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의 기둥서방이 되었다-191화 (191/192)

〈 191화 〉 죽어서도 끝나지는 않는다 ­ 완

* * *

“ …으음. ”

새벽 햇살이 지저귀는 아침.

나는 어김없이 코를 찌르는 독특한 냄새를 애써 외면하며, 한 발 먼저 몸을 깨끗이 씻고 나왔다.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는 꿈을 꾸었던 것 같기도 한데, 여태껏 겪어왔던 일들이 뇌리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는 것만큼은 기억이 났다.

사실 그마저 무척 희미한 수준이라 그런 것 같다는 느낌뿐이긴 했지만, 아무튼.

깨끗하게 씻고 옷을 갈아입은 것 까진 좋았으나 막상 푹 절은 침대에 다시 눕자니 찝찝해서, 나는 방에 놓인 티세트를 들고 테라스로 갔다.

느긋하게 차나 마시며 아침까지 시간을 때울 생각으로.

“ 후우……. ”

테라스 의자에 앉아 뜨거운 차를 마시니 절로 뜨거운 숨이 흘러나왔다.

더해 속도 따뜻하게 풀리는 것이, 이럴 때 마다 따뜻한 물이 몸에 좋다던 말들이 떠올랐다.

정작 나는 뜨거운 물보단 찬물을 마실 때 느낄 수 있는 식는 느낌이 좋아 찬물만 자주 마셨었는데, 나이가 들고 보니 취향도 바뀌어 있었다.

날씨도 덥지 않을 정도로 따뜻하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조금 시원하다 느껴질 만큼 좋은 날씨.

그 날씨 덕에 여유로워진 마음을 품고 담장 바깥쪽을 바라보자 새삼 새벽 햇살에 물드는 거리가 보기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일까. 피곤한 몸에 평화로운 풍경을 눈에 담으니 절로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평화롭다는 건 어찌 보면 따분하다 할 수도 있겠지만 전혀 나쁠 것 하나 없었다. 시끄러운 것보다 평화로운 편이 좋으니까.

더구나 못 산 인생만큼 더 왁자지껄하게 살아서 그런지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었고.

“ 으음……. ”

이제 할 일도 없는 뒷방 늙은이니까 자고 싶을 때 자도 괜찮지 않을까?

물론 젊었다고 한들 자고 싶을 때 잔 적이 많아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약간 뻔뻔하게 생각해도 되겠거니 싶었다.

감기는 눈을 가만히 내버려 둔 채 완전히 잠에 빠질 때 까지.

.

“ 수고했어. ”

뭐지?

문득 잠을 자고 일어나 보니, 낯설었음에도 익숙하기 짝이 없는 풍경이 나를 반겼다.

늘 은은한 금빛으로 물들어 있어 해가 뜨고 지는 것조차 용서치 않는 불변의 하늘.

곳곳에 깔린 대리석 타일과 옛날에 읽었던 그리스 로마신화 만화가 떠오르는 건물들과, 지금 내 앞에서 졸린 듯 눈을 비비는 남자까지.

“ 어… 힙노스님? ”

“ 흐아암……. 그래. 나야. 제법 길어졌지만 여태껏 수습하느라 수고 많았어. 덕분에 별 일도 없고 좋더라. ”

남자… 가 아니라, 신인 힙노스는 여느 때처럼 늘어지게 하품을 하면서도 눈웃음쳤다.

그에 순간 이게 꿈인가 싶었으나, 가볍게 팔뚝을 꼬집어보니 꿈이 아니라 현실임을 알려 주었다. 약간 아팠으니까.

“ 제가 여기 있다는 건……. ”

“ 어. 죽었어. 자다 죽었더라. 복상사는 아니고, 그냥 수명이 다 돼서 그래. 다른 말로는 천수를 누렸다고 말할 수도 있고. ”

그래. 죽었구나.

곧 죽을 거라 예상은 했는데, 이렇게 자다 죽어버릴 줄은 몰랐기에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것 마냥 몽롱한 느낌이 강했다.

물론 시름시름 앓다 죽는 것보다야 훨씬 깔끔하고 좋긴 한데, 좀 허무한 느낌이 강했다.

