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7화 〉 시간은 흐른다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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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아이답지 않게 머리가 잘 돌아가는 구석도 있긴 했지만, 일단 그 나이에 맞게 순진하게 지내던 때가 대부분이었던 닉스가 그런 일을 저지르다니.
나는 알트람 상회에서 꾸린 상단에 따라갔던 일, 그리고 그곳에서 닉스가 제국상회를 만났던 일을 곱씹으며 팔짱 낀 손가락으로 팔뚝을 톡톡 두드렸다.
모두가 잠든 야심한 밤이기에 큰 소리도 낼 수 없고, 각 침대엔 늘 함께하는 세 여자들이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어 움직이기도 불편했다.
다만, 불편하다는 점이 꼭 불만스럽다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나이가 먹어도 예전만큼 힘이 있기에 내심 뿌듯하기까지 했다.
“ …이게 아니지. ”
나는 어깨에 닿는 살결로부터 애써 눈을 돌리며, 앞으로 닉스가 어떻게 나올지 상상해봤다.
이미 헬레나의 조치에 따라 제국상회는 해체되고, 밑에서 일하던 사람들에게 각자 일터를 마련해 준 것 까지는 좋은데… 그 다음이 문제였다.
아마 첫 눈에 반하기라도 한 듯, 닉스가 하필 제국상회의 딸에게 눈독을 들였으니까.
그저 사이가 좋지 않던, 혹은 서로 적대관계라 할 수 있었던 상대의 딸을 사랑한다는 건 상관없었다.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어떻게 빠질지 알 수 없기에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어느새 헬레나와 꼭 닮은 모습으로 그 아이를 대하기 시작한 닉스에게 있었다.
만약 헬레나와 비슷한 수준으로 집착하기 시작하면, 보통 멘탈을 가진 사람이 그걸 감당할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자연스레 떠오를 정도니.
헬레나도 그 점을 고려한 듯 언제든 이야기를 하라고 말해주긴 하긴 했는데, 나도 뒷짐지고 구경만 할 수는 없을 노릇이긴 하다.
이런 감정 문제는 괜히 누가 끼어들지 말고 장본인들끼리 풀어야 한다는 건 알지만, 그 본인이 평범하질 않으니 가만 둘 수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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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흐아아……. ”
제법 넓고 큰 이층 주택의 어느 방에서, 길고 붉은 머리칼의 여아가 눈을 감은 채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여아의 이름은 셀렌으로, 망해버린 제국상회의 주인이었던 레너드의 유일한 여식이었다.
전에 쓰던 침대만큼 고급스럽지는 않았지만 깨끗하고 푹신했으며, 홀로 잠드는 것도 두렵지 않았기에 제법 쾌적하다 할 수 있었다.
다만, 예전이라고 한들 제국상회가 한창 위세를 떨쳤던 시절보다 질이 낮은 물건을 쓴 탓에 큰 차이가 없기는 했다.
더구나 옷 또한 하인들이 입을 법한 어딘가 허름한 옷이 아니었기에 고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제 열 살이라고는 하나 레너드의 혹독한 교육을 받으며 자랐기에 보통 아이보다 시야가 넓고 아는 것이 많았던 덕이다.
그러나. 정작 셀렌은 그 교육에 대해 썩 고맙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좋은 시기를 누렸던 셀렌의 모친은 아이가 다섯 살이 될 무렵 떠나간 지 오래였고, 부친인 레너드는 그에 더욱 독기를 품고 딸을 혹독하게 가르쳤다.
기본적인 셈부터 교섭을 하는 방법, 예절, 교양에 이르기까지.
그 탓에 제대로 숨 쉴 틈조차 없었고, 제국상회의 딸이라는 이름으로 허영을 채울 수도 없었다.
기울어져 가는 와중에 부리는 사치는 말 그대로 사치였으며, 애초에 그럴 여유가 있었다 하더라도 시간이 없다는 이유가 가장 컸다.
