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1화 〉 어쩌다보니...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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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더슨이 헬레나가 하는 말을 고스란히 받아들인 후. 국왕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조용하고도 꼼꼼하게 일을 벌였다.
괜히 국왕이 눈치라도 챘다가는 일이 더 시끄러워질 것 같다는 우리의 뜻을 헤아린 덕이다.
그렇게 먹을거리를 주었다던 앤더슨 자작 측의 하인을 찾기는 쉬웠으나, 그 다음이 문제였다.
정말로 실수인지, 아니면 사주를 받은 것인지, 혹은 개인적 원한에 의한 것인지 알아야 했기 때문이다.
“ 사, 살… 살려 주십시오…! 제, 제가 잘못했습니다! ”
왕국의 국경을 넘어 제국 영토 초입에 들어섰을 때, 한 사람이 마차 안에서 무릎을 꿇고 빌었다.
그는 한스에게 독 든 재료를 넘겨준 남자로, 평범한 생김새에 존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 살려 달라… 살려 달라……. ”
살려 달라. 헬레나는 싸늘하게 식은 눈빛을 띤 채 같은 말을 몇 번 중얼거리다, 숙인 고개를 들어 무릎 꿇은 존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본래 성질 같았으면 그 이유가 어떻게 되던 칸에 당장 칼침을 놓았겠지만, 약간이나마 화가 식은 덕에 침착한 모습을 보였다.
아마 예전처럼 독 때문에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기지 않고 무난히 넘어간 점이 컸던 덕이지 않을까 싶다.
다만, 그렇다 하더라도 좋게 넘어갈 생각은 아닌 듯싶었다.
“ 실수든, 고의든… 네가 독 든 재료를 넘겨 준 탓에 제 남편의 몸이 크게 상할 뻔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구태여 말할 것도 없겠지. ”
“ 으, 으으으……. ”
헬레나가 눈을 가늘게 뜬 채 째려보자 존이 식은땀까지 흘리며 온몸을 벌벌 떨었다. 그가 꿇어앉은 옆자리에 앉아있던 엘렌까지 압박하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보통 사람이 소드마스터나 전쟁에서 오래 구른 용병과 기 싸움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으니까.
“ 그래. 당장 죽어도 할 말 없을 만큼 커다란 죄라는 것을 잘 깨달은 모양이니 그 값을 치러야겠지. 다만, 그 전에 내가 묻는 질문에 순순히 답하라. 만에 하나 네놈의 답에 거짓이 한 방울이라도 섞여 있을 경우엔……. ”
“ 예, 예엣!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다, 다 말하겠습니다! ”
존은 질문에 답하면 무사히 살지도 모른다 생각했는지 아주 절실한 목소리로 외쳤다.
두려움에 질린 채 벌벌 떠는 것은 여전했으나 혹시 살지 모른다는 희망이 눈빛에 녹아들어 있었다.
마치 살려주겠다는 말을 한 적이 없음에도, 원하는 답을 들려주면 그렇게 해 주겠다는 교묘한 뜻이 녹아든 것만 같았기 때문이리라.
“ 좋다. 말해 보도록. 어쩌다 내 남편에게 독을 먹이게 되었는지, 아주 상세히. ”
헬레나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존의 입술이 열렸는데, 막상 자초지종을 듣고 보니 허탈한 느낌이 들었다.
암살기도부터 시작해서 단순 실수까지 생각해 두긴 했으나정말 단순한 실수라는 결론이 나왔기 때문이다.
경위는 이렇다.
일단 싹 난 감자에 솔라닌이라는 독이 있는데, 보통 싹이 난 부분을 깔끔하게 도려내면 아무 문제없이 먹을 수 있다.
이곳 사람들은 그 독이 솔라닌이라는 것은 모르지만, 싹이 난 부위에 독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감자의 처리가 깔끔하기 못한 것이 몇 개 섞여 있었는데, 존이 그걸 모르고 우리 쪽에 줬다는 이야기였다.
일단 겉으로 보긴 깔끔해 보였으니까.
물론 존이 말하는 바를 온전히 믿을 경우 낼 수 있을 결론이지만, 의심할 이유가 없어 보였다.
헬레나와 엘렌이 가하는 압박, 달리 말하면 살기 속에서 숨이 턱턱 막혀가고 있는 와중 거짓말이 나올까?
나는 아니라고 할 수 있었다.
더구나, 나보다 눈썰미가 뛰어난 두 여자가 아무 말도 않는 걸 보니 이 결론이 더욱 확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저 말이 사실이라면 내 부주의 탓이 없다고는 말 못할 것 같은데…? ”
설마 싹 난 감자가 있었고, 그 감자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 생각하기도 어려웠지만… 그렇다 해서 내 잘못이 없다고도 말하기 어려웠다.
이 대륙 기준으로 보면 당연히 죄가 없지만, 요리하는 사람으로서 재료 확인을 못했다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래서 헬레나에게 존에 대한 처벌 수위를 내려달라는 뜻을 은근히 돌려 말하는 식으로 전했다.
