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1화 〉 시간은 흐른다 #1
* * *
“ 오늘 훈련은 여기까지 하자. 씻고 나서 좀 쉬렴. ”
따뜻한 기운이 녹아드는 봄바람을 맞는 아침.
연무장 한복판에 서 있는 헬레나의 무덤덤한 눈길이, 바로 자기 발 앞에 무릎 꿇고 가쁜 숨을 토해내는 아이를 향했다.
올해 열 셋이 될 예정인 아이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몸이 제법 탄탄했으나, 나이에 맞는 앳된 티가 얼굴에 훤히 드러나고 있었다.
“ 예… 감사합니다. ”
“ 그래. 다친 곳엔 약을 발라 두고, 굳이 숨기지 말고 몸 상하지 않게 조심하렴. 부끄러운 일이 아니니까. ”
아이, 닉스는 얼굴에 들러붙은 머리칼을 쓸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스스로 부탁해서 아침마다 헬레나와 검을 맞대기 시작한 지도 대략 이년이 되었지만, 지금도 저 가녀린 등에서 나오는 힘과 빠르기의 정도가 높은지 알 수가 없었다.
“ 하아아……. ”
털썩. 닉스는 욱신거리는 몸 곳곳이 목검에 맞아 욱신거리는 것을 느끼면서도, 힘이 빠진 나머지 연무장 바닥에 드러누웠다.
목검에 얻어맞은 몸이 욱신거리는 거야 적응이 되었기에 견딜 만 했지만, 지금 당장 누워 숨을 고르지 않으면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았기에.
“ 헬레나는 오늘도 여전했던 모양이구나. ”
그러다 문득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오자, 닉스가 몸을 번쩍 들어 앞을 쳐다봤다.
그렇게 해야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시선이 연무장 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남자, 지온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 아버지…! ”
“ 벌떡 일어나는 걸 보니 기운이 영 없지는 않은 모양이구나. ”
지온은 입꼬리를 슬쩍 들어 올리며 주인을 반기는 개처럼 자신을 반기는 닉스에게 다가가, 주머니에 준비해 두었던 약병을 꺼내들었다.
헬레나와 훈련을 할 때면 반드시 다칠 수밖에 없다는 것을 하인들이 미리 알고 준비해 둔 물건이었다.
처음에는 멍이 든 닉스의 모습을 보고 저택 사람들이 무척 놀랐었으나, 훈련이 훈련다워야 한다는 헬레나의 생각을 듣고 진정되는 일도 있었다.
생각해 보면 늘 목을 메는 지온과 대련을 할 때도 거침없이 검을 휘둘렀으니…….
“ 굳이 아버지께서 이렇게 하시지 않아도 하인들이 해 줄 텐데……. ”
“ 아버지로서 내 아이를 돌보는데 뭐가 문제가 되겠느냐. ”
닉스는 옆에 앉아 손수 멍든 부위에 약을 발라주는 지온을 흔들리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본래 공작가를 모시던 자작가 출신이라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가 보고 들었던 귀족과는 몹시 동떨어진 모습을 보일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던 탓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온이 싫다는 뜻은 아니었다. 오히려 동떨어져 있기 때문에 좋다고 생각했다.
“ 찝찝하겠지만 멍든 몸에 막 약을 발랐으니 씻을 수가 없을 노릇이지. 다행히 헬레나가 정도를 많이 조절했으니, 삼십분 정도만 참으면 되겠구나. ”
아이에게 너무 편하게 말을 거는 것도 위엄이 떨어진다 하여 말투를 바꾼 지도 몇 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어색하기만 하다.
지온은 그리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몹시 자연스럽게 여느 귀족들이 쓸 법한 말투로 대화를 이어 나갔다.
“ 배울 것이 많으니 아무래도 싫증이 나지? ”
“ 싫증이라뇨.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공작가의 사람으로서 보고 익히는 것이 당연한 것을요. ”
“ 정말로…? ”
닉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 지온의 눈을 빤히 바라보다, 결국 고개를 숙인 채 작은 목소리로 사실은 썩… 이라고 답했다.
기다렸다는 듯 정형화된 답을 내놓을 때 까지는 좋았지만, 가만히 바라보며 진심을 묻는 압박에 견디지 못한 결과였다.
그래서 귀족으로서 나약하구나. 그래서는 안 된다며 꾸중을 들을 줄 알았는데,
“ 그럴 수 있지. 보통 너 정도 나이에 배우는 것을 좋아하는 이는 그리 없으니까. ”
꾸중은커녕 그럴 수 있다고 시원스레 말하는 지온을 보자, 되려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 어… 그런가요? ”
“ 물론 환경에 따라 다르고, 사람의 기질에 따라 다르니 딱 잘라 말은 못 하겠다만, 대체로 그렇다고 나는 생각한단다. ”
하지만, 그럼에도 필요하다는 것을 알기에 배울 수밖에 없다고 지온은 말했다.
