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3화 〉 시간은 흐른다 #3
* * *
─미안해. 정말 미안해.
클로토는 예전 무릎 꿇고 울먹이던 어머니, 이브의 얼굴을 떠올리며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올렸다.
수도원에서 받아 온 성수를 가지고 연구하느라 밤을 샌 탓에 아직도 피로가 풀리질 않고 있었다.
“ 끄응……. ”
그래서 곱게 자른 은색 빛깔이 도는 앞머리를 손으로 쓸며, 단전에 담아 두었던 마나를 몸 구석구석으로 돌렸다.
머리를 맑게 만들기 위한 수단으로 이브에게 배운 것인데, 무협에서 말하는 운기조식을 하는 것과 조금 비슷하다고도 할 수 있었다.
살겠네. 클로토는 마나를 돌려 잠기운을 몰아내고 나서야 침대에서 일어나, 곧장 욕실로 걸음을 옮겼다.
이브와 엘렌이 아이를 낳고 나서부터 방에 욕실을 만들어 두었기에 굳이 여러 사람 불편하게 물을 길어 오라고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욕실에서 쪼그려 앉은 채 간단히 얼굴을 씻고 오고 나니, 그제야 이브가 방을 비우고 있음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어제부터 영지 곳곳에 깔린 우물에 설치해 둔 정화마법진의 상태가 어떤지 둘러보고 온다 했었던 말이 클로토의 뇌리를 스쳐간 덕이다.
“ 안녕하세요……. ”
“ 아, 안녕하세요. 이제 일어나신 모양입니다. ”
“ 네. 저도 모르게 연구를 너무 많이 했나 봐요. ”
클로토가 대충 옷을 갈아입고 방을 나오기 무섭게 고개를 숙였고, 입술에선 반사적으로 인사말이 흘러나왔다.
당연히 그를 받는 하인들 또한 정중하게 인사할 수 밖에 없었지만 반가움이 가득했다.
지온의 피를 이었다는 말하기 힘든 속사정을 제외하더라도, 영지 곳곳에 편안함과 이윤을 가져다주는 이브의 딸이기에 그만한 대우를 받을 수밖에.
클로토도 그를 잘 알고 있지만 이브처럼 마법에만 정신이 팔리기도 했고, 아이임에도 선을 넘지 않아 모난 구석이 없었다.
가끔 자기 위치를 이용해 수도원에 드나드는 등 기행을 저지르곤 하지만 충분히 웃고 넘어갈 정도였다.
“ 아저씨… 안녕하세요. 죄송하지만 남은 빵 같은 거 있나요…? ”
“ 허허. 오늘도 늦으셨나 보군요. 간단하게 차려드릴 테니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
아침은커녕 점심시간도 지났을 무렵인지라 이미 주방을 치우고도 남았겠지만, 정 안되면 빵 한 쪼가리라도 얻어 봐야겠다.
그렇게 생각했기에 클로토의 발걸음이 자연스레 주방을 향했으나, 다행히 주방을 지키고 있던 바트나 주방 식구들이 싫은 기색 하나 없이 요리를 해 줬다.
직접 주방까지 찾아와 때 늦은 밥을 먹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기도 하고, 폐를 끼치는 모습조차 귀엽게만 보였던 덕이다.
“ 감사합니다. 정말 잘 먹었어요. ”
딱딱한 빵에 물 정도면 되었을 것을 정성스럽게 차려줬으니 고마운 것이 당연하다. 그렇게 생각했기에 클로토의 고개가 아래를 향했다.
그에 바트를 비롯한 사람들도 잠시 당황했으나, 곧 정신을 차리곤 별 거 아니라는 듯 가볍게 웃었다.
덕분에 먹을 것도 잘 먹었으니 힘 있게 마법 실험을 할 수 있겠거니 싶었으나, 어림도 없다는 듯 누군가 이브의 방 안에 들이닥쳤다.
알트람 상단을 호위하다 돌아 온 잿빛 피부의 라케시스였다.
“ 대체 언제 잤길래 이제 깬 거야? 밥은? ”
“ …먹었어. ”
당장 실험을 할 수 없게 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나 자매가 찾아왔으니 매몰차게 대할 수도 없는 법이라, 클로토가 한숨을 쉬며 들어오라 손짓했다.
