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화 〉 14화
* * *
"...또 습격을 당했다고?"
정말로 듣기 싫은 보고의 내용이다.
지금 꿈이라도 꾸고 있는 건가?
매번 당한다고? 내부에 배신자가 있기라도 한 건가?
동부에 스파이를 심을 정도로 침투했다면. 모든 게 헛된 것 아닌가...!
카니안 남작은 의심이 깊어져 가고 있었다.
연속된 패배. 도착하지 않는 보급.
이제는 귀족인 카니안 남작의 식사마저도 초라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보급만 제대로 도착한다면, 이런 상황이 호전되겠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카니안 남작은 애꿎은 분노를 터트렸다.
"망할.. 망할...! 보급을 하는 새끼들은 뭐하는 놈인데 계속 당하기만 하는 거야!
적군이 대놓고 우리 진영으로 들어오는데 다른 놈들은 뭘 하고 있고!"
애초에 다프닐을 먹히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테지만.
분노로 거기까진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계속된 패배.
상대가 뛰어나다는 것을 부정하고 싶은 생각에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망할 보급. 망할...!"
카니안 남작이 이를 갈았다.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다프닐을 뺏긴 날로 돌아가고 싶었다.
아니, 애초에 다프닐에서 흑령을 잡겠다고 설치지만 않았다면 이렇게 일이 풀리진 않았을 텐데.
그 분노는 결국. 지금 가장 심각한 문제인 보급으로 향했다.
카니안 남작이 보고서를 찢어버리며 소리쳤다.
"보급에 실력 좋은 기사들을 보내면 안 되는 건가? 왜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느냐 말이야!"
"바로브 자작님! 후방의 영지에서 너무 대충 보급을 보내는 것 아닙니까? 보급에 신경을 써달라고 요구해야합니다!"
"...지금 그게 쉬운 게 아니네. 나도 지금 최선을 다한 거야."
한숨을 내쉰 바로브 자작이 눈을 흘겼다.
정작 제일 답답한 사람이 누구인데.
남작은 누구에게 큰 소리를 치고 있는 거지?
바로브 자작은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지금이 어떤 상황인 지도 모른 채로 입만 나불거리고 있다니.
이 망할 놈의 돼지가 다프닐을 뺏기지 않았더라면 생기지 않을 문제였다.
군대가 루프란으로 몰리지 않았다면 식량이 부족할 일도 없었고.
다프닐을 뺏기지 않았다면 이렇게 심적 고통을 받을 일도 없었을 테니까.
카니안 남작이 저지른 문제는 이제 바로브 자작의 일이 되었다.
'상황이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
식량이 빠르게 소모되고 있는 루프란은 흔들리는 중이었다.
바로즈 자작의 귀에 들려오는 소문들.
루프란이 망해가고 있다.
오드웰 연합군에게 곧 패배할 것이다.
절망이 가득한 얘기밖에 없지만 반박할 수 없었다.
병사들의 사기는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지만 마땅한 대책을 떠올리지 못했으니까.
보급 요청을 보낸 만큼 어음만 늘어나 루프란의 재정이 악화됐을 뿐이다.
'그렇다고 보급에 모든 신경을 쓸 수 없다.'
보급을 하겠다고 다른 지역의 소드마스터 지원을 요청한다거나.
더 많은 병력을 요청 한다?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지는 상황이다.
기하급수적으로 보급에 사용하는 돈이 많아진다.
그 돈이라면 차라리 더 많은 보급 요청을 하는 게 맞다.
단 한 번..!
딱 한 번만 성공하면 숨통이 트일 거라는 생각을 한 자작이었지만.
지금까지 모든 보급에 실패했다.
'파프닐 경을 보급으로 보내야 한다..!'
파프닐 경이 자리를 비운다는 것은 자작에겐 달갑지 않았다.
루프란은 다프닐처럼 성벽이 견고하지 않다.
성벽 강화 마법이 걸려있긴 하나 하급 수준.
