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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기둥서방이 되었다-190화 (190/192)

〈 190화 〉 시간은 흐른다 #10

* * *

기댈 곳을 좁히고 일부러 위기에 처할 상황을 만들고 났던 후, 닉스와 셀렌 사이에 흐르던 서먹함은 놀랍도록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오히려 닉스에 대한 거부감이 없어지자 다른 사람을 대할 때에도 소탈한 모습이 드러나는 등, 제법 바람직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누군가는 긴장감과 예의가 없다며 한 소리 할 법도 했으나, 결국 한 식구가 될 사람이 집 안에서 각 잡고 다니는 게 좋지는 않겠지.

그래서 닉스는 나나 헬레나와 다르게 이 대륙 기준으로 제때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작위를 이어받아 공작령을 제법 잘 다스리고 있다.

벽이 없어진 후부터 일을 돕기 시작하던 셀렌도 늘 함께 붙어 있어 그런지 몹시 안정적이었다.

굴곡 없는 인생이 없듯 크고 작은 일들이 몇 번 있기는 했는데, 우리가 약간 도움을 주었을지언정 거의 제 능력으로 극복하며 능력을 드러내기도 했다.

예를 들면 서인족 사이에서 맺은 조각상에 관한 협안이나, 왕국과 엘프가 정식으로 조약을 맺는 데 중재를 한다거나…….

“ 큰할아버지이! ”

덕분에 뒷방 늙은이가 되어 편안한 세월을 보낸 지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나는 손주의 손주… 증손주라고 하던가?

그런 아이를 품에 안고 놀 정도로 나이를 먹게 되었다.

이브의 마법 덕택에 겉가죽은 여전히 젊은 채였으나, 그 탓에 추파를 받기도 하는 등 곤란할 때가 있었다.

“ 저런, 조심해야지! ”

나는 넘어지지 않을까 싶을 만큼 헐레벌떡 뛰어오는 증손녀, 세이렌을 품에 안으며 가볍게 등을 토닥였다.

굳이 성벽 바깥에 있는 이 호수까지 찾아온 것을 보니 어지간히 심심했나보다.

닉스와 그 아들이자 내 손자인 엘리엇과 다르게 형제 없이 홀로 자라고 있으니 그럴 수도 있지.

“ 히히! 큰할아버지가 안아줄 줄 알았는걸요! ”

“ 그래, 그래……. 하지만 앞으로 꼭 조심해야 한다. 알았지? ”

“ 네에! ”

대답은 잘 하네. 나는 품에 안긴 채 얼굴을 부비는 세이렌을 보며 피식 웃고는, 다시 호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헬레나도 나이가 들어 그런지 내가 홀로 나간다 말해도 불만을 토해내거나 불안해하는 기색이 많이 줄어, 이렇게 홀로 나오는데 큰 지장은 없었다.

물론 멀리 나간다고 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집착하기는 하는데, 많이 순해져서 귀여울 지경이다.

“ 그래. 우리 세이렌은 뭐 하러 여기까지 왔을까? 여긴 호수라 와도 재밌는 게 없는데. ”

“ 있어요! 그거, 그거 보여주세요! ”

“ 그거? 그게 뭘까? ”

“ 히이잉…! 모르는 척 하지 마시고요! ”

서운하다는 듯이 칭얼대는 세이렌의 표정을 보자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무엇을 말하는지는 알기에 그냥 모르는 척 물어봤을 뿐인데, 참 반응 하나하나가 귀여웠다. 아무래도 나도 나이를 먹긴 먹은 모양이다.

“ 하하! 미안하구나. 내가 지금이라도 준비할 테니 용서해 주렴. ”

나는 적당히 칭얼대며 애원하는 세이렌을 달래 품에서 놓은 뒤, 허리춤에 둘렀던 요대에 꽂아 둔 더크 몇 자루를 뽑아들었다.

아무래도 칼을 다루는 일이니만큼 아이를 안고 뽑았다가는 큰 상처를 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설령 몇 십 년이나 써와서 손에 닳을 만큼 익숙해졌다 할지라도.

“ 자, 그럼 던질 테니 잘 보고 있으렴. ”

세이렌의 주의를 끌며 더크를 휙 던지자 제법 멀리 떨어져 있던 나무 밑동 부근에 깔끔히 박혔다.

