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3화 〉 서클 마법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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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아… 이런 낭패가 있을 수 있나. ”
모든 일정이 끝난 늦은 밤, 리차드는 한숨을 쉬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의 맞은편에는 리차드가 낭패라 말했던 일을 보고했던 당사자, 앤더슨이 한숨을 쉬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지나갔다고는 하나 한숨만이 새어나오는 밤임을 그도 느끼고 있었다.
“ 그나마 잘 해결되어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우호를 가장한 암살 시도라는 명분으로 크게 곤란에 처했을 것입니다. ”
“ 그렇지요. 그 경우엔 제국의 위신이나 신용이 크게 깎여… 후우. ”
앤더슨은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하겠는지, 긴 한숨을 쉬며 입을 다물었다.
자작이라고는 하나 사실상 리차드와 가까운 관계에 있으며, 또한 가장 큰 기밀을 공유하는 사이였기에 약간 어깨에 힘을 뺀 모습을 보여도 괜찮았다.
다만, 지금 상황에서는 그 사이가 가깝던 멀던 앤더슨이 한숨 쉬는 모습을 가지고 무례하다 말할 수도 없었다.
전후사정을 알게 된 제국 귀족이라면 누구나 앤더슨과 같은 모습을 보일 테니까.
“ 그래… 그 망할 놈은 어떻게 처리하셨소? ”
“ 예. 공작이 직접 손을 쓴 것도 있고, 그 내용이 제법 잔혹하여… 제 성에서 쫓아낼 뿐, 더 이상 처벌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
앤더슨은 제 실수로 리차드가 말하는 망할 놈, 존의 얼굴을 떠올리며 고개 숙였다. 앤더슨도 마음 같아서는 일을 크게 꼬다 못해 크게 망칠 뻔했던 인간을 벌하고 싶었으나,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벌벌 떠는 모습을 보고 마음을 바꾼 결과였다.
“ 더한 처벌을 하지 않기로 결정할 정도로 잔혹했다는 뜻입니까? ”
“ 놈이 저러다죽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온 몸을 덜덜 떨며 말하기를… 아침부터 밤까지 숨이 끊겼다 열리기를 반복했다고 합니다. ”
“ 허어, 세상에…! ”
왕국에서 이곳까지 오는 데 걸린 그 긴 시간동안 그랬다니.
리차드는 몹시 놀란 듯한 얼굴로 탄식하며, 과연 그럴 만했다는 생각을 했다.
결과적으로 몸만 멀쩡할 뿐, 정신이 크게 망가졌음이 분명하다는 것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 내 소문으로 익히 듣기는 했습니다만, 그 공작의 광증이 날뛰면 정말 종잡을 수가 없군요. ”
“ 예. 배우자가 해를 입거나 추파를 던지려 하면 미쳐버린다고 하기에 정말 그런가 싶었으나, 그 소문을 눈앞에서 직접 보니… 끔찍하더군요. 심지어 그마저도 어느 정도 가감을 한 셈이라 하니 두렵기 짝이 없었습니다. ”
“ …자작께서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
하필 틈을 보여서 안 될 사람에게 틈을 보이고, 그 눈치를 보느라 얼마나 고생했을까. 리차드로서는 동정을 금할 길이 없었다.
자칫 제국 역사상 가장 빠르게 옥좌에서 물러나게 된 황제라는 치욕적인 칭호도 피할 수 있게 된 덕일까.
그 답은 리차드만이 알고 있겠지만, 지금은 그저 어떻게든 일이 잘 해결되었음에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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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 계약에 황제 측에서 사과의 뜻으로 조용히 건넨 보석들과 사업에 관한 거래. 그리고 이번 호위에 대한 상으로 국왕이 내린 돈까지.
돈만 따지면 제법 크게 벌어들였다 할 수 있겠지만 두 번 다시 이런 짓을 하고 싶지는 않다.
