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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기둥서방이 되었다-167화 (167/192)

〈 167화 〉 어쩌다보니... #1

* * *

“ 아니, 제법 잘 이기고 있는 대표에게 기권을 권했다? 대표도 그럴 받아들였고? ”

“ 예, 전하. 저희 측 대표에게는 이미 그리 말해 두었고, 대표도 그를 받아들였습니다. ”

리암이 기권할 것이라 이야기하자 국왕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워했다.

굳이 알현까지 해가며 잘나가던 후보를 굳이 떨어뜨린다는 소식을 전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 음… 나로서는 무척 아쉽기는 하오만, 어째서 그런 결정을 내리셨소? 아, 물론 공작의 결정을 존중하기에 별 말은 않겠소만… 이유는 알고 싶어서. ”

“ 예. 다름이 아니라… 저희 공작령을 대표해 나온 이가 싸우는 방식이 너무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

이기면 이길수록 더욱 노련한 적과 마주쳐야만 하고, 그런 적을 상대로 몸을 던지며 싸울 경우 도리 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위험이 높았다.

즐거운 축제에 그와 같은 불상사가 생겨서는 안 될 일이며, 한 영지의 영주로서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국왕은 헬레나의 그 변명을 가만히 듣더니, 과연 그렇구나 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름대로 탄탄한 명분을 내세운 덕인지 반박할 기색도 안 보였다.

혹시 국왕이 아쉬운 소리를 내면 대화가 길게 늘어져 피곤할 테니, 참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 …그렇지. 기사를 뽑는다는 대회라고는 하나 그 본질이 축제인 이상 선을 넘을 수도 없을 노릇이지. 내 두 사람의 뜻을 잘 이해했소. ”

“ 감사합니다. ”

그 후에는 국왕이 직접 명령을 내려 리암을 기권처리로 하고, 리암과 맞붙을 예정이었던 상대는 칼 한 번 섞지 않고 준결승 무대에 오르게 되었다.

아깝게도 결승까지 오르지 못해 고배를 마셔야 했지만 4강도 대단하지.

“ 우선 마지막까지 꿋꿋이 버티고 응전하여, 승리를 거둔 그대의 분전을 칭찬하노라. ”

그렇게 며칠에 걸친 나머지 일정까지 무사히 다 치르고 난 뒤.

국왕은 연무장 한 가운데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은 남자에게 다가가, 그 어깨에 검의 등을 얹으며 엄숙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우승자는 나도 전에 들렀던 리슬링 변경백 출신이었는데, 험한 곳에서 사는 이라 그런지 인상 또한 날카로웠다.

짝짝. 나는 함성과 땅이 울릴 만큼 커다란 박수소리를 들으며 내심 안도했다.

드디어 행사가 다 끝나고 집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도 좋았다. 세심하게 신경써준 덕분에 불편한 것은 없었으나 역시 내 집이 편한 법이라서.

“ …마지막으로, 짐은 앞으로도 간악한 제국을 몰아낸 역사를 기리고 축하하기 위해, 삼년에 한 번씩 이런 자리를 마련하겠노라!. ”

이런 대회를 정기적으로 열겠다는 뜻은 이미 귀족 모두가 알고 있어 반론하는 이가 없었으나, 가만히 듣고 있던 구경꾼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대대적으로 공포하는 것이 처음이니 당연한 반응이기는 했다.

다만 놀라는 선에서 그치지 않고, 목이 찢어져라 국왕 소리를 질러대며 기뻐하기도 했다.

기간이 길다고는 하나 삶에서 즐길 거리가 하나 늘었으니 그럴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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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제법 재미있었지만 어딘가 피곤했던 일정을 마치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서류 작업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 와중에 수습기사로 임명한 리암을 홀랜드에게 넘겨 몸과 마음을 갈고 닦도록 하거나, 주기적으로 열릴 축제를 위한 장소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었기에 미리미리 끝내 두려는 생각에서였다.

“ 겨울에 손이 비는 사람들을 고용해서 만드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

“ 좋네. 당연히 평생 일거리는 못 되겠지만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테니까. ”

재료부터 사람에 이르기까지,

헬레나와 함께 필요한 사항을 최대한 빠뜨리지 않고 이야기하다보니 어려운 일이 없었다.

정작 이번 추수철엔 세금을 얼마나 걷을 지가 더 관건이었다.

