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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기둥서방이 되었다-175화 (175/192)

〈 175화 〉 서클 마법 #3

* * *

─마법이란 마나를 다듬고 주물러 원하는 현상을 일으키는 것이다.

톡톡. 이브는 가장 먼저 마법을 배울 때 들었던 문장을 빈 종이에 써 놓은 채, 그 문장 위를 펜으로 톡톡 두드렸다.

앞을 가로막은 벽이 아득히 높고 깜깜할 때면 이 말을 놓고 보라는 선배 마법사의 충고를 따르는 중이었다.

단순히 문장 하나 써 놓고 뚫어져라 쳐다본다 한들 대책이 있을까 의심도 되겠지만, 막상 그렇게 하고보니 제법 많은 벽을 뛰어넘을 수 있었다.

“ 으음……. ”

마나심법으로 쌓은 마나만을 이용해 마법진을 만들 수야 있지만 너무 위험했고, 그래서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했다.

고작 물방울 하나 만들다 겪은 마나역류의 부작용이 너무도 컸기에, 또 비효율적이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나마 마법진의 원을 자기 몸으로 대신하겠다는 생각 하나만큼은 옳다는 결과를 얻은 것 까지는 좋았으나 그 다음이 문제였다.

어쩌면 좋을까. 이브는 책상에 앉은 자세로 무려 몇 시간 동안이나 생각에 잠겼다.

뭔가 떠오를 듯 말 듯한 불쾌한 느낌이 머릿속을 꽉 채우는 탓에 답답함만 느끼고 있었다.

차라리 머리를 텅 비우고 아무 생각도 안했다면 불쾌하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절로 떠오를 만큼 답답했다.

“ 이브? 혹시 방에 있다면 잠깐 들어가도 될까? ”

그러던 차, 똑똑 하고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지온의 목소리가 이브의 귀에 들어왔다.

이브는 그제야 해가 거의 다 저물어 가고 있음에도 불을 켜지 않고, 반쯤 어두컴컴한 방에 홀로 앉아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생각이 많은 점이야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지온을 바깥에서 기다리게 할 수는 없을 노릇이었다.

“ 네, 네에…! ”

이브가 다급한 목소리로 외치며 황급히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동안, 지온이 천천히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지온은 며칠 전 이브가 실험을 하다 마나역류로 크게 위험할 뻔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지만, 마주칠 때마다 표정에 그늘이 져 있었던 지라 걱정이 되어 이렇게 찾아왔다.

마나역류에 관해 아는 것은 금방 낌새를 알아차린 뒤 지온이나 헬레나에게 적당히 얼버무렸던 엘렌과 당사자인 이브 뿐이다.

본래 마나역류는 심각한 일이기에 며칠 정도 요양을 하는 편이 좋았으나, 이브의 부탁으로 그를 숨긴 엘렌이 몰래 약을 가져다주는 선에서 그치고 있었다.

그나마 더 이상 무모한 짓을 삼가고 몸을 낫게 하는 데 신경 써서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몸이 망가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 세상에… 불도 안 켜고 있었어? ”

지온은 반쯤 어두컴컴한 방에 불을 밝히며 놀라워하다, 이브를 바라보며 걱정이 가득한 기색을 띠었다.

뿌리부터 새로 만드는 일이니만큼 머리를 싸매고 싸매도 끝이 없기에 여유를 가져야 하겠지만, 그러지 못해 피폐해져 가는 것만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 아… 저도 모르게 생각에 잠겨있느라 그랬나 봐요. ”

“ 너무 애쓰지는 마. 물론 어려운 일이니 생각이 많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기에 하루아침에 이루어 질 일도 아니잖아. 몸 상하지 않게 천천히 해. ”

“ 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대체 무슨 변덕이 생겨서 새로운 체계를 만들겠다는 건지.

지온은 걱정과 불안이 섞인 눈빛으로 이브를 바라보다, 좀 더 강하게 말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이브의 어깨를 감쌌다.

“ 대공… 님? ”

“ 내가 생각을 해 봤는데, 이브는 그냥 쉬라고만 해서 쉴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맞지? ”

“ 아, 그게……. ”

이브는 정곡을 찔린 탓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말까지 더듬었다.

하루라도 빨리 원하는 바를 이루어야 한다는 조급함은 둘째 치더라도, 한 번 연구에 빠지면 밤낮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을 본인도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성격을 당연히 잠자리를 함께 하는 지온이, 더 나아가 엘렌과 헬레나도 모를 수가 없었다.

“ …네. 맞아요. ”

“ 그래. 다행히 이브도 본인이 어떤지 잘 아는 것 같으니까… 주5일제를 도입하는 걸로 하자. ”

주5일제? 이브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었지만 어렴풋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대화 맥락으로 미루어보아 모를 수가 없었고.

