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0화 〉 어쩌다보니... #4
* * *
“ 어…? ”
아주 약간이지만 마나가 빠져나가 목걸이로 흘러 들어갔음을 느꼈다.
한스가 가져 온 재료를 가지고 전을 만들고, 반죽 간을 보다가 생긴 일이다.
목걸이가 알아서 마나를 빨아들였다는 건 해독을 했다는 뜻인데, 다르게 말하면 음식에 독이 있었다는 뜻이다.
누가 독을 탔을까?
아니, 애초에 독을 타려고 생각하고 탄 건 맞을까? 외지에서 독을 탄다는 뜻은 자기도 죽기를 각오했다는 뜻일 텐데.
물론 그걸 다 각오하고 준비한 것도 있겠지만, 정말 우연찮게 터진 일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다만, 지금은 싸늘하게 식다 못해 얼어가는 헬레나부터 달래야 할 듯 싶었다.
“ 헬레나. 이리 와. ”
여기 앉으라는 뜻에서 깔고 앉은 통나무의 옆을 톡톡 두드리자, 헬레나가 순순히 다가와 앉았다.
검 손잡이를 만지작대는 것이나, 무저갱 같은 눈빛이 꼭 피를 봐야 가라앉을 것이라 외치는 느낌이었다.
더구나 은연중에 주위를 압박하고 있어 공포에 질린 표정을 지은 이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마스터가 내는 압박이니 그럴 수밖에.
슥.
나는 헬레나의 허리를 끌어안아 품에 꼭 안은 채, 모닥불을 바라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몹시 화가 난 와중에도 순순히 안기는 모습을 보니 희망이 보인 것만 같았다.
“ 난 괜찮아. 이브가 준 매직 아이템 덕분에 아무렇지도 않아. 그러니 화부터 가라앉히자, 응? ”
사람들의 눈이 많은 곳에서 보여주기엔 너무 격 없는 행동이 아닐까 하는 우려도 있겠지만, 헬레나가 검을 뽑는 것보다야 나았다.
자칫 잘못했다간 이곳 사람들을 전부 잡아두고 고문 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되면 우호는 그저 개소리로 치부되어 없던 일이 될 테고, 그 결과 험악한 꼴이 되겠지. 그건 막고 싶었다.
작게는 내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고, 크게는 유혈사태에 이르지 않기 위해서.
“ 자. 천천히 숨쉬고, 내쉬고……. ”
“ 후우, 후우…….. ”
내가 독 때문에 죽을 뻔했던 일이 여전히 마음에 걸리기에 평소보다 더 예민한 모습도 이해가 간다.
헬레나는 모르지만, 아마 좀비마냥 질긴 몸뚱이가 아니었다면 진즉 중독으로 죽었을 테니까.
그래도 내 품에 안겨 점점 안정을 찾아가긴 하는지, 숨을 가쁘게 내쉬며 분을 식히는 모습을 보였다.
“ …못난 모습을 보여서 미안해. 그래도… 혹시나 싶은 마음에 너무 불안했어. ”
화가 다 가라앉았는지, 헬레나가 한숨을 쉬며 나를 바라봤다.
다행히 눈동자에 빛이 돌아와 있어 급발진 할 것 같지는 않았다.
“ 못난 모습이라니. 나로서는 이렇게 화를 내줘서 고마울 지경인데. ”
“ …정말? ”
“ 그럼, 정말이지. 그리고 이렇게 화까지 참아주니 안 고마울 수가 있을까. 그러니 너무 신경 쓰지 마. ”
헬레나는 응이라고 짧게 답한 뒤, 기운이 빠진 듯 내 어깨에 등을 기댔다. 이로서 큰 고비를 넘긴 셈이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엘렌도 헬레나와 비슷하게 화가 난 기색이었지만, 내가 헬레나를 달래는 모습을 보고 차분해졌으니… 따로 손 쓸 필요는 없어 보였다.
“ 한스. 이리 와 봐요. ”
헬레나가 한스부터 부르는 것을 보니 정말로 화가 가라앉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평소보다 고압적인 기색이 배인 점이야 어쩔 수 없으나, 차분하게 사람을 불러 조사할 생각을 몸으로 보여주고 있었기에.
