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의 기둥서방이 되었다-189화 (189/192)

〈 189화 〉 시간은 흐른다 #9

* * *

얼핏 보기엔 갓 사교계에 들어와 적응하지 못해 수줍어하는 아이와 그를 배려하듯 주위를 둘러싼 여인들이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실상이 전혀 다른 것임을 닉스는 알고 있었고, 자신을 둘러싼 일련의 무리와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티나지 않게 셀렌의 낯빛을 철저히 살폈다.

웃는 낯짝으로 뱉어내는 비난을 받아들이며 우울함에 물들어가는 낯빛을.

“ …네, 저도 즐거웠어요. 다음에도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네요. 그럼,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그래서 닉스는 의례적으로 던지는 인사를 마지막으로 무리에서 벗어난 뒤, 셀렌의 곁으로 다가갔다.

나를 의지할 상황을 만들고, 그에 도움을 줌으로써 호감을 사라는 헬레나의 말은 정확히 맞아 떨어졌지만, 아무래도 기분이 좋을 수는 없었다.

계획대로 굴러간다 하더라도 꼭 기분이 좋지만은 않구나.

닉스는 인생의 교훈을 하나 얻어가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셀렌과 귀족 여인들 틈으로 끼어들었다.

“ 실례합니다. 한참 재미있게 이야기 하시던 중이셨나 보군요? ”

“ 네. 아… 네에! 나이가 조금 적을지언정 아는 것이 많은 분이라 유익하고 재미있는 이야기가 쏟아지는 듯 했습니다. ”

“ 그러시다니 참 다행이군요. 하지만……. ”

못 들었나? 못 들은 거겠지?

스칼렛은 닉스가 의외로 눈치가 없는 것 같아 보이는 모습에 내심 안도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 호호 웃으며 자리를 넘기려 했었다.

다만, 그 생각이 곧 부질없음을 깨달은 듯 목 뒷덜미로 식은땀 한 줄기가 흘렀다.

“ 제가 질투가 좀 많아서 그러니까… 앞으로는 꼭 제 허락을 받고 이야기 해 주세요. 오늘처럼 함부로 다가와 아무 말이나 하지 마시고요. 아시겠지요? ”

귀족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나이의 차이가 아니라 신분의 차이다.

그렇기에 설령 닉스가 스칼렛보다 열 살 이상 어리다 하더라도 찍 소리도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자기는 집 안에서도 몇 명이나 존재하는 흔한 아이 중 하나인 반면, 닉스는 전쟁영웅이자 소드마스터로 이름을 떨친 공작의 유일한 자식이니까.

“ …예.크라우저 님의 말씀… 잘 알겠습니다. ”

스칼렛은 도저히 아이답지 않은 무저갱과 같은 눈동자와 사람 자체에서 느껴지는 압박감, 신분의 차이에 겁을 먹으며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다른 귀족 여인들도 그 모습을 보고 느낀 바가 있었는지 덩달아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 이해해 주셔서 고마워요. 그러니 조금 전에 하신 행동은 특별히 불문에 붙여 드릴게요. 본래 제 사람을 괴롭히는 건 못 봐주지만… 처음이니까요. ”

그에 닉스가 고맙다는 듯 웃으며 한 마디 하자, 근처에 있던 귀족 여인들 모두가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낌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웃고 있음에도 오히려 화가 났다는 것을 여실히 느낄 수 있는 기색도 그러했지만,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능청스럽게 다가왔다는 사실이 두려웠던 탓이다.

“ 예, 예에… 그러면, 저희도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

“ 네. 조심해서 가세요. ”

스칼렛은 조그만 닉스를 얼마나 무서워하는지, 영혼 없이 던지는 안부조차 목숨을 앗아가겠다는 협박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몸을 휘청거리면서도 재빨리 자리를 벗어났고, 셀렌은 그 모습을 멍한 눈으로 응시했다.

강한 권력을 가진 이가 더 강한 권력 앞에 무너지는 모습을 보니 남일 같지 않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묘한 기분에 무언가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 미안해. 이유도 없이 바로 싫다고 할 수도 없어서 잠시 자리를 떴는데, 곧장 이런 일이 생겨서……. ”

“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다 맞는 말이기도 했으니까. ”

사실은 때때로 어떤 비수보다 날카로워 받는 사람의 심장을 푹 찌르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셀렌이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래서 점점 위축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직접 몸으로 느끼던 셀렌이었지만, 막상 그 때를 벗어나게 해 준 사람이 닉스였기에 큰 혼란을 느꼈다.

아이 같으면서도 음습한 구석만 보았기에 그 충격이 더했던 탓이다.

그리고 그 충격은 날이 갈수록 더해져, 셀렌 안에 깊게 박혀 있던 닉스의 인상이 바뀌게 되는 결과에 이르렀다.

두 아이를 사교계로 보내도록 한 어른들이 예상했던 대로.