그래도 낳아 준 부모랍시고 무관심하지는 않았으나 그뿐이었기에 아버지가 원망스러웠고, 더 나아가 아버지를 저렇게 만든 소테른 왕국을 원망했다.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그냥 밉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막상 원망했던 소테른 왕국의 공작령에 와보니 전혀 생각지도 못한 상황을 겪어 혼란스러웠다.
감히 공작가의 아이를 납치하여 이득을 보려 한 죄 때문에 죽겠구나 싶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안쓰러운 눈으로 동정을 보냈고, 노예 취급은커녕 적당히 좋은 대우까지 주었다.
셀렌으로서는 그 모든 일이 혼란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으나, 진짜 혼란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 방에 있느냐? ”
“ 어, 어어? 예, 예에…! ”
레너드가 죽어라 때려 박은 교육 덕에 하녀나 할 법한 잡일 대신 알트람 상회에서 상인 보조를 할 수 있었고, 그 일은 해가 저물어 갈 무렵에 끝난다.
그 뒤에는 찾아오는 사람도 없어 오롯이 셀렌만의 자유로운 시간을 누릴 수 있었으나, 문 밖에서 들려오는 예상치 못한 목소리가 셀렌을 당황케 했다.
다름 아닌 알트람 상단의 상단주의 목소리였기 때문에.
“ 드, 들어오세요. ”
황급히 머리칼과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침대에 걸터앉자, 상단주가 기다렸다는 듯 끼익, 하고 문 여는 소리를 내며 발을 들였다.
“ 다행히 아직 잠자리에 들지 않은 모양이구나. ”
“ 네에. 그렇긴 한데…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요? 상단주님께서 이 시간에 찾아오신 걸 보면……. ”
“ 음. 그렇지. 마침 너와 관련된 일이 생겨 내 이렇게 직접 알리러 왔다. ”
이 늦은 시간에? 순간, 셀렌의 뇌리에 허름하다 못해 해져버린 옷을 입고, 손에는 무거운 족쇄를 찬 채 사슬에 끌려가는 자신의 모습이 스쳐갔다.
너무도 빨랐지만, 동시에 너무 선명했기에 무심코 등줄기가 찌르르 울릴 지경이었다.
“ 저… 혹시 마침내 노예로 팔려가는 건가요? ”
의젓한 부분이 있다고는 하나 아직 열 살 아이이며, 급격하게 주변 환경이 바뀌어 버린 지 얼마 되지 않아 더더욱 불안한 상황에 노예가 되는 상상까지.
어린 셀렌에게는 교양이고 뭐고 다 잊어버릴 만큼 커다란 충격이었다.
상단주도 그를 알았는지, 내심 당황해하면서도 침착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 진정하거라. 노예로 팔려가는 것이 아니니까. ”
“ 예? 정말로요? ”
“ 그래. 내 거짓으로 말해 뭐 하겠느냐. 다만, 내일 상회를 떠나 새로운 곳으로 가야 하는 건 맞다. ”
“ 새로운 곳이라면… 대체 어디로 가는 건가요? ”
셀렌은 새로운 곳으로 가야한다는 말이 약간 불안했으나, 일단 노예로 팔려가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적어도 셀렌이 보고 들었던 노예의 삶은 도저히 견뎌내기 어려울 만큼 혹독했는데, 그게 아니라는 말을 들은 덕이다.
그럼에도 낯선 곳으로 향해야 한다는 불안이 입술에서 질문을 내뱉게 만들었고, 상단주는 그걸 당연하다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설령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더라도, 미래엔 귀중히 대접해야 할 손님이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 공작님이 머무시는 저택으로 갈 것이다. 내일 아침을 먹고 떠날 것이니, 그렇게 알고 있거라. ”
공작가라니! 셀렌은 상상도 못했던 장소를 듣자, 한순간 노예가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했다.
이 넓은 영토를 지배하는 귀족이자 왕국 내에서도 셋 밖에 없으며, 무엇보다 제국에서 악명 높은 소드마스터가 머무는 거처로 간다는 두려움 때문에.