“ 예, 예엣…! 지금 가겠습니다! ”
워낙 분위기가 안 좋게 흘러가는 것을 한스도 아는지 쪼르르 달려와, 헬레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마차에서 여기까지 거리가 별로 안 된다고는 하나 눈 깜짝할 사이에 오는 걸 보니 어지간히 겁에 질린 모양이었다.
“ 우선 한 가지 물어볼게요. 오늘 아침에 먹을 재료를 준비해 온 게 한스라고 알고 있는데, 맞죠? ”
“ 마, 맞습니다. 미리 보존해 두었던 말린 야채나 고기를 꺼내 왔었지요. ”
“ 그 외에 다른 것은요? ”
아이템이 해독을 했다는 사실이 너무 거창하게 들려 잊기 쉽지만, 단순히 식중독을 일으키는 상한 음식도 독이 될 수 있다.
그 경우에는 재료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우리의 책임도 있으니, 한스에게 사과하고 조용히 넘어갈 법도 했다.
그러나. 내 예상과는 다르게, 한스의 입술에서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 어, 그것이… 제국 귀족님 측에서 사람을 보내 재료를 주긴 했습니다. 새하얀 감자 같은 놈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
“ 아, 기억나요. 저는 그게 우리가 들고 온 감자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봐요? ”
나는 전을 만들기 위해 갈아버렸던 감자를 떠올리며 손뼉을 탁 쳤다.
스프만 먹기 물린 나머지 감자를 갈아 전을 부칠 반죽을 만들었는데, 그게 우리 감자가 아니었다는 말을 들은 탓이다.
설마 앤더슨이 재료를 줬을 줄은 몰랐지.
처음에는 껍질을 까고 씻어두는 등 손질이 깔끔하게 되어 있기에 그저 고맙다는 생각뿐이었는데… 이게 이렇게 되네.
“ 예, 예에. 그렇습니다. 그쪽에서도 생색내는 것이 아니니만큼 따로 말은 하지 말라는 요청이 있어 조용히 건네 드렸습니다만, 그게 이렇게 될 줄은……. ”
“ 그렇군요. 잘 알겠습니다. 물러나도 좋아요. ”
본래 네 잘못이 아니라며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는 편이었으나, 상황이 이러니 물러가라는 말 뿐이다.
개인적으로는 한스의 잘못이 크다 생각하진 않지만, 아마 한스가 건네받은 재료를 확인했으면 이런 일이 없었으리라 생각하는 모양이다.
한스도 그를 알기에 살았다는 듯 가슴을 쓸어내리며 급히 자리를 떴다.
속내가 뭔지는 몰라도 표정만 보면 죽다 살아난 사람이 따로 없었다.
그럼에도 내심 억울하기는 할 것 같았다.
그 억울함이 어디서 왔는지, 또 정말로 억울한 것인지도 알 수 없지만… 우울한 것 하나만큼은 확실해 보였다.
기미를 보는 사람이 아니라 그냥 마부니까.
“ 조금 어수선해지긴 했지만… 일단 밥부터 먹자. ”
나는 상했는지 독이 들었을지 모를 반죽을 치우고, 직접 마차에서 재료를 꺼내와 간단히 고기를 굽고 몇 가지 야채를 끓여 국물을 냈다.
이것도 어찌 보면 스프라 할 수 있겠지만 일단 국물이니만큼 마시기 쉽고 스프 특유의 끈끈한 감촉이 덜해 상쾌했다.
급히 끓인 것 치곤 맛도 괜찮았고.
물은… 엘렌이 정령마법으로 만들었기에 걱정 없었다.
“ 엘렌. 먹기 전에 미안한데… 이걸 한스에게 따로 전해줄 수 있을까? 그리고 너무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고 전해주면 좋겠어. ”
“ 네. 알겠습니다. ”
엘렌은 별 거 아니라는 듯 내가 주는 그릇을 받아들고 마차 쪽으로 걸음을 옮겼고, 헬레나는 잠시 멀어지는 엘렌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불편한 기색을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한숨까지 쉬며 눈빛까지 흔들리는 모습을 보니 아차 싶었나보다.