“ …내일까지 생각을 좀 해 볼게. ”
그 덕분인지, 헬레나가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며 짧게 한숨 쉬었다.
생각을 해보겠다는 말이 꼭 긍정적인 결론을 낸다는 뜻은 아니지만, 날 선 기색이 가라앉은 모습을 보니 희망이 아예 없지는 않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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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우……. ”
잠시 생각을 달라고 한지도 몇 시간. 헬레나는 사방이 황량한 야영지에서 저물어가는 해를 바라보며 짧게 한숨 쉬었다.
그 이유가 어찌되었던 당장 목을 찔러 죽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죽이지는 말아줬으면 하는 지온의 부탁을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이성과 본능 사이에서 오는 괴리. 헬레나가 지금 한숨을 쉬는 이유이자, 좀처럼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이유였다.
“ 이걸 어떻게 하면 좋을까. ”
“ 글쎄요. 일단 대공님이 죽이지는 말라 부탁하셨으니 그냥 죽일 수는 없지 않을까… 싶네요. ”
이곳 사람들 대부분이 저녁 준비나 텐트 마련 등으로 분주하나, 한가한 이 또한 있었다.
가장 귀빈으로 대접받는 왕이 그러했으며, 그를 호위하는 헬레나가 그랬으며, 그 헬레나가 불러서 뒤를 따르게 된 엘렌이 바로 그랬다.
“ 설령 감자 손질을 제대로 못해 생긴 문제라 하더라도 독은 독이야. 더구나 감자에 깃든 독도 얕볼 수가 없잖아. 그런 독을 먹였는데……. ”
“ 물론 대공님께서 그 독 때문에 고통 받고 계셨다면 진즉에 목이 달아나고도 남았겠죠. 하지만 매직 아이템 덕분에 그럴 일 없이 잘 지나가긴 했죠. 다만, 그래서 처벌 수위를 잡기가 애매한가 봐요? ”
매직 아이템 때문에 그날처럼 끔찍한 광경을 눈에 담지 않고 넘길 수 있었음에는 감사한다.
그래도 독이 든 무언가를 줘버린 벌은 받아야 한다.
헬레나는 속으로 존을 어떻게 벌할지 고민하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긴 해도 일단 벌은 줄 생각이야. 설령 실수라도, 아니… 오히려 실수이기에 얌전히 넘어가서는 안 돼. 특히 독이라면 더더욱. ”
“ 그야… 그렇긴 하죠. ”
헬레나의 입으로 지온이 어렸을 적 벌어진 일을 들었기에 그 마음을 잘 안다.
엘렌은 만약 자기가 헬레나였어도 원흉의 피를 반드시 봐야 직성이 풀릴 터라고 확신하며 쓴 웃음을 보였다.
다른 때라면 몰라도 우호 조약을 치르러 온 사절단이 제국이었다는 점과, 그 수행 중 생겨난 소홀함이 하필 독으로써 드러났으니까.
그럼에도, 엘렌은 겉으로나마 피를 보는 일은 최대한 피해야한다고 말했다.
일을 시끄럽게 만들고 싶지 않다.
더해, 조용히 끝맺고 싶다는 지온의 속내를 들었기 때문에.
“ 그래도 아까 전에도 말했듯, 피를 보는 일은 반드시 피하셔야 해요. 내년에 아이도 가지실 계획이시잖아요. ”
“ …아이. ”
아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헬레나의 뇌리에 지온이 했었던 말들이 떠올랐다.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하나 많은 목숨을 빼앗고 피를 뒤집어쓴 몸으로 아이를 가질 수는 없으니, 내년으로 미루자던 말을.
“ 그래요. 아이요. 남은 날짜 동안 몸을 깨끗이 해서 아이를 갖고 싶다고,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
“ 그랬지. 머리에 열이 오른 나머지 깜빡 잊고 있었어. ”
“ 지금이라도 기억나셨다니 다행이네요. ”
대공님께서 잘 다독여 아이에 대한 생각을 바꾸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두 번째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구나.
엘렌은 새삼 헬레나가 아이를 낳아도 그만한 모성을 가질까 생각했으나, 자기도 남 말할 처지는 못 된다는 생각에 피식 웃었다.
스스로 낳은 아이를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야 당연하지만 지온에게 주는 사랑보다 못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 깨끗하게, 깨끗하게……. ”
헬레나는 여전히 불만족스럽기는 하나, 지금으로서는 죽이지 않고 고통만을 주어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 최선이라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그 결론을 떠받치기 위해 어떤 식으로 하면 좋을지 고민했다. 시선을 아래로 떨군 채 깨끗하게 라는 말을 연신 몇 번이고 되뇌면서.
그러다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들었다.
“ 엘렌. 네가 좀 도와줘야 할 것 같아. 많이 번거롭기도 할 테고. ”
“ 뭔가 좋은 생각이 떠오르신 것 같네요. 말씀하세요. ”
엘렌이 호기심 가득한 기색으로 묻자, 헬레나가 기다렸다는 듯 머릿속에 정리한 생각을 쏟아냈다.
