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6화 〉 서클 마법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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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훈련을 마지막으로, 올해 기사단 훈련도 무사히 끝마쳤음을 알립니다. 다들 고생 많으셨어요. ”
“ 올해도 가르침을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
서늘한 시기를 넘어 찬바람이 피부를 쓸고, 손가락이 닿아도 흔적도 없이 녹을 것만 같은 첫 눈이 내린 어느 날.
나는 각 잡고 열을 이룬 기사단 앞에서 훈련이 끝났음을 입에 담는 헬레나 옆자리에 서 있었다.
이로서 올해 마지막이자 가장 굵직하기도 한 일이 끝나 그런지 마음이 편안했다.
“ 아, 배고프다…! 오늘 점심 뭔지 아는 사람? ”
“ 듣기로는 향신료에 버무린 모둠이라는데… 듣기만 해선 상상이 잘 안 가네. ”
“ 딱 들었을 때는 감이 잘 안 오는군. 그래도 공작가에서 만든 음식이니 맛없지는 않겠지. ”
훈련이 끝났다고 해서 막사 대용으로 깔아 둔 텐트를 당장 내리거나 필요한 물건들을 물리지 않고 내버려뒀다.
하루아침에 풀릴 피로는 아니겠지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라고 오늘 하루를 쉬게 하는데, 기사들이 수도로 돌아갈 작업을 마무리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 아… 불씨가 다 떨어졌구나. 한 팔 거들어 주는게 나을지……. ”
준비가 어떻게 되어가나 싶어 잠시 취사장을 엿보러 오자, 불씨를 피우려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텐트 안은 매직 아이템을 설치해 뒀기에 굳이 불을 때울 필요가 없지만, 그렇다 해서 불씨가 아예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니다.
지금처럼 취사장에서 음식을 만들 때에도 불씨가 필요했고, 바깥에서 모닥불을 피우며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그래서 거들어 줘야겠다는 하는 생각을 하며 뒷문으로 들어가려는데, 한 발 먼저 취사장에 발 들였던 이브가 간단히 만든 화덕 쪽으로 다가갔다.
마법병단의 장으로서 다크엘프 군대를 이끌고 기사단과 훈련을 했기에 이곳 어디에 있다 한들 이상하진 않으나, 다가가는 모습이 뭔가 이상했다.
꼭 무슨 일이라도 저지를 것만 같았다.
“ 도와드릴까요? ”
이브가 쪼그려 앉은 채 불을 때느라 바쁜 남자 옆으로 고개를 쑥 내밀며 묻자, 불을 때던 남자가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 아, 마법사님! 도와주시면 저희야 감사하지만 이거 죄송해서 원…… ”
“ 죄송하긴요. 넓게 보면 같은 저택에서 사는 식구인걸요. 참, 위험하니까 잠깐 떨어져 계세요. 불 붙일 테니까. ”
“ 아이고. 이거 참 죄송하면서도 감사합니다. 크게 신세 지네요. ”
“ 신세라니요. 그렇게 무겁게 생각하시지 마세요. ”
평소 소심한 기색이 엿보이지 않는 여유로운 모습이 보기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무심코 고개를 갸웃거리게 될 만큼 묘하기도 했다.
이브가 평소 자신감을 드러낼 때는 오랫동안 연구하던 마법이 완성되거나, 반도 이해하기 힘든 마법이론을 법문마냥 읊을 때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이브의 손가락이 딱 소리를 내며 튀기는 순간, 나는 그제야 이브가 왜 여유로운지 알 수 있었다.
화덕 아래에 놓았던 마른 장작더미에 아무 이유도 없이 불꽃이 피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작지만 아주 선명한 불꽃이.
“ 허, 허어! 세상에…! 갑자기 불이 확 솟네?! ”
“ 네. 그래서 떨어져 있어야 했어요. 아니면 크게 다칠 수도 있고, 순간적이지만 눈도 멀 수 있으니까요. ”
순순히 이브의 권유를 따라 장작더미에서 거리를 둔 남자가 몹시 감탄하며 중얼거렸다.
비단 저 사람 뿐 아니라 누구라도 저런 반응을 보일 테니, 저렇게 놀라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더구나 남은 화덕에도 가볍게 불을 붙이자 취사장 사람들이 모두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이브를 바라보고 있었다.
“ 마법사님! 마법사 분들은 모두 이렇게 아무것도 없는데 불도 피우고 막 그럽니까? ”
“ 어… 아마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저도 방에서 연구만 하느라 다른 분들이 마법 쓰는 모습을 많이 본 건 아니거든요. 부끄럽지만……. ”
“ 참 묘하다 묘해. ”
이브를 부르며 질문을 던진 남자를 시작으로, 나머지 사람들도 이브를 향해 한두 마디씩 질문을 쏟아냈다.
