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화 〉 12화
* * *
"강한윤, 일어나."
누군가 몸을 흔드는 느낌에 눈이 살며시 떠진다.
노아가 보이는 걸 보니 나도 모르게 깜빡 잠이 든 것 같다.
근데 가슴에 가려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건 조금 야하네. 자연스레 발기해버렸다.
"아니... 이쪽으로 일어나라는 건 아닌데?"
내 바지 쪽을 힐끔 본 노아가 눈을 흘겼다.
아무래도 도착한 마차 안에서 하는 건 그렇겠지.
나는 마음속을 비우고 노아의 허벅지에서 머리를 뗐다.
"미안해. 원래는 조금만 뒹굴 거리다가 일어나려고 했는데 어느 샌가 자버렸네."
"알았으면 더 신경써주지 그랬어?"
"그럼 오늘 저녁 좋은 데 가서 먹을까? 단둘이만?"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내가 노아의 손을 잡았다.
얼굴이 붉어진 노아의 귀가 파르르 떨린다.
"그...그러던가."
아무래도 오케이인 것 같다.
"나는 보고하러 세계수로 갈 건데 노아 너는 어떻게 할래?"
"부대로 가려고. 정찰대 인원들에게 인수인계 할 것도 있고 다른 할 일도 있거든."
"그렇다면 여기서 헤어져야겠네. 일 끝나고 내가 찾아갈 테니 기다려."
"알았어."
노아와 간단하게 인사를 나눈 뒤에 각자 반대 방향으로 헤어졌다.
'세계수는 언제 봐도 대단하긴 하네.'
원래 세계에 이렇게 큰 나무가 있다면 일조권을 방해한다고 고소를 당했겠지.
게임에서도 쓸데없이 크다고 느꼈는데, 실제로 봐도 크긴 크다.
가슴이 웅장해지는 것을 느끼며 세계수의 근처로 향했다.
세계수를 지키는 병사들이 무기를 들어올리고.
나의 모습을 제대로 확인한 다시 무기를 내린다.
저번에 왔을 땐 아무 신분도 아닌 인간이었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오드웰 연합군의 군복과 중위의 계급장이 있으니까.
'어디로 들어가야 하지.'
세계수 여기 저리를 둘러보니 빛이 새어나오는 조그마한 틈이 보인다.
저 사이로 들어가면 뭔가 있겠지.
안에 들어가서 걷고 있으니 자그마한 불빛이 나를 향해 다가온다.
사람이 전등을 들고 오거나 마법은 아니었다.
어디선가 많이 본 것 같은 하늘색의 빛인데... 아. 빛의 정령이다.
가까이서 보니 빛 안에 자그맣게 일렁거리는 표정이 보였다.
'게임에서는 세계수에 대한 상호작용이 단순했는데.'
여기에서는 다른 걸까. 빛의 정령들이 내 주변으로 모이고 있었다.
앞으로 걸어가려고 하니 빛의 정령이 나의 앞을 막는다. 그리고 빙글 빙글 돌았다.
"어라, 인간이네요. 이번의 그 분이신가요?"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둠속에서 걸어 나온 상대는 날개를 가지고 있었다.
수인 중에서도 날개를 가진 종족. 하늘에 가깝다는 의미에서 천족이라 불린다.
나를 향해 다가오니 하얀색 깃털이 이리저리 흔들린다.
"예. 강한윤 중위입니다."
"흐음... 에리엘 대령님의 명령으로 오셨나보네요."
천족의 여인이 자연스럽게 나의 오른손을 붙잡고 손등을 쓰다듬었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건가?
그러자 눈앞에 메시지가 떠오른다.
[세계수에 접근할 권한을 획득했습니다.]
'신관이구나.'
세계수 내부에는 신관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실제로 본 건 처음이다.
게임에서는 세계수를 클릭하면 바로 상호작용을 할 수 있도록 되어있으니까.
"그럼 들어가시면 됩니다."
여인이 손짓하자 나를 막고 있던 정령들이 길을 내어준다.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자 수많은 빛의 정령들이 세계수의 안을 맴돌고 있었다.