전쟁을 했기에 평소보다 세금을 좀 더 적게 걷을 생각이었으나, 생각보다 균형을 맞추기 쉽지 않았던 탓이다.

“ 앤디. 집무실에서 마시게 와인 좀 가져다주실 수 있을까요? ”

“ 예, 알겠습니다. ”

여느 때처럼 오늘 일을 끝마친 오후 무렵. 헬레나가 앤디를 시켜 와인 한 병을 가져오도록 했다.

마실 사람은 나와 헬레나, 엘렌에 이브까지 넷이었다.

예전이었으면 집무실에서 술을 마셔도 되나 싶었지만, 지금은 별 대수롭지 않게 느껴졌다.

일도 다 끝난 데다, 지금 이 저택의 주인이 헬레나였으니.

“ 공작님, 가져왔습니다. ”

“ 고마워요. 따르는 것은 제가 할 테니까 이리 주세요. ”

앤디가 은으로 만든 네모난 트레이 비슷한 것에 와인과 거꾸로 엎어 둔 잔 네 개를 담아 가져오자, 헬레나가 빙긋 웃으며 그 트레이를 넘겨받듯 손에 잡았다.

그에 앤디가 잠시 적잖게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다, 곧 고개를 숙이며 방에서 물러났다.

“ 저… 도와드릴 건 없나요? ”

앤디보다 한 발 빨리 집무실에 들어온 이브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헬레나가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고개를 저었다.

거절한다는 뜻이었다.

아마 도와준다고는 해도 술을 다루는 것이 서투를 것이 뻔했기 때문이리라.

“ 자, 평화를 위해서. ”

쪼르륵. 헬레나는 네 잔에 와인을 골고루 따른 뒤, 간단한 건배선창까지 끝내고 나서야 잔을 입가로 가져다댔다.

평화를 위해서라는, 짧지만 내게 있어 가장 중요한 말이라 제법 인상적이었다.

“ 와아… 술이 혀에 휘감기는 느낌이에요. 신기해라……. ”

길게 늘어진 잔의 기둥을 조심스레 두 손으로 잡고 마시던 이브가 놀랍다는 듯 중얼거렸다.

평소 술을 잘 마시지 않아 그런 것도 있겠지만, 그 이상으로 맛이 묘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물론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좋은 의미에서 묘하다는 뜻이다.

“ 앞으로 좀 더 숙성해도 좋을 것 같은데… 지온은 어떻게 생각해? ”

“ 나야 술에 관해서는 잘 모르니까 뭐라 말을 못 하겠어. 그냥 맛있다, 맛없다 정도만 느껴지네. ”

“ 그럼 엘렌, 네 생각은 어때? ”

“ 저요…? 제 생각에는 아직 여유롭게 버틸 만 하지 않나 싶어요. 본래 엘프가 길러서 보통 포도보다 생명력이 강한 포도를 소재로 썼고, 제조나 보관에도 정성을 들이고 있으니까요. ”

내 생각이지만, 지나가는 듯한 투로 말하는 엘렌의 목소리에 분명한 자부심이 녹아 있음을 느꼈다.

내 호위를 하며 포도 농사에서 손을 뗄 수밖에 없었다곤 하나, 그 시작을 함께 했던 만큼 느낌이 남다른 게 당연하겠지.

“ 그렇다면 장기 숙성을 대비해 좀 더 많이 남기는 것도 괜찮겠네. 다른 영지에도 조금씩 수출하곤 있지만 아직까진 양이 적으니까. ”

나는 헬레나가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 결론을 내리며 잔을 비우는 동안, 그럼에도 조금씩 괜찮아져서 다행이긴 하다는 생각을 했다.

몇 년 전 같았으면 이걸 누가 먹느냐는 소리가 절로 나왔을 텐데, 점점 인식이 좋아지는 것을 느낀 덕이다.

수요가 늘어나면 어떻게 할까.

지금이야 영지 내에서 소비하는 경향이 강하지만 나중에 요구하는 곳이 늘어나면 어쩌지.

생산량을 늘리면 그만큼 일손이 많아야 할 테니 마법병단을 이용할까.

나는 정작 올 지도 오를 미래에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 그 생각들을 머리에서 깔끔히 지워버렸다.

너무 김칫국 마시는 것만 같아서.

“ 저, 그런데…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나요? 갑자기 술을 마시자고 하셔서……. ”

도수가 낮아 깊게 취하지 않은 채 점점 기분이 좋아지던 중, 이브가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어깨를 움츠린 채 잔을 든 모습이 영락없이 겁먹은 아이 같아서 그런지 귀엽게 보였다.