하나같이 놀랍고 들뜬 기색이 역력한 모습이 마술쇼를 보고 놀라는 관객 무리와도 같아 보였다.
그래서일까. 이브는 수없이 쏟아내는 질문세례 탓에 자신감을 잃고, 평소처럼 소극적인 모습으로 힘겹게 질문에 답하고 있었다.
아마 질문이 어렵다기보다는 단순히 너무 많아서 어지러움을 느낀 탓이리라.
“ 아, 저기… 오늘 있었던 일은 비밀로 해 주실 수 있나요? 사실 이 마법도 실험 중이라서… 괜히 기대하시는 분들이 실망할 수도 있으니……. ”
“ 아, 예에.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죠. 그나저나 참 신기하네. ”
“ 네… 감사합니다. ”
취사장을 담당하는 바트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면서도, 불에 타오르는 장작더미를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그래도 대장답게 곧 정신을 차리고 사람들을 시켜 재료를 다듬은 뒤 굽거나 끓이기를 시키는 등, 금세 제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 그럼… 저는 이만 물러나 볼게요. ”
“ 예. 정말로 감사했습니다. ”
이브는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한 뒤, 바트의 배웅을 받으며 취사장을 떴다.
나로서는 왜 취사장에 왔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제 할 일이 끝났다 생각했기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신경 쓴 모양이었다.
“ 후우……. ”
다만 취사장 뒤쪽을 통해 빠져나왔기 때문인지, 딱 내 옆을 지나게 되었다.
순간 내가 여기 있는 걸 알아챈 것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고개 숙인 채 숨을 길게 토해내는 모습을 보니 그렇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만약 알고 있었다면 기다렸다는 듯 나와 눈을 마주쳤겠지.
“ 많이 긴장했나보구나? 사람들이 워낙 질문을 많이 했으니 그럴 수도 있지. ”
“ 네… 그래서 약간 무서울 지경이었… 어? ”
이브는 내 생각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멍하니 답하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피곤함이 녹아있던 표정이 점점 놀라움으로 물드는 모습이 참 재미있어 보였다.
“ 대… 공님? 왜 여기 계세요? ”
“ 잠깐 취사장 상황을 보려고 왔더니 이브가 있더라고. 그래서 일단 지켜보고 있었지. ”
“ 아, 그러셨구나……. ”
말투는 덤덤한 느낌이 가득하지만 눈동자가 몹시 흔들리고 있어 몹시 당황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지간히 눈치가 없는 사람이라도 말을 건네기 난처할 정도라 안쓰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래서 주제를 돌려 불안함을 가라앉힐 겸 조금 전 마법을 어떻게 썼는지 알고 싶어 물었다.
“ 그런데 조금 전 마법은 어떻게 쓴 거야? 정령마법을 쓴 것 같지는 않던데… 혹시 매직 아이템으로 쓴 거야? ”
“ 아… 일단 정령마법에 대해 답해드리자면, 저는 불의 정령마법에 소질이 없어 쓸 수가 없어요. 조금 전 불은 새로운 체계로 써 본 마법이고요. ”
“ 벌써 완성한 거야? ”
이브가 체계를 만들겠다고 했던 때가 대략 두 달 정도 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당연히 그 짧은 시간에 체계 하나를 완성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생각했는데, 그걸 가지고 저렇게 마법을 썼다니.
정말 소름 끼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이브의 답 덕분에 등줄기를 찌르르 찌르는 듯한 느낌이 많이 가라앉았다.
“ 아뇨… 유감스럽지만 완성은 아니에요. 그렇다고 해서 미완성 이라 하기에도 좀 묘한 것 같아요. ”
“ 묘해? ”
완성이되 완성이 아니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일까.
나는 그 말이 모순의 유래를 설명하는 것 같아 머리가 어질어질해지는 것을 느꼈으나, 곧 이어지는 설명에 정신을 바로잡을 수 있었다.
“ 네. 틀은 튼튼하게 가다듬은 것 같으니 완성이지만, 그 틀에 채워 넣을 것이 많아서 미완성인 부분도 많은 것 같아요. ”
간단히 말해 이브가 말하는 새로운 체계는 어느 마법이 어떻게 마나를 바꾸며 일어나는지를 관찰하고, 그 움직임을 자기 마나로 따라하는 것에 있다.
즉 원래 하던 대로 마법을 펼친 뒤, 관찰하고 익혀야 쓸 수 있는 가짓수가 많아지기에 미완성이라고.