.

일단 사람이라면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 누군가 도움을 주었을 때 은혜를 느끼며 좋은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게 된다.

그리고 이 좋은 사람이라는 인상이 지금의 닉스에게 있어 가장 필요한 일이라 생각했고, 그를 위해 일부러 각 영지에서 주최하는 사교계로 내보냈다.

나야 조용히 살면 그만이었고, 헬레나는 나만 있으면 그만이었기에 사교계에 나갈 필요를 못 느껴 나갈 시기가 많이 늦었었으나, 이번에는 경우가 달랐다.

닉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던져 넣어 생각을 바꾸도록 할 생각이었고, 그를 위해 사교계를 택한 거니까.

“ 다행히 잘 풀리고 있는 모양이지? ”

“ 그러게. ”

나는 집무실에서 헬레나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서류에 떨군 시선을 그대로 두며 답했다.

처음에는 먹고 싶으면 한 발 물러날 줄도 알아야 한다는 충고가 제법 노골적이라 생각했는데, 그 말을 잘 지키는 모습을 보니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아무래도 집착이 강한 혈육이라는 공통점이 있어 그런지 서로 잘 통하는 모양새였다.

“ 그런데, 헬레나는 제국상회 측의 딸이었던 그 아이를 며느리로 맞아들여도 괜찮은 거야? ”

셀렌이 점점 닉스에게 빠져 들어가고 있으니 깊은 관계가 되는 건 시간문제다.

그 말은 즉, 언젠가 이 공작가의 며느리로 들어온다는 뜻도 되었다.

그래서 혹시 모를 견제를 받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넌지시 묻자, 헬레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 왜? 닉스가 좋아하잖아. 그러면 된 거 아냐? ”

크라우저 공작가가 배우자를 고르는 데 신분을 따지지 않는다는 점도 있지만, 무엇보다 헬레나가 열린 생각을 가지고 있음을 여실히 드러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무렇지도 않게 뭐가 문제냐며 질문을 던질 리가 없겠지.

“ 그렇긴 하지. 나도 물론 그렇게 생각하고. 하지만 우리와 껄끄러운 관계였던 상회의 딸이잖아. 그 점이 마음에 걸리는 게 아닌가 해서. ”

“ 이미 없어진 지 제법 시간이 흘렀고, 눈에 거슬렸던 건 상회주였던 노예뿐인걸. 아이에게 무슨 죄가 있겠어. ”

하지만. 헬레나는 거기서 잠시 말을 끊곤, 내 팔을 꼭 끌어안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 만약 그 아이가 제국상회를 재건하겠다는 소리를 하며 이빨을 드러내면… 그 때는 닉스와 잘 상의해야지. ”

“ 목을 끊겠다고? ”

“ 그럴 리가. 좋아하는 사람을 죽인다는 건 내게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인걸. 즉, 그 아이도 그런 선택을 절대 할 수 없다는 뜻이야. 물론, 다른 사람 손에 죽는다면 그 사람을 죽여 버리겠지. 나처럼. ”

만약 헬레나의 손으로 셀렌을 죽인다면 닉스가 눈에 불을 켜고 헬레나를 죽일 지도 모른다.

지금 당장은 죽일 수 없을 테니 차분히 때를 기다리겠지.

나는 그 상황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약간 구역질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절대 그런 꼴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 교육을 잘 시켜야겠네. ”

“ 정 안되면 이브와 함께 세뇌라도 시켜서 생각을 바로잡으면 될 거야. 별로 심각한 일도 아닐 테고, 닉스도 타협점이라 생각하고 이해해 주겠지. 그 아이도 사랑을 가꾸기 위한 배경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나이니까. ”

조교와 세뇌라. 어찌 보면 그것도 썩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으나, 서로 죽이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훗날 셀렌의 입에서 그럴 생각이 아예 없다는 진심을 듣게 되어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이 때는 그걸 몰랐기에 떨떠름한 느낌만이 입안을 맴돌았다.

.

어떤 사람이 예상 밖의 모습을, 그것도 믿음직한 모습을 보여주면 몹시 당황스럽다.

셀렌은 사교계를 돌았던 요 몇 달 간 그 말을 직접 겪은 당사자로서, 지금도 혼란스러운 마음을 부여잡느라 고생을 하고 있었다.

“ …그래서 훈련을 하다가 또 다쳤는데, 클로토나 라케시스가 잘 봐줘서 금방 나을 것 같긴 해. ”

클로토와 라케시스. 각각 전쟁 전부터 큰 공을 세워 공작가의 중신이라 불리는 두 여아의 딸들이다.

셀렌은 그 이름 뿐 아니라 직접 대화까지 해 본 당사자로서, 그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은 물론 성품도 훌륭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리지만 같은 여자로서 대화가 통하는 면도 있었고, 그것은 답답했던 가슴에 부는 한 줄기 바람이었으니까.

