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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기둥서방이 되었다-172화 (172/192)

〈 172화 〉 어쩌다보니... #6

* * *

커, 커어어…! ”

숨을 참는 것과 쉴 수 없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마차 바닥을 뒹굴며 제 목을 조르듯 목에 손을 댄 채 컥컥대는 존은 그 차이를 몸으로 깨닫고 있었다.

당장 목이 잘려도 이상하지 않았을 상황에서 목숨을 건진 건 천만 다행이나, 이 짓을 몇 번이나 되풀이하며 점점 그 생각이 바뀌어갔다.

차라리 죽였으면. 죽여줬으면 하는 생각이 존의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대체 얼마만큼 시간이 흘렀을까.

존은 여태껏 겪어 본 적 없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며 바닥을 뒹굴었고, 또 뒹굴어야 했다. 그것도 제국 수도까지 이르려는 때 까지 계속.

그래서 차라리 도망이라도 칠 까 몇 번을 생각했지만, 그랬다간 더 큰 벌이 떨어질 지도 몰랐다.

그 두려움 때문에 차마 발을 떼지 못했다.

더구나, 존의 능력으로는 자리에 앉아 싸늘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는 헬레나와 엘렌의 눈길을 피해 달아날 수도 없었다.

만약 그럴 수 있었다면 아주 잠깐 처벌을 받았던 그날 밤에 도망쳤을 테니.

“ 허억, 허억…! ”

존은 공기가 다시 코 안으로 스며들자 기다렸다는 듯 입까지 크게 벌렸다. 최대한 많이 숨을 들이마시기 위해서였다.

남이 보기엔 자칫 먼지까지 들이마실 만큼 과장스러워 보였지만, 존의 머릿속에는 숨을 쉬고 살아야겠다는 본능만이 가득했다.

“ 앞으로 얼마나 남았지? ”

“ 이 속도로 가면… 앞으로 나흘 정도 뒤엔 수도에 이를 것 같아요. ”

나흘이라니.

존은 그 말을 듣고 눈앞이 캄캄해짐을 느꼈다.

물론 지금껏 겪어 온 시간들이 훨씬 길었으나, 나흘이나 남았다는 말을 듣자 정신이 아득해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 반면,헬레나는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인 존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던 대로 잘 흘러갔다는 생각을 했다.

일정을 알고 있음에도 굳이 엘렌에게 그 시간을 물은 것과, 그 이유를 알아채고 장단을 맞춘 엘렌이 고맙기도 했다.

“ 제, 제발… 제발 죽여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

존은 헬레나가 의도한 대로 정신이 반쯤 미쳐버린 채, 가녀린 헬레나의 발목에 매달려 울부짖었다.

평소 같았으면 나흘이란 시간이 그리 길지도 않아 그저 그러려니 하겠으나, 그 시간동안 고문을 당해야 한다는 생각이 존의 등을 떠밀었다.

숨을 쉴 수 없는 시간이 너무도 길었고, 그로 인한 고통이 이미 뼛속 깊숙이 새겨진 탓이다.

얼핏 눈물 콧물을 다 쏟아내며, 차라리 죽여 달라 애원하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약해질 만도 하다.

하지만 헬레나는 마음이 약해지기는커녕 그 모습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처음 이 이야기를 했을 때 그 자비에 감사하다며 우는 존의 얼굴과, 지금 죽여 달라며 애원하는 모습이 몹시 거슬렸기 때문이다.

“ 미리 말했을 터다. 너는 죽지 않고 살려두겠다고. 그리고 네 목숨을 거두는 대신 이 같은 벌로써 대체하겠다고. 이제 나흘만 지나면 그 벌조차 받지 않고 자유로운 몸이 될 터인데, 그것조차 불만이란 말인가? 귀족, 그것도 내 남편에게 독을 먹인 중죄를 저지르고도? ”

“ 으, 으으으…!! ”

제발 죽여 달라 발악을 하려다, 스산하기 짝이 없는 헬레나의 목소리를 듣고 존의 말문이 막혔다.