“ 그리고 몸을 마법진의 원으로 간주하는 것만으로는 불안한 면이 많아서, 마나가 쌓이는 아랫배 쪽에 작은 원을 만들었어요. 마나를 뭉쳐 원을 만드는 작업인데, 집중력이 많이 필요해서 그런지 가장 힘든 작업이었어요. ”
나는 어디서 들어본, 혹은 눈으로 본 적 있는 이야기를 들으며 속으로 깜짝 놀랐다.
예전부터 이렇게 놀랄 일이 있을 때 마다 생각하는 거지만, 이럴 때 멘탈의 축복을 못 받았다면 눈을 휘둥그레 뜬 채 크게 소리쳤을 것이 분명했다.
“ 몸 속에 쌓은 마나를 원형으로 만들었다고? 그게 가능해? ”
“ 어… 어떻게 하다 보니 되더라고요. 마법진을 그릴 때와 비슷한 요령으로 만들었어요. ”
그래. 네가 그렇다니 그런 거겠지.
나는 이해하는 것을 포기하고 그냥 얌전히 고개나 끄덕였다.
세상에는 자기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신기한 일과 사람들이 많으니, 이런 일도 있을 수 있는 거구나 싶었다.
그러나. 내가 알기론 보통 서클이라는 건 심장 부근에 쌓은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랫배… 즉 단전 부근에 쌓을 수도 있던가?
“ 그러면 원으로 만들었다는 마나를 이용해서 마법을 쓰겠네? ”
“ 네. 그렇죠. 그래서 현상 구조를 파악할 수 있으면 기존 마법보다 훨씬 빠르게 사용할 수 있어요. 그때그때 좌표 계산을 해야 한다는 점이나 원을 만드느라 압축한 마나가 줄어들거나 없어지면 채울 때 까지 못 쓰는 게 단점이지만… 원의 수를 늘이면 되지 않을까 싶어요. ”
간단히 말해 원래 쓰던 마법보다 훨씬 빠르게 쓸 수 있지만 그만큼 빠르고 조금 더 복잡한 계산이 필요하다는 뜻이리라.
그런데, 신속한 건 좋지만 굳이 고생을 하며 만든 체계 치고는 뭔가 허무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원래 마법진을 새기는 시간도 그리 긴 편이 아닌데, 굳이?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칠 만큼.
나는 그 생각을 하며 굳이 왜? 라는 질문을 던지려다, 곧 대답해 주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입을 다물었다.
전에도 물어 봤었지만 숨겼으니, 이번이라고 답해 줄 리가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다만, 이브가 말하지 않은 이유 속에 이 체계를 만든 진짜 이유가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그러면 일단 연구가 일단락 된 셈이지? 요 몇 달처럼 계속 방에만 박혀 있지는 않겠네? ”
“ …네에. 아마 그렇게 될 것 같아요. ”
이브는 내가 은근히 놀린다고 느꼈는지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그 모습이 제법 귀엽게 보였다.
스무 살 넘은 여자가 아이처럼 부끄러워하니, 이건 귀할 만 하지.
그렇게 잠시. 드디어 부끄러움에서 빠져나와 정신을 차린 듯, 이브가 눈에 힘을 주며 이야기했다.
“ 저어, 마침 기회인 것 같아 말씀드릴 게 있는데… 혹시 들어주실 수 있나요? ”
“ 응? 말해 봐. 내가 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해 줄게. ”
대체 뭘 부탁하려는 걸까 싶어 내심 두근거리며 답을 기다리자, 이브가 잠시 뜸을 들인 뒤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소리를 내뱉었다.
“ 대공님의 정을… 따로 내려주실 수 있을까요? 연구를 위해 꼭 쓸 데가 있어서……. ”
“ 어… 그 말은 즉……. ”
그렇고 그런 뜻이 분명하겠거니 싶어 무심코 이마에 손을 짚다, 곧 어지러운 마음을 바로잡으며 이마에 손을 뗐다.
생각해보면 임신이 잘 되지 않아 시험관 아기를 시도할 때에도 정자와 난자를 따로 채취하는 경우가 종종 있을 텐데, 그것과 비슷하다 생각하니 썩 거부감이 느껴지진 않았다.
참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 …그래. 그러자. 썩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 ”
“ 아, 감사합니다! ”
이브는 뭐가 그리 고마운지 방긋 웃으며 허리를 숙이기까지 했다.
묘하게 우월감이 느껴지는 광경이라는 생각을 하자 한심하다는 생각도 함께 떠올랐지만, 결국 그럴 수도 있겠거니 싶었다.
뭔가 해 볼 만하다는 느낌도 있었고.
“ 이렇게 허리 숙일 건 아니니까 너무 그러지 마. 그리고… 헬레나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 얼른 텐트로 돌아가자. ”
하지만. 일단은 허리 숙인 이브를 일으켜 세워 헬레나가 기다리고 있을 텐트로 돌아가는 것이 먼저일 듯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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