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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기둥서방이 되었다-174화 (174/192)

〈 174화 〉 서클 마법 #2

* * *

“ …정말 꼭 그래야 해? ”

“ 나한테 부탁했으니까 내가 해야지. 헬레나가 중간에 끼어들면 모양이 이상하잖아. ”

“ 그래도……. ”

이브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선 당분간 일정을 조율해야 하는데, 당연하게도 그 말을 들은 헬레나가 몹시 실망하는 기색을 보였다.

아마 일하면서 같이 있는 시간을 빼앗기는 모양새라 그런가보다.

마나심법보다 나만 신경 쓰는 모습을 보니 이래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일이 답답하게 흘러가는 것보다야 훨씬 나았다.

“ 치이……. ”

헬레나도 내용이 제법 심각한데다 그 이브의 부탁이라 그런지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술을 삐죽였다.

만약 엘렌이 같은 부탁을 했다면 그 속내가 다르다 생각하고 절대 허락하지 않았겠지만, 이브라서 마지못해 허락하는 기색이었다.

“ 하지만 그 새로운 마법체계 라는 게 하루 이틀 만에 만들어질 것도 아닐 텐데……. ”

“ 나야 잘 모르지만… 대략 몇 년, 혹은 십 년 이상이 걸릴 지도 모르지. ”

“ 뭐? 그렇게 오래? ”

적어도 하루아침에 끝날 일은 아니라고 장담하자 헬레나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

아무래도 질투 때문에 묘하게 잘못 생각하고 있는 눈치였다.

“ 그래도 그건 체계를 연구하고 만드는 데 걸리는 기간이고, 마나심법을 익히는 것 자체는 금방 익힐 것 같은데? 접근 방법은 다르지만 마나를 쓰는 마법사니까 보통 사람보다 훨씬 빠르게 이해 할 테고. ”

“ …아. 마나심법만 익히게 도와준다고 했었지? ”

그랬지.

내가 짤막하게 답하자, 그제야 오해가 풀린 듯 식었던 헬레나의 눈빛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 모습을 보니 내가 그 긴 시간동안 이브와 붙어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었던 모양이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럴 만한 능력이 없다는 것을 잘 알 테지만, 그 생각을 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기에 그냥 그러려니 했다.

“ 좋아, 알았어. 대신 최대한 빨리 끝내야 해. ”

“ 그래. 노력할게. 오래 끌 일도 아니니까. ”

나는 희미하게 떨리는 헬레나의 어깨를 쓸며 위로한 뒤, 곧장 이브가 있는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는 방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브를 만나 간단한 이론부터 설명했다. 원래 몸으로 느끼보는 편이 훨씬 빠르기는 하지만, 이브 같이 과학자 성향이 짙은 사람에겐 이러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 우선, 마나심법이란 말 그대로 마나를 몸에 쌓아 이용하는 방법인데……. ”

이 대륙의 마나심법이란 흔히들 말하는 내공심법과 비슷했다.

단전 부근에 마나를 모아 몸 안 구석구석으로 돌게 만드는데, 각 심법마다 경로나 그 방법, 마나를 몸 안에 넣기 위한 호흡법에서 자잘한 차이를 보였다.

그리고 그 자잘한 차이가 모여 큰 차이를 만들수록 좋은 심법이라고들 하는데, 그 중 크라우저 공작가의 마나심법은 상당히 뛰어난 축에 속했다.

원래도 효과가 좋긴 했지만 헬레나가 새로 다듬으면서 더 좋아진 경우였다.

아무튼, 심법을 익히기 위해서는 원래 심법을 익힐 때에는 마나를 느끼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이브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본래 마나를 다루는 마법사이기에 진작부터 마나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곧장 몸 안에 마나를 느끼고 불리는 과정부터 들어갈 수 있어, 나로서는 참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그만큼 심법을 빨리 익힌다는 뜻이니까.

“ 후우……. ”

이브는 눈을 감은 채, 발바닥이 마주보고 붙는 자세로 앉아 숨을 골랐다.

양반다리 같은 자세를 오래, 자주 하면 안 좋다는 부위가 한두 군데가 아니라고는 하는데, 몇 시간 하는 것도 아니라 괜찮을 듯싶었다.

더구나 다 끝나면 몸을 풀어주기도 하고.

“ 어때? 좀 묵직한 것 같아? ”

“ 아, 네. 마나는 앞으로 천천히 모아야 하니 어쩔 수 없지만… 감은 확실히 잡은 것 같아요. 가르쳐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

호흡을 마친 듯 눈을 뜨는 이브에게 묻자 고맙다는 말이 돌아왔다. 별로 해 준 것 없는 나로서는 정말 듣기 부끄러운 칭찬이 아닐 수 없었다.

처음 마나가 다니는 길을 느끼게 해주고 덧붙이듯 몇 마디 해 줬을 뿐인데, 아주 노련하게 심법을 썼던 탓이다.