다른 때보다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는 말이 떠오르는 일들이 많았고, 길도 길었으니까.
더구나, 저택에 돌아오고서도 여전히 날이 서 있는 헬레나와 엘렌을 달래느라 피곤함이 한층 더했다.
그 탓에 개운하면서도 노곤한 느낌 탓에 머리가 몽롱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런 상태라 하더라도 장인이자 어른인 이스의 부름을 거절할 수도 없었다.
일부러 여독이 풀릴 것을 고려해 며칠 뒤에 불렀는데, 거기다 대고 아직 피곤하니 못 만나겠다 말하기가 뭣했던 탓이다.
싸가지 없어 보이기도 하고.
“ …고생 많았네. 헬레나의 광증이 도졌다고 들었네만, 잘 넘긴 모양이더군. ”
“ 감사합니다. 단지, 저로서는 광증을 제외하더라도 꼭 그렇게 처벌을 해야 하냐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결국 그것이 옳다 생각하긴 했지만…… ”
“ 음. 만약 그 일이 평소 같았을 때, 이 저택 안에서 일어났다면 가볍게 넘어갔을 테지. 하지만 실수라 하더라도 일을 벌인 쪽이 제국인 이상, 가만히 넘겨서도 안 되었을 걸세. ”
이스는 비록 헬레나가 반쯤 미쳐 처벌을 정했다고는 하나, 사실 지극히 차분하게 생각하고 결정한 것과 다름없다 말했다.
어떻게 보면 결과에 끼워 맞추는 감도 없잖아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럴 수도 있겠거니 싶어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내 귀에는 일리 있는 소리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 아무튼, 정말 고생 많았네. 피를 보지 않겠다는 선택도 좋았고… 이제 때가 되기를 기다리면 될 뿐이겠어. ”
“ 때요? 때라 말씀하시는 거라면…? ”
“ 이 사람. 모르는 척 하는건지 정말 모르는 건지 모르겠네만… 아이 말고 뭐가 있겠나. ”
아, 아이. 그러고 보면 이스로서는 헬레나가 아이를 낳을 시기가 많이 밀렸으니 초조할 만도 하지.
나는 내년에 반드시 좋은 소식을 들려주겠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이스의 집무실에서 나와 방을 향해 걸었다.
너무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도록 애써 날을 세웠더니 정말 피곤해서 견딜 수 없는 지경이었던 탓이다.
“ 고생하셨어요. ”
그런데, 방에 들어가자마자 생각도 못했던 이브가 웃으며 나를 반겼다.
헬레나나 엘렌이야 내가 이스를 만난 뒤 방에 들어가 쉬겠다고 했으니 사정을 알겠지만, 방에 콕 박혀 있던 이브는 전혀 모르고 있었을 텐데.
“ 그래… 고마워. 고맙긴 한데… 혹시 무슨 일 있어? ”
“ 네? 아, 그게……. ”
말하고 싶지만 말을 할 수가 없어. 우물쭈물하는 이브의 모습을 보니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로서는 그 이유를 잘 모르겠지만, 아마 내가 피곤한 기색을 띠고 있기 때문에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 혹시 급한 일이야? ”
“ 아뇨. 급한 건 아닌데… 한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그래도 지금 물어보는 건 때가 안 맞는 것 같으니까 나중에… 올까요? ”
“ 음… 솔직히 말하면 지금 많이 피곤하긴 해. 그래서 잠부터 자야겠거니 싶었거든. ”
“ 아… 그러셨구나. 그럼 나중에 다시 올게요. 정말로 급한 일은 아니라서요. 실례 많았습니다. ”
이브는 허둥지둥 고개를 숙인 뒤 서둘러 방을 떠나려고 걸음을 빨리 했다. 아마도 내가 손목을 잡아 막지 않았다면 진즉 방을 나가고도 남았을 만큼.
“ 대공… 님? ”
말도 없이 손목을 잡히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으나, 싫어하는 기색은 또 없었다.
