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0화 〉 나도 ... 하고 싶어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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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아이를 임신하고 나서부터는 잘 참아낸다 싶었더니, 결국 이브에게 졸라 임신 중에도 몸을 섞을 방법을 얻어내고 말았다.
매일같이 해대다 갑자기 끊으니 힘들 것이라는 생각은 했었는데,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나는 속으로 한숨 쉬며, 침대 위에 누운 헬레나와 그를 덮치듯 위에 올라 있는 이브를 멍한 눈으로 응시했다.
“ 제법 따끔… 화끈한 느낌이 드실 거에요. 놀라지 마시고 견뎌내셔야 해요. ”
“ 고마워. 그래도 검에 깊게 찔리는 것보다야 덜하겠지. ”
헬레나는 과거 헬릭스 백작과 싸웠을 때를 입에 담으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본의 아니게 통증에 익숙한 삶을 살았기에 종종 이렇게 대범한 모습을 보이곤 했는데 늘 새롭게 놀라웠다.
아무래도 대범한 여자라는 것이 허구 속에서나 쉽게 찾아 볼 수 있지, 현실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 으음……. ”
헬레나의 신음소리에 뒤이어 찌익, 하고 살갗 찢어지는 소리가 귀에 들린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살갗을 조금 긋는다 한들 찢어지는 소리가 들릴 리가 없을 테지만, 붉은 실선을 그리는 이브의 손끝을 유심히 보고 있었던 탓에.
엷고 붉은 실선이 길면 길어질수록, 모양이 뚜렷해질수록 헬레나가 신음소리를 흘렸고, 이브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은 많아져만 갔다.
마치 VIP 수술을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으니 그럴 수밖에 없겠거니 싶었다.
한 침대 위에서 헐벗은 몸을 드러낼 만큼 사이가 좋아진다 한들 공작과 공작가에 몸 담은 마법사라는 거리를 좁힐 수가 없었을 테니.
“ 괜찮으세요…? 혹시 크게 불편하시면……. ”
“ 아냐. 괜찮아. 잘 하고 있어. 그러니까 너무 긴장하지 마. ”
이브는 눈을 감은 채 신음하던 헬레나를 향해 걱정스럽다는 듯 바라보다, 곧 헬레나의 아랫배로 시선을 떨구었다.
아주 약간 떨리고 있던 손은 석고상처럼 딱딱하게 굳어 흔들림이 없었고, 눈빛에도 흔들림이 사라져 있어 차가워 보일 지경이었다.
“ …다 끝났습니다. 적어도 오늘 하루는 약초를 바르면서 상처를 보살피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
이브가 긴 숨을 토해내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는 동안, 눈을 뜬 헬레나가 몸을 살짝 일으켜 문양이 새겨진 아랫배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피가 흐르고 약간 번져 있어 정확한 모양을 알긴 힘들었지만, 테두리가 삼중으로 그려진 원 모양처럼 보였다.
심지어 그 원이 단순한 선이 아니라 기하학적 모양을 짜내 그려졌기에, 자세히 보면 몹시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잠시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곧 침대에 걸터앉아 헬레나의 상처에 묻은 피를 닦아내기 시작했다.
본래 이런 수발은 하인이 해야 한다고 생각할 법도 했으나, 굳이 하인을 시켜야 하냐는 생각과, 하인이 있을 경우 난리가 날 것이 분명했기에 이브와 헬레나, 나밖에 없었다.
“ 으음… 그래. 고마워. 뭔가 보답을 하고 싶으니 필요한 재료나 물건이 있다면 생각해 봐. ”
“ 보답이라뇨…? 지금 받는 지원만으로도 충분하고도 넘치니까 더 바랄 것도 없는 걸요……. ”
“ 그것과 이건 다르게 봐야지. 네가 마른 침을 삼키는 소리가 내 귀에 또렷이 들릴 지경이었는데, 그냥 넘어갈 수가 있을까. 지금 정 생각이 안 나면 나중에라도 말을 해 줘. ”
“ 아… 감사합니다. 마법식은 잘 자리 잡은 것 같으니까, 마나만 흘리면 곧바로 쓰실 수 있을 거에요. ”
이브는 헬레나의 호의를 차마 거절할 수 없었는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누가 봐도 고생을 한 것이 맞고, 그만큼 부담감도 심했을 테니 지원과 별개로 상을 받는 것이 맞았다. 더구나 연구를 하느라 바쁜 몸이기도 했고.