그저 해야 한다, 가 아니라 최대한 구체적인 사례를 덧붙여서.
어린 닉스로서는 그 말에 담긴 무게가 얼마나 큰 지 짐작할 수 없었지만, 그를 말하는 아비의 눈빛이 진지했다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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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고, 피곤해……. ”
늘 그렇듯 훈련부터 공작령의 행정, 그 외에도 지온에게서 자질구레한 일까지 배우느라 해가 다 저물어버린 후.
닉스는 노인처럼 앓는 소리를 내며 자기 방 침대에 몸을 던졌다.
헬레나를 닮아 머리가 제법 좋았기에 이해하기 어렵지는 않았으나 종류가 워낙 많다보니 피곤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주말에는 푹 쉬게 해주고, 잠들기 전까지 밀어붙이지는 않으니 다행이긴 하다.
닉스는 지금 같은 평일 저녁시간, 그리고 주말에 찾아오는 자유시간이 얼마나 달달하고 감사한지를 새삼 느꼈다.
“ 뭘 그렇게 앓는 소리를 내? 노인네도 아니고. 그리고 옷은 좀 벗어. 침대 더러워지잖아. ”
본래 공작의 아들이기도 한 닉스의 방에 스스럼없이 들어오는 것은 처벌을 해야 할 만큼 커다란 무례일 테지만, 그에 해당하지 않는 이도 있었다.
예를 들면 닉스의 방에 허락도 없이 들어와 잔소리를 내뱉는 다크엘프 소녀 라케시스처럼.
“ 그래야지……. ”
닉스는 성큼성큼 다가와 잔소리를 해대는 소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급히 몸을 일으킨 뒤 시키는 대로 옷을 갈아입었다.
대련을 하고 나서 깨끗이 씻고, 그 후에는 집 안에서 머물며 땀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기에 곧장 잠옷 차림이었다.
“ 그나저나 언제 온 거야? 블루네일 근처까지 갔다 오는 거 아니었어? ”
“ 방금 왔지, 방금. 그래서 좀 피곤하긴 해. ”
호위로서 알트람 상단을 긴 일정 동안 따라갔다 온 것이 피곤했으나 그만큼 즐거웠다고 라케시스가 말하자, 닉스가 부럽다는 듯 눈을 흘겼다.
넓다고는 하나 여태껏 공작령 안에서 생활한 탓에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 부럽다. 나도 공작령 바깥으로 나가보고 싶은데……. ”
“ 넌 아직 멀었으니까 못 내보내는 거시겠지… 라고 말하고 싶긴 한데, 경우가 다르니까 그렇지. ”
라케시스가 닉스를 위로하는 듯 놀리자, 닉스는 한숨을 길게 내뿜으며 침대 위로 벌렁 드러누웠다.
원래부터 저런 성격인 것을 알고, 고칠 수도 없어 지금처럼 일찍이 포기하는 편이 좋다고 경험으로 깨달은 덕이다.
“ 그래… 그렇겠지. 나는 공작의 아들이니까. ”
헬레나의 유일한 자식이자 대를 이을 사람이니 귀하게 여기는 것도 당연하며, 닉스 또한 그런 분위기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자유롭게 공작령 바깥으로 나가는 배다른 형제를 볼 때 마다 가슴이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한들 마음의 정리가 잘 되지 않는데다, 처지가 바뀌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라케시스는 머리가 복잡한 탓에 점점 생기가 가라앉아가는 닉스의 표정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어이없다는 듯이 물었다.
“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인데? ”
“ 응? 뭐가? ”
“ 표정이 썩었잖아. 또 무슨 일인데 그러냐고. ”
라케시스는 남자 주제에, 라는 순간적으로 뇌리를 스친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은 채 더운 숨을 뿜어내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 저택 안에서는 배다른 가족으로서 허물없이 대할 수 있었기에 거침없이 말할 만도 했건만, 지금처럼 자기만의 선을 지켰다.
닉스는 그 배려를 아는지 모르는지, 동년배의 친구이자 형제이기도 한 라케시스에게 자기 고민을 털어놓았다.
“ 그냥… 어머니가 나를 사랑하는지 아닌지 애매해서. 보통 귀부인이 자식을 낳으면 끔찍하게 아낀다는데… 우리 어머니는 그런 기색이 잘 없으시니까. ”
만약 다 큰 어른이 나를 사랑하는지 아닌지 물었다면 애냐는 핀잔이 들어올 만도 했지만, 닉스는 엄연한 아이였기에 그럴 일이 없었다.
더구나 그 이야기를 듣고 있는 라케시스 또한 아이이기에 짐작가는 바가 아예 없지는 않았는지, 인상을 풀고 고개를 끄덕였다.