순간 도망칠까 생각도 했지만, 절대 불가능할 것임을 깨닫고 두려움에 질린 채 체념했다.
공작령을 벗어나려면 동사남북 어느 성문 중 하나를 반드시 거쳐야 하는데, 얼굴이 팔릴 대로 팔릴 제국상회의 딸이 가능할까 싶었던 탓이다.
그리하여, 셀렌은 다음 날 아침이 밝자 몸을 단정히 하고, 상회주가 준비해 준 붉은 드레스를 입은 채 저택으로 가는 마차에 올랐다.
재질이나 옷감이 척 봐도 귀족들이나 부자들이 몸에 걸칠 법한 고급품이었기에 몹시 부담스러웠고, 그 부담감이 표정에 얼핏 드러나고 있었다.
“ 으음. 도착했구나. ”
인솔자로서 함께 마차를 탄 상단주의 묵직한 목소리가 울리자, 셀렌의 시선이 자연스레 창밖으로 향했다.
넓은 부지에 잘 가꾸어진 정원. 높고 묵직한 벽에 둘러싸인 큰 저택은 척 보기에도 급 높은 귀족이 살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찌 보면 저택이 귀족인 마냥 으스대는 것만 같이.
“ 드레스를 입은 채 혼자 내리기엔 불편하겠지. 자, 내 손을 잡거라. ”
“ 아… 감사합니다. ”
마차를 대는 차고 겸 마구간에 이르자, 한 발 먼저 마차에서 내린 상단주가 마차 입구에 서서 우물쭈물하는 셀렌에게 손을 내밀었다.
덕분에 셀렌은 상단주의 손을 잡은 채 천천히, 불안 없이 땅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정말 공작가 안으로 발을 들였구나.
셀렌이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주변을 훑는 동안, 상단주는 미리 마중을 나온 앤디와 간단한 잡담을 나눴다.
서로 얼굴을 마주할 일이 의외로 있다 보니 잡담을 나누는 모습도 제법 친근하고 자연스러웠다.
“ …어디, 저쪽에 계신 아가씨가 바로 그? ”
“ 그렇다네. 셀렌, 인사하거라. 이곳 하인들을 총괄하는 집사, 앤디다. ”
“ 아, 네엣! 처음 뵙겠습니다. 셀렌 메르카토르입니다. ”
셀렌이 허둥대는 와중에도 곧고 올바른 자세로 허리를 숙이자, 앤디도 입가에 호선을 그리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저택에서 일하는 하인이라면 또 모를까, 어떤 의도로 셀렌을 불러들였는지 잘 알기에 자연스레 예의를 갖추는 것이 당연했다.
나중에 어떻게 될지는 모르나 지금 당장, 그리고 높은 확률로 귀빈이 될 확률이 높았으니.
“ 반갑습니다. 집사 앤디입니다. 지금부터는 공작님을 만나시게 될 텐데, 혹 들은 바가 있으십니까? ”
“ 네. 상단주께서 미리 귀띔을 해 주셔서……. ”
“ 그렇다면 다행이로군요. 지금부터는 저를 따라오시면 되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
셀렌으로서는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으나 그 생각을 겉으로 드러내지 못한 채 상단주를 스쳐 지나, 얌전히 앤디의 등을 쫓았다.
신기하다.
긴장하는 와중에도 화려하되 졸부마냥 가볍지 않은 묵직함이 느껴지는 저택 내부 풍경에 감탄하는 것이 신기하다고, 앤디는 생각했다.
그저, 헬레나가 머무는 집무실에 도착했기에 그 생각이 오래 가지 못했을 뿐.
똑똑. 앤디가 문을 두드리며 입을 열자, 안쪽에서 기다렸다는 듯 답이 돌아왔다. 답을 준 것은 물론 헬레나였다.
“ 공작님. 말씀하신 아이를 데리고 왔습니다. ”
“ 그래요? 들이도록 해요. ”
앤디는 헬레나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집무실의 문을 열며, 셀렌이 들어가기 쉽도록 옆으로 비켜주었다.
