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7화 〉 나도 ... 하고 싶어 #1
* * *
“ 내 입장에서 보면 한 방울도 남기고 싶지 않고, 그래서도 안 되겠지만… 사정이 그렇다니 어쩔 수 없지. ”
“ 네……. 감사합니다. ”
사람들 대다수가 눈을 붙이고 잠드는 새벽 시간.
이브와 헬레나는 엘렌을 옆에 낀 채 잠 든 지온을 사이에 두고 작은 소리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 와중 불편한 기색이 역력한 헬레나의 표정 탓에 이브가 마른 침을 꿀꺽 삼키기도 했으나, 사정을 잘 설명한 덕에 잘 넘어갈 수 있었다.
아이가 없다는 것을 핑계 삼아 더 큰 사랑을 노려볼 법도 한데, 굳이 그러지 않고 아이를 갖길 원한다니.
곧 가지게 될 아이에 대한 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나, 여전히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진 헬레나로서는 공감이 잘 가질 않았다.
않았지만, 아이를 품고 싶어 하는 마음은 이해가 가기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 역시 공작님이야. 아마 대를 이어야 하는 의무만 없었다면, 하는 생각을 지금도 안 버리신 모양이네. ”
그 후로 몇 시간. 엘렌은 이브의 방에서 기절해 있던 동안 있었던 일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헬레나가 가장 강한 집착을 보여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보니,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 공작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
“ 이브가 잠자리에 들어오기 전엔 자주 그런 말씀을 하셨지. 그래서 대공님이 은근히 마음을 돌리시느라 고생 좀 하셨어. ”
“ 아… 그런 일도 있었어요? ”
이브가 잠자리에 섞이기 시작한 시기가 올해부터이나, 엘렌은 몇 년 전부터 헬레나와 함께 헬레나와 같은 침대에 오른 여자다.
그러니 이브가 모르는 이야기도 아는 것이 당연했다. 지금 같은 이야기도 그 중 하나였고.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브의 가슴에 차가운 바람이 부느냐 묻는다면, 그건 아니라고 답할 수 있었다.
애초에 모든 것이 늦되기도 한데다, 결국 한 남자를 섬기는 테두리 안에 섞여 나름대로 행복하게 지내고 있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엘렌은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브의 침대에 걸터앉은 채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 있었지. 나도 공작님만큼 대공님에 대한 집착이 심하다 알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 말을 들으니 나보다 훨씬 심각하구나 싶었지. 아이를 배에 품고 지내야 하는 몇 달, 그리고 아이를 기르는 몇 년이 거슬린다고. ”
“ 그, 이렇게 말하면 무척 무례하다는 건 알지만… 공작님다우신 답인 것 같아요. ”
“ 나도 그렇게 생각은 해. 원래부터 대공님을 가장 우선하시는 분이니까. 물론 그 와중에도 어느 정도 주위를 보실 줄 아는 분이기에 내 도박도 성공한 셈이긴 한데… 지금 생각하니 아찔하다. ”
엘렌이 과거 헬레나와 독대하고 앉아 강하게 협박했던 과거를 떠올리며 쓰게 웃자, 이브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음 같아서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물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입을 다문 채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곤, 시험관 거치대에 꽂아 두었던, 하얀색 액체가 가득 찬 얇은 관 하나를 집었다.
“ 그게 대공님의 씨앗이지? ”
“ 네. 그리고 제 앞에 둔 접시에 깔아둔 게 언니의 아랫배 쪽에서 추출한 피고요. ”
이브는 책상 위에 올려 둔 오른손으로 붉은 피가 얼룩처럼 담긴 접시를 가리키며, 반대쪽 손에 든 시험관에 든 액체를 다른 빈 접시에 몇 방울 떨어뜨렸다.
각 접시 아래에는 마법진이 새겨진 나무판이 접시 받침대처럼 깔려 있었다.
지온의 몸에서 뽑은 액체와 엘렌의 피에서 보이는 각 생명의 파형을 알아보기 위한 마법진이었다.
“ 그 두 개로 뭘 어떻게 하려고? ”
“ 대공님께 들은 이야기인데, 여자의 몸에는 아이를 만들기 위한 씨앗이 대략 달에 한 번 정도 만들어진다고 해요. 저는 여자의 몸 속에 남자의 씨앗을 넣으면 확률에 따라 아이를 가질 수 있다고만 알고 있었는데……. ”
아무튼, 그 이야기를 듣고 감이 조금 오더라고요.
이브는 각 접시에서 시선을 떨어뜨리지 않은 채 답하며, 마법진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마법진은 지온이나 기사들이 뽑아내는 오러에서 착안점을 얻어 개발한 것으로, 그 기간이 짧으나 제법 정확하다 자부했다.
마나심법을 갈고 닦는 동안 한 사람 한 사람 몸에 품은 마나의 성질이 미묘하게 다르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덕이다.