그럼에도 혹시나 싶은 마음에 그게 뭐냐고 묻자, 지온이 아주 간단하게 답을 주었다.

“ 연구는 아침 먹고 나서 저녁 먹기 전까지만 하고, 주말은 쉬는 거지. ”

“ 아, 네… 알겠습니다. ”

하루 24시간이 모자란 이브에게 있어서는 실망스러운 내용이 든 압박이었지만, 그럼에도 묘하게 기분이 좋아져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야 어찌되었던 걱정 해 주는 사람이 특별했다보니 그럴 수밖에.

더구나 헬레나마저 지온의 뜻에 따르니 이브로서는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그럴 생각도 없었지만, 만약 남몰래 연구에 매진할 결심을 한들 수포로 돌아갔을 가능성이 아주 높았다.

“ 정말 이렇게 멍하게 있어도 괜찮은 걸까요? ”

“ 대공님과 공작님께서 특별히 명하셨는걸.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 더구나 이번에는 특히 강하게 말씀하셨으니까. ”

“ 하지만 연구뿐만 아니라 마법병단 일도 해야 할 텐데……. ”

“ 병단도 당분간 쉬기로 했어. 일이나 간단한 훈련 정도는 올리비아나 오르커스가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 마. 원래 촌장과 부촌장이잖아. ”

그렇게 지온의 엄명 하에 홀로 주5일제의 주말을 맞은 어느 날.

이브는 엘렌과 함께 뒤뜰 연무장 바닥에 드러누운 채 한숨 섞인 이야기를 나누었다.

돗자리를 대신할 천을 깔고 있어 옷이 더러워질 일도 없었고, 날도 약간 선선해질 시기라 누워 있기 딱 좋은 날씨였다.

“ 그렇긴 하지만……. ”

“ 책임감을 갖고 일하는 건 바람직하지만, 책임감에 쫓기는 건 별로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래. 그러니 쉬어 둬. 안 그럼… 알지? ”

“ 네… 죄송해요, 언니. ”

이브는 언제부터인가 엘렌을 언니라 부르며 친근감을 드러냈고, 엘렌 또한 그런 모습이 마음에 들어 지금처럼 서로 편하게 지내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 편한 사람이 자기 때문에 시간을 들여가며 감시를 하고 있다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런 일이 없었다면 여느 때처럼 집무실에서 지온과 함께 시간을 보냈을 테니까.

“ 죄송할 게 뭐가 있어. 오히려 내가 등 떠민 것 같아서 미안하기만 한걸. ”

“ 네…? 그건 언니 잘못이 아닌데……. ”

“ 그래도. 내 마음이 꼭 그렇지만은 않더라. 아무튼, 그러니까 미안해 할 거 하나도 없어. ”

“ …네. ”

서로 미안할 거리가 있다면 서로 비긴 셈 치자는 엘렌의 말을 듣자, 이브가 어깨를 파르르 떨며 작게 한 마디 했다.

당연히 미안한 마음이 있겠지만 배려 받는 듯한 느낌을 받자 목이 막힌 탓이다.

엘렌은 그런 기색을 읽었는지, 하늘을 향해 시선을 둔 채 아무 생각 없이 중얼거렸다.

들어도 그만, 안 들어도 그만이라는 듯한 태도였기에 말없이 흘려 넘기기도 좋아 보였다.

“ 참, 구름 흘러가는 걸 보면 언제 봐도 참 느긋하다 싶어. ”

“ 구름…이요? ”

“ 그래. 앞쪽으로 가는 것 같으면서도 흩어지고, 느리다 싶으면서도 빠르고. 잠시 눈을 깜빡였다 뜨면 모양이 변해 있기도 하고……. 참 흐름이라는 게 신기해. 안 그러니? ”

“ 어… 그런 것 같기도 해요. ”

뜻 없이 하는 대화라도 상대에 따라 몹시 불편하기 마련이지만, 다행히 이브에게 있어 엘렌이 불편한 존재는 아니었다.

오히려 엘렌의 도움을 받아 정령마법을 배웠고, 비슷한 이유로 첩이 되고자 희망했기에 친근감이 큰 편이었다.

그래서 얼핏 어색하게 받아치는 듯한 답에도 자연스러움이 녹아들어 있었지만, 정작 눈빛으로 다른 것을 쫓고 있었다.

엘렌과 똑같이 구름이 흘러가고 바뀌어가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음에도 그랬다.

“ 이브?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

너무 조용하다 싶은 마음에 옆을 돌아보니, 멍하지만 날카로운 눈빛으로 구름을 쫓는 이브가 눈에 들어왔다.

엘렌은 그 모습을 보고 무심코 이브를 불렀지만, 워낙 깊게 집중한 탓인지 듣지를 못하고 있었다.

