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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기둥서방이 되었다-168화 (168/192)

〈 168화 〉 어쩌다보니... #2

* * *

그 날 내기에서 이긴 여자는 엘렌이었고, 그 탓에 헬레나가 제법 아쉬워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했다.

사실 시간으로 따지면 몇 시간도 안 되었으니 잊어버릴 수가 없었다.

잊어버리면 그게 더 문제지.

“ 벌써 옷 갈아입을 때가 됐나봐. ”

오전 작업을 끝내고 한 숨 돌리고 있을 무렵, 방 옆 테라스에 앉아 있던 헬레나가 조용히 눈을 감은 채 중얼거렸다.

다소 뜬금없기는 했지만 피부에 닿는 바람이 시원해졌으니 그렇게 느낄 만도 하다 싶었다.

조만간 시원한 바람이 차가운 바람이 될 테니까.

더해, 정원을 꾸미는 식물 몇몇도 샛노란 빛을 띠고 있었고.

“ 그럴 만도 하지. 시간이 워낙 정신없이 지나갔잖아. 특히 전쟁 때문에. ”

“ 응. 그래서 화가 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해. 그게 다 황제가 미치는 바람에 생긴 일이라 생각하니……. ”

헬레나가 진절머리 난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 쉬는 동안, 나는 혹시 또 비슷한 일이 일어날까 하는 생각에 약간 답답함을 느꼈다.

본래 세상에 간섭하기 어렵다고 힙노스에게 듣기는 했으나, 아예 없다는 뜻은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신탁 정도면 상당히 직접적으로 개입한 축에 속하니 이제 별 일은 없을 듯싶었다.

“ 그래도 잘 끝났으니까 그나마 다행이긴 해. ”

“ 그건 그렇지만 새삼 그렇게 떠나간 시간이 아쉬워서 나도 모르게……. ”

우뚝. 헬레나는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더니, 테라스와 방을 나누는 큰 창문을 열어젖혔다.

말없이 창문을 열어젖히고 방으로 발 들이는 모습이 묘하게 긴장감 있어 보였으나, 사실 이렇게 긴장할 이유가 없었다.

이제는 몹시 익숙해진 하인 중 한 사람의 기척임을 알고 있을 테니.

똑똑.

헬레나는 문 두드리는 소리에 이은 실례합니다, 라는 말이 들려오기 전에 조용히 방문을 열었다.

확 열어젖히면 바깥에 있던 사람이 깜짝 놀랄 것 같았기 때문이리라.

“ 아, 공작님…! ”

그럼에도 대답도 하기 전에 문을 열어젖힌 것이 놀라웠던지, 하녀 한 사람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낮은 목소리로 외쳤다.

“ 네, 저에요. 아직 점심 식사를 하기엔 시간이 약간 남았는데… 뭔가 급한 일이라도 있나요? ”

“ 네, 네엣! 다름이 아니라 집사님께서 이 편지를 전해달라고 하셔서…! ”

하녀는 당장 말을 심하게 더듬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긴장했는지, 떨리는 손으로 편지 하나를 내밀었다.

헬레나보다 한 발 늦게 문 쪽으로 다가가 확인해 보니 붉은 밀랍에 왕실의 문장이 찍힌 편지였다.

축제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무슨 일인지.

나는 헬레나나 나를 부르거나, 또 어떻게든 부리려 할 국왕의 얼굴을 떠올리며 속으로 한숨 쉬었다.

헬레나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표정이 좋질 않았으나, 다행히 하녀가 그 표정을 눈에 담지는 못했다.

편지를 전하자마자 황급히 고개를 숙이곤 도망치듯 떠나간 덕이다.

“ 제발… 별 일 아니었으면. ”

헬레나는 편지를 손에 쥔 채 기도하듯 두 손을 모으며 중얼거리다, 마른 침을 꿀꺽 삼킨 뒤에야 편지 봉투를 뜯었다.

누가 보면 폭발물이라도 다루는가 싶을 정도로 조심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래, 경우에 따라 폭발물이 될 수도 있지.