세계수의 벽면에는 마나가 흐르는 뿌리들이 보인다.
그것 외에는 특별히 보이는 것은 없다.
'이걸 만지면.. 뭐가 되나?'
나는 조심스럽게 뿌리로 다가가서 손을 가져다 대었다.
뿌리가 꿈틀대면서 나의 손이 스캔들 당하듯이 마나로 뒤덮인다.
[데이터를 분석중입니다.]
[오드웰 연합군 소속 강한윤 중위.]
[세계수 본체에 접속을 허가 받았습니다.]
[세계수에 접속합니다.]
이거 무슨 인트라넷 로그인을 하는 것처럼 창이 뜨네.
게임에서는 세계수를 통해 정보를 얻는다. 라고만 나왔는데.
나는 정보를 입력하는 창을 열고 보고서 작성을 하기 시작했다.
'대륙년 1476년. 4월.....'
이렇게 적으니 뭔가 양판소 도입부 같네.
기분이 이상하지만 나는 그대로 내용을 쭉 적어 넣는다.
작전 중 이상 없음. 이상 징후 발견하지 못함.
이런 내용이 쭉 이어지다가 드디어 나의 이야기가 나온다.
흑령 대령 및 강한윤 중위의 활약으로 인한 다프닐 남쪽 성문 붕괴.
적군 210명 사살, 포로 670명 포획.
아군 36명 사망, 55명 부상.
이것으로 보고서 작성은 끝이 난다.
이렇게 적어놓으니까 별거 없네?
오래 걸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더 빨리 끝났다.
'UI가 그냥 인터넷이랑 똑같아서 그런가.'
타자도 내가 아는 쿼티 그대로고.
시간이 예상외로 남아버린 나는 페이지의 다른 부분들을 돌아다녔다.
혹시 이게 있나? 나는 에리엘을 검색했다.
에리엘 대령 / 개요 / 상세 / 작전 수행 내용 / 관련 문서
오 뭐야. 목차별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게 어디 위키 문서 같다.
이게 진짜 나무위키지. 아니 세계수 위키인가?
에리엘에 대한 내용은 크게 적혀있는 게 없었다.
어디서 복무를 시작했고 언제 승진을 했고 작전을 수행했다.
이런 기본적인 내용만 조금 적혀있을 뿐 내 기억 속에 있는 에리엘의 정보에 비하면 턱도 없다.
'개인이 가진 기술이나 전투력은 나오지 않네.'
혹시나 내가 가진 정보 중에 틀린 게 있다면 고칠 기회였는데.
아쉽게도 그런 기회는 없었다.
평상시에 컴퓨터 앞에 앉아서 나무위키를 하는 것처럼 자세를 편하게 취했다.
사이트 여러 군데를 돌아 다녀봤지만 금세 지루해져서 하품이 나온다.
웬만하면 다 아는 내용에 중요한 정보를 누르면
[정보 열람이 가능한 단계가 아닙니다.]
라고 뜨면서 출입을 막았으니 흥미가 떨어지는 것도 당연하다.
'중위라 그런 걸지도 몰라.'
등급이 올라간다면 쓸 만한 정보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이제 볼게 없나 싶어서 메인페이지로 되돌아가봤다.
[토론 게시판]
토론 문서도 있네?
나는 토론게시판으로 들어가면서 아쉬움을 느꼈다.
자유 게시판 같은 게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평상시 세계수 인트라넷으로 시간을 보낼 텐데.
무엇보다 여기는 이상한 사진 같은 게 돌아다니지 않을 테니까.
'...그런 게 있다면 오드웰 연합군은 망해도 돼.'
이 세계까지 그런 게 존재한다면 세계수를 불태우고 싶다는 욕망이 생길 지도 모른다.
이상한 사진의 기억을 깊숙한 곳에 묻어버리고 토론 게시판으로 접속했다.
그리고 지금 가장 핫한 것으로 보이는 게시글의 내용을 클릭했다.
제목 : 북부 구멍 난거 '그 녀석' 때문 아니냐?
생각해 봐.
갑자기 북부라인에서 구멍이 뚫렸잖아.