막상 죽을 위기가 다가오자 살고 싶다는 욕망이 고개를 치켜들고 말았으니까.

“ 쯧. 본래라면 당장에 목을 베도 할 말이 없을 것이나… 좋은 일을 앞에 두고 피를 볼 수 없다는 뜻 때문에 이 정도로 참아주고 있는 것이다. 내 마음 같아서는 네놈의 몸뚱이에다 일흔이 넘는 구멍을 뚫어도 분이 풀리지 않을 테니. ”

아무튼. 헬레나는 제법 긴 말을 하자 목이 칼칼했는지, 잠시 뜸을 들인 뒤에 입을 열었다.

“ 어쨌든, 발악할 기운이 있는 걸 보니 제법 숨통이 트인 모양이구나. 그렇지? ”

“ 아, 아아…! 제, 제발 그만……. ”

그만하라고 그만했을 거였다면 시작도 안 했겠지.

헬레나가 맞은편에 앉은 엘렌과 잠깐 눈을 맞춘 뒤 작게 끄덕이자, 엘렌이 기다렸다는 듯 존의 주위를 돌던 공기를 거두었다.

.

“ 참담하군요……. ”

몇날며칠에 걸려 제국의 심장부라 할 수 있을 황궁의 마굿간에 이르자, 한스가 한숨을 쉬며 안타깝다는 듯 중얼거렸다.

긴 시간 동안 마차를 몰아 피곤한 기색도 역력했지만, 여전히 두려움에 질린 듯 몸을 부르르 떨며 떠나가는 존의 등이 안쓰럽게 보인 탓일까.

내 눈에도 참담해 보이기는 마찬가지였기에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 고생이 참 많았나 봅니다. ”

“ 그야… 그렇겠지요. ”

사형을 당할 만한 큰 죄라고는 하나 그 긴 시간 동안 숨을 못 쉬었으니 몰골이 초췌할 만도 하고, 그를 본 한스가 떨떠름한 듯 말하는 것도 당연했다.

더해, 두려움에 질린 듯한 눈빛을 띠는 것 또한 당연했다.

“ 가끔 이럴 때 마다 헬레나가 두렵게 느껴지시죠? ”

“ 두려움이라… 글쎄요. 애초에 저보다 아득히 귀하신 분이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다만, 대공님께서 던지신 질문이 저 남자를 처벌한 공작님의 모습을 묻는 것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생각합니다. ”

국왕은 진즉 황궁 전속 하인들의 안내를 받아 떠났으며, 헬레나나 엘렌 또한 한 발 먼저 오늘 하루 묵을 방으로 찾아갔다.

즉, 이 마구간에는 나와 한스 둘 밖에 없다는 뜻이다.

본래 이곳을 지키는 마구간지기도 내가 부탁해서 잠시 자리를 비켜 준 상태니까.

그렇기에, 한스는 그들을 앞에 두고 토해내기 어려운 속내를 덤덤히 입에 담고 있었다.

내가 지금이야 급 높은 귀족이 되었다곤 하나 원래는 자작가 사람인데다, 하인들과 함께 저택에서 잡일도 하며 쌓은 친분도 컸으니.

“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요. ”

“ 어휴, 감사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애초에 죽을 목숨을 저리 살려주신 것도 모자라 몸도 멀쩡하지 않습니까. 정신은 둘째 치고서라도, 저만하면 아주 자비롭다 할 수 있겠지요. ”

다른 귀족들이 했을 처벌보다 가볍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보다 훨씬 무거워 보이기도 했다.

몸이야 멀쩡하지만 평생 안고 살아가야 할 트라우마를 받았으니, 아마 최소 몇 년은 악몽 속에서 사는 기분일 터였다.

이걸 다르게 표현하자면 한 사람의 삶을 망가뜨렸다 할 수도 있겠지.

