적으로 터지기 직전이니 가볍게 건드리기만 한다면.
'이렇게 되는 거지.'
내가 간단한 소문 몇 개를 흘린 것이 도화선이 되었다.
불만이 쌓일 대로 쌓인 루프란의 시민들이 날뛰는 건 당연한 일이다.
군대는 식량을 숨기고 있다.
군대가 영지민들을 다시 약탈하려 한다.
'물론 팩트는 하나도 없지만.'
루프란이 풍족한 영지도 아니고 추수철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다.
저 많은 병사를 먹여 살리려면 당연히 허리가 휘는 법이다.
영지의 내정 상황을 굳이 확인하지 않더라도 알 수 있는 내용이다.
소문으로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더라도 상관없다.
연합군 측에는 아무런 피해가 없으니까 말이다.
나는 개 박살나는 루프란을 보면서 쓴 웃음을 지었다.
'인간 세력은 이래서 문제라니까.'
자원이 부족한 인간 세력의 영지는 대부분 불만이 쌓여있다.
영지민들이 언제 반란을 터트릴지 모르니, 적과 싸우고 아군과도 싸울 준비를 해야 한다.
불만 수치를 내리려면 내정에 특별히 신경을 써야하는 데.
나는 전략에 특화된 고인물이다. 내정작업을 빡세게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인간 세력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였다.
인간 세력은 내정이 망가졌을 때, 건드리기가 너무 쉽다.
특히 자원 상황이 그렇게 넉넉지 않은 남부라면 더욱 쉽다.
계속해서 루프란 쪽에서 소음이 들린다.
루프란의 지금 상황은 언제 끝날까. 불만을 잠재우는 건 힘들겠지.
1만 정도 되는 영지민 중에 어느 정도를 죽여야 할지 상상이 안 간다.
처형을 통한 공포 정치를 해서 불만을 잠재우거나, 협상을 해야 한다.
하지만 그게 어렵지. 화가 난 영지민들은 말이 통하지 않는다.
파프닐은 군대를 위해서라면 영지민들을 기꺼이 죽이겠다는 선택을 내렸다.
이대로만 쭉 흘러가준다면 루프란의 전력은 크게 약화되겠지.
다프닐을 점령하고 루프란은 자멸한 상태.
동부의 영지는 멀어서 지원을 오기 힘들다.
그렇게 되면 남부의 영지는 마르벨스만 남게 된다.
'남부가 다프닐을 뚫기만 하면 먹기 쉬워.'
상대가 대처하기 전에 턴을 끝내버리면?
상대는 손실을 입을 수밖에 없다.
나는 가만히 있다가 루프란이 멸망하기만을 기다리면 된다.
영지민들의 반란은 진압될수록 군대 내의 여론은 나빠질 것이다.
징병된 병사들이 누구의 가족일 지는 뻔한 일이니까.
가족을 잃은 병사들은 반란을 일으키고 또 다른 세력을 만든다.
게임에서도 이런 흐름대로 흘러가니까.
누가 이길지는 모르겠지만 파프닐이 이기지 않을까.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내란으로 약해진 루프란이 우리의 공세를 버틸 수 있을 리가 없다.
나는 부대로 복귀하면서 남은 영지를 떠올렸다.
마르벨스. 소드마스터 중급인 헨리크 공작이 있는 영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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