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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기둥서방이 되었다-192화 (192/192)

〈 192화 〉 외전 : 신계 #1

* * *

신계는 말 그대로 신들이 사는 세계다.

여러 신들이 있고, 그 신들이 영주처럼 자기 구역을 가지고 있으며, 지루한 시간을 달래려 다른 영지로 놀러가거나 기행을 저지르는 경우도 더러 있다.

물론 옵저빙을 하러 신계 중앙에 버티고 선 거대한 신전으로 발을 옮기기도 한다.

“ 정우야. 이거 봐봐. 내가 만들었다. 잘했지? ”

그런 와중, 부엌에서 비빔밥을 비비던 헬레나가 활짝 웃으며 물었다.

내가 어떤 사정으로 어떻게 헬레나와 만났는지 다 얘기한 후부터 지온 대신 정우라고 불렀는데, 엘렌이나 이브도 그랬다.

그리고 헬레나는 보는 사람도 없고 신분의 굴레도 없어 그런지 죽기 전보다 훨씬 잘 웃고, 소탈하게 잘 지내고 있다.

“ 그래. 맛있네. ”

“ 정말? 그러면 얼른 먹자. 식기 전에. ”

내가 헬레나가 약한 불에 비빈 비빔밥을 접시에 덜어 먹자, 헬레나가 배시시 웃었다.

이브는 오늘도 도서관에 박혀 책을 읽느라 여념이 없었고, 엘렌은 주변 지형을 파악하겠답시고 산책을 나가 둘 뿐이었다.

그렇게 주방에서 간단히 밥을 먹고 나면 곧장 내 방에 있는 테라스로 나갔다.

여전히 신전이 우뚝 선 하늘 아래로 흐르는 바다가 참 놀라웠다.

힙노스가 잠 자는 환경이 중요하다며 만든 곳이라 그런지 바다를 두고 있음에도 바람이 습하고 짜질 않았다.

“ 신들이 정말 위대하긴 하구나……. ”

한 쪽에는 바다. 한 쪽에는 꽃이 만발한 정원. 또 다른 쪽에는 은하수가 흐르는 밤하늘.

도저히 말이 안 되는 것들이 한 군데 모여 있으니 이질적이었고, 헬레나는 그 이질적인 풍경 속에서 살며 즐겁게 익숙해지려 했다.

이곳 신계에선 시간도 남아돌기 때문에, 언젠가 그 모든 것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할 때가 올 테니까.

“ 그래. 위대하긴 하지. ”

나는 헬레나가 중얼거리는 사이 한 발 먼저 선베드에 누워 바깥 풍경을 감상했다.

약한 파도를 타고 조용히 넘실대는 바다 풍경이 지루하기도 했지만, 그래서 볼 때마다 마음이 편안했다.

익숙하기도 하고 평화롭기도 해서.

헬레나는 옆에 나란히 놓인 선베드와 내가 누운 자리를 번갈아 쳐다보다, 당연하다는 듯 내 옆에 안기며 품에 얼굴을 묻었다.

원래도 그랬지만 신계에 오고 나서부터 부쩍 달라붙는 일이 훨씬 늘어났다.

물론 내 입장에서는 익숙하기도 했고 오히려 좋았기에 헬레나의 허리에 팔을 둘러 품 안으로 바짝 당겼다.

“ 그런데 정말 계속 이렇게 지내도 돼? 나중에 벌 받는 거 아닐까…? ”

기다렸다는 듯 내 품에 얼굴을 묻고 거친 숨을 내쉬던 중, 헬레나가 고개를 들며 걱정스럽다는 듯 물었다.

신을 모시는 시종이 되어 이곳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하루 대부분을 빈둥거리며 지내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무언가 일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시달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시간을 누릴 수 없을까 불안해했다.

“ 시종도 모시는 신마다 달라. 매일 바쁘게 곁을 따라다녀야 하는 경우도 있고, 우리처럼 이렇게 지내도 되는 경우도 있고. 힙노스 님은 그 중에서 가장 여유로우시니까 괜찮을 거야. ”

힙노스는 하루 대부분을 잠만 자며, 거의 오후 1시에 깨어나 3시에 다시 잠든다.

