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이 전부 따먹음-2화 (2/163)

〈 2화 〉 2화

* * *

나는 블러드 앤 블레이드의 고인물이다.

무려 3000 시간 넘게 플레이 했고 아무도 깨지 못한 업적을 달성했다.

스탯을 찍지 않고 옷을 발가벗어도 전략과 꼼수로 게임의 엔딩을 볼 정도의 썩어버린 고인물.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안 되는 것은 있는 거다.

예를 들자면 스탯과 스킬 트리가 답이 없는 캐릭을 살릴 순 없다.

물론 망캐를 살리는 건 불가능 하지만 쓸 만하게 만들 수는 있었다.

초반의 스킬트리와 재능을 버리고 전혀 관련 없는 방향으로 육성을 하는 것.

손절 타이밍이 초반에서부터 늦어질수록 살리기 어려워지고, 만약 타이밍을 놓친다면 내 캐릭터는 없다고 생각하고 전략으로만 게임을 진행해야 한다.

내정, 명령, 전략, 전술.

이 네 가지만으로 엔딩을 봐야한다는 건 아주 끔찍한 일이다.

자동으로 움직이는 npc에게 명령을 내리고 유리한 전황을 만든 다음 제발 이겨달라고 기도를 해야 하니까.

이기면 좋은 거고. 지면? 그대로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진다.

고인물인 나라면 이런 상황이라도 전문가 난이도까지는 가볍게 깰 수 있다.

하지만 나이트 메어 난이도라면? 불가능하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강한윤 : 레벨 1]

­마나 : 50/50

­힘 : 5

­체력 : 5

­지능 : 7

­재치 : 23

[재능]

­동물의 친구

동물과 대화를 할 수 있습니다.

[스킬]

­방중술 : 채음보양 (Rank : F)

음기를 흡수해 양기로 전환합니다. 일부는 마나로 전환됩니다.

(일일 제한 ; 10)

"하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스탯에 한숨이 터져 나왔다.

지금 마음으로는 다시 캐릭터를 만들고 싶었지만 그건 불가능하다.

인터페이스 창을 아무리 뒤져봐도 게임 재시작이나 메인화면으로 가는 버튼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여기는 게임 속이자 또 다른 현실이라고. 내 직감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었다.

'랜덤을 왜 골라가지고!'

랜덤을 고르지 않았더라면 이런 처참한 스탯을 가질 일도 없었을 텐데.

나는 한숨을 쉬면서 스테이터스 창을 다시 살펴봤다.

힘 5. 길가에 있는 검도 제대로 못 드는 수치다.

검을 들고 휘두르면 상대에게 해를 입히는 게 아니라 본인이 다치질 않길 바래야한다.

체력 5. 제발 죽지 말아 달라고 기도를 해야 한다.

기본적인 몸의 내구력이 약해지니 그야말로 걸어 다니는 개복치다.

최악의 경우엔 스치는 공격에 맞았다고 죽는 경우도 있다.

지능은 마법의 캐스팅 속도를 줄여주고 데미지를 올려주는 스탯이다.

나를 미칠 것 같이 만드는 것은 바로 그 아래의 이것.

재치 23.

재치가 높아지면 운이 올라간다.

대화를 통해서 설득할 확률이 '약간' 올라간다.

공격과 마법의 치명타 확률이 올라간다.

운이라는 건 수치화 되지 않는 쓰레기 스탯이고 대화는 사용하기 힘들다.

전장에서 칼을 휘두르는 것보다 대화를 많이 할 리가 없으니까.

전투가 중요하다면 공격의 치명타 확률이 올라가는 건 좋은 게 아닌가? 라고 할 수 있지만.

그냥 강한 공격으로 상대를 찍어 누르면 언젠간 죽는다.

치명타? 이건 그야말로 함정카드다.

치명타가 터진다 한들 기본 공격력이 낮아서 죽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다.

'재능이나 기본 스킬이 좋기라도 했다면 다행이지만..'

그 기대마저도 배신을 당했다.

재능과 스킬은 그야말로 뽑기다.

대놓고 사기인 능력도 있고 대놓고 쓰레기인 능력도 있다.

재능과 스킬 둘 중 하나가 사기라면 나머지 하나는 무조건 쓰레기다.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서 이런 시스템이 적용됐다고 하는데.

이것조차도 함정이다.

어차피 사람들은 보통 + 보통 조합보다는 사기 + 쓰레기 조합을 선호한다.

적당한 재능과 스킬을 합친다? 그 결과로 보통의 캐릭터가 나올 뿐이다.

하지만 사기인 재능이나 스킬을 가진다면 그 캐릭터는 최소한 좋은 캐릭터가 된다.

'포텐셜이 미쳤으니까.'

중반, 후반 포텐셜이 미친 재능이나 스킬로 캐릭터를 성장시키면 혼자서 전부 썰어버리고 다닐 수 있다.

보통의 재능과 스킬을 가진 캐릭터로는 그게 거의 불가능하다.

기연과 이벤트. 그리고 온갖 성장에 필요한 아이템을 전부 쏟아버리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그런데 왜 그게 나한테 온 거냐고.'