화르륵! 마법진이 제대로 작동되는 순간, 마치 푸른 불 같은 마나가 솟아오르며 소용돌이처럼 접시 주위를 싸고돌기 시작했다.
그 탓에 순간 불이 붙는 것 같은 광경을 본 엘렌이 화들짝 놀라 물의 정령을 꺼내 들었다.
곧장 불이 아니라 단순한 마나임을 깨닫고 정령을 거두는 우스꽝스러운 일이 벌어지기도 했으나, 접시 위에 둔 이브의 시선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 으음……. ”
복잡하다. 이브는 접시 위에 떠오른 입체적이면서도 복잡한 원형을 보며 낮게 신음했다.
최대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설계한 마법이기에 어느 정도 복잡할 수도 있다 예상은 했지만, 그 예상보다 훨씬 더했던 탓이다.
“ 혹시… 마법이 실패한 거야? ”
엘렌의 지식으로는 마법이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 판단할 수가 없으나, 표정에 그늘이 드리운 이브를 보고 영 좋지만은 않다는 것 정도는 알 수는 있었다.
다행히 마법 자체가 실패한 것이 아니라 알고 있는 이브가 금세 고개를 저으며 성공했다고 말해 준 덕에 분위가가 영 무겁지만은 않았다.
“ 다행히… 제가 만든 마법 자체가 성공하기는 했어요. 단지, 성공했기에 답답하다는 걸 알았어요. ”
“ 성공해서 답답하다는 건……. ”
엘렌은 말을 잇다 말고, 각 접시와 그 위에 떠오른 입체 도형을 번갈아 응시했다.
양쪽 다 동그란 원을 테두리 삼고 있는 것은 같았으나 척 보기에도 다른 점을 찾아낼 수 있을 만큼 안이 달랐다.
한 쪽 접시에 떠오른 도형은 면 없이 선만 남은 공이라 할 수 있을 안에 입체적인 오각형이라면, 다른 쪽 접시가 그보다 몇 배나 복잡한 도형을 그리며 돌고 있는 탓이다.
“ …그 느낌이 단순한 착각이 아니었다는 걸까. ”
이브는 엘렌이 살짝 입을 벌리며 놀라워하는 동안, 하얀 액체 위에 떠오른 복잡한 도형을 보며 눈을 날카롭게 치떴다.
평소에 수줍어하는 모습만 보여주는 편이라 그런지, 보는 사람이 어색할 정도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엘렌이 워낙 크게 놀라 시원하게 넘어가고 그쳤지만, 알아챘다면 그 이유를 꼬치꼬치 캐물었으리라.
“ 생각보다 대공님의 파장이 너무 복잡해요. 맞추려면…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아요. ”
엘렌과 지온은 종이 다르기에 아이를 가질 수 없지만, 강제로 마나의 파장을 맞추면 결과가 달라질 지도 모른다.
이브는 그렇게 가정했기에 이 마법을 개발했고, 또 진행하고 있으나… 생각보다 벽이 높았던 탓에 고개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아주, 아주 잠깐.
“ 그래도… 해야겠죠. 언니에게 신세진 걸 갚기 위해서라도. ”
“ 잘 모르겠지만… 정말 괜찮겠어? 혹시 너무 힘들면 안 해도 괜찮아. 내 욕심 차리자고 혹사시킬 수는 없을 노릇이니까. ”
이브가 의지를 다지며 말하니, 엘렌이 이브에게 다가와 걱정스러운 투로 말했다.
표정에도 미안한 기색이 가득 묻어 있어 지금만 넘기고 말자는 식의 기만이 아니라 진심임을 알 수 있었다.
“ 혹사라니요. 아니에요. 제 개인적인 사정을 빼고 마법사로서만 봐도 연구할 만한 가치가 충분해 보이는걸요. 그러니 미안해하지 마세요. ”
더욱이, 이브는 이 도형 때문에 서클 마법을 더욱 갈고 닦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굳게 믿었다.
기사들이 말하는 깨달음이 높아질수록 보지 못하던 것을 보고 반응할 수 있듯, 마법에 있어 근본이라 할 수 있을 깨달음이 더욱 깊어져야한다 느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여태껏 해 왔던 방식이 아니라 몸으로 마법을 휘둘러야 한다는 것도.
또한.
본래 마법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 공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번에는 그와 정 반대쪽에 있다고, 이브는 생각했다.
.
어질어질하다.
나는 마지막으로 남은 찌꺼기 같은 연말정산 보고서를 내려놓으며 크게 한숨 쉬었다.
이 일도 몇 번이나 해 본데다 헬레나가 도와주기에 익숙해지고도 남았으나 반갑지는 않았다.
새삼 위쪽에서 처리하는 입장이 썩 즐겁지만은 않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이다.