“ 공작님? 하긴 그런 측면이 없지는 않으시니. 늘 대공… 아버지가 우선이신 분이니까. ”
“ 너도 그렇게 생각해? ”
“ 나 말고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한둘이겠어? 근데, 그렇다고 해서 널 사랑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예라고 답하기도 뭣하다? ”
“ …그건 또 무슨 소리야? ”
라케시스가 내뱉는 말에 흥미가 생긴 듯, 닉스가 눈을 반짝이며 몸을 일으켰다.
무기력했던 기색도 사라져 있어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아이처럼 보였다.
“ 아니, 생각을 해 봐. 공작님이 딱 네 나이 즈음에 어떠셨는지. 이미 서류작업도 어른만큼 하실 줄 아셨던 데다, 진즉에 검에서 오러를 뽑으신 것도 모자라 중앙기사단과 검을 겨룰 수도 있으셨잖아. ”
“ 그야… 그렇지. ”
“ 그래도 그런 분이 네가 오러를 못 뽑는다고, 혹은 서류작업이 서툴다고 뭐라고 하신 적이 있어? 아니면 뭐 다른 교양이 모자라다 한 적은? ”
닉스는 새삼 헬레나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깨닫고 다시 고개가 꺾일 뻔했으나, 라케시스가 급히 덧붙이듯 내뱉은 말을 들으며 꺾이지 않을 수 있었다. 생각해보니 구구절절 옳은 말뿐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헬레나는 여전히 지온과 함께 있으면 여느 귀족 영애처럼 아양을 떨고, 그 외에는 부드럽되 침착한 모습으로 선을 긋는 듯한 느낌이 있기는 하다.
아들인 닉스조차 그렇게 느끼고 있으니 더 말할 필요가 뭐가 있을까.
하지만. 라케시스가 이야기한 대로 헬레나가 자신을 채근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 …없었지. ”
“ 그래, 없었지. 거기다 뭐라고 하셨어? 사람마다 능숙한 분야가 다르고 익히는 속도도 천차만별이니 조급해 하지 말라고 하셨지? 나도 엄마한테 들은 이야기라 잘은 모르지만, 그랬었지? ”
“ …그랬어. ”
“ 거 봐. 그렇게 차분하게 기다려 주는 것이 공작님의 사랑이지. 그분이 당연하게 할 수 있었던 걸 아들인 네가 못하면 답답할 만도 하실 텐데, 전혀 그런 기색이 안 보이잖아. 대공… 아버지야 원래 따뜻하신 분이니 넘기고. ”
복 터진 놈. 라케시스의 눈에는 풀죽어 있는 장남이 어이없게 보이면서도, 그럴 수도 있겠거니 하는 생각을 했다.
자기가 봐도 헬레나와 지온의 모습이 보통 귀족 가정과 사뭇 달랐으니까.
본디 엄격하고 묵직해야 할 것이 가문을 이끄는 남자이며, 부드럽게 감싸는 것이 귀족 여인의 소양이다.
때때로 허영이 가득해 아이를 몰아붙이는 여인들 또한 있었지만, 그것과 가장이 보일 법한 무뚝뚝함은 다른 문제였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헬레나가 아이에게 무뚝뚝하고, 지온이 어미처럼 친절하고 부드러우니 혼란스러울 밖에.
거기다 사정을 아는 사람이면 헬레나가 아이에게 썩 정이 없다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자신 있게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었다.
지온이 과거 헬레나가 어떤 마음으로 살았는지 언급하며, 상처를 줘서는 안 된다는 말을 듣고 깨달은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단지 그렇다 하더라도 대륙에 사는 여느 어머니처럼 아이를 가장 우선하지 않으며 살가움이 부족하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안타깝게도.
“ 그리고, 바깥에 나가고 싶으면 아버지에게 말씀을 드려서 설득을 해. 그게 제일 빠른 건 너도 알지? 우리 말도 잘 들어주시는 분이니까. ”
“ 그건 맞지. ”
헬레나에게 직접 말하면 거절당할 여지가 제법 많으나, 지온이 헬레나를 설득하면 무조건 통한다.
닉스는 어린아이이기에 가질 수 있는 감으로 이 저택 내에서 누가 가장 실세인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기에, 별 말 없이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이 아니라 그 배우자인 대공이 실세라는 점이 묘하기도 했지만, 하루 이틀 일도 아니었고.
라케시스는 닉스의 낯빛을 보며 이제 되었다는 생각과 함께, 다른
“ 그래. 그럼 이 이야기는 이쯤 하자. 클로토는 그동안 뭐 하고 지냈어? ”
“ 클로토? 늘 똑같지 뭐. 수도원에 들르면서 신성력을 마법에 연결시킬 수 있을지 없을지……. ”
“ 아… 이브 님의 핏줄이라 그런지 변함이 없네. ”
마지막 배다른 자매가 별 다를 바 없이 지내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라케시스의 입술에서 허탈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 어머니에 그 딸이라고, 건강히 잘 지내는 건 좋지만 매일같이 수도원에 들르는 모습을 상상하니 어이가 없었던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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