순간 엘렌의 뇌리에 저걸 말려야 하나 말아야 하는 갈등이 떠올랐으나, 곧 가만히 지켜보자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단순히 고민하는 모습이 아니라 번갯불처럼 뇌리를 스치는 생각을 뚜렷이 하고자 하는 시간을 방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브는 저도 모르게 낮은 탄성을 터뜨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금 당장 머리에 떠오른 과정을 정리하고 실천해보고자 하는 욕망으로 가득했다.

“ 언니… 죄송하지만 방으로 가봐야겠어요. ”

“ 뭔가 떠올랐나보구나? ”

“ 네.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이에요. 지금이 아니면 구상했던 과정들이 전부 흐려질 것만 같아요. ”

주말에는 쉬라고 한 지온의 명령을 어길 수도 없을 노릇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감에 번뜩이는 이브를 억지로 막을 수도 없을 노릇이다.

억지로 주말을 쉬게 한 이유도 연구 때문에 이브가 피폐해 지는 것을 막기 위함인데, 저 모습은 아무리 봐도 피폐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일까. 엘렌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이브를 따라가겠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얼마나 확신에 찼는지 평소처럼 뜸을 두지 않고 또렷하게 말하는데, 어떻게 그걸 막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 그래, 가자. 원래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너를 막아야겠지만… 지금 이 모습을 대공님이 보셨다면 이해해 주셨을 테니까. ”

“ 고마워요. ”

이브는 엘렌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입가에 호선을 그리더니, 앞장서서 자기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흐름. 엘렌이 무심코 스쳐가듯 말한 단어일 뿐이고, 대화를 할 때에도 간간히 쓰이기도 하는 단어지만… 그 탓에 잊고 있었던 것을 떠올랐다.

마법이야말로 엘렌이 말했던 흐름을 인위적으로 바꾼다는 것을. 주무른다는 표현보다 훨씬 이해하기 쉽고 가슴에 와 닿았다는 것을.

일단 마나의 흐름을 눈으로 볼 수 있을 마법부터 만들어야겠다. 새로운 체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이브는 손님 대접을 위해 마련한 의자에 앉아 자신의 등을 바라보는 엘렌을 향해 그렇게 설명하며, 실험대 서랍장에서 나무판 몇 장을 꺼냈다.

마나의 흐름을 볼 수 있을 마법을 새기기 위해서.

“ 갑자기 방으로 들어가기에 무슨 일인가 했는데…….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

잠시 후. 이브의 방 안으로 몰래 들어온 지온은 엘렌의 입에서 사정을 들은 뒤, 허탈한 숨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억지로 쥐어짜내듯 책상 앞에 앉았다면 모를까, 영감의 흐름을 타고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사람을 방해할 수 없을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영감이라는 놈은 찾아왔다가도 금방 도망가는 놈이라, 잡을 수 있을 때 얼른 잡아야 했고.

그렇게 몇날 며칠.

이브는 은근히 방해가 되지 않도록 신경 써 준 사람들과 배려 덕분에 원하던 길로 가는 첫 걸음을 밟을 수 있었다.

다만, 흐름을 볼 수 있는 눈을 얻었다고는 해도 이제부터 그 눈을 써서 보고 외우고, 기록하며, 그를 몸으로 실현하는 과정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이는 곧 넘어야 할 산이 많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브는 그 수많은 산들을 앞에 두고도 막막하다는 생각보다 훨씬 잘 흘러간다는 희망을 가졌다.

가장 간단한 빛을 밝히는 마법부터, 몸 안에 쌓은 마나만으로 시도하려다 실패한 물방울을 만드는 마법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흐름을 보고 해볼만 하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막상 공식대로 마법을 만들 생각만 했지, 그 마나의 변질에 대해서는 생각도 못했었는데…….

이브로서는 이 또한 새 체계를 만들 계기를 준 대공의 은총이 아닐 수 없다 생각하며, 속으로 몇 번이고 감탄했다.

마나가 변질되는 현상은 저마다 다양했다.

숫돌에 칼날을 갈 듯 마나를 갈아 발동되는 것도 있었으며, 마치 걸레를 쥐어짜내듯 짜내 떨어뜨리는 경우도 있었다.

이브는 그 모든 마법을 눈으로 보고, 또 기록하며 두 번 다시 잊지 않도록 애썼다.

스스로 그 현상을 일으키려면 마법진을 만들 때와 또 다른 계산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새로운 체계에는 형태와 과정을 기억하는 것이 더더욱 중요하다 생각했기에.

또, 그 과정이야말로 새로운 체계의 근본이 되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이는 다르게 보면 계산으로 이루어지는 종래의 마법체계와 등을 돌리는 셈이기도 했으나, 이브는 그를 두고 이단이라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저, 어찌 되었던 간에 지온과 접하며 느꼈던 그 희미한 위화감의 정체를 밝힐 수 있다면 그걸로 좋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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