오히려 눈빛에 희미한 기대감이 서려 있기까지 했다.
세 여자 중에서 가장 욕심이 없다고는 해도, 막상 이러니 기대는 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브가 기대하는 행동을 할 수는 없었다.
그저 피곤해서 함께 잠이나 자고 싶을 뿐이다.
“ 어… 혹시 기대했다면 미안하지만, 그냥 함께 잠이나 자 줄 수 있나 싶어서……. ”
“ 그냥… 잠만요? ” “ 그래. 그냥 잠만. ”
보통 이럴 때 그냥 잠만 자자고 하는 소리를 곧이곧대로 믿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으면서도, 일단 진심을 다해 물었다.
더구나 피곤한 표정으로 진짜 잠만 자고 싶다 강조했기에 다르게 해석할 여지도 없어 보였다.
그래서 그런지 이브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며 당황해하다, 곧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네. 영광이에요. ”
“ 영광이라니, 너무 아부하는 게 아닐까 싶긴 하지만… 허락해줘서 고마워. ”
바닥에서 잘 수 있는 환경이면 참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그렇지 못하기에 침대나 소파에서 잠을 자야 했다.
하지만 침대에 오르려면 옷을 갈아입어야 했기에 소파 말고는 답이 없었다.
아마 보통 소파였다면 그 폭 때문에 둘이서 잘 수 있겠다는 생각은 못 했겠지만, 다행히 방에 마련된 소파가 충분히 커서 괜찮았다.
“ 으응……. ”
잠시 후. 적당한 이불을 덮고 꼭 안은 채 소파에 눕자, 이브가 괴롭다는 듯 신음했다. 그래서 미안하다는 말을 건네며 팔을 느슨하게 풀려는데,
“ 아뇨… 답답해서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좀 더… 꼭 안아주세요. ”
“ 어… 그래. 답답한 게 아니었다니 다행이네. ”
답답하지는 않다고 하니, 다시 팔에 힘을 주고 나서야 눈을 감았다.
잠에 완전히 빠지기까지 몇 번의 낮은 신음소리가 귀를 파고들었지만, 오히려 품 안으로 더욱 파고드는 것을 보아 괜찮은 듯싶었다.
답답했다면 떨어지려 애를 쓰지, 얼굴을 깊게 파묻으려 들지는 않을 테니.
“ 마나심법을 가르쳐 달라고…? ”
그렇게 몇 시간 정도 눈을 붙이고 나자, 이브가 마나심법을 익히고 싶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피곤함을 씻고 맑은 정신으로 들었는데도 워낙 맥락 없는 이야기라 그런지 잘 이해가 되질 않았다.
“ 네. 실은 이번에 새로이 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마나심법을 익히면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이런 말을 꺼내는 게 큰 무례라는 건 알지만……. ”
서로 몸까지 겹친 사이에 새삼 무례라는 게 있을까 싶긴 하지만,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넘어서는 안 될 선이라는 게 있기는 하다.
그리고 그 선은 사이가 아무리 좋아도 사라지지 않는다고 하더라.
아마, 이브는 그 선을 넘었다 생각했기에 소파에 앉은 채 나와 마주보며 몹시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이는게 아닐까 싶다.
마나심법은 각 가문의, 또는 스승과 제자 간에 전하는 기밀이니 그럴 수밖에.
그저, 나는 이브가 마나심법을 알려 달라 했다고 해서 그 선을 넘었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오히려 여태껏 해 주었던 것들만 떠올려 보아도 마나심법 정도야 기꺼이 알려줄 수 있었다.
설령 이 심법이 크라우저 공작가에 전해지고, 헬레나가 새로 다듬고 향상시킨 것이라 하더라도 그랬다.
그런데도 내가 곧장 그렇게 하겠다는 답을 주지 않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그저 궁금했기 때문이다.
마법사인 이브가 왜 기사들이 쓰는 마나심법에 흥미를 느낀 것인지.