동물의 친구.

동물과 대화를 할 수 있다.

이 능력은 이게 전부다.

진짜로 다른 능력치는 없다.

중요한 순간에 동물에게 말을 걸어서 정보를 얻는다거나 하는 경우도 있다.

있긴 하지만 그게 꾸준히 성과를 내진 못한다.

그야말로 운을 믿는 것 말고는 기대할 가치가 없는 쓰레기 재능이다.

이어서 방중술 계열의 채음보양.

이건 효율성은 좋다.

일일 제한이 걸려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캐릭터가 강해지는 효과가 있으니까.

하지만 전투를 하기도 바쁜데 NPC에게 호감도 작업을 해서 섹스를 유도한다?

그걸 매일매일 하면서?

총칼이 난무하는 전쟁터에서도 사랑은 싹트고 아이를 만든다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NPC의 호감도를 올리는 방법은 알고 있어.'

내가 게임에서는 호감도를 뚝딱뚝딱 올릴 수 있는 실력자였지만,

실제로는 어떨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자연스럽게 호감도를 올릴 수 있을까?

깎아 먹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일단은 성장 방향을 정해야하는데...'

원래의 게임에서는 스토리를 전부 진행하면 레벨이 60정도 찍혔다.

여기서 60개의 스탯을 더 받는다고 한들 힘, 체력, 지능 어디 하나에서는 구멍이 생기는 상황.

'일단 체력은 필요해. 초반에도 그렇고 후반에도 스쳐도 죽을 가능성이 높아.'

지금 체력은 5. 최대 스탯치인 60까지는 55개의 스탯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남는 건 고작 5.

스탯 포인트 5개 로는 힘을 올려도 지능을 올려도 전투에는 도움이 되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그렇다면... 재치.,,?

재치를 올렸을 때 얼마나 큰 효과가 있는지 모른다.

이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모른다는 점에서 최대한 건들고 싶지 않은 스탯이었다.

'마나는 채음보양이나 다른 방법도 많다. 괜찮아.'

마나를 올리는 건 딱히 걱정이 되지 않았다. 다른 스탯이 완전히 맛이 가버린 게 더 큰 문제였으니까.

'하아. 조금 답답하네.'

스탯을 어떻게 찍을까 고민은 일단 접어두자.

'레벨을 올리면서 천천히 고민해도 늦진 않아.'

망캐를 1인분 하게 만드는 건 어렵지만 불가능한 건 아니다.

곳곳에 숨어있는 기연과 이벤트를 전부 독식한다면 이런 망캐를 살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무조건 해낼 수 있다.

나는 이 게임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고인물이니까.

'일단은 움직여야 한다.'

성장과 보너스 스탯을 얻기 위해 가장 괜찮은 직업을 하나 떠올렸다.

여러 직업 중에서도 가장 직접적으로 영향력을 펼칠 수 있는 직업.

'오드웰 연합군의 군인.'

나는 오드웰 연합군의 막사로 향했다.

***

오드웰 연합군의 루드밀라 지휘부.

"이 상황을 타파할 방법이 없나."

세력의 정보가 기입되어있는 작전지도를 지켜보던 여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고착화된 전선을 타파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루드밀라와 마주한 인간 세력은 두곳.

동쪽에 위치한 마르벨스와 북동쪽에 위치한 다프닐.

한 지역을 점령하기에는 루드밀라의 전력으로도 충분했지만 상황이 좋지 않았다.

동쪽에 위치한 마르벨스를 공격하면 북동쪽에 위치한 다프닐에서 지원을 온다.

다프닐을 공격하러 가면? 당연히 반대로 진행이 된다. 마르벨스에서 지원을 온다.

마르벨스를 몰래 급습할 수도 없었다.

병력들이 몸을 숨길만한 위치도 없는 평야지대로 서로의 움직임이 훤히 보였으니까.

그렇다고 다프닐을 공격하기엔 다프닐은 공격하기 까다로운 협곡의 요새다.

어느 쪽이든 공격을 하면 지원이 오고 공격을 하기도 까다로운 상황.

"본부에서도 섣부른 움직임을 하지 마라고는 했지만..."

전황을 바꾸고 공을 세우고 싶다는 게 지휘관 에리엘의 속내였다.

이렇게 마주한 것도 벌써 1년. 상대편에서도 움직임은 있지만 특별한 정황은 포착되지 않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불안했다. 자신이 확인하지 못한 방법으로 공격을 해오는 게 아닐까하고.

에리엘은 전략적 요충지인 루드밀라가 무너지면 까다로운 상황을 초래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본부의 명령을 우선시 하고 있었다.

오늘도 마땅한 수를 생각해내지 못한 에리엘은 한숨을 내쉬었다.

체스를 둘 때 장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최선의 플레이를 하지 못했을 때의 기분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똑똑.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온 병사는 경례를 하고서 에리엘이 먼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무슨 일이지?"

"대대장님이 확인하셔야할 일이 있습니다."

"내가 확인할 일?"

"임관과 관련한 문제입니다."