나는 헬레나의 어깨 너머로 글자가 제법 빼곡히 적힌 편지를 읽어 나가다, 결국 한숨을 참지 못해 밖으로 토해내고 말았다.

때 아닌 잔치도 아니고 이게 무슨 꼴인지 원.

“ 제국… 이 망할 것들. ”

헬레나가 차가운 목소리로 제국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냈지만, 사실 제국의 잘못이라 보기는 어려웠다.

선전포고문이 적힌 것도 아니었으며, 그렇다 해서 전과 같이 군량과 군사를 모으는 등 수상쩍은 움직임이 있다는 내용도 아니었다.

그저, 우리 왕국 측 국왕과 화친 조약을 맺고 싶다는 이야기였을 뿐.

“ 지온. 나… 꼭 가야해? 가기 싫은데……. ”

가기 싫은 마음이야 이해는 하지만, 얼마나 가기 싫었는지 앓는 소리까지 내며 내게 안겨들었다.

그렇잖아도 조만간 기사단 훈련이 예정되어 있어 차곡차곡 준비하는 중인데 일이 또 겹치니 싫을 만도 하다.

물론 나 또한 일이 겹치는 것이 싫지만, 국왕이 직접 찾아오라 명령했기에 거부할 수도 없을 노릇이었다.

안전이라는 명분까지 내세웠기에 더더욱.

“ 그래그래. 착하지, 착하지. ”

나도 가기 싫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최대한 내색하지 않고 헬레나를 어르고 달랬다.

특별한 사정이 있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 거절했다가 무슨 일이 생길지… 상상하기도 싫었다.

.

“ 미안하오. 내 그렇잖아도 바쁜 공작을 이리 부르고 싶지는 않았으나, 사안이 사안인지라……. ”

“ 전하께서 사과하실 일이 아니니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 화친을 청한 제국을 날카롭게 거절할 수도 없었을 테니까요. ”

며칠 뒤. 나와 헬레나는 알현실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미안해하는 국왕과 얼굴을 마주하고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듣자하니 제국은 황제가 물러나고 황태자였던 리차드가 새 황제가 되었다고 하는데, 요 몇 달이라는 시간 동안 많은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우선 군을 물린 뒤 배상 책임을 두고 큰 회의를 나눴으나, 의외로 황태자가 주도하여 그 부담을 공평하게 나눴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전쟁을 주장했던 주전파 세력을 압박해 그 크기를 줄이기 위한 시작에 불과했다.

왜 할 필요도 없는 전쟁을 주도적으로 부추겨 참상을 불러일으킨 놈들이 더 큰 책임을 지지 않는가, 하는 불만부터 그들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까지.

시간이 갈수록 목을 죄는 듯한 압박에 주전파 세력이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으나, 결국 공허한 외침으로 끝났다고 한다.

큰 책임도 지지 않은 주제에 욕심만 그득하다는 식으로 밀어붙이니 어찌할 수가 없었다고.

“ …그렇잖아도 제국 내에서 흉흉해지던 민심에 불안하던 세력이 제법 있었고, 황태자는 그 민심을 교묘하게 다루어 목표를 이뤘다 하더이다. 그에 관한 자세한 일은 굳이 조사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아 놔두었소만,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하오. ”

“ 예. 그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정세를 파악하는 데에 문제가 없다면 그것으로 충분하겠지요. ”

나는 국왕의 입에서 여태껏 제국에서 벌어진 일을 들은 뒤, 간단히 한 마디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우리 쪽에 호의적이었던 황태자이기도 하고, 세세한 의도나 움직임 하나하나까지 조사하는 건 낭비가 너무 심하다.

다시 전쟁을 하기 위함이라면 모를까, 그저 남의 집안싸움에 발 들일 이유가 없었다.