“ …그랬군요. 저는 자다 죽어버려서 좀 묘하긴 한데, 어찌 보면 운이 좋은 것 같기도 하네요. ”

“ 그렇지. 잠든 상태로 죽어버리는 게 얼마나 좋은지는 익히 알려져 있으니까. 아무튼, 다시 한 번 고생 많았어. 너도 잠이나 잘래? ”

힙노스는 반쯤 감긴 눈을 억지로 비비며 한쪽 구석을 가리켰다. 환생하기 전에 쓸고 닦으며 한가로이 지냈던 내 방의 문이었다.

그 말은 즉, 죽자마자 바로 힙노스가 다스리는 영역 중에서도 그 중심인 집으로 날아왔다는 소리다.

“ 방금 자다 일어났는데 또 자려니까 뭔가 이상하네요. ”

“ 그래? 잠은 자고 또 자도 모자란데…? 나만 그런가? ”

힙노소가 몽롱한 눈으로 하품하는 것을 지켜보며, 내심 당신만 그렇다는 생각을 했다.

여러 신들 중에서도 가장 많은 잠을 자기로 유명한 신이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고는 해도, 하루 24시간 기준으로 22시간을 자니…….

더구나 어지간히 소란을 피우지 않는 한 일어나지도 않을 만큼 잠귀가 어두운 편이라, 같이 생활하는 입장에선 참 편하고 고마웠다.

“ 저야 뭐 깨있는 시간이 좀 더 많으니까요. 아무튼, 주무시기 전에 뭐라도 만들어 드릴까요? 저쪽에서도 요리를 하다보니 실력이 좀 늘긴 했는데. ”

“ 응…? 자기 전에 뭐 먹는 건 안 좋지 않아? 그 뭐더라, 역류성 식도염 걸리잖아. ”

“ 신은 상관없지 않아요? ”

“ …아. ”

힙노스는 졸린 눈으로 손뼉을 탁 치더니, 뭔가 큰 깨달음을 얻은 사람마냥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럼 오랜만에 달달한 토스트 한 번 구워주라. 그게 맛도 좋고 편해서 좋더라. ”

“ 네. 우유도 같이 드려요? ”

“ 좋지이. 데메테르가 짜서 뿌린 우유가 있으니까 그거랑 같이 줘. ”

풍요를 다스리는 여신이 젖을 짜서 뿌렸다는 말이 어처구니가 없지만, 여기에선 그런 일이 일어나도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었다.

어떻게든 무료함을 달래려 살아가는 신들이기에 심심했던 나머지 기행을 저지르는 경우가 종종 있었으니까.

“ 예. 잠시만 거실에서 기다려 주세요. 금방 해 올 테니까. ”

“ 그래……. ”

나는 터덜터덜 걸으며 거실로 가는 힙노스를 등지고, 곧장 주방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신들이 사는 곳이라 설비는 낡았을 거라 생각하기 쉬운 생각과 달리, 여전히 현대적인 물품이 가능한 주방이 눈에 들어왔다.

냉장고부터 시작하여 가스레인지, 정수기, 컨테이너처럼 거대한 시간 정지 창고 등등… 참 다양했다.

다양했지만, 다행히 배치가 바뀌지는 않았기에 재료를 꺼내어 썰고, 식빵을 구우며 속이 튼실한 토스트 두 개를 만들어 거실로 갔다.

토스트가 담긴 접시 두 개와 우유병도 트레이에 함께 실어서.

“ 다 됐어요. 드세요. ”

“ 오냐. 잘 먹을게. ”

힙노스는 접시를 받아들기 무섭게 토스트를 씹으며 우유병의 뚜껑을 손가락 하나로 날리더니, 안에 든 우유를 시원스럽게 들이켰다.

여전히 빨리 잠을 자려 급히 먹는 모양새였으나 표정이 묘하게 밝아 마음에 들었음을 알 수 있었다.

“ 끄윽…! 오랜만에 뭘 좀 먹으니 기분이 좋네. ”

“ 오랜만? 며칠이나 굶으신 건데요? ”

“ 어… 네가 저쪽에 가고 나서 한 끼도 안 먹었어. ”

신이야 안 먹어도 안 죽고, 배도 그다지 고프지 않기에 그저 즐기기 위해서 먹는다는 걸 알긴 하지만, 그렇다 쳐도 그 긴 세월을 아무것도 안 먹고 살다니.