그러니 부담을 가질 필요가 없다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본인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 저… 그러면 이만 물러나 봐도 될까요? ”
“ 그래. 고생했어. 들어가서 좀 쉬어 둬. 한창 연구 중에 방해해서 미안해. ”
나는 헬레나가 침대 위에 누운 채 이브를 배웅하는 동안, 고생 많았다는 한 마디를 던진 뒤 곧장 서랍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미리 상처가 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준비해 두었던 초록색 진액이 담긴 작은 유리병을 들고 오기 위해서였다.
얼핏 풀죽과도 비슷해 보일 만큼 끈기가 있었고, 실제로 손가락에 찍어서 발라보면 그보다 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갯벌에 깔린 흙을 찍어 펴 바르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말이 나오더라도 과장이 아니었다.
“ 그렇게 못 참을 것 같았어? ”
“ 응. 지금까지 참은 시간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인데, 훨씬 더 긴 시간을 참는 건 정말 지옥 같아서……. ”
약을 바르기 전 헬레나에게 물었더니 저도 모르게 쓴웃음이 배어나오는 답이 돌아왔다.
몹시 과장되었다는 느낌도 없잖아 있었으나, 헬레나라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이 또 무서웠다.
아무튼, 지옥이라.
나는 눈을 게슴츠레 뜬 채 쑥스러운 듯 변명하는 헬레나의 목소리를 들으며, 아랫배에 약을 골고루 펴 발랐다.
문양 자체는 원이 세 개 겹쳐서 그려진 형태라 밋밋하기까지 하지만, 부위가 부위인지라 묘한 느낌이 들었다.
가령 원이 아니라 하트 모양 같은 것이었다면 빼도 박도 못 하고 음문처럼 보였겠지.
“ 몇 달이라는 시간이… 길기는 길지. ”
“ 길고말고! ”
헬레나는 내가 중얼거린 소리가 마음에 들었는지 저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내며 눈을 부릅떴다.
덕분에 저도 모르게 쫄아버린 나머지, 약을 바르는 손가락이 미끄러져 매끈한 아랫배를 시원하게 가로지를 뻔했다.
그나마 가로라서 망정이지, 세로였다면 바로 엄한 꼴을 볼 뻔했다.
“ 전에 지온이 수인국에 떠났을 때도 미칠 지경이었지만, 그 때는 상황도 상황이라 어쩔 수 없다는 마음으로 버틸 수 있었어. 정말 위험한 상황이었으니까. 하지만 아이를 갖는 건 그 정도로 위험한 일이 아니잖아. 그렇지? ”
누군가에게 아이를 갖고 품는 일은 전쟁보다 더한 일임에 분명하겠지만, 헬레나에게는 아닌 모양이다.
물론 객관적으로 봤을 때에도 수많은 목숨이 오고가는 전쟁을 아이의 목숨 하나와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시원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기가 묘했다.
“ …그렇긴 하지. ”
“ 그렇다니까. 거기다 한 번 그런 일을 겪어서 그런지, 또 비슷한 일을 겪는다 생각하니까 무서울 지경이었는걸. ”
“ 정말 못 말리겠다. ”
나는 단순히 쾌락에 찌들어 내뱉은 것이 아니라 그만큼 사랑에 굶주린 탓에 저런 말을 하는 거구나 싶었다.
아마 다른 사람이, 예를 들어 이스가 이런 말을 들었다면 그럴 수 있겠거니 싶으면서도 내심 큰 충격을 받았겠지.
그래도 나는 그 다른 사림이 아니었기에, 피식 웃으며 헬레나의 배꼽 부근을 쓸어주며 말했다.
“ 많이 늦은 것 같지만, 그 때 마음고생 시켜서 미안해. ”
“ 미안할 것 까지는 없지만… 그래도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
헬레나는 내 손길이 기분 좋았는지, 애처럼 헤헤 웃으며 눈을 감았다. 마치 사람의 손길을 받고 즐거워하는 강아지를 보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눈을 흘기며 입술을 여는 몸짓과 표정은 결코 아이의 그것이 아니었다.