그럼에도, 한스가 말했듯 독을 먹이는 실수를 범하고도 사지 멀쩡히 돌아갈 수 있게는 됐으니, 그나마 다행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 뒤엔 약속이라도 한 듯 헬레나와 엘렌을 만나 무난하면서도 불편한 하루를 보냈다.

왕과 함께 제국 황제를 만나 인사를 나누기도 하고, 불편함과 묘한 느낌이 섞인 제국 인사들의 눈총을 받기도 했다.

서로 전쟁을 치른 지 얼마 안 되었고, 그 전쟁에서 나름대로 결정타를 먹인 우리가 찾아왔으니 그럴 수밖에.

“ …이리하여, 양 국은 서로 평화를 약속하기 위한 자리에서 다시 한 번 맹세하노니……. ”

해가 제법 높이 떠올랐을 무렵.

많은 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국왕과 제국 황제는 옥좌가 놓인 넓은 방에서 성공적으로 우호, 또 다른 말로 평화 조약을 맺었다.

제국 황제와 국왕이 번갈아가며 선언문을 읊고, 서로가 서로의 옥새를 찍어 만든 증서를 손에 든 채, 남은 손으로 악수를 하며 웃기도 했다.

마치 뉴스에서나 볼 법한 광경이었던지라 제법 신기한 느낌이었다.

“ 부디 이 평화가 길게 유지되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

“ 예. 반드시 그리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제 요청을 들어주셔서 다시 한 번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

공식적인 자리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상대가 황제다보니 국왕도 말을 높였다.

항복을 받을 때만 하더라도 자연스레 말을 놓았기 때문일까.

당연히 말을 높이기는 것이 맞다 생각하면서도, 뭔가 묘한 느낌이었다.

“ 자, 오늘을 축하하여 연회장에 자리를 마련했으니 모두들 부담 없이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가시죠. ”

황제가 허허 웃으며 연회를 하자니 거절할 수도 없어 얌전히 뒤를 따랐다.

오늘의 주인공이 국왕이기에 구석자리에 있어도 큰 문제는 없으나, 떠들썩한 자리 자체가 불편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여러 먹을거리나 음악을 하는 악단까지 불러 연주까지 시키는 자리였기에 일단 웃고 봤다.

헬레나나 엘렌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일 텐데, 무덤덤한 표정으로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고 있었으니까.

다만, 그렇다고 해서 친분을 쌓고자 많은 귀족들이 줄을 이어 다가오지는 않았다.

적으로 만난 것도 모자라 악명이 자자했기에 쉽사리 말을 걸 생각을 못하는 눈치였다. 그저 이 연회 자리가 만드는 분위기가 불편했을 뿐이다.

덕분에 부족함 없이 화려하고 즐기기 좋은 자리도 얼마든지 어색한 분위기가 흐를 수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 바라보는 눈길들이 영 심상치 않네. 앤더슨 자작도 우리를 멀리하는 것 같고……. ”

연회장을 둘러본답시고 잠시 따로 떨어져 있던 헬레나가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러고 보니 한쪽 구석에서 현 황제 일파로 보이는 귀족들과 대화를 주고받고 있을 뿐, 우리 쪽으로 다가올 기색 하나 보이질 않았다.

때에 따라서는 그 모습이 불편하고 보기 좋지 않다 생각할 법도 하겠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럴 수도 있겠거니 싶었다.

실수를 저지른 부하가 길고 긴 시간동안 모진 꼴을 겪고 풀려난 지 얼마 안 된데다, 전체적인 분위기도 뭔가 그랬으니.

“ 그럴 수밖에. 전쟁이 끝난 지 반년도 안 지났잖아.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 웃는 얼굴로 다가오는 사람이 더 수상하지 않을까? ”

“ 음… 그렇긴 해. 더구나 제국 귀족은 제국 귀족사회 안에서 살아가야 하니 더더욱 그렇겠지. ”

“ 그래. 우리야 잠시 지나가는 인연이라고 치면 그만이지만,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진 않을 테니까. ”

앤더슨이 우리에게 호의적인 편이라고는 하나, 결국 제국 귀족이라는 틀을 벗어날 수가 없다.