누군가 개트롤을 한 게 아니라면 불가능하다고.
근데 어울리는 지휘관이 딱 한명 있잖아? 능력은 없는 데 계급은 높은 사람.
>그렇긴 한데 너무 억측 아님? 또 애꿎은 지휘관만 물어뜯네 (12676a)
ㄴ 응 본인 꺼지시고
ㄴ 본인임? 이걸 옹호하네 북부에 구멍이 뚫렸는데
>에우제ㄴㅇ 말하는 거야? (887zu7)
>ㅇㅇㅈ니아? (c8h9in)
>난 그 작자가 제발 명령 좀 안 내렸으면 좋겠어 (nah8a9)
>이번에 북부 전투 한 번 더 말아먹으면 어디까지 밀릴지 상상이 안 간다 (h299az)
북부의 라인에 구멍이 뚫리고 그 잘못이 전적으로 사령관 한명에게 있다는 내용이었다.
조용한 남부에 비해서 북부는 화약고 그 자체다.
매일 전투가 벌어지고 오늘 한 칸 전진하면 내일 한 칸 뒤로 밀리는 고지전이 일상인 곳.
거기에서 큰 실수 한번이면 점령지가 날아가는 것은 아무 일도 아니다.
'북부의 개트롤 에우제니아.'
소드마스터 중상급의 실력을 가지고 있지만, 지휘, 전략, 전술 모든 면에서 꽝인 지휘관.
그녀가 북부에서 여전히 지휘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제 슬슬 사령관에서 물러날 때가 되지 않았나?
아니, 내려오지 않으면 문제가 100% 생기는데.
'북부가 위험하면 안 좋아.'
블블을 플레이할 때 웬만한 플레이어들은 북부부터 진행을 한다.
남부 쪽을 건드는 게 안 좋은 것도 있고. 잘못해서 북부를 npc에게 맡긴다면 에우제니아가 똥을 거하게 싸지를 가능성도 있다.
'최악이긴 하네.'
일명 에우제니아식 지휘.
에우제니아가 북부를 맡은 상태에서 자동진행을 한다?
그럼 북부가 개 박살이 나버린다는 점에서 이런 별명이 붙었다.
이 녀석이 물러나지 않는다면 북부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는 건 시간문제다.
'... 건의를 해야 하나.'
글을 남겨서 북부의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해야 하나.
그게 제일 확실한 방법일 테니까.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하니 큰 참견은 못하겠지만.
터지지 않도록 적당한 가이드라인은 남길 수 있다.
나는 북부를 살리기 위한 장문의 글을 작성했다.
제목 : 솔직히 아우제니아 이 년보단 내가 더 잘할 듯 ㅋㅋ
***
세계수 인트라넷을 그만두고서 밖으로 나오자 어느새 해가 산 중턱에 걸려있었다.
'생각보다 세계수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네.'
들어갈 땐 사람이 얼마 없었는데 나올 때 보니 이용하는 사람들이 몇몇 있었다.
사람이라기 보단 엘프, 수인, 오크들이었지만 아무튼.
나는 노아를 만나기 위해서 부대의 정찰대가 위치한 막사로 향했다.
"그 자세가 아니라니까. 조금 더 힘을 빼고 가볍게 찌른다는 느낌으로. 그래. 좋아. 그 느낌을 유지해."
노아가 다른 병사들이 검을 휘두르는 것을 보면서 자세를 봐주고 있었다.
뭐야 왜 이리 섹시하냐고. 이것저것 세세하게 알려주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일을 열심히 하는 여성은 섹시한 법이지.
"... 노아 중위님을 찾아오셨습니까?"
"어우 시발 깜짝이야!"
나는 뒤에서 소리도 없이 등장한 수인 병사의 목소리에 화들짝 소리를 내질렀다.
깜빡이는 키고 들어오지. 아니면 소리라도 좀 내주던가.
묘족의 사내여서 그런지 조용하게 움직인다.
"크흠... 노아 중위를 찾아온 게 맞지만 방해가 되나 해서 보고 있었지."