“ 아무튼, 그 후에 새로이 황제에 오른 황태자가 화친을 맺자고 사신을 보내왔소. 제법 예물도 풍성하게 준비해서 왔더군. 이미 잘 아는 변명과 함께. ”

“ 전쟁을 걸어 온 당사자가 화친을 맺자 했으니… 주변국이나 우리 왕국의 영주들도 제법 어이없는 시선으로 볼 법 하겠군요. ”

“ 그래도 명분 자체는 좋은 것이기도 하고, 조건도 나쁘지 않으니 거절하기도 그렇더군. 그래서 받아들이기로 결정을 내렸소이다. ”

단순히 생각해보면 뭣 모르고 덤볐다 된통 깨지고,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말하며 비는 셈이라 나쁠 건 없었다.

그저 만에 하나 그를 빌미로 뒤통수를 칠 놈들이 나타날 가능성이 높으니, 그에 대비하고자 헬레나를 데리고 가고 싶었겠지.

실력만 보면 흠 잡을 데가 없기도 하니까.

다만, 헬레나만 데리고 가기엔 스스로 고삐를 잡을 수 없다 판단했기에 나까지 끌어들인 것이 아닐까 싶다.

“ 예. 저도 받아들이는 것이 옳다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국 수도까지 가기엔 열흘이 넘게 걸릴 터인데, 괜찮으시겠습니까? ”

“ 음. 사실 나도 그 점이 약간 걱정이기는 하오만… 제국 측에서 필요한 준비를 전부 해 주기로 했으니, 그에 따라 태도를 달리해야 할 것 같소. 준비가 철저하다면야 열이 쌓일 피로를 다섯까지 줄일 수도 있을 테고. ”

“ 화친을 맺자 말하며 초대하는 입장이니만큼 전하를 모시는 데 소홀하지는 않겠죠. 지나치게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되겠지만… 일단 괜찮을 것 같습니다. ”

국왕은 헬레나의 짧은 답변을 듣고 마음이 든든해졌는지 허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까지 가는 길에 몇 번의 기습이 있을 지도 모르나, 알현실 바깥에서 기다리는 엘렌까지 함께 하는 이상 안전하기는 할 터였다.

문제는 바깥에서 식사를 하며 섞일지 모르는 독인데… 이는 나나 헬레나가 기미를 보면 그만일 듯싶다.

국왕에게 선물한 정화 아이템은 크고 무거워 들고 가기 불편하기 짝이 없으나, 나나 헬레나는 목걸이를 바탕으로 만든 해독 아이템을 몸에 지니고 다니기에.

“ 하하! 공작이나 대공이 있어 내 마음이 든든하오. 더구나 큰 공을 세웠던 다크엘프까지 함께 한다면, 오히려 해를 입히려는 놈들을 걱정해야 할 지경이 아니겠소? 상상만 해도 웃음이 나오는구려, ”

껄껄 웃으며 말하는 국왕의 말엔 쳐들어 와보라는 듯한 뉘앙스가 없지 않아 느껴졌으나, 그럴 수도 있겠거니 싶어 함께 따라 웃었다.

그렇잖아도 제국의 헬릭스 백작을 죽이며 한층 흉악한 명성을 떨치게 된 헬레나에, 엘렌까지. 웃지 않을 수가 없었겠지.

“ 직접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제국에서 소테른의 국왕 전하를 모시고자 온 앤더슨이라 하옵…… ”

며칠 왕궁에 머무르며 제국 측 사절이 올 때만을 기다리던 중, 드디어 제국 측에서 보낸 사람이 도착했다.

내가 잘 아는 앤더슨 자작이었다.

그리고 앤더슨도 나를 잘 알기에, 알현실에 발 들인 나와 헬레나를 보며 무척 놀라는 기색을 보였다.

“ 그래. 앤더슨 자작이라고?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았을 테니 하루 쉬고 가겠는가, 아니면……. ”

“ 전하의 귀중한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겠지요. 배려해 주신 것은 감사합니다만, 저는 괜찮습니다. ”

“ 음… 그렇다면 내 바로 출발하도록 하지. 보아하니 크라우저 공작과 안면을 튼 것처럼 보이네만, 회포는 잠시 후에 풀도록 하는 것이 좋겠군. ”

잠깐 의례적인 대화를 나눈 뒤, 국왕은 곧장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고 일어났다.