그것이 하나라면 그냥 운이라고 치부하고 넘어갔겠지만, 세이렌은 뒤이어 한 점을 향해 날아드는 더크 무리를 보며 손뼉을 치며 웃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은 뒤 저도 모르게 가볍게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겉가죽은 젊어 보일지언정 나이가 나이인지라 말투도 그렇고, 지금처럼 어이쿠 하는 소리를 내는 것도 참 자연스러웠다.

“ 나도, 나도 던져보면 안 돼요? ”

내 뒤를 쪼르르 따라와 더크 뽑는 모습을 보던 세이렌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귀엽게 물으니, 도저히 거절할 엄두가 나질 않았다.

원래 이런 어린 아이에게 날붙이를 들게 하는 건 무척 위험한 일이라 무조건 반대해야겠지만, 나도 저 나이 때 투척을 배웠기에 영 이상하지만은 않았다.

이래서 사람이 적응의 동물이라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 그렇게 하렴. 대신, 다칠 수도 있으니 치료할 방법이 갖춰진 집에 돌아가서. 알겠지? ”

“ 네에! ”

나는 정말 기쁘다는 듯이 웃는 세이렌을 품에 안아 번쩍 들어 올린 뒤, 한쪽 구석에서 하인과 함께 기다리고 있는 마차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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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몸을 섞은 뒤로 몇 십 년이 흘렀고, 나 또한 겉은 젊을지언정 턱 끝까지 차오른 나이의 한계를 뚜렷하게 느낄 때가 되었다.

물론 마나와 검을 갈고 닦은 덕에 어지간한 청년들보다는 여전히 기운이 좋은 편이라 생각했으나, 전에 비하면 확연히 떨어져 있음을 느꼈다.

특히 몇날며칠이고 몸을 섞을 수 있었던 시간이 한나절 정도로 줄었고, 한 번 그러고 나면 그 다음날은 무조건 쉬어 줘야 한다는 점에서.

“ 자, 일단 다들 들어. 지온이 특별히 구워 준 과자도 있으니까 느긋하게 즐기고. ”

결혼을 하기 전에도, 그 후에도 요리를 자주 즐기던 편이라 이렇게 우리가 먹을 것을 만들어 준다.

여전히. 변함없이.

그래서 테라스 테이블을 두고 둘러앉은 이브나 엘렌도 그냥 그러려니 싶은 기색이 엿보였으나, 동시에 은근한 욕심이 피어오르고 있음을 엿볼 수 있었다.

아마 과자가 욕심나는 것이 아니라 그 정성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맛보고 싶었기 때문이겠지.

물론 나 또한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과자를 집어먹는 그들과 같은 생각이지만, 신기하도 예전만큼 질투심이 피어오르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오래 살아서 그런지 조금 유해진 부분이 생긴 덕이 아닐까 싶다.

덤으로 꼭 해야 할 이야기도 있었고.

“ 그런데 공작님, 저희를 다 부른 걸 보면 그만큼 중요한 이야기가 있는 거죠? ”

탁. 엘렌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묻자, 우리 사이에 끼인 자리에 앉아 있던 이브도 조심스레 눈을 반짝이며 호기심을 내비쳤다.

엘렌이나 이브나 엘리엇이 공작이 된 지금도 여전히 나를 공작이라 불렀기에 어색한 느낌은 없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공작이었던 닉스나 현 공작도 그러려니 하고 넘겼기에 쓸데없는 분란이 일어나지도 않았고.

“ 그렇지. 다들 적당히 먹고 마신 것 같으니… 슬슬 얘기를 해 볼까. ”

나는 과자를 아그작 소리가 나도록 강하게 씹어 삼키고는, 천천히 숨을 고른 뒤에 입을 열었다.

“ 우리도 나이가 나이인지라 슬슬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잖아. 엘렌이야 아직 살아갈 날이 많다곤 해도, 스스로 끊을 생각이니까 상관없지? ”

“ 네. 대공님이 돌아가시면 당연히 그 뒤를 따라야죠. 혹여 놀랄 수도 있기에 라케시스에게 이미 말해 둔 지도 오래고요. ”

태연하게 스스로 남은 수명을 끊어버리겠다는 말은 무척이나 오싹했지만, 여기 모인 여자들에게 있어서는 당연한 일이었기에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애초에 지온에게 미쳐 목숨까지 걸었고, 또 그 목숨을 끊어버릴 생각으로 인연의 끈을 맺어 두었으니.