물론, 지금에 이르러서는 답답하다는 느낌도 많이 희석되었고, 무엇보다 닉스가 매일같이 찾아오는 것이 즐거웠기에 편안하기만 했다.

“ 저어… 그런데 괜찮으세요? 사교계에서 퍼진 소문 때문에……. ”

“ 소문? 뭐 어때. 오히려 좋은데. ”

크라우저 공작의 아들이 망한 상회의 딸에게 빠져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그런 소문이 있다는 것을 닉스도 잘 알고 있고, 그 속에 조롱의 뉘앙스가 녹아든 것도 알고 있으나 굳이 부정하질 않았다.

굳이 발끈할 필요도 없는 당연한 사실이라고 생각하니까.

“ 하지만 도련님에게 흠이 될 텐데… 정말로 아무렇지 않으세요? ”

“ 원래 남 얘기 좋아하는 게 사교계잖아. 막상 그걸 입에 담는 사람들도 흠이 한둘이 아닐걸? 그러니까 웃기기만 하지. ”

좋지 않은 소문이 나면 자연스레 신경이 쓰이기 마련임에도, 닉스의 낯빛에서 그런 기색을 조금도 느낄 수 없었다.

왜냐하면 헬레나마저 광기 때문에 평판이 좋지 않았던 때가 있었음을 알았으며, 결국 그 또한 뒤집히거나 잊히게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더해, 그런 소문보다 실리를 손에 쥐는 것이 훨씬 중요했다.

셀렌도 그런 진심을 알았는지 당황해하며 입을 꾹 다물다, 몇 달 전만 해도 입에 담기는커녕 떠올릴 수조차 없었던 물음을 입에 담았다.

“ 도련님은… 제 어디가 그렇게 좋으신 거에요? ”

그리고 그 물음은 닉스가 그토록 기다려왔던 물음이었기에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비틀며 웃었다.

헬레나의 가르침에 따라 솔직하게 본성을 고백한 뒤 그를 억누르는 모습을 보이던 시간들이 결실을 맺게 될 때라는 것이라 확신했다.

“ 글쎄…? 그냥 좋은데?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물어? 혹시 생각이 좀 바뀐 거야? ”

서로 성별이 반대였으면 훨씬 일이 쉽게 풀렸을 테지만, 그래도 참고 기다린 보람이 있어 다행이다.

닉스는 때가 무르익었다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셀렌 앞으로 걸어갔다.

한발 한발 가까워질 때마다 묘한 긴장감이 돌았고, 셀렌 또한 그를 느낀 듯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닉스가 진즉 말을 해 둬서 그런지 셀렌의 방에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고, 그럴듯한 인기척조차 느껴지질 않았다.

“ 아, 그게……. ”

헬레나와 지온이 넌지시 던진 말도 있고, 심적 변화도 있어 두려움 대신 묘한 우월감이 자리하기 시작하자 태도 또한 자연스레 바뀌었다.

닉스가 거리를 좁힐 때 마다 겁에 질리기만 했던 셀렌이 얼굴을 붉힌 채 쑥스러워 하는 것이 그 중 하나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를 지켜보던 닉스가 자기 어깨에 손을 얹는 순간, 어쩔 줄 몰라 몸을 슬며시 꼬기까지 했다.

닉스의 마음이 절대 가볍지 않으며 거짓 또한 없다는 헬레나와 지온의 말을 떠올리면서.

“ 해도 돼? ”

보통 아이라면 무엇을 할 건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릴 법도 했으나, 셀렌은 분위가 닉스의 표정, 목소리를 통해 무엇을 원하는지 어렴풋이 알았다.

정확히는 그녀 또한 어떤 경우에 어떤 행위를 하게 되는지 잘 몰랐으나 헬레나가 친절하게 설명해준 덕이다.

다만 그 때가 셀렌이 사교계를 돌아보고 온 바로 당일날 밤이었다는 점을 미루어 보면, 조만간 이런 상황이 올 것이라 예상했던 모양이다.

이는 어떻게 보면 한 사람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난다는 것만 같아 화가 날 법도 했지만, 지금 셀렌에게 화를 낼 겨를 따위는 없었다.

그저, 앞으로 벌어질 일에 긴장하며 조용히 기다리는 것이 최선이었다.

“ …네. ”

그럴 생각으로 셀렌이 짤막하게 대꾸하자, 닉스는 기다렸다는 듯 어딘가로 입술을 가까이 댔다.

여태껏 머리로만 알고 있던 곱상한 생김새와 목소리가 심장을 파고들었고, 책으로 읽어봤을 뿐 난생 처음 해 보는 키스에 넋을 놓았다.

아직 어리기에 더한 일이 기다리고 있음을 지금의 두 아이는 모르지만… 그것 또한 시간 문제였다.

아마, 적당한 나이가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서로를 탐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누군가 그러했듯이.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