“ 저기… 한 번만 넣어주면 안 돼? 살살하면 피도 안 나고, 효과도 확인 할 겸 지온이 위에서 움직여 주기만 하면……. ”
“ 안 돼. 오늘 못 참으면 며칠 동안 안해 줄 거야. ”
“ …히잉. ”
그 탓에 유혹을 뿌리치기가 참 힘들었지만 어찌어찌 잘 이겨낼 수 있었다. 자칫 잘못했으면 그대로 넘어갈 뻔했던 순간이 몇 번 있었지만, 어떻게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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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다. 오늘도 이브는 두 접시에 떠오른 파형을 나란히 응시하며 짙은 한숨을 내뱉었다.
지온의 파형을 기준으로 엘렌의 파형을 바꾸려 손을 대 봤지만, 모양이 비틀리거나 파형을 구성하는 계산식의 위치가 바뀌는 등 오류가 끊이질 않았다.
마치 조각을 한 번 잘못된 곳에 두면 완성되지 않는 그림 퍼즐을 보는 것만 같았다.
“ 도저히… 풀릴 기미가 없어 보여? ”
이브가 파형 변형을 연구하며 시간을 보낸 지도 몇 개월.
그 사이 헬레나의 배는 부풀대로 부풀어 올라 완연한 임산부의 곡선을 그리고 있었으나, 연구만큼은 진전이 없었다.
직접 연구를 하는 입장에서도 답답했지만, 그를 지켜보는 엘렌 또한 답답함과 동시에 안타까움, 그리고 미안한 감정을 실어 물었다.
“ …지금까지는요. ”
후우. 이브는 입으로 짧은 숨을 내쉬고 뱉으며 호흡을 고른 뒤, 뒤쪽 테이블 근처에 앉아 있던 엘렌에게 시선을 돌렸다.
“ 이런 말씀을 드려 죄송하지만… 좀처럼 진도가 나가질 않아요. 대공님의 파형이 생각보다 너무 어려워서 따라하려다 비틀리기만 하네요. ”
“ 늙지 않는 마법식을 만들었을 때 보다? ”
“ 네. 그 때에는 규모가 컸을지언정 조금씩이나마 나간다는 느낌이 있었지만, 지금은 제자리에서 한 발도 떨어뜨리지 못한다는 느낌이에요. 저도 그 때 보다 좀 더 나아졌다고 생각하는데……. ”
그 때 연구했을 때보다 아는 것이나 계산 능력, 마법적 능력도 훨씬 나아졌으나, 그럼에도 앞이 깜깜해 보이지 않는 것이 답답하기만 하다.
이브는 그에 도전의식과 동시에 절망감을 느끼며, 볼 낯이 없다는 듯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순전히 이브 혼자서 정하고 연구한 주제라면 몇 년이 걸린들 실망하지 않고 즐겁고 느긋하게 연구했을 테지만, 엘렌을 위해서라 초조해 질 수밖에 없었다.
엘렌도 그 마음을 잘 알았기에, 겨우겨우 힘겹게 한 마디 했다.
“ 미안해. 이렇게 힘들 줄 몰랐어. 지금까지 고생한 네겐 미안하지만 지금이라도……. ”
“ 안 그만둬요. ”
세상에. 엘렌은 드물게 단호한 어조를 한 것도 놀랍지만, 자기 말을 끊고 눈을 반짝이는 이브를 보며 속으로 놀라워했다.
적어도 엘렌이 아는 한, 이브가 말을 잘라버릴 만큼 단호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 언니도 대공님의 아이를 갖고 싶으시잖아요. 그걸 포기하시면 앞으로 얼마나 힘들게 살아가실지 제 눈에도 보이는데, 어떻게 포기를 하겠어요. ”
“ 이브……. ”
“ 설령 헛물만 켜다, 희망고문만 당하다 끝나버린다 하더라도… 제 목숨이 붙어있는 한 포기하고 싶지는 않아요. 옛날에 했었던, 마탑의 마법사 분들이 정말 되냐고, 망상이냐고 짙은 의구심을 품었던 연구도 마찬가지였고요. ”
그래. 생각해보면 그랬지.