여유롭기로는 신계 제일이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부지런하게 살았던 헬레나가 불안해하는 것도 당연하지만, 이 또한 지나갈 일이라 생각했다.

“ 정말? ”

“ 응. 그래도 시종이니까 최소한 할 일은 하면서 이래야지. 감사할 줄도 알아야 하고, 너무 풀어져도 안 되고. ”

어지간히 시끄러워도 잠에서 안 깨는 힙노스라 더 늘어져도 될 법 하지만, 그러다 밉보일 수도 있을 것 같아 적당히 긴장해야 한다고 말했다.

괜히 괜찮겠거니 싶어 늘어지면 공경심도 없어지고, 그러다 보면 태도에도 드러나 좋을 것 하나 없을 테니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잠이 오는 탓에 저절로 눈이 감기는데,

“ 어? 정우야. 바닥 붉어진 거 봐. 손님 왔나본데? ”

약간 놀랐다는 듯이 말하는 헬레나의 말을 듣고 눈을 번쩍 뜬 채 몸을 일으켰다.

예고 없이 찾아온 손님이면 거의 무조건 신이라 봐도 되었기에 늘어져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품에 안긴 헬레나를 조심스레 떼어놓은 뒤, 황급히 방을 나와 현관까지 달렸다.

워낙 요란스럽게 뛴 탓에 쿠당탕 소리가 귀를 때렸지만, 이 정도 소리로 힙노스가 깨지는 않았다.

“ 누구십니까? ”

“ 어머, 정우구나? 나 알지? 데메테르란다. ”

현관문에 선 채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묻자, 몹시 익숙한 목소리와 이름이 귓가에 스며들었다.

돌아오자마자 본인이 직접 짠 신선한 젖이 있다고 했던 당사자이자 선신 중 하나라 모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망설임 없이 문을 열자, 예상했던 대로 여성적인 곡선이 몹시, 몹시도 도드라지는 갈색 머리칼의 여성이 눈에 들어왔다.

풍요를 상징하는 여신이라 그런지 딱 봐도 풍요롭다는 느낌이 전해져 왔다.

“ 어서 오십시오. ”

“ 그래, 안녕? 이렇게 얼굴 보는 건 오랜만이지? 저쪽 세계에서 활약하던 건 잘 봤단다. 정말 즐거웠어. ”

일단 고개 숙여 인사하자 데메테르가 반갑게 웃으며 재잘재잘 떠들어댔다.

모성애 넘치는 눈빛도 여전했고, 수다스러운 면이 있는 여신이라 할 말이 많은 모양이었다.

특히 내가 파견까지 갔다 왔으니 더더욱.

“ 혹시… 전부 보셨습니까? ”

“ 유감스럽게도 전부는 못 봤단다. 처음 네 여자와 살을 섞었던 소문을 듣고 나서부터 관찰하기 시작했거든. 그래도 그 때부터 시작이라 그런지 많이 재미있었어. 특히 시간 날 때 마다 몸 섞는 걸 보니까 다른 신들도 발정이 나서……. ”

내가 혹시나 싶어 묻자 더욱 신난 데메테르가 더욱 신이 나서 목소리를 높였다.

겨우 잊어가던 부끄러운 추억을 데메테르가 생생히 이야기하자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다 못해 터질 지경이었다.

보는 눈 없을 때 할 때야 좋았지, 그걸 다 지켜봤다 생각하니 민망했던 탓이다.

“ 그, 그렇습니까? ”

“ 그럼! 이건 무조건 사야 된다고 영상으로 만들어 보존까지 했는걸. 그 성질 고약한 에리스도 네 행위를 보며 1년 내내 쉬지 않고 홀로 뜨거운 몸을 달랬을 정도란다. 물론 나도 충분히 즐기는 데 썼고. 아주 입소문을 탔었지. ”

“ 어… 그건 또 처음 듣는 소리네요. ”

“ 몰랐어? 하긴. 힙노스는 원체 대충 사니까 말을 안 할 만도 해. ”

일부러 드러낼 목적으로 동영상을 찍어 배포하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그럴 생각도 없는데 온갖 신들이나 그 시종들의 손에 퍼졌다.