소드마스터 급의 고수가 루프란으로 공격을 오게 된다면,
루프란의 성문이 열리는 것은 금방일 터였다.
'어지럽다.. 어지러워...'
전투를 위해서 루프란의 얼마 남지 않은 식량을 군대에 쏟아 부어야 하나?
실패하면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데?
바로브 자작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프닐을 총공격하기엔 턱 없이 부족한 양의 식량이고.
식량에 맞춰서 군대를 운용하면 공성에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차라리 첫날에 공격을 하는 편이 맞았나..?
의문만 깊어져 가는 바로브 자작은 다른 수를 떠올렸다.
'영지민들에게서 식량을 징수한다.'
하지만 이 방법도 마땅히 좋은 수는 아니다.
영지민들은 오랫동안 지속된 전쟁으로 인해서 불만이 쌓여있다.
세금을 올리고, 식량을 징수하고, 젊은 청년은 군인으로.
이미 뺏을만한 것은 전부 뺏은 상태인 상황.
이들의 분노가 터질수도 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군대의 칼은 다프닐이 아니라 루프란의 영지민들에게 향하리라.
군대냐. 영지지민이냐.
둘 중 하나를 버려야 하는 상황에서 바로브 자작은 쉽사리 선택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고민만 깊어가던 바로브 자작에게 반가운 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직접 보급을 받아오겠습니다. 바로브 자작님."
"파프닐 경."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파프닐 경이 손수 움직이겠다니.
하지만 바로브 자작은 반문했다.
"그건... 이미 시도해본 방법이 아닌가."
적이 숨어있을 만한 곳에서 대기하는 것은 이미 시도를 했었다.
적은 허를 찌르는 것에 선수였다.
보급 마차에만 손상을 입힌 뒤 도망치고.
반격하기 위해서 숨어든 곳 근처에서는 절대로 등장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빈틈이 있는 곳에서는 얌체같이 마차에 타격을 주고 도망친다.
수많은 패배를 겪은 기억이 자작에게 새겨져 있었다.
"그 때는 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다를 겁니다."
"하지만 파프닐 경이 성을 비운다면 문제가 생기지 않겠는가?"
"다프닐의 군대를 두려워하시는 겁니까?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계속된 패배로 겁쟁이가 되어버렸군. 파프닐이 속으로 혀를 찼다.
루프란으로 공격해오는 것을 상상하는 건지.
아니면 연속된 패배로 인해서 뇌가 굳어버린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건 중요치 않았다.
파프닐은 오드웰 연합군의 작전을 이해하고 받아칠 생각을 하고 있었다.
'루프란은 안전하다.'
겁에 질린 두 귀족의 생각과는 달리 루프란은 밀리지 않는다.
밀리려면 에리엘과 군대가 밀고 들어와야 하는 법인데.
에리엘이 공격을 해온다? 그건 말이 안 되는 상황이니까.
아무리 기세를 잡았다고 한들. 루프란이 위태롭다 한들.
마르벨스가 존재하는 이상, 다프닐은 이 이상으로 압박을 넣을 수 없다.
오드웰 연합군의 전략은 거의 파악했다.
상대에게 겁을 심어주고 선제권을 가져온 다음 전력을 갉아먹을 셈이었다.
루프란의 움직임을 막아두고 자멸하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다.
파프닐은 결론을 내렸다.
'내가 보급을 위해 움직일 거라는 생각은 쉽사리 할 수 없다.'
보급을 하기 위해 소드마스터가 움직이는 건 예상하기 힘들 것이라고.
정보가 없는 상태로 그런 판단을 내린다는 것은 무모하니까.
그렇다면 오히려 상대는 쉽사리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루프란에서 뭘 준비하고 있는 지 모르니까.
'그리고 루프란의 전력은 약하지 않다.'
파프닐이 빠지더라도 부대에는 수많은 병사들이 주둔하고 있다.
다프닐을 공격하는 건 어렵겠지만.
루프란을 수비하는 것은 공격에 비하면 훨씬 쉽다.