“ 앤더슨을 불러 자초지종을 캐낸 뒤에, 위로라도 해 주자. 크게 자책하다보면 속병을 앓게 되잖아. ”
“… 응. ”
헬레나가 속병과는 연이 깊은 사람이라 그런지 몰라도, 한스에 대한 연민이 점점 커져가는 것이 눈으로 보였다.
보통 잘못을 저지르고 자책하는 사람들이 헬레나와 같은 얼굴빛을 띠곤 했으니까.
나는 헬레나의 답을 들은 뒤, 곧 돌아온 엘렌과 함께 아침을 먹자마자 앤더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국왕을 모시고 출발준비를 하는 모습에서 제법 분주함이 느껴졌지만, 그를 배려할 만한 상황이 아니라 유감이었다.
“ 아. 공작님과 대공님이시군요. 어젯밤은 잘 주무셨습니까? ”
앤더슨은 우리가 말을 걸기도 전에 가볍게 고개 숙여 인사를 건넸다.
바쁜 와중에도 인기척을 눈치 채고 반응하는 모습을 보니, 은근히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예. 야외에서 자는 것이 익숙하기에 불편함 없이 잘 잤습니다. ”
“ 그러시다니 다행입니다. 그런데, 혹 하실 말씀이라도…? ”
딱딱하게 굳은 표정만 봐도 어제와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알았는지, 앤더슨이 다소 긴장한 기색을 띠며 물었다.
그래서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같은 마차에 타고 싶다 제안했고, 앤더슨도 이를 받아들였다.
“ 도, 독이라니… 그게 정말이십니까?! ”
잠시 후.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여태껏 벌어진 일을 다 말하자, 앤더슨이 새하얗게 질린 낯빛을 띠며 외쳤다.
왕국을 채 벗어나기도 전에 매직 아이템의 해독 기능이 작동했다니 놀랄 수밖에.
물론 그의 입장에서 보면 없는 말을 지어낸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도 할 수 있겠으나,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지 않을까 싶다.
덤으로 손해가 더 크다는 것도.
“ 그렇습니다. 아까도 말했듯, 저희 쪽 사람이 자작님께서 주신 식재료를 가지고 왔고, 그 식재료를 가지고 요리를 한 뒤, 맛을 보다 독이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고의인지, 혹은 단순히 재료를 부주의하게 다룬 것인지는 모르겠지만요. ”
“ 으음…!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생기다니……. ”
이게 정말 현실인가 싶겠지.
나는 침음을 흘리며 숙인 머리를 싸매는 앤더슨의 뒤통수를 보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얼마나 괴로워할지 훤히 보이니 뭐라 할 말도 없었다.
거기다 내 눈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뒤통수가 보통 남자보다 엷다는 느낌이…….
“ …맞는 것 같은데. ”
아무 말도 안했는데 내 속을 읽기라도 한 듯, 헬레나가 내게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가 앤더슨의 뒤통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는 걸 눈치 챈 듯, 헬레나 또한 그의 뒤통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새삼 전쟁이 이토록 참혹한 결과를 낳았음에 한탄하며, 고개 숙인 앤더슨을 일으켜 세웠다.
귀족이라면 누구나 어느 정도 가식적인 겉면을 갖고 생활하긴 하지만, 저 모습은 아무리 봐도 가식이 아니었다.
그러니 직접 말릴 수밖에 없었다. 만약 말리지 않는다면 몇 시간이고 고개 숙인 채 한숨만 쉴 것 같아서.
“ 죄송합니다. 못난 꼴을 보이고 말았습니다. ”
“ 갑자기 이런 일이 생기면 누구나 혼란스러울 수 있지요. 이해합니다. ”
괜찮다는 말 대신 이해는 한다.
즉, 네 처지를 감안은 해 주겠지만 그냥은 안 넘어가겠다는 뜻이다.
앤더슨도 그 속내를 깨달았는지 우울했던 기색을 걷어버리고, 묵직하기 짝이 없는 표정을 드러낸 채 입을 열었다.
“ 오늘 야영지에 도착하는 대로 데려온 사람들을 모두 조사하겠습니다. 그래서 범인을 밝혀낼 경우……. ”
“ 자작님. ”
한창 입을 여는 사람의 말을 끊으면 예의가 아니지만, 헬레나는 지금 그런 예의를 차릴 상태가 아니다.