이브는 떠오르는 대로 말을 뱉어내면서도, 한 때는 그랬었지 하는 마음에 달아올랐던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과거 마탑에 있을 때 빠져들었던 입자 마법에 관한 연구에 몇 년이라는 시간을 들였으나 성과가 없었던 날들.
그럼에도 포기 않고 계속 자리를 지키다 보니 지온을 만났고, 그 만남을 통해 원하던 답을 얻을 수 있었던 과거가 빠르게 이브의 뇌리를 스쳐 지났다.
“ …생각해보면, 그 때는 몇 년을 들여도 성과가 없었던 시절이었어요. 그러니 아직 포기할 때가 더더욱 아니라고 봐요. ”
엘렌은 이브의 희망 넘치는 목소리를 들으며 약해진 마음을 다잡고,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계속 폐 끼칠 것 같아서. ”
“ 네. 마음껏 폐 끼치세요. 저는 괜찮으니까. ”
“ 응. 그래도… 만약 내가 인간이었다면 이런 고민을 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 ”
“ 네…? 인간이었다면…? ”
“ 어…? 그렇지. 인간이었다면 이브가 이렇게 고생을 할 일도 없이, 바로 원하는 시기에 맞춰 씨를 품으면 되었을 테니까……. ”
이브가 갑자기 인간이라는 말을 곱씹으며 생각에 잠긴 것이 이상하게 보였으나, 엘렌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순순히 질문에 답했다.
몸에 이상이 생긴 것이 아니라 아무리 봐도 생각에 잠긴 듯한 기색이었던 탓이다.
꿀꺽.
엘렌이 마른 침을 삼키며 무서운 침묵을 견디던 중에도, 이브의 머릿속엔 인간이라는 단어가 계속 맴돌았다.
인간과 다크엘프.
본래 엘렌은 다크엘프이며, 그래서 인간과 관계를 한들 아이를 만들 수가 없다.
그래서 마나의 파장을 강제로 맞춰 씨와 씨를 섞을 예정이다. 종족을 바꿀 수도 없을 노릇이기 때문이다.
“ 인간이었다면……. ”
엘렌이 인간이었다면. 혹은… 지온이 다크엘프였다면.
그런 생각을 한 순간, 이브의 눈빛이 강렬하게 반짝이기 시작했다. 반짝이다 못해 눈이 멀 정도로 빛나고 있다는 착각마저 들 만큼.
“ 내가 왜 이 생각을 못했지. ”
지온의 몸에 손을 대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에 자연스레 엘렌의 몸을 어떻게 주물러야 한다는 결론만 내렸고, 거기에 따라 연구만 하고 있었다.
파장을 맞추려 한다면 그 반대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왜 몰랐는지.
이브는 새롭게 떠올린 생각에 희열을 느끼는 한 편, 그를 바탕으로 동시에 파장을 조율하고자 하는 결론에 다다랐다.
“ 파장은 부딪치면 흔들리는 거고, 그러면 굳이 고정할 게 아니라 부딪쳐서 모양을 갖게 만들면……. ”
그 또한 쉽지 않은 일임에는 분명했으나, 한쪽 파장을 다른 쪽 파장에 맞춰 손보는 것보다 훨씬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이브는 본능적으로 그를 느끼고, 과감하게 연구 방향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예고 없이 불연 듯 찾아온 직감에 따르는 행위가 위험할 수도 있겠지만, 생각지도 못한 답을 이끌어 낸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언니. ”
“ 으… 으응? 왜 그래? ”
엘렌은 이브의 부름이 갑작스러웠던 나머지 당황하여 물었으나, 이브는 그에 아랑곳 않고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 앞으로도 많이 도와주세요. 답을 찾을 때 까지요. ”
그리고, 그 후로 1년하고도 조금.
이브는 마침내 답을 찾아냈고, 그 답을 실현함으로써 두 여자가 원하는 바를 이뤄낼 수 있었다.
이브 자신과 엘렌의 임신 소식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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