'상대는 공격해오지 않는다.'
루프란을 뚫으려면 다프닐의 많은 병력을 끌고 와야겠지.
다프닐의 수비도 생각을 한다면, 공격의 인원은 적을 터였다.
그렇다면 공격을 안 한다는 쪽이 더 논리적이었다.
상대는 공격하지 않는다.
상대는 보급을 끊으면서 압박을 준다.
루프란의 움직임은 소극적이 된다.
그렇다면 오히려 움직여야 한다.
파프닐은 심리를 역으로 비틀어서 생각했다.
이쪽이 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해야 한다고.
그렇게 본인이 직접 움직이기로 결정을 내렸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
보급을 실패한다면 어차피 미래는 없다.
그렇다면 움직일 수 있을 때 움직여야 한다.
특히, 이 귀족들은 답이 없다.
분위기를 살핀 후에 파프닐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제가 군대를 움직일 수 있는 지휘권을 원합니다."
"그건...!"
"무례하다! 지휘권을 달라니!"
파프닐도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자작과 남작이 가진 군대 지휘권을 양도하라는 뜻이었다.
아니, 표현만 거칠지 않았을 뿐.
반쯤 협박을 하고 있었다. 지휘권을 내놓으라고.
"그렇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겠습니다."
"파프닐 경.. 정말 이것밖에 없나?"
"계속된 실패를 지켜볼 바엔 제가 움직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파프닐의 시선이 카니안 남작에게 닿았다.
"크윽.."
계속된 실패가 누구를 말하는 지는 뻔했으니까.
침음을 계속해서 흘리던 카니안 남작이 입을 열었다.
"...허가 하겠소. 파프닐 경..."
"감사합니다. 카니안 남작님."
파프닐이 드디어 움직였다.
***
[동물의 친구]
동물과 대화를 할 수 있습니다.
텍스트만 읽어도 쓰레기처럼 보이는 재능
아니 실제로도 쓰레기가 맞다.
게임에서 동물이란 스토리 진행을 위한 힌트를 조금 던져주고 약간의 도움을 주는 게 전부니까.
하지만, 어떻게 보면 숨겨져 있는 상호작용이 있지 않을까 기대하게 만드는 텍스트였다.
동물에게 말을 걸어서 타고 다니고!
동물 군단을 만들어서 움직이고!
새 군단을 만들어서 지휘하고 폭격을 하고!
'나도 전투에 써먹을 수 있나 한참을 연구했었지.'
동물에게 말을 걸고 먹이를 주고 온갖 난리를 다 해봤지만,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동물과 상호작용은 없었으니까.
동물과 대화만 가능하다. 그 이상의 상호작용은 존재하지 않았다.
동물들에게 명령을 내려서 작전에 써먹는 상상을 했지만 상상으로 끝났다.
게임의 데이터를 뜯은 유저에 의해서 나의 기행은 멈췄다.
그런데 이 재능을 제대로 사용해볼 때가 왔다.
나에게 먼저 말을 걸어온 까마귀 하나에 의해서 말이다.
"인간! 인간!"
"아니 주인이라고."
"인간! 주인? 인간!"
"까마귀가 똑똑하다던데 이건 뭔 말이 통하질 않네. 바보도 아니고."
"바보! 인간은 바보다! 인간은 바보다!"
"화염구 맛 좀 볼래?"
내가 손에 화염구를 만들어보이자 까마귀가 갑자기 조용해진다.
그리고 또 다시 입을 열었다.
"주인! 주인! 주인은 똑똑하다! 천재다! 최고다!"
"..."
오히려 나를 맥이는 거 같은데 그냥 구워버릴까.
고민을 계속 하다가 나는 화염구를 없애버렸다.
어떻게 보면 귀중한 기회인데, 굳이 그럴 필요는 없겠지.
나는 바닥을 가리키고 까마귀에게 다시 명령했다.
"이거 물어봐."
"내가 왜."
"화염구."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한다!"
'뭐 이런 애가 다 있냐.'