어르고 달래 마음을 가라앉혔다고는 하나 여전히 화가 가라앉지 않았기 때문이다.
차분하지만 서릿발 같이 싸늘한 느낌이 드는 목소리가 그 증거였다.
앤더슨도 목소리에 담긴 싸늘함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그저 긴장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 예… 말씀하시지요. ”
“ 물론 자작님께서 일을 잘 처리하시리라 믿고 있지만, 그 이유가 어찌되었던 지온이 독을 먹은 건 변함없는 사실입니다. ”
“ …예, 그렇지요. ”
“ 그렇기에 식재료를 건네 준 인간을 잡고 그 자초지종을 묻는 것이 당연하고, 그 처벌 또한 당연하겠지요. 하지만……. ”
그것만으로는 너무도 부족하다고 헬레나는 말했다. 눈을 가늘게 뜬 채, 앤더슨을 죽일 듯이 노려보면서 말하니 그 날카로움이 남달랐다.
정작 눈빛을 받는 당사자가 아닌 나마저 순간 움찔할 정도였기에 더 말할 것도 없었다.
“ 범인을 찾으면 그 신병을 제게 넘겨주세요. ”
“ 공작님께서… 직접 처벌하실 생각이십니까? ”
“ 예. 다른 건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저는 독에 무척 민감한 사람이라서요. 부탁드립니다. ”
부탁이라고 말은 하는데, 압박 주는 모습을 보면 명령과 다를 바가 없었다.
더해 앤더슨을 못 믿겠다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자기 손으로 처벌을 하겠다는 뜻이 강하게 느껴져, 무심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 예… 알겠습니다. 이번 일을 일으킨 범인을 찾게 되면 반드시 넘겨드립니다. ”
“ 고맙습니다. 그리고, 이번 일이 벌어진 데에는… 자작님의 책임도 어느 정도 있다는 것을 아시지요? 억울하신 마음은 이해가 가지만……. ”
“ 예. 그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만약 대공께서 목에 걸고 계신 목걸이가 없었다면 큰 사단이 났을 테니… 원하시는 바를 말씀해 주십시오. ”
본래 이런 말을 꺼내기가 어렵고, 얼마나 뜯길지 모르기에 꺼내서도 안 되는 말이지만, 그런 말을 꺼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한 나라의. 심지어 막 우호조약을 맺고자 하는 공작급에 해당하는 귀족이 독을 먹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설령 앤더슨이 황태자, 지금 황제 파벌에 몸담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 일이 큰 파장을 일으키는 순간 등골이 무너질 듯한 큰 책임이 따를 테니까.
다만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런 밑밥을 깔았을까 하고 생각하는 동안, 그 답이 헬레나의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 음……. 자작께서 알고 계실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영지에서는 다크엘프가 기른 포도로 와인을 만들어 팔고 있어요. 그 와인을 사주셨으면 좋겠네요. ”
“ 다크엘프가 만든… 와인입니까? ”
“ 네. 지금은 생산량이 그리 많지 않고, 대부분을 우리 영지에서 소비하는 만큼 양이 많지는 않겠지만… 늘어나면 늘어나는 대로요. 물론 싸구려가 아니라 그만한 질을 보장하니, 맛이 좋을 겁니다. 단지 인상이 안 좋을 뿐이지. ”
한 번 팔아볼 생각으로 와인을 들고 오기는 했는데, 설마 지금 그 이야기를 꺼낼 줄이야.
나는 헬레나의 상업적인 태도가 무척 놀라워 눈을 약간 크게 떴다.
상업도시를 다스리는 앤더슨이 주기적으로 와인을 사고, 그 와인이 마음에 들면 판로가 점점 넓어질 가능성이 보였다.
지금 당장이야 그 시작이 좋지 않아 찝찝하지만, 결국 다 지나갈 일이니 괜찮지 않을까 싶다.
“ 아시겠지요? ”
앤더슨이 대답을 않자 헬레나가 재촉하듯 한 마디 했다.
은근한 압박감이 실려 있어, 자칫 거부했다 죽을 지도 모른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 예. 공작님의 뜻을… 받아들이겠습니다. ”
고로, 궁지에 몰린 앤더슨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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