"임관? 임관할 사람이 있어?"

에리엘이 인상을 찌푸렸다. 임관과 관련된 문제는 없었던 것 같은데.

대대의 병사 중에서 부사관이나 장교로 임관을 앞둔 이를 까먹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들려온 얘기는 전혀 상관없는 내용이었다.

"지금 대대에 임관하고 싶다고 난동을 피우는 인간이 있습니다."

"인간? 적당히 돌려보내지 그래."

에리엘이 생각하기에 인간이라는 족속은 어디에나 붙어먹을 수 있는 박쥐같은 녀석들이었다.

손쉽게 배신을 하고 붙어먹기도 하고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는 족속들. 생각만 해도 혐오감이 치솟았다.

거기에 오드웰 연합군에서 인간을 받아들인 곳도 있지만 여기는 아니었다.

인간과 교류가 존재하지 않는 곳. 루드밀라에서 굳이 임관을 요청한다는 것 자체가 수상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 인간이 저희 대대의 기밀을 알고 있었습니다."

"기밀을 알고 있다고?"

"...자신의 말로는 모든 걸 알고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도 2급 기밀을 술술 말했습니다. 대대장님 정말로 돌려보냅니까?"

"하. 어이가 없어서. 그래 내가 나가볼게."

에리엘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벗어둔 군복을 입었다.

'혐오스러운 놈.'

아마도 그 인간은 자신이 기밀을 알고 있는 것으로 임관을 요청하는 것이겠지.

그렇게 협박한다고 받아줄 오드웰 연합군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움직일 수 있다. 라고 생각한 에리엘은 인간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오드웰 연합군은 언제든지 입대 지원을 받는다.

그 중에서도 입대는 2가지로 나뉘었다.

일반 병사로 입대하는 것과 부사관이나 장교로 임관하는 것. 물론 하늘과 땅차이로 차이가 있었다.

일반 병사는 가장 낮은 계급인 이병으로 들어와서 부사관이나 장교가 될 정도의 실력과 공적을 쌓아야 진급할 수 있다.

하지만 부사관과 장교로 임관하는 것은 다르다.

처음부터 자신이 그만큼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만 임관할 수 있었다.

에리엘의 경우엔 소드마스터 초입이라는 경지를 가지고 단숨에 대령까지 올라올 수 있었다.

오드웰 연합군에서 손에 꼽을 정도의 강자였으니까.

'인간이 임관을 원한다고?'

만약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지 못한다면 오체를 분시하리라. 물론 그 전에 기밀을 어디서 엿들은 건지 고문을 해야겠지.

그런 피비린내 풀풀 나는 생각을 하던 에리엘은 인간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에리엘이 인간을 보자마자 느낀 것은 실망이었다.

몸은 루드밀라에서 가장 약한 수준이고 느껴지는 마나도 비약하다.

그렇다고 마법적으로 뭔가를 이룬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고 외모도 평범했다. 그가 입고 있는 옷차림이나 귀티도 귀족의 무언가로 보이진 않았다.

한 눈에 사내를 스캔한 에리엘은 비어있는 의자에 앉아서 다리를 꼬았다.

맞은편에 앉아있는 사내는 알고 있을까.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고문 형에 처해진다는 사실을?

'제 발로 무덤에 들어온 것을 후회해라. 인간.'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에리엘은 사내가 입을 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에리엘님."

사내의 말에 에리엘이 움찔했다.

2급 기밀을 알고 있는 사내다. 이름 정도는 아는 게 당연하겠지.

평정심을 되찾은 에리엘이 입을 열었다.

"이봐 인간. 어디에서 2급 기밀을 듣고 온 거지?"

"2급 기밀을 제가 알면 안 됩니까?"

"당연하다. 알고 있으면 즉각 사형이니까. 하지만 지금이라도 출처를 불면 살려줄 의향이 있다."

"사형을 면한다라... 저는 그것보다 임관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니까 작전장교 정도로 임관됐으면 합니다."

작전장교. 소위는 불가능한 직책이었다.

중위부터 가능한 직책. 즉, 사내는 중위의 직책을 당당하게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에리엘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인간. 선을 넘는 군. 어디서 정보를 듣고서 임관을 원하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입을 다물면 찢어죽이진 않겠다."

"...그렇습니까?"

사내의 입이 잠시 다물어졌다가 다시 열렸다.

"그렇다면 대위는 어떻습니까?"

"인간 따위가 선을 모르는 군!"

지금 당장이라도 모가지를 꺾어서 죽여버리겠다는 생각으로 마나를 끌어올린 에리엘은 인간에게 손을 뻗었지만.

"에리엘님. 가레스 스승님이 물려준 검은 아직도 잘 보관하고 계십니까?"

가레스 라는 단어를 듣고 손이 멈췄다.

자신에게 처음으로 검을 가르쳐주었던 스승. 다른 사람들이 알 리가 없는 정보였다.

그것도 스승님이 물려준 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까지 말이다.

에리엘이 당황하며 입을 열었다.

"그걸... 어떻게..."

"저는 모든 걸 알고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증명이 됐습니까?"

사내가 웃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