“ 무례라니. 나는 그렇게 생각 안해.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이브에겐 당연히 알려줄 수 있지. 다만 궁금해서 그러는데, 혹시 기사라도 하고 싶은 거야? 아니면 그냥 몸을 좀 잘 움직이고 싶다거나……. ”
“ 아,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배려해 주신 덕분에 몸은 건강하니까요. 그저 잘 될 가능성이 거의 없더라도, 새 마법 체계를 만들어보고 싶어서요. ”
“ 마법 쳬계를 새로 만들어? ”
워낙 뜬구름 잡는 소리 같아 그런지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 탓에 순간 불길한 느낌이 뇌리를 스쳤으나, 다행히 이해 못할 이론의 향연이 나를 괴롭히는 일은 없었다.
아마 이론을 열심히 설명한다 하더라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이브도 깨달은 모양이었다.
이건 어떻게 보면 지능이 낮다고 은근히 무시당하는 것만 같은 모양새처럼 보이기도 했으나, 그렇다 해서 어설프게 아는 척을 할 수도 없었다.
그런 자존심을 세울 사이도 아니거니와, 자칫 잘못했다간 이야기를 듣다 머리가 터질 지도 모를 지경이었으니.
“ 대공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지금 마법은 역대 마법사 분들이 정교하게 체계화하고 발전시켜 온 마탑의 마법과, 엘프들이 쓰는 정령마법이 있어요. 그 중에서도 전자는 수식을 조립한 마법진을 만드는 것으로 다양한 현상을 만들 수 있고, 그를 응용해 마법 효과를 가진 물건을 만들 수도 있고요. ”
“ 그래. 그건 알지. 당장 주방만 하더라도 이브가 만들어 준 매직 아이템이 떡하니 버티고 있으니까. ”
“ 네. 하지만 그만큼 준비해야 할 것이 많아 신속함이 떨어진다는 게 단점이에요. 반면, 정령마법은 현상을 일으키는 힘이 각 정령이 다스리는 원소에 한정된 만큼 그 응용력이 낮지만… 신속하다는 장점이 있고요. ”
그래. 그것도 알지.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열리는 이브의 입술에 시선을 두었다.
아무래도 마법에 문외한인 나도 알아들을 만큼 적당히 쉬운 이야기를 하니 저도 모르게 집중이 되는 모양이다.
“ 그래서… 저는 마탑에서 배운 마법을 정령마법처럼 빠르게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그렇게 할 수 있다면 큰 도움이 될 테니까요. ”
“ 물론 그렇긴 하겠지. 그런데 그 과정에서 마나심법을 배워야 할 이유가 있어? ”
“ 네. 정령마법이 교감을 통해 힘을 발휘하고, 그러기 위해 정신력을 소모하는 것처럼… 새 마법을 쓰려면 몸 안에 마나를 쌓아뒀다 사용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대공님께서도 아시다시피… 마나심법은 몸 안에 마나를 효과적으로 쌓고 흐르게 하기 위한 것이니까요. ”
나는 그제야 알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도 몸 안에 마나를 쌓아둘 수는 있지만 보통 사람보다 조금 나은 수준으로, 오러는커녕 몸을 강화할 수준도 안 된다.
예전에 이브가 말했듯, 마탑에서 체계적으로 정립한 마법은 공기 중에 떠도는 마나를 이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나심법에 주안점을 둔 것은 역시 대단하다 싶었는데… 왜 묘한 기시감이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아마 크게 중요한 일은 아니겠지.
“ 그래. 그런 일이라면 나도 도와 줘야지. 오늘은 시간이 늦기도 하고, 헬레나에게 말을 건네 일정도 조정해야 하니… 내일부터 하면 어떨까 싶은데? ”
“ 아… 네! 감사합니다! ”
이브는 순순히 허락하는 것이 기뻤는지, 연신 고개를 숙이며 감사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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