“ 이브. 너는 어떻게 할 거야? 나나 엘렌이야 네 덕분에 지온이 죽을 때 함께 눈을 감게 되었지만, 너는 아니잖아. ”

“ 저는… 아무래도 정리해야 할 문제들이나 체계들이 있어서 조금 늦을 지도 모를 것 같아요. ”

“ 그래……. 그것도 좋은 선택이기는 해. 존중할게. ”

지온이 죽어 다른 사람으로 태어난다 한들 우리는 그를 알고 있으며, 또한 그 곁에서 함께 살아갈 날이 많기에 서두를 필요는 없다는 것을 안다.

앞으로도 영원히 삶과 죽음을 함께 할 테니. 짧은 몇 년을 느긋하게 즐긴다 한들 문제가 없을 테니까.

단지, 나나 엘렌의 성향이 이브보다 훨씬 더 극단적이기에 이런 선택을 했을 뿐이다. 어차피 죽을 때가 되면 죽어야 하기도 하고.

“ 그러면, 너희들이 볼 때 지온이 앞으로 몇 년이나 더 살 수 있을 것 같아? ”

“ 글쎄요. 대공님도 여전히 정정하시긴 하지만 나이가 나이이시니만큼… 솔직히 언제 눈을 감으셔도 이상하지 않기는 하죠. ”

“ 저도… 언니랑 같은 생각이에요. ”

마나의 성질을 직접 볼 줄 아는 이들이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아직까지 서두를 필요는 없어 보이기는 하다.

그러면 그 때가 오기를 느긋하게 기다리면서, 지금 지온과 함께하는 시간을 충분히 즐기면 그만이겠지.

훗날의 삶이 보장되어 있다 하더라도 지금 이 시간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테니까.

“ 그렇다면 굳이 서두를 필요가 없겠지. 알았어. 다들 돌아가도 돼. 아이들도 기다릴 텐데. ”

내 피를 이었다고 증명이라도 하듯 집착이 강한 닉스였으나, 라케시스나 클로토는 전혀 그런 기색을 내비치질 않았다.

라케시스야 엘렌의 가르침에 따라 자기와 함께 긴 시간을 할 수 있을 이를 느긋하게 기다리는 모양이고, 의외로 클로토가 가장 평범한 가정을 꾸렸다.

이브보다 더 심하다 생각될 만큼 마법에만 미쳐 살아 그런지 양자를 들이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인연이라는 게 참 신기했다.

그러나.

“ 저… 공작님. 실은 그에 관해서 꼭 드려야 될 말씀이 있어요. 말씀드리는 게 조금 늦어지긴 했는데……. ”

“ 괜찮아. 뭔데? ”

나는 이브가 쭈뼛거리며 망설이는 모습을 보며 절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치 무슨 사고라도 친 것 같은 아이같이 겁에 질린 기색이 약간이나마 엿보였던 탓이다.

혹시 내가 모르는 곳에서 마법 실험이라도 하다 날려먹은 재산이 제법 컸던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이브가 하는 말을 듣고자 뜸을 두고 기다렸다.

“ 확신을 얻는 게 늦어져 말씀을 못 드렸는데, 아무래도 대공님의 영혼은… 하늘과 연결된 것 같아요. ”

“ …뭐? ”

하늘?

나는 영문 모를 소리에 눈을 부릅떴고, 엘렌 또한 그에 대해 들은바가 전혀 없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워했다.

“ 하늘이라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

“ 언니나 공작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저는 언니와 대공님 사이에서 라케시스를 가질 수 있도록 연구를 했었어요. 그리고 아시다시피 성공했고요. ”

“ 그래. 그랬지. 그런데 갑자기 그 얘기는 왜? ”

“ 다름이 아니라… 그 연구에서 대공님의 혼이 가지신 형태가 무척 복잡하고 섬세하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에요. ”

그 일은 나도 안다. 그래서 이브가 상당히 고생했고, 엘렌이 그 고마움을 표하고자 얼마나 많이 노력했는지도 잘 안다.