"그런 거라면 들어오셔도 됩니다. 훈련시간은 끝났고 개인정비 시간이니까요."
뭐에요. 노아 중위님. 남자친구 생겼습니까?
와 뭐야, 이번에 새로 오신 작전 장교님이시네요.
아니 그런 사이 아니야!
소대 사람들이랑 사이가 좋아 보이네.
주변에서 노아를 놀려대니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진다.
훈련장에서 걸어 나온 노아가 바깥으로 나를 데리고 나온다.
이렇게 하면 그런 사이라는 걸 대놓고 말해주는 꼴 아닌가?
우리가 이동한 곳은 루드밀라 세계수 남쪽에 있는 음식점이었다.
일반적인 레스토랑처럼 스테이크와 와인, 빵, 수프를 판매한다.
우리는 저녁으로 스테이크와 와인을 곁들이기로 결정했다.
"어우 벌써 취하네."
"그렇게 마셔댔으니 당연한 거 아냐?"
내가 원래 술이 센 편도 아니지만, 이상할 정도로 빨리 취했다.
이런 것도 체력 스탯에 영향을 받는 건가.
알딸딸함을 느끼며 노아의 부축을 받아 숙소로 도착한 나는 침대에 풀썩 쓰러졌다.
어우 세상이 도네.
오늘은 별로 한 것도 없는 데 피곤하다.
차를 타서 그런가? 차를 타면 왠지 몸이 더 피곤하다.
마차도 차는 차니까.
침대에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을 느끼며 누워있자 노아가 나의 옷을 벗겨준다.
"고마워."
그런데 겉옷을 벗기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내 바지까지 옷을 전부 벗기려고 한다.
고개를 돌려서 노아를 보니 라텍스 재질의 속옷. 마사지 전용 옷을 입고 있었다.
"...노아?"
"오늘은 내가 마사지 해줄 건데.. 싫어?"
노아의 말에 자연스럽게 발기했다.
[채음보양으로 마나를 획득하였습니다!]
[행동 경험치를 획득하였습니다!]
이게 행복이지.
***
다음날 아침.
간단하게 밥을 해치우고 다프닐로 향하는 마차에 올랐다.
그리고 어젯밤에 떠오른 메시지 로그를 확인했다.
'생각보다 신기한 판정이네.'
마사지를 받은 건 난데, 마지막에 내가 노아의 몸을 주물러서 그런가.
노아에게 마사지 버프가 걸렸다고 표시가 되어있었다.
채음보양도 어제 달달하게 다 먹었고 거기에다가 채음보양의 등급이 상승했다.
[방중술 채음보양 (Rank : E)]
음기를 흡수해 양기로 전환합니다. 일부는 마나로 전환됩니다.
(일일 제한 ; 20)
마나 상승 량이 10에서 20으로 올라갔다.
캐릭터를 생성할 때 얻을 수 있는 고유스킬은 많이 사용할수록 랭크가 올라간다.
이게 일반 스킬과의 큰 차이점이다. 스킬이 성장한다는 것.
고유스킬을 좋은 것으로 받아야 하는 이유가 이것 때문이기도 하다.
'방중술을 계속해서 단련해 볼까.'
채음보양이 좋은 것도 있고.
방중술과 일반계열 스킬과는 부딪히는 게 없다.
이대로라면 방중술 쪽으로 더 발전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지휘관 실로 향했다
다프넬로 복귀한 나는 에리엘에게 간단한 보고를 해야 하니까.
세계수에서 보고 했다는 간단한 내용의 이야기.
가만히 듣고 있던 에리엘이 서류 작업을 그만두고 펜대를 내려놓았다.
"그래서 강한윤 중위. 어젯밤은 즐거웠나?"
"노코멘트 하겠습니다."
이게 엘프야 아저씨야. 또 음흉한 눈빛으로 쳐다보기에 헛기침을 했다.
내가 말하려던 건 이게 아니었는데.
자연스럽게 에리엘의 페이스에 휘말려버렸다.
나는 목을 가다듬고 원래 하려던 얘기를 입에 올렸다.
"에리엘 대장님. 다음 작전을 건의하려고 합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