물론 그런 속사정이 없었어도 서운하다 생각지 않았다. 어차피 남의 나라 귀족이니만큼 건들지만 않으면 다행이라는 생각뿐이었다.

여태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별 사건 없이 평화롭게 지내다 끝냈으면 싶었다.

그러나 그 생각을 읽기로 한 듯, 황제가 나와 헬레나를 따로 불러 자리를 마련했다.

그것도 제법 늦은 시각에, 어느 아담한 방에서.

“ 앤더슨의 사람이 크나큰 실수를 했다고 들었는데, 그를 너무 늦게 알게 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

사석인데다 보는 사람도 없어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황제가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표정이나 몸짓을 보아하니 정말로 미안한 기색이 가득해 보였다.

단지 상대가 황제이기에 이런 몸짓과 표정마저 꾸며낸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지만, 설령 그렇다 해도 괜찮았다.

진심이든 가식이든 우리에게 고개를 숙인다는 결정과 행동이 결코 쉽지는 않아 보였기에.

“ 으, 으음… 제국의 황제께서 굳이 고개를 숙여 사과하실 것 까지는 없습니다. 잘못을 저지른 자도 적절하게 처벌했고요. 그러니 고개를 드시지요. ”

나는 입을 살짝 벌린 채 굳어버린 헬레나 대신 황제를 위로하며 고개를 들도록 했다.

만약 여기서 더 고개를 숙이며 석고대죄라도 하면 어쩌나 싶어 불안했는데, 다행히 내 말에 순순히 따라 주었다.

“ 정말 미안합니다. 도움은커녕 손질이 덜 된 감자를 주었다니,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독을 준 것과 진배없는 행위니까요. ”

“ 그 일은 앤더슨 자작과 마무리를 보았으니, 폐하께서 사과하실 일이 아니지요. 괜찮습니다. ”

“ 아닙니다. 자칫 우호는커녕 양국 사이에 커다란 불화가 피어날 수 있었던 것을, 공작과 대공의 자비 덕분에 조용히 넘길 수 있었습니다. 나로서는 몇 번을 감사하고, 또 사과해도 모자랄 지경이지요. ”

서로 물밑에서 도운 사이라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유난스럽게 호의적이라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당연히 척을 지는 것보다야 낫지만 참 부담스러웠다.

더구나 헬레나도 그렇게 생각하는 듯 가만히 입을 다문 채 반쯤 눈을 감고 있었다.

“ 경사스러운 일을 앞두고 피를 볼 수 없을 노릇이었으니까요. 그 때문에 바로 목을 베는 것보다 잔혹한 처사가 되긴 했습니다만… 어쨌든, 자작도 이런 우리 뜻을 잘 이해해 줬습니다. ”

“ 그 덕분에 성공적으로 조약을 끝마칠 수 있었습니다. 공작과 대공의 결정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

“ 예……. ”

여기서 뭐라 할 말이 있을까. 그냥 네 라고 답하는 것이 가장 무난할 듯싶어 적당히 말꼬리를 흐렸다.

그러다, 문득 앤더슨에게 전후사정을 들었다는 말이 번갯불처럼 뇌리를 스쳤다.

그 말은 즉 와인에 관해서 알고 있다는 뜻도 될 테니까.

“ 참. 그러고 보니 앤더슨 자작에게 사정을 들으셨다는데… 혹, 와인에 관해서도 들으신 바가 있습니까? ”

“ 와인…? 아. 물론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왜…? ”

“ 혹, 괜찮으시다면 폐하께서도 한 번 맛을 봐 주실 수 있겠나 싶어서요. ”

왕국 내부가 아니라 제국부터 판로를 넓힐지 모르는 것이 기묘하긴 했으나, 모처럼 찾아온 기회를 그냥 놓칠 수도 없을 노릇이었다.

일이 잘 풀릴지 말지는 제쳐두고라도, 일단 찔러는 봐야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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