그에 라케시스는 기다렸다는 듯 웃으며 방문을 닫고, 클로토의 바로 옆에 엉덩이를 딱 붙이고 앉았다.
클로토와 함께 연구를 시작한 이래 벤치처럼 긴 의자로 바꿔 두었기에 앉을 공간이 제법 넉넉한 덕이었다.
“ 먹었는데 목소리가 왜 그래? 제대로 챙겨먹은 거 맞아? ”
“ 몰라……. 아침을 걸러서 그렇겠지. 그보다 너는 할 일 없어? 엘렌 님이 안 불러? ”
“ 응. 훈련이야 아침에 다 끝냈으니까 아주 널널하지. 너처럼 연구를 하는 것도 아니고, 닉스처럼 배울 게 많은 것도 아니고. ”
나중을 대비해 기본적인 교육을 받기는 하나 공작가를 이을 닉스만큼 빡빡하지는 않아 상대적으로 여유가 넘친다고, 라케시스는 말했다.
그에 클로토의 뇌리에 뻔한 소리를 했구나 하는 후회가 잠시 떠올랐다 사라졌다.
“ …그거야 그렇긴 하지. 아무튼 무슨 일로 왔어? ”
“ 굳이 이유가 필요해? 그냥 얼굴도 볼 겸 걱정 되서 왔을 뿐인데. ”
“ 아… 그래. ”
지온의 자식 중에서 오지랖이 넓고 시끄러운 편이라 대하기 거북할 만도 했으나, 의외로 클로토의 낯빛과 태도에선 그런 기색을 느낄 수 없었다.
같은 피를 이었음에도 대외적으로 밝힐 수 없다는, 배다른 자매라는 공통점과 더불어 라케시스의 진심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 고마워. 걱정해 줘서. ”
“ 고마우면 연구 시간을 좀 줄이는 게 어때? 그 마법에 목매고 사시는 이브 님도 주말은 무조건 쉬시잖아. 그건 즉 휴식이 필요하단 거 아냐? ”
“ 맞는 말이긴 한데… 나는 아직 어리잖아. 더구나 어머니가 쉬실 때는……. ”
“ 주로 아버지랑 떡방아 찧으실 때가 있으시지. ”
라케시스는 같은 어린아이임에도 언사에 거침이 없어 듣는 클로토가 난감할 법도 했으나, 워낙 무덤덤한 성품인지라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누군가 그 모습을 본다면 아이답지 않다며 한 마디 할 법도 했으나, 이 무덤덤함 덕분에 이브의 사과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더구나 클로토는 이브의 뒤를 이어 연구자를 지향하는 만큼 사람의 생식행위를 무척 자연스럽게 보고 있었다. 마치 동물실험을 하는 것 마냥.
“ 아이를 낳고 나서도 부부간에 몸을 섞는 빈도가 많은 건 좋은 일이야. 수컷은 한 번 정복해서 씨를 뿌린 암컷에게 호감도가 떨어진다고 하니까. ”
“ 어… 그래? 진짜로? ”
“ 무조건 그렇다는 게 아니라 대체적으로 그런 경향이 있다고 하더라. 비슷한 얘기 못 들어 봤어? ”
“ 어…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해. ”
순간 라케시스의 뇌리에 니 눈엔 마누라가 여자로 보이냐? 라는 말이 떠올랐기에, 과연 그럴 듯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였지만, 곧 클로토가 말없이 만지작대는 약병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 그런데, 오늘은 뭐 하려고? ”
“ 교국에서 수련을 쌓은 사람들은 성수를 만들거나, 직접 신성력을 행사해서 사람들을 치료하잖아. 그걸 마법으로 쓸 수 있을지 연구하려고. 만약에 급한 일이 터졌을 때 유용할 테니까. ”
“ 굳이? 우리는 엘프 약초로 만든 약이 있는데? ”
“ …대충 약 없을 때를 대비하기 위해서라고 쳐. ”
사실 명분이 뒷전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클로토가 볼멘소리를 내며 입을 다무는 것도 당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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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알트람 자작가의 아들로 태어났기에 크라우저 공작가를 모시기 위한 기술을 배웠지만, 닉스는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자작가의 피가 섞였다고는 하나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공작가의 아들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내가 닉스에게 여러 가지 기술을 가르쳐 주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그저 알아두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바느질을 할 줄 알면 그렇지 못한 사람들보다 바늘땀이 어떤지, 또 마감이 어떤지 날카롭게 볼 수 있는 눈을 기를 수 있었고, 요리를 할 줄 알면 조리 상태가 어떤지, 재료는 뭐가 들었는지 더 날카롭게 볼 수 있었다.