아마 숙련도로 따지면 몇 년 동안 써봤던 나보다 더 익숙할 지도 모르겠다.

“ 솔직히 내가 한 게 없어서 그런지 부끄럽기만 하네. ”

“ 하신 게 없다니요…! 처음 심법으로 끌어야 하는 흐름을 천천히 알려주셔서 얼마나 감사했는데요! 그러니 그런 말씀 말아 주세요……. ”

“ 어, 음… 그래. ”

드물게 이브가 눈을 반짝이며 소리까지 높이자, 무심코 주눅이 든 채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 화를 안 내던 사람이 화를 내면 더 무섭고 두렵게 느껴지는 느낌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 아무튼, 앞으로 갈 길이 멀겠지만… 너무 서두르지는 마. 급하게 먹다 체하는 것과 비슷할 테니까. ”

“ 네. 명심할게요. ”

뭣도 모르는 사람이 충고랍시고 내뱉으면 기분이 나쁠 만도 했건만, 이브는 그런 기색 하나 없이 배시시 웃기만 했다.

본래 성품이 착하기도 하지만, 아마 스스로 가려진 첩으로 살아가겠다고 결심할 정도로 내게 품은 감정이 크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 참. 그런데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될까? ”

“ 네…? 네. 뭐든 말씀하세요. ”

바닥에 깔아둔 값싼 천에서 엉덩이를 떼고 바닥에서 일어나 방을 나서기 전, 나는 문득 떠오른 호기심을 해결하고자 운을 뗐다. 다행히 이브도 고개를 갸웃거릴 뿐 불편해하는 기색이 없었기에 편하게 입을 열 수 있을 것 같았다.

“ 문득 왜 새로운 마법 체계를 만들고 싶어졌는지 궁금했거든. 정말 혼자서 할 수 있을지 모를 일이라는 건 둘째 치더라도. ”

“ 아… 그거요? ”

보통 큰일을 꾸밀 때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그 이유가 작던, 크던 간에 이유가 없을 수는 없었다.

적어도 내 생각에 변덕이 생겨 한 번 해 봐야지,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는 엄두도 안 나는 일이니까.

다만, 이브는 그 이유를 밝히는 것이 꺼림칙했는지 몹시 우물쭈물하며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다, 억지로 쥐어짜내듯 한 마디 했다.

“ 저… 정말 죄송하지만 나중에, 나중에 말씀드리면 안 될까요? 일이 잘 풀려서 얻을 수 있을 기대 성과와도 관련된 일이라서요……. ”

“ 음……. ”

기대 성과라.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여러모로 알쏭달쏭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지만, 저렇게 겁을 내는 이브를 보니 꼬치꼬치 캐물을 용기가 나질 않았다.

성공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일이라 기대를 품을 여지를 주고 싶지 않기 때문인지, 혹은 성과 자체가 입에 담기 어려운 것일지.

나로서는 도저히 상상이 가질 않지만, 적어도 우리에게, 혹은 이브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하고자 저러는 것은 아닐 테지.

그렇기에 이브를 믿고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뒤, 말없이 방을 나섰다.

.

일을 할 때, 특히 누군가의 지원을 받아 일을 할 때 성과는 특히 중요하다.

이브는 철이 들 적부터 마탑에서 연구하며 살아 온 마법사로서 그 사실을 잘 알았고, 그 지원을 해 주는 공작가의 사람과 특별한 관계가 되었음에도 그 생각에 변함이 없었다.

설령 지원하는 측에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브의 양심이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지원을 받은 결과가 좋지 않거나 그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자연스레 평가가 내려가고, 주위에서 둘러보는 시선들이 점점 차갑게 식어간다.

과거 이브는 그 느낌을 뼈저리게 알았지만, 그럼에도 본인이 연구하던 분야를 포기할 수가 없었다. 고집과 집착 때문에.

“ 으음……. ”

마법진의 원은 곧 그릇이자 마나를 끌어들여 돌게 하는 순환기의 역할을 하니까, 그걸 몸을 통해 하는 것부터 시작해야겠지.

이브는 마나심법을 통해 쌓은 마나를 가지고, 내부에서 원을 그리듯 돌리며 진을 만들었다.

연구를 통해 여러 성과를 얻다보면 이 방식마저 바뀔 것이라 예감하면서도, 일단은 익숙한 방법부터 실험해 볼 요량이었다.

마법진을 몸 안에서 만들어 효과를 발휘하는 일은 상상보다 더욱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이브의 이마에 한 줄기 식은땀이 흘렀다.

한 번 새겨두면 일부러 망치지 않는 이상 잘 작동하는 마법진과 다르게, 안에서 만드는 마법진은 집중력이 흐트러지면 안개처럼 흩어져버리는 탓이다.

그래도 이브는 지온이 늘 천재라 부르는 마법사답게, 어떻게든 마법진을 만들어 사용하는데 성공했다.

그저 그 성과가 고작해야 작은 등불만한 빛을 밝히는 데에 그쳤을 뿐이나 성공은 성공이었다.