피를 묻히지 않으면서도 충분히 벌을 주며, 더불어 가슴에 쌓인 울분도 털어낼 수 있는… 헬레나가 생각할 수 있을 최고의 방법이었다.
세상에. 엘렌은 헬레나의 설명을 귀담아 들은 뒤, 입을 살짝 벌리며 물었다. 누가 봐도 놀란 기색이 역력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 와… 숨통을 직접 막는다는 생각은 대체 어떻게 하신 거에요? ”
“ 마침 네가 바람, 더 나아가 공기를 다룰 줄 아니까 떠오른 거야. 아무튼 아침부터 밤까지 계속해야 할 텐데… 괜찮겠어? ”
“ 그리 힘든 일은 아니니 괜찮을 거라 생각해요. 잠깐 쉬면서 해도 괜찮을 것 같고요. ”
아직 제국 수도에 이르기까지 긴 길을 지나야 할 테고, 그 기나긴 시간 동안 숨통이 끊겼다 트였다 하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으리라.
어찌 보면 온 몸을 칼끝으로 찌르는 것만큼, 또는 그보다 더한 괴로움을 안겨 줄 것이 분명했다.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이상 숨을 쉬지 않을 수가 없는데, 그렇지 못할 경우 오 분도 채 안 되어 죽음을 맞이하고 마니까.
물론 사람에 따라 오 분 이상을 숨 쉬지 않고도 버티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다.
초인이라 할 수 있을 헬레나가 그러했으며, 당장 바람을 다루며 존을 괴롭힐 엘렌 또한 그랬다.
하지만 그 괴롭힘을 받을 존은 그렇지 못한 보통 사람이기에, 그 기준을 잘 세워 숨을 붙여 둬야했다.
자칫 잘못하면 정말로 죽을 지도 모를 일이었으니.
“ 숨을… 못 쉬게 한다고? ”
“ 응. 당장 오늘부터 그렇게 하기로 정했어. 제국 수도에 발을 들일 때 까지 하루하루가 고통스러울 거야. ”
의논을 마치고 난 뒤. 지온은 저녁 식사 자리에서 헬레나가 내린 결정을 듣고 내심 헉 소리를 냈다.
잠시 엘렌과 단 둘이서 한적한 곳에 떨어져 이야기를 나누고 있기에 뭔가 일을 낼 거라 생각은 했지만, 그 결론이 기상천외했던 탓이다.
그럼에도, 헬레나가 분노를 꾹 눌러가면서 내린 결론이기에 반대할 수도 없을 노릇이었다.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할 수도 없거니와, 이렇다 할 만 한 대안도 없는 이상 더더욱.
“ 그런 고문을 몇 시간이나 하면 몸에 큰 무리가 갈 거야. 알지? ”
“ 응. 잘 알아. 그래서 엘렌더러 잘 신경 써 달라고 해 줬어. 나랑 마찬가지로 화가 많이 났었으니까, 아주 적극적으로 따라 줄 거야. ”
얼굴에 흠뻑 젖은 종이를 씌워 숨을 막는 고문이 있다던데, 그것을 마법으로 간편하고 악랄하게 재현할 줄이야.
지온은 그 발상에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면서도, 몸이 망가지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생각했다.
크나큰 마음의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는 결과를 맞이하겠지만, 결국 대가를 치러야 했으니까.
“ …그래. 네 뜻이 그렇다면 나도 아무말 않을게. 대신, 절대로 죽이면 안 된다. ”
“ 알아. 목숨을 뺏으면 결국 손에 피를 묻히는 것과 다를 바 없으니까. 마음 푹 놓고 기다려……. ”
헬레나는 지온의 손을 꼭 잡고 웃다, 아차 싶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 참. 그 놈이 고통 받는 모습을 지온에게 보이고 싶지는 않으니… 당분간 앤더슨 자작이나 국왕의 마차에 탈 수 없을까? ”
지금 당장이야 허락한다 하더라도, 자비심이 깊은 지온이 바닥에서 뒹굴 존의 몰골을 보면 생각을 바꿀 지도 모를 일이다.
헬레나는 그리 생각했기에 지온이 볼 수 없는 곳에서 죽어 마땅한 놈이 고통 받는 모습을 바라볼 생각이었다.
다만 지온에게 있어 앤더슨 자작이나 국왕의 마차에 타는 것이 더욱 고역이었기에, 한스 옆 마부석에 오르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 마부석에 가 있을게. 아무래도 자작이나 국왕과 같은 마차를 타는 건 영 불편해서. ”
“ 음…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알았어. ”
마부석이 썩 편하지는 않을 테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음이 불편해질 소굴에 밀어 넣을 수도 없을 노릇이지.
헬레나는 지온의 결정을 존중하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곧 마차 안에서 뒹굴 존의 얼굴을 상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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