물론 안목만을 기르기 위해서라면 자주 보고 접하기만 해도 그만이었으나, 직접 해봄으로써 이런 작업을 쉽게 여기지 말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아무래도 왕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귀족으로 태어났으니, 싫어도 허파에 바람이 들어갈 수밖에 없을 듯싶었기에.
“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좀 쉬자꾸나. ”
닉스의 교육을 하게 되며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 헬레나와 내가 함께 있는 시간이 줄었다는 점이다.
오전에 헬레나가 검을 가르치면 그동안 내가 서류작업을 하고, 오후에 내가 잡기를 가르치면 헬레나가 서류작업을 하는 식이었다.
“ 벌써요? 아직 저녁 식사까지 시간이 좀 남았는데……. ”
“ 매일, 꾸준히 하고 있으니 이 정도 여유야 부릴 만 하지. 안 그러느냐? ”
내가 묻자, 닉스도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지 제법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헬레나를 대할 때와는 완전 딴판으로, 정말 아이답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 모습이 어쩔 수 없는 이유에서 기인했기에 꼭 나쁜 것은 아니라 생각하며, 선반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헬레나가 나를 대하는 모습에서 미루어 생각해 보면 아주 양반이었으니.
“ 테라스로 가 있으렴. 날씨가 좋으니 바깥바람을 쐬기도 좋을 것 같구나. ”
“ 아, 네…! ”
나는 화들짝 놀라 답하며 테라스 쪽으로 다가가는 닉스의 등을 바라보다, 트레이에 찻주전자와 찻잔을 놓은 뒤 저 아이의 등을 느릿느릿하게 좇았다.
차만 먹으면 서운하고 허전하니까 같이 먹을 과자도 곁들였다.
쪼르륵. 닉스는 자기 앞에 놓인 찻잔에 따라지는 찻물과, 미리 만들어 두었던 과자에 눈독을 들였다.
남자라고는 하나 아이라서 그런지 제법 단 것을 좋아하는 편이라 그랬다.
“ 보다시피 쿠키는 두 개 까지다. 그 이상 먹으면 저녁 식사가 맛없어 질 테니까. 알았지? ”
“ 네. 잘 먹겠습니다. ”
닉스는 내가 허락하자 기다렸다는 듯 쿠키를 집어 반 정도 베어 물었다.
테라스로 가기 전에 미리 손은 씻어 두었으니 거리낄 것이 없어 보였다. 물론, 나 또한 그랬다.
그저 밖에서 구르던 때가 많다보니 다소 더러운 손으로 먹는다 하더라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을 테지만… 입 다물고 있어야 할 것 같았다.
“ 역시 아버지가 만들어 주신 건 뭐든 맛있어요…! ”
“ 그래.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구나. ”
“ 이래서 저보고 요리를 배우라고 하신 거죠? 없으면 언제든 만들어 먹을 수 있도록. ”
“ 음… 그렇다고 볼 수 있지. 요리를 못하는 것보다 할 줄 아는 편이 여러모로 편하니까. ”
일단 늘 주고받던 대화로 운을 떼니 지루함 보다는 편안하다는 느낌이 앞섰다. 안정감이 높다고 표현할 수도 있었다.
아무래도 안하던 행동을 하는 것보다 늘 하던 행동을 하는 편이 마음에 걸리는 느낌도 적을 테니.
달그락. 나는 잠시 닉스와 함께 차와 과자의 단맛을 즐긴 뒤, 찻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이야기할 수 있을 때 이야기 해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 요즘에는 네 어머니에게 서운한 마음이 제법 줄어든 것 같던데… 혹 계기가 있었느냐? ”
“ 어, 어떻게 아셨어요? ”
닉스는 내가 헬레나보다 편해서 그런지 꾸밈없는 말투를 썼고, 놀라는 감정 또한 억누르거나 숨기지 않고 물었다.