그 말을 듣자 머리가 새하얗게 물들어버렸다.

부끄럽다는 느낌마저 잊어버릴 만큼 새하얗게.

더구나, 어느새 쪼르르 다가와 조금 거리를 두고 서 있던 헬레나마저 새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 적극적이던 헬레나가 맞나 싶을 만큼 수줍음을 드러내고 있어 어색할 지경이다.

“ 아. 얘기하다 보니 갑자기 하고 싶어지네. 힙노스는 안에 있지? ”

“ 네. 밤하늘을 펼쳐놓고 주무시고 계십니다. ”

“ 어머나, 마침 잘 됐네. 힙노스는 맨날 자는 주제에 물건은 실하니까 온 김에 따먹어봐야겠어. ”

신계에서 머무는 신이라 눈치 보지 않고 말하는 모습이 적응하기 어렵지만 이쯤 되면 그냥 그러려니 했다.

거리낄 것이 없으니 가끔 알몸을 드러낼 때도 종종 있는데 더 말해 뭐할까.

더해, 말할 자격도 없었고.

“ 혹, 실례지만 힙노스 님을 만나러 오셨습니까? ”

“ 응? 그건 아냐. 갑자기 따먹고 싶어지긴 했는데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단다. 얘기하다보니 깜빡할 뻔했네. ”

데메테르는 질문을 듣자마자 아차 싶었는지, 파티 드레스 같은 옷의 허리춤에 손을 집어넣다 씨앗 하나를 꺼내들었다.

독이나 늪지를 떠올리게 하는 칙칙한 녹색이 아니라, 햇살 아래에 자리 잡은 밝은 숲을 떠올리게 하는 색을 띠고 있었다.

“ 관람비란다. 좋은 걸 봤다는 뜻으로 주는 거니 적당한 화단에 심어주렴. 화단 크기에 맞게 꽃밭을 만들 테니 알아서 조절하고. ”

“ 감사히 받겠습니다. 물 같은 건 어떻게 주면 될까요? ”

“ 하루에 한 번은 주렴. 그래도 좋은 흙이나 물보다 애정이 중요한 아이라 자주 봐 주는 게 가장 좋단다. ”

씨앗을 아이라 칭하는 모습도 여전하지만, 데메테르가 준 씨앗이니만큼 아이라 불려도 상관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색도 그렇고 말하는 것도 그렇고, 절대 그냥 씨앗은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 예. 꼭 그렇게 기르겠습니다. ”

“ 고맙구나. 내 용건은 이걸로 끝이란다. 그럼… 슬슬 안으로 들어가 봐야겠구나? ”

데메테르는 조금 전에 내뱉은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듯 맨발로 바닥에 발을 들였다.

신은 맨발로 바닥을 걸어도 더러워지지 않고, 어떤 날카로운 날붙이도 것도 아픔이나 상처를 줄 수 없어 당연하다 할 수 있었다.

더구나 더러움이 붙은 맨발도 손짓 한 번, 눈 짓 한 번이면 깨끗하게 사라지기에 더더욱 거리낄 것이 없었다.

“ 뭔가 필요하신 것이 있다면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

“ 필요한 거? 글쎄. 뭐가 좋을까……. ”

현관으로 들어와 망설임 없이 발을 옮기던 여신에게 묻자, 여신이 손가락으로 가볍게 턱을 쓸며 고민에 잠겼다.

필요한 게 있다면 직접 본인의 손으로 빚어낼 수도 있지만, 시종에게 시켜 가져오게 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 아! 은으로 만든 대야에 향이 좋은 기름을 반 정도 채워 올 수 있겠니? 그 때 봤던 풍경이 너무 즐거워 보여서 언제 한 번 해볼까 싶었거든. ”

“ …예. 알겠습니다. 준비해서 안으로 들일 테니 방으로 가시죠. ”

“ 고마워~. 그럼 나 먼저 가 볼게. ”

신난 나머지 노래를 부르던 데메테르가 현관 복도 끝에 있던 방 안으로 발을 들이자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선신 중에서도 자비로운 부류에 속하지만, 여느 신들처럼 나사 빠진 부분이 있어 만날 때 마다 피곤함을 느끼곤 했다.