까마귀가 바닥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입으로 물었다.
이 녀석은 며칠 전에 만난 까마귀.
내가 대화를 거니 좋다고 따라왔고 먹을 것을 주면서 친해졌다.
'문제는 잘 안 따라준다는 건데.'
원래 장난기가 많은 성격인건지. 까마귀가 대부분 이런 건지 도통 알 수가 없다.
더더욱 이해가 안가는 건 화염구를 시전해도 도망치지 않는다.
'내가 이걸 쏠 생각이 없다는 걸 아는 것처럼 말이야.'
얘를 전략적으로 이용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만. 가능할까.
"손."
"끼에에에엑! 끼에에엑!"
"화염구."
"저는 주인님의 충실한 종입니다."
날개를 내 손위로 올리면서 까악 까악 거린다.
뭐 이딴 녀석이 다 있지.
하지만 이 까마귀의 조련에 성공한다면.
전략의 폭이 넓어지고 정보도 많이 얻을 수 있다.
게임에서는 구렸지만 여기에서는 수 많은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지 않을까.
동물의 친구 재능이 사실 좋은 건가? 싶지만.
"까악 까악"
아니 아닌가?
다른 동물들이 이 녀석보다 말을 못 알아먹는다면?
대화는 되더라도 나의 부탁이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진짜 쓰레기 재능인거지.'
그런 끔찍한 상황이 온다면 그땐 주저하지 않고 손절한다.
"까마귀라고 부르면 좀 그런데.. 너의 이름으로 까막은 어때."
"까막? 까막? 구리다! 구리다!'
"화염구."
"좋다! 좋다! 나는 주인의 까막이다!"
까마귀에게 화염구를 날리고 싶은 충동을 참아야 했다.
***
결국에 나는 까막을 이용하려는 계획은 뒤로 미뤘다.
말을 통 들어먹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얻은 게 없는 것은 아니었다.
동물에게도 호감도 시스템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호감도가 올라간다면 내 명령을 들을 확률이 상승한다.
'어렵네.'
동물의 호감도는 대체 뭐로 올려야하나.
일단은 내가 아는 대로 진행하는 게 좋겠지.
나는 다프닐의 한 주점을 찾았다.
구석진 곳에 위치하고 허름하기 짝이 없는 주점.
저녁인데도 불구하고 손님이 한 명도 없었다.
"손님, 주문하시겠습니까?"
내가 입구로 들어가자 웨이터가 반응했다.
고개를 위로 올려서 메뉴판을 보자 주문할 수 있는 메뉴는 딱 2가지 밖에 없었다.
생선튀김과 맥주 뿐. 이러니 장사가 될 리가 없지.
맥주 한 잔 정도는 괜찮을 지도 모르지만.
내가 맥주같은 걸 마시기 위해서 여기에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특별한 주문을 원합니다."
"예. 어떤 걸 원하십니까?"
"피가 흥건한 레어 스테이크를 원합니다."
내 대답을 듣자 웨이터의 눈빛이 예리해졌다.
그리고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 한 뒤.
오른쪽에 잠겨있는 문을 열어주었다.
위층으로 향하는 계단이 보인다.
웨이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서서 접시만 닦을 뿐이다.
끼익. 끼익.
계단을 걸어서 올라갈 때마다 바닥의 나뭇 판자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난다.
2층에 도착하고 보이는 것은 방문 하나였다.
마치 이 쪽 말고는 길이 없다는 듯이 하나 뿐인 문.
나는 조용히 문을 열었고.
문틈 사이로 달짝지근한 향이 새어나왔다.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붉은 머리칼의 여인이 보인다.
"어서 오세요. 손님... 이신가? 아니면 단속이라도 나오신 건가요?"
그렇게 말한 뒤, 뭐가 웃긴지 여인이 쿡쿡 웃은 뒤.
담배를 한 모금 빤 후에 연기를 가볍게 내뱉는다.
"그래서 무슨 일이죠?"
"의뢰를 하나 하고 싶은데. 라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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