“ 끝났다……. ”
내가 한숨을 쉬며 몸을 축 늘어뜨리자, 헬레나가 배시시 웃으며 수고했다는 말을 던지며 내 팔을 감싸 안았다.
그 탓에 체중이 약간 쏠려 순간 휘청했으나, 곧 자세를 고쳐 앉은 덕에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다.
만약 힘을 안 주고 체중이 몸을 누르도록 내버려 뒀다면 허리가 꺾여버린 끝에 집무실 바닥에 함께 쓰러졌겠지.
“ 아예 쓰러질까? ”
“ 그러면 옷이 더러워지잖아. 쓰러질 거면 저기 소파로 가자. ”
나는 속내를 읽고 말하는 듯한 헬레나의 목소리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끼며, 급히 손님용 소파로 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헬레나가 내 팔을 꽉 붙들고 있었기에 약간 불편하긴 했지만, 거리가 짧아 금방 소파에 엉덩이를 붙일 수 있었다.
“ 지온……. ”
헬레나가 내 이름을 부르며 나를 누르듯 침대에 쓰러지자, 기세에 밀려 소파 위에 몸을 누이고 말았다.
원래 나보다 힘이 세기도 하지만 애써 밀쳐낼 수도 없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고.
“ 나… 못 참겠어. 지금 하면 안 돼? ”
기다렸다는 듯 내 귀에 입술을 가져다대며 속삭이듯 말하자, 간지러움 탓인지 몸이 부르르 떨렸다.
더구나 귀에 목소리가 울려서 그런지 면봉으로 귀를 후비고 싶었다.
이상하게도 지금 파면 큰 귀지가 딸려 나와 아주 시원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잠깐 뇌리에 떠올랐다 사라졌다.
“ 참아. 내일을 위해서 오늘은 피임도 안 했잖아? 그리고 몇 시간 정도밖에 안 남기도 했고. ”
“ 히잉……. 그 몇 시간이 얼마나 긴 줄 알아? 지온이 수인국에 떠나 있었던 그 끔찍한 시간들만큼과 같을 만큼 괴로워. ”
헬레나가 내 위에 올라탄 채 입술을 삐죽이는 모습이 그렇게 자극적일 수가 없었다.
이제 시간도 넉넉한데다, 엘렌과 이브도 우리를 배려해서 자리를 비워줬고, 하인들도 정말 급한 일이 아니고서야 찾아오지 않을 터였다.
그래서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구석에 처박고 싶은 마음이 없잖아 있기는 한데… 그럴 수야 없었다.
더구나 편법으로 날이 바뀌자마자 아이를 만들기로 했으니 더더욱.
“ 그래도 참아. 참으면… 그만큼 좋아질 지도 모르잖아. ”
나는 헬레나의 허리에 팔을 두른 채 짐짓 엄격한 말투로 다그치다, 은근슬쩍 당근을 뿌리듯 은근한 투로 헬레나를 꼬셨다.
다른 사람이 이렇게 알기 쉽고 별 거 없는 꼬임에 넘어올지는 모를 일이지만, 적어도 헬레나만큼은 아주 쉽게 넘어왔다.
“ 그러면… 참을래. ”
그래도 아예 불만스러운 기색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는지, 내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원망스럽다는 듯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작은 아이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두드리는 것만큼 약해 아프지는 않았다.
마치 종이 몇 장을 모아 건드리는 느낌과 비슷했다.
“ 그래. 조금만 더 참자. ”
나는 애 같은 모습을 보이는 헬레나의 등을 가볍게 쓸어주며 최대한 달래보려 애썼다.
마침 서로 꼭 껴안은 채 누워있던 덕에 서운한 기색이 금방 사라지는 것 같아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 지온. 전에 함께 이야기한 것도 있고, 부탁도 있어 아이를 만들겠지만… 한 명만 낳을 거야. 그 아이가 죽지 않는 한은. ”
그렇게 잠시 입을 다물고 시간을 보내던 중, 헬레나가 여전히 내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말했다.
아이를 품고 그에 맞는 애정을 쏟을 생각은 있으나 명백히 선을 긋는 모습이 서늘하게 보이기도 했으나, 이상하게도 마음이 놓였다.
아이가 많을수록 안정적으로 집안을 잇는 데 유리하다는 생각과 거리가 멀지만… 그럴 수도 있지.
“ 알지. 아이를 낳을수록 내게 안기는 시간이 줄어든다고 싫어했잖아. 기억하다마다. ”
“ …응. 이해해 줘서 고마워. ”
“ 헬레나도 내 말을 잘 들어주고 이해해 줘서 고마워. ”
내 설득으로 생각을 바꿨다고는 하나, 아이에게마저 질투를 드러내는 집착이 정말로 사라질 리가 있나.
아마 눈을 감을 때 까지 끝나지 않을 텐데, 그럼에도 공작가를 이어 갈 아이를 낳겠다 말해줬으니… 고마웠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