바로 지금처럼.

“ 헬레나. 거기 계속 서 있을 거야? ”

한바탕 불어 닥친 폭풍에 여전히 굳어버린 헬레나를 바라보며 묻자, 그제야 헬레나의 입에서 앗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무리 헬레나라도 그 모습들을 남이, 더욱이 수많은 눈들이 지켜봤고 지금도 보고 있다 생각하니 굳을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 아, 아냐. 너무 놀라서 그만. 얼른 움직여야지. 신께서 기다리시겠다. ”

“ 그래. 반쯤 놀리시는 거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많이 부끄럽긴 하지만 일단 칭찬하신 셈이잖아. ”

그 칭찬이라는 게 듣기에 따라 희롱이라고 받아들여도 과언이 아니지만, 아무튼 칭찬이라는 말로 달랬다.

그렇지 않으면 굳어버린 헬레나가 얼마나 오래 저러고 있을지 알 수 없었던 탓이다.

어차피 우리 손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면 잊거나 내려놓는 편이 정신건강에 좋기도 했고.

그래서 헬레나와 함께 주방에 들어가 은으로 만든 작은 대야를 꺼내, 안에 향유를 반쯤 채웠다.

뭘 할지 예상이 가기에 방 청소하는 데 고생할 미래가 머리에 떠올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힙노스가 잠든 방에 조심스럽게 대야를 넣어 주었다.

침대에 누워 잠든 힙노스 위에 올라 탄 데메테르의 미소가 너무 소름 돋는 나머지, 모른 척 하느라 은근히 고생했다.

“ 정우야. ”

천장이 어두운 밤하늘로 만들어져 있던 방을 나오자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헬레나가 나를 불렀다.

여전히 뺨은 달아올라 있었으나 표정을 보니 당황스러웠던 감정이 많이 가라앉은 모양이다.

“ 어. 무슨 일이야? ”

“ 혹시 말이야, 신들은 모두 저래? 말씀하시는 것도 그렇고, 행동도 그렇고 너무 거침이 없으셔서……. ”

“ 그렇지. 아무래도 신들께서는 거리낄 것이 없으니까. ”

나는 헬레나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거실 소파로 발을 옮겼고, 헬레나와 나란히 앉은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단 흔히 전지전능이라 말하는 요소를 신들 모두가 갖추고 있으며, 각자 좋아하는 분야에 따라 선신과 악신, 또 어떠한 신이라고 분류가 되었다.

예를 들면 데메테르가 풍요의 신이고, 힙노스가 잠의 신인 이유도 단순히 농사와 잠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신들은 규칙을 정하고 지키려 했고, 간혹 그를 어기는 놈이 튀어나오면 단체로 짓밟아 그러지 못하도록 했다.

나도 들은 이야기지만 여러 신들이 소위 자기 꼴리는 대로 하다 개판이 났기 때문에 규칙을 정했다고 한다.

그 규칙은 신들끼리의 다툼에 관한 사항도 있으며, 옵저빙을 할 때 주의해야 할 점도 있었다.

즉, 얼핏 거침없어 보이는 모습들도 협의로 정한 규칙을 지킨 결과라 할 수 있었다.

정작 정해진 규칙이 저래서 의심을 품는 것도, 이래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아무튼.

“ 신계에 온 지 얼마 안 돼서 저런 모습에 적응하기 힘들겠지만, 헬레나도 곧 그러려니 하게 될 거야. 내가 그랬듯이. ”

“ 정말 그렇게 될까…? ”

“ 되고말고. 지금도 잘 적응하고 있잖아. ”

헬레나는 정말 그럴 수 있겠냐는 듯 불안한 눈빛으로 물었지만, 정말 잘 적응하고 있기에 자신감을 심어 주려 노력했다.

공작이라는 굴레를 벗어 그런지 마음의 여유가 많이 생겼고, 그 덕분에 차분하게 적응하는 힘도 커졌다.

더해, 절대로 헤어지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고 나서 병적으로 집착하던 모습도 옅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으레 마음 편히 사는 사람들처럼 될 수 있을 거라고 말해주자, 헬레나의 입꼬리가 살짝 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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