더해, 나 또한 노고를 치하하고자 상을 주었던 것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으니 더 말할 것이 없었다.

“ 그런데 갑자기 그 이야기는 왜…? ”

“ 사실, 저는 그 후로도 계속 꾸준히 연구를 했고, 서클 마법을 갈고 닦아서 보이지 않는 것도 볼 수 있게 되었어요. 그러다… 아홉 서클을 완성하곤 흐릿하게 보이던 것들이 뚜렷하게 보이게 됐고요. ”

여전히 마법에 관한 이야기만큼은 제대로 알아듣기 힘들어 잘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지온의 혼이 하늘, 즉 저 신들이 산다는 영지와 이어졌다는 말 만큼은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다.

얼핏 신과 이어졌다는 말을 들었다면 허무맹랑하다, 또는 어처구니가 없다 생각하기 쉽겠지만… 간간히 신이 계시를 내려준다는 걸 나는 안다.

당장 우리가 끌어내렸던 전 제국 황제이자 계시를 받았다던 헬리오스만 봐도 그 점은 명확했고.

“ 그 말은 즉 … 뭔가 문제가 있는 거야? 우리 계획이 전부 무너질 수도 있다고? ”

“ 아마도요. 만약 공작님이 계획하신 대로 흘러간다면, 아마 저 하늘에 오르시거나… 그를 허락지 않은 신들께서 혼을 태워버리실 것 같아요. ”

“ 그렇다 이거지……. ”

엘렌이 예상 밖의 결론을 듣고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에 잠기자, 나 또한 어떻게 해야 할 지 망설여졌다.

오랫동안 당연히 그렇게 될 거라 생각해 왔던 희망과 계획이 실행을 목전에 두고 무너지게 생겼으니 그럴 법도 했다.

우리가 보통 사람과는 다른 감성을 갖고 있다고는 하나, 결국 사람이니까.

“ 후우……. ”

어떻게 할까.

나는 무거워진 침묵 속에서 고민했고, 하다못해 이브가 조금만 더 그를 빨리 알았다면 싶은 마음에 때늦은 원망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일은 벌어진 지 오래인데다 우리 중 가장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이브도 손 쓸 방법이 없다고 말한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하는 것은 당연했지만, 의외로 그 답이 아주 명쾌했다.

“ 도박을 해야지. 어차피 다음 생을 지온과 함께할 수 없다면 아예 깔끔하게 사라져 버리는 게 나을 테니까. ”

내가 한숨을 거두고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하자, 엘렌도 깨달은 바가 있었는지 굳은 표정을 풀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 옳으신 말씀이세요. 원래 대공님의 곁에서 환생하는 것 자체가 순리에 거스르는 일이었으니, 실패한다 한들 그냥 눈을 감을 뿐이겠죠. 한 번 죽으면 생애에 마침표를 찍기 마련인 보통 사람들처럼. ”

“ 두 분은… 정말 그래도 괜찮으세요? ”

“ 그래. 이걸로 충분해. 하지만 이브 너는 생각이 다른 듯하니, 지금이라도 물러날 수 있도록 할까? ”

이제 한 가족이라 일컫기 손색이 없는 이브를 두고 떠나기가 무척 아쉽지만, 이건 온전히 본인이 선택해야 할 문제다.

나는 그를 알기에 후련한 마음으로 이브의 뜻을 기다리기로 했는데, 의외로 그 답이 빨리 나왔다.

“ 아니에요. 조금 전에 말한 대로… 어차피 사람은 한 번 죽으면 끝나는 거잖아요. 그러니 저도 도박을 하고 싶어요. ”

“ …좋아. 그러면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내기로 하자. 어차피 다들 뜻을 굳힌 모양이라 더 말할 것도 없겠지. ”

닿을 수 없다면 차라리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편이 좋다.

사실 어떻게든 지온과 함께 영원토록 살고 죽기를 반복하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하늘이라는 벽이 가로막고 있다면 도박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브라면 혹시, 하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나… 그 가능성에 걸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도박을 하는 편이 훨씬 가능성이 높다고 감이 속삭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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