아무래도 헬레나와 대하는 태도가 달라 그렇겠지.
“ 이래저래 들은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네 눈빛이 전보다 힘이 있지 않느냐. 그래서 짐작해 본 건데, 딱 맞춘 모양이구나. ”
“ 세상에……. 어른이 되면 그런 것도 할 수 있나요? ”
“ 아마 너도 공작가의 장남으로서 살다보면 자연스레 알게 될 거다. 내가 싫더라도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을 보고 판단해야 하는 자리니까. ”
그만큼 공작가의 혈통이 좋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교육 방법이 좋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무언가를 이해하는 능력이 약간 부족하더라도 조금 성실하게 교육을 따르기만 하면 수준을 높일 수 있으니 놀라울 정도였다.
“ 아… 공작이요. ”
보통 공작가의 유일한 후계자라는 소리를 들으면 절로 어깨가 떡 벌어지고 거만해 질도 하건만, 닉스는 썩 내켜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표정이나 말투에 떨떠름한 기색이 가득한 것이 꼭 헬레나를 빼닮았다.
그 탓에 내심 웃음이 나왔지만, 일단 심각해 보이는 기색이었기에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물었다.
“ 공작자리가 영 내키지 않나 보구나. ”
“ 실은… 그래요. 저도 라케시스처럼 바깥으로 다녀보고 싶고, 클로토처럼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지내고 싶어요. 잘못이라는 건 알지만……. ”
닉스는 공작가를 이어갈 사람으로서 해선 안 될 말이라 생각했는지, 말꼬리를 흐리며 자연스럽게 변명하듯 한 마디 덧붙였다.
내 입장에서 보면 그럴 수도 있으니 굳이 변명할 필요도 없다 생각하지만, 아무래도 닉스 입장에서는 그렇지 못하겠지.
“ 잘못이랄 게 뭐가 있겠느냐. 오히려 나로서는 웃음이 나올 지경이로구나. ”
“ 네…? 웃음이요? ”
“ 그래. 네 어머니… 헬레나도 공작가를 잇는 걸 무척 부담스러워 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까. ”
“ 예? 어머니가요?! ”
상상도 못한 이야기를 들었는지, 닉스가 화들짝 놀라 목소리를 높였다. 아이 목소리라 그런지 빼액, 하고 소리 지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 그래. 헬레나가 겉으로는 일도 잘 처리하고, 공작으로서 부족함이 없으니 눈치 채지 못한 사람이 많지만… 사실 권력에 많은 부담을 느끼는 사람이란다. ”
나는 닉스를 달래줄 겸, 그리고 공작가를 이어갈 사람으로서 마음을 다잡을 계기를 줄 겸, 누구에게도 말 안했던 이야기를 덤덤하게 털어놓기 시작했다.
사실 헬레나가 권력이나 관심에 부담을 많이 느끼는 소심한 면이 있고, 그를 감추기 위해 많은 부담을 짊어지고 있다는 것을.
또 닉스가 자유롭다 느끼는 라케시스나 클로토가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것도 공작가가 있기 때문이며, 그를 지키기 위한 일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말했다.
“ …물론 지금이야 예전보다 나아졌지만, 그렇다 해서 그 마음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부담감을 느끼는 것이 꼭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나는 생각한단다. ”
“ 정말로요…? ”
“ 그럼. 부담감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공작가를 이을 자격이 있는 거란다. 그러니 부담을 갖지 말라는 소리는 차마 못 하겠다만, 그 때문에 자신감을 잃을 필요는 없을 거다. 어찌보면 공작으로서 갖춰야할 덕목을 이미 갖춘 셈이니까. ”
부담감이 덕목이라. 닉스는 그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놀란 기색을 가라앉힌 뒤에도 몇 번이고 입에 되뇌었다.
여전히 어딘가 겁먹은 빛이 엿보이는 눈을 하고 있었지만, 제법 의젓해 보이는 표정을 하고 있어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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