그 덕분에 활짝 열린 문 너머로 집무실 탁자 앞에 앉아있는 헬레나와 셀렌의 눈이 거의 정면에서 마주치게 되었다.
듣기로는 마흔이 넘었다고 들었는데, 여느 귀족 영애들보다 아름답고, 그들보다 젊은 싱그러움이 느껴져 신기하다.
셀렌은 여전히… 아니, 오히려 전보다 더욱 농염해진 헬레나를 멍한 눈으로 바라보다, 곧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고개 숙여 인사했다.
“ 아! 저어… 처음 뵙겠습니다. 셀렌 메르카토르입니다. ”
“ 반가워요. 헬레나 크라우저에요. ”
헬레나는 수도원의 사제들처럼 인자하게 웃으며 몸을 일으키더니, 셀렌 앞으로 다가가 직접 고개를 들도록 했다.
그에 셀렌이 화들짝 놀라 다시 고개를 숙이려다, 헬레나가 여전히 웃으며 다정하게 말리는 통에 몸이 굳어버리고 말았다.
말로만 듣던 흉악한 공작의 이미지와는 완전 딴판이었던 탓이다.
“ 자. 일단 저쪽에 앉을까요? 서 있으면 다리가 아플 테니까. ”
“ 배…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헬레나가 셀렌의 어깨를 가볍게 감싸며 집무실 소파로 가는 동안, 앤디도 눈치껏 고개를 숙인 뒤 천천히 집무실 물을 닫았다.
그 덕분에 집무실 안에 헬레나와 셀렌만이 남아 차분히 대화를 나눌 만한 분위기가 되었다.
“ 차는 좋아하나요? 저는 쓴맛이 아직까지 거북해서 설탕을 넣곤 하는데. ”
“ 아… 실은 저도 설탕 넣은 차를 좋아해요. 그렇지 않은 차는 향은 좋지만, 혀에 쓴 맛이 너무 길게 남아서……. ”
“ 후후. 저랑 똑같네요. 자, 들어요. ”
셀렌은 소파에 앉은 채 직접 주홍색으로 물든 차를 끓여주는 헬레나를 놀랍다는 듯 바라봤다.
집사나 하인을 시켜 내오게 만들었어야 할 차를 직접 끓여주는 것도 그러하지만, 자기를 배려해 자연스레 입맛을 맞춰주는 모습도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급 높은 귀족은 주위를 맞춰주도록 만들지, 결코 자기가 맞춰주지는 않았으니.
“ 와아……. ”
아슬아슬하게 선을 지키는 은은한 단맛에, 가장 좋은 품질의 찻잎만이 낼 수 있는 향.
셀렌은 레너드가 익히라고 닦달을 했던 교양을 통해 차의 품질을 알 수 있어, 지금 마시는 차가 단순한 손님용이 아니라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두려웠다.
이 정도 품질을 가진 차를 단순히 손님, 그것도 자기처럼 별 볼일 없는 아이에게 줄만한 이유가 무엇일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 감사합니다. 정말 맛있어요. ”
“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네요. 그럼, 미안하지만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도 될까요? ”
탁. 헬레나가 찻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입을 열자, 셀렌이 자세를 곧게 하며 한껏 굳은 모습을 보였다.
본론이라는 말을 꺼낸 이상, 이제 더 이상 벗어날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친 탓이다.
“ 네. 말씀해 주세요. ”
어차피 죽을 거, 말이나 들어보자.
셀렌이 각오를 다지고 짧게 한 마디 하자, 헬레나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입술을 뗐다.
“ 내 아이가 당신을 마음에 들어 해요. 그래서 이 저택에 머물게 할 생각이에요. ”
뭐…?
반쯤 죽을 생각을 하고 긴장하며 물었더니, 이건 또 무슨 소린지.
셀렌은 뜬구름 잡는 소리를 듣자 저도 모르게 입을 살짝 벌리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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