새삼 힙노스가 얼마나 잠만 자는 신인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 세상에. 뭐라도 좀 드시지 그랬어요. ”

“ 챙겨주는 사람이 없어서 귀찮았거든. 아무튼, 달달한 걸 먹은 덕분에 기분이 좀 좋아. 고마워. ”

“ 고맙긴요. 저야말로 고맙죠. ”

다른 신도 아니고 힙노스가 주워준 덕에 아주 느긋하게 지낼 수 있고, 혹여 내가 잠들어 있을 때 힙노스가 일어나더라도 절대 방해하질 않았다.

본인이 잠을 아주 소중히 생각하기에 본인의 잠처럼 똑같이 존중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고맙지 않을 수가 있을까.

“ 으응. 그러면 나는 이만 자러 갈게. 배가 차니까 더 잠이 오는 것 같아. ”

힙노스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걸 보며, 나도 빈 접시나 병을 치운 뒤 책이나 읽을까 하는 생각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갑자기 힙노스가 앗 하는 소리를 내더니 느긋하게 내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 참. 조금 있다가 손님이 올 거야. 네 방에서 적당히 데리고 있어 줘. ”

“ 예? 손님이라면 신 아니에요? 그런 분을 그냥 제 방에 데리고 있으라고요? ”

손님을 내 방에 데리고 있으라는 말에 화들짝 놀랐으나, 힙노스는 그래도 된다는 소리만을 남긴 채 손을 흔들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덕분에 참 곤란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는데, 일단 설거지부터 끝내고 봤다.

그리고, 어차피 손님이 올 거라면 거실에서 메뚜기의 당랑권이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이나 보고 있는 게 나을 듯싶었다.

고로 거실에서 책을 읽으며 기다리기를 잠시.

손님이 왔음을 알리기 위해 거실부터 시작해서 입구까지 이어지는 복도가 은은한 붉은색으로 물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곳에서는 초인종 소리 대신 바닥 색깔이 붉어짐으로써 누가 왔음을 알렸다.

음음. 나는 이 거대한 저택으로 들어오는 현관문에 서서 가볍게 목을 가다듬은 다음, 천천히 문을 열며 고개를 숙였다.

나보다 급 높은 신이 올 테니 고개를 숙이는 게 당연했다.

“ 어서 오십시오. 힙노스 님은 방금 막 잠에 드셨습니다만, 혹 용건이 있으시다면……. ”

“ 지온? 정말 지온이야? ”

지온? 이 동네에서 나를 그렇게 부를 사람이 없는데?

그렇게 생각했기에 순간적으로 머리가 몹시 혼란스러웠으나, 곧 그 목소리가 어디서 많이 들어봤던 목소리였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 헬레나…? ”

얼른 고개를 들어 앞을 보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놀라워하는 헬레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더해, 입을 가리며 눈물을 글썽이는 이브와 엘렌까지.

“ 엘렌이랑 이브까지…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

더구나 대리석으로 만든 문에 흐릿하게 비치는 내 모습이 예전 모습이 아니라, 지온 알트람의 모습을 띠고 있음을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설마 이것도 파견을 성공적으로 마친 보수 중 하나였던 걸까?

나는 어지러웠던 머리가 빠르게 식어감을 느끼며, 혹시 내가 얻어갔던 특성도 고스란히 남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 여기서 하기엔 약간 이야기가 길어. 그러니까 안으로 안내해 줄 수 있을까? ”

“ 아, 미안. 그래야지. 얼른 들어와. ”

세 여자가 힙노스가 말한 손님이라면 대체 어떻게 된 일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책이 빼곡하게 꽂힌 책장이 가득한 내 방으로 안내하자 셋 모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놀라워했다.

특히 그 중에서도 이브가 특히 놀라워했는데,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지식에 목마른 모습이라 편안하게 보일 지경이다.

“ 그래. 어떻게 된 일이야? ”

“ 응. 그게……. ”

셋 중에서 가장 발언권이 강한 헬레나였기에, 이럴 때에도 남에게 맡기지 않고 본인이 직접 설명을 했다.