“ 아으윽…! ”

작은 성공에 힘입은 것을 시작으로 자신감을 얻은 이브가 점점 복잡한 마법을 시도하던 중, 미간을 있는 힘껏 찡그리며 신음했다.

몸 안을 걸레 짜듯 짜내는 고통 탓에 숨이 턱 막힐 지경이었으니, 몸을 가누지 못해 바닥을 뒹구는 것도 당연한 결과였다.

쿵.

작지만 묵직한 울림이 방을 울리는 와중에도, 이브는 바닥을 기며 끊임없이 낮은 신음소리를 흘렸다.

마음 같아서는 있는 힘껏 비명이라도 내지르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으나, 지온의 얼굴에 그늘이 낄 것을 상상하자 도저히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 이브…! ”

그러나 그 작은 소리마저 알아챈 이가 있었다.

다름 아닌 이브의 방문을 열어젖히며 탄식하는 엘렌이 바로 그랬다.

엘렌은 집무실에서 일을 하고 있던 세 사람 중에서 가장 귀가 좋았고, 마나에 민감했기에 이브의 방에서 터진 일을 느낄 수 있었다.

“ 문은… 으으으! 닫아… 주세요……. ”

엘렌은 누군가 찾아온 와중에도 바닥을 기는 모습이 들키지 않도록 문부터 닫아 달라 말하는 여자의 말을 듣고, 황급히 그에 따랐다.

자세한 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어떤 마음으로 이런 말을 뱉어냈는지는 잘 이해할 수 있었던 덕이다.

“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

“ 으…으으…! 잠시…만, 기다려……. ”

이브는 화들짝 놀라 다가와 자신을 안은 엘렌의 품에 안긴 채, 겨우 한 마디 꺼낸 뒤 새로 끙끙 앓기 시작했다.

핏줄이 투둑투둑 소리를 내며 끊어지는 듯한, 혹은 피가 역류하며 몸 안이 찢어지는 것만 같은 끔찍하고 괴로운 느낌이 끊이질 않았던 탓에.

“ 하아, 하아……. ”

그래도 그 와중에 고통의 원인이 된 마나 역류를 견디면서 애를 쓴 덕일까.

이브가 찡그렸던 미간을 펴고 천천히 호흡하기 시작하면서 안정된 기색을 보이기 시작했다.

“ 다행이다. 일단 정상으로 돌아온 것 같은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

“ 하아……. 새로운 체계를 실험하다가… 마나 역류가 생겼어요. ”

“ 뭐?! ”

마나 역류라 함은 자칫 잘못했다 곧바로 죽을 수도 있을 만큼 위험한 일인지라, 엘렌이 깜짝 놀라며 목소리를 높이는 것도 당연했다.

마법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은 없을지언정 마나 역류가 어떤 현상인지는 잘 알았기 때문이다.

“ 대체 마나 역류가 생길 정도면 얼마나…! ”

“ 그게… 마법 자체는 물을 만드는 비교적 간단한 마법이었는데, 막상 새롭게 하려 해 보니까… 보시다시피 잘 안됐어요. ”

막상 물을 만드는 마법이라고 한들 규모에 따라 그 복잡함이 천차만별이나, 이브가 말한 것은 큰 물방울 정도나 만드는 정말 간단한 마법이긴 했다.

그래서 마나 역류를 일으킬 만한 위험성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고작 그 마법에 이렇게 아파하다니.

엘렌은 아마도 이브가 이 꼴이 된 이유가 새로운 체계 탓이라 생각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이브. 그 새로운 체계라는 걸 꼭 만들어야 해? 여태까지 해 왔던 것처럼, 기존 체계를 바탕으로 쓰면 안 되는 거야? ”

“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하던 대로 하는 것보다 좀 더 가능성이 있을 것 같아 보여서요. ”

“ 가능성? 무슨 가능성을 말하는 건데? ”

“ 여러 가지가 이유가 있지만… 언니가 대공님의 아이를 품는 데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요. ”

아…….

엘렌은 애써 입꼬리를 올리는 이브와 눈을 맞추며 낮게 신음했다.

본래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사람과 아이를 갖기 위한 가능성을 찾고자 이브와 이야기를 나눴고, 은연중에 노력하는 것도 알았지만… 설마 그 때문에 이런 위험을 감수할 줄이야.

엘렌으로서는 안타까움과 고마움, 또 미안함이 섞일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오롯이 자기 때문에 벌인 일이 아니라 하더라도, 거기에 한 몫 거들었다는 생각을 하니 죄책감도 느꼈다.

이브는 엘렌의 얼굴에 그늘이 지는 것을 통해 그런 감정 상태를 알았는지, 웃으며 말했다.

“ 걱정 마세요. 이번 실패를 통해서… 접근 방식을 새롭게 해야 한다는 결과를 얻었으니까요. 아마 앞으로 잘 될 거에요.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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