먹을거리부터 옷, 씻는 것에 이르기까지 전부를 준비했다고 말했으니까, 몸만 가면 그만일 테지.

물론 우리도 그 배려 안에 있기는 했으나, 일단 제몫을 따로 챙겨두기는 했다.

왕성에 오며 챙긴 와인이나 마차, 텐트 등등…….

─굳이 그렇게 따로 챙겨가야 할 필요가 없지 않겠소? 전부 제국 측에 맡겨도 될 것을…….

그 말을 하자 국왕이 의문스럽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이렇게 하는 것이 편하다는 이유로 두루뭉술하게 넘어갔다.

되도록 국왕 곁에 붙어있어야 하니 쓸 일이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있어서 손해볼 건 없었다.

그렇게 해가 거의 다 저물어 갈 무렵. 제법 긴 마차행렬이 걸음을 멈추고 한적한 공터가 가까운 쪽에 멈춰 섰다.

마차가 빨리 달린다고는 하나 워낙 갈 길이 머니, 당분간 이런 식으로 시간 갈 일이 많겠거니 싶다.

“ 야영 준비를 해라! 전하께서 주무실 자리와 취사장부터 서둘러 준비하고! ”

앤더슨이 수족들을 부려 자리를 꾸리는 동안 우리도 마차에서 텐트를 꺼내 펼쳤다.

생각도 못했던 앤더슨이 와서 그런지 마음도 제법 편하고, 은근히 날을 세우며 털을 곤두세울 필요도 없어 보였다.

만에 하나 앤더슨이 수작을 부리면 우리가 쥔 약점이 전 황태자까지 흔들 테니까.

“ 앤더슨이 왔으니 번을 설 필요까진 없어 보이죠? ”

“ 어… 아마도? ”

국왕의 권유를 정중히 거절하고 저녁 준비를 하던 중, 식료품을 들고 온 엘렌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번을 서면 아무래도 피곤할 텐데, 그 상황을 피할 수 있을 것 같아 기대되는 모양이다.

물론 기미는 보겠지만 밥은 따로 먹을 셈이다.

“ 물론 앤더슨은 믿을 만 하니까 지나치게 경계할 필요는 없겠지. 하지만 너무 넋 놓고 있지는 말았으면 해. ”

“ 네. 알겠습니다. ”

“ 그래도, 네가 말한 것처럼 너무 경계할 필요도 없으니… 적당히 긴장만 해 둬. ”

내가 재료를 썰고 고기를 굽는 동안, 헬레나와 엘렌이 대화를 주고받으며 어떻게 할지 정했다.

예상 못한 상황이 벌어졌기에 원래 세워 두었던 계획을 조금 수정하는 셈이었다.

빡빡하게 더하는 것이 아니라 느슨하게 빼는 식으로.

“ …마침 저쪽 식사 준비도 다 끝난 것 같네. 기미를 보고 올게. ”

마침 다 구운 고기를 타지 않도록 그릇에 옮겨 담던 중, 헬레나가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약간 떨어진 곳에서 음식을 나르는 사람들을 보았기 때문이리라.

“ 그래? 그러면 내일 아침은 내가 기미를 보면 되겠네. 음식은 데워놓고 기다릴 테니까 너무 서두르지 않아도 돼. ”

“ 아니. 그러지 마. 기미는 전부 내가 볼 테니까. ”

나는 헬레나 혼자 기미를 본다기에 왜, 라고 무심코 물으려다 입을 다물었다.

나를 바라보는 불안하면서도 딱딱한 눈빛을 보니 목구멍이 턱 막힌 느낌이 든 탓이다.

나야 좋지만 무슨 일일까. 홀로 떠가나는 헬레나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길 잠시. 곧 헬레나가 왜 그랬는지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어렸을 때 독으로 명줄이 달랑달랑했던 사건 때문이겠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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