그 결과, 나도 모르는 사이 영혼을 묶어 새로 태어나도 떨어지지 않을 정령마법을 걸었고, 그 때문에 영혼이 끌려 신계까지 다다랐다..

그 후 곧장 대륙을 관찰하던 신들에게 걸려 죽느냐 사느냐를 두고 판결을 받았고, 드물게 만장일치로 살리겠다는 결론이 났다고 .

그것도 좋은 구경을 했다는 이유로.

그러나 이 경우 가장 먼저 죽었어야 할 내가 이를 모르는 것이 말이 안 됐는데, 이는 정령마법을 미리 알고 있던 신들이 시간순서를 뒤집어 해결했다고 한다.

신계에서는 제한 없이 뭐든 할 수 있다는 건 알았지만, 인과관계까지 뒤집었다는 소리를 듣자 오싹한 느낌이 등줄기를 자극했다.

물론 세 사람이 이렇게까지 나와 붙어있으려는 것도 새삼 오싹하긴 한데, 한편으로는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리 충격적이지는 않았다.

그냥 또 사고 한 번 쳤다는 느낌이 강했다.

“ 그래. 이해는 가는데… 그 좋은 구경이라는 게 설마……. ”

“ …교배야. 부끄럽지만, 우리가 교배하는 걸 많은 분들께서 보셨다고……. ”

헬레나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 답하는 걸 보니, 나도 비참함과 쑥스러움에 뺨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설마하니 그거마저 다 봤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해서 몹시 충격적이었던 탓이다.

“ 하아……. 이미다 봤다니 어쩔 수 없지. ”

나는 자칫 영혼이 타버릴 큰 위기를 넘겼다는 것에 안도하며 짧게 한숨을 토해냈다.

사람 인생이 한 번 뿐이라고는 해도, 깊게 정을 준 여자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면 마음이 아플 테니까.

“ 저어… 대공님. ”

“ 대공이라니. 이미 죽었는데 그렇게 딱딱하게 안 불러도 괜찮아. 그냥 이름으로 불러 줘. ”

엘렌이 입에 붙은 호칭으로 부르려는 것을 막자, 몹시 감동을 받은 듯 눈물을 글썽였다.

신계에 오른 걸 보면 남은 수명도 끊어버리고 온 것이 분명할 텐데, 그런 무거운 짓을 저지른 여자 같지 않게 몹시 순진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 그, 그럼… 지온 님? ”

“ 기왕이면 님 자도 빼면 좋을 것 같지만… 그건 천천히 바꿔보자. 어차피 남는 게 시간인데. ”

신계에는 신과 신이 아닌 사람만이 있을 뿐, 사람과 엘프 사이에 신분고하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헬레나도 그를 아는지 불쾌한 기색 하나 없었고, 오히려 신분에서 해방되어 눈치 볼 것이 없다 생각하는지 몹시 후련하다는 듯이 웃었다.

“ 저, 대공… 아니, 지온 님. 저기 있는 책들… 아무거나 꺼내 봐도 될까요? ”

우리가 대화를 하는 사이, 이브가 많은 책을 앞에 두고 모든 것을 다 잊은 듯 눈을 번뜩이며 물었다.

본래 이렇게 재회할 거라 계산했을 테니 그리 놀랍지는 않은 듯 했지만, 그렇기에 생각지도 못한 책을 앞에 두고 이성을 잃은 모양이었다.

그에,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 그래. 천천히 봐. 천천히. ”

아까도 말했지만 신계에서는 어차피 남는 게 시간이다.

지식은 책으로, 먹을거리는 먹을거리대로, 도구는 도구대로 언제든 만들어 낼 수 있는 곳이기도 하고.

하지만, 그 긴 시간 대부분을 혼자 보낸다고 생각하자 내심 답답했는데…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끼리 보낼 수 있어 참 좋았다.

도나 닦아서 해탈이나 할까 싶었던 계획은 물 건너갔지만…….

기왕 이렇게 된 거 체면치례도 상관없이 즐기자는 생각을 하며, 옆자리에 앉아 있던 헬레나의 팔을 잡아 당겼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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