거기다 이 자리에 모인 세 여자 중에서 막내라 더 그런 것일 수도 있고.

헬레나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여전히 호선을 그리는 입술을 떼며 말했다.

“ 응? 별 일 없는데? 술이라는 게 꼭 무슨 일이 있어야 마시는 건 아니잖아. 여느 기호품이 그러하듯, 그냥 마시고 싶을 때 마시는 거지. ”

“ 아. 그렇긴 하죠…? ”

“ 그렇지. 거기다 모두 한 남자를 섬기는 입장이기도 하니까… 이런 자리를 가지는 게 필요하기도 하고. ”

이브를 지긋이 바라보던 헬레나의 시선이 나를 향하자, 이브도 자연스레 나를 바라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더해, 가만히 입을 다문 채 술만 마시던 엘렌마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니, 괜히 낯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 다… 공작님께서 허락해주신 덕분이죠. 정말 감사드려요. ”

그러다 엘렌이 가장 먼저 헬레나를 향해 고개를 숙이자, 이브도 허둥지둥 그를 따라하며 감사하다는 말을 꺼냈다.

나로서는 마음만 먹으면 첩이 아니라 누군가의 정실이 되고도 남을 여자들이 저러니 기분이 묘했다.

내게 그만한 가치가 있는가 싶기도 하고, 우쭐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 음… 그래도 기왕 이런 자리를 마련한 김에 미리 정리를 좀 해 두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

조용하고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서 잔을 한 번 더 비웠을 무렵. 헬레나가 피식 웃으며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그에 나를 포함한 나머지 두 여자도 헬레나 쪽으로 눈을 돌렸다.

“ 너희도 알지 모르겠지만… 내년이 되면 지온의 아이를 갖게 될 거야. 대를 이어야 하니 꼭 필요한 일이지만… 많이 늦은 셈이지. ”

“ 네. 저희도 알고 있어요. 보통 영애들은 늦어도 스물 둘에 아이 하나 정도는 낳는 것이 기본이라면서요? ”

“ 맞아. 그래서 계획대로라면 올해 아이를 가지자고 미리 입을 맞춰 뒀지만, 아시다시피 제국 놈들이 전쟁을 걸어오는 바람에……. ”

하아. 헬레나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자 이상하게도 등골이 오싹했다.

순간 날카롭게 번뜩인 헬레나의 눈빛과, 손이 으스러져라 깍지를 끼는 모습을 보니 아직 제국에 대한 원한이 가시지 않았음을 느낀 탓이다.

엘렌이나 이브도 그걸 눈치 챘는지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을 했으나, 곧 마음을 가라앉힌 듯 안정된 기색을 보였다.

“ 아무튼, 그 때문에 내년에 아이를 가질 생각인데… 중요한 건 그 다음이야. 너희들도 지온의 아이가 갖고 싶잖아? ”

마치, 너 쌓여 있잖아? 가 떠오르는 말투와 눈빛에 순간 소름이 돋았다.

전에 뭣도 모르고 그걸 봤다 깜짝 놀라 휴대폰을 휙 떨어뜨렸었는데… 거 참.

그러나, 그를 알 리 없는 엘렌과 이브는 눈을 반짝이며 제법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물론이에요. ” “ 저도… 기회만 된다면 그러고 싶어요. ”

“ 그렇지. 나도 이런데 너희들도 오죽 할까. 하지만. 너희들이 아이를 낳는다 한들 비공식적인 첩이니만큼 공작가 재산의 일부를 물려 줄 수는 없을 거야. 물론 지금처럼 겉으로 주는 지원이야 계속 될 테니, 물려줄 재산의 일부나마 대신 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지만… 무슨 뜻인지는 알지? ”

“ 네. 걱정 마세요. 전에도 말씀드렸듯, 옆에만 있게 허락해 주신다면… 그걸로 충분하니까요. ”

“ 저도… 마찬가지에요. ”

엘렌이 결연한 각오로 답하자, 이브도 짧게 한 마디 거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보면 정이 없는 것이 아닐까 싶을 수도 있겠지만, 이런 정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기에 말없이 지켜보기만 했다.

과장해서 말하면 규율로써 조직의 중심을 세우는 것과 비슷하니까.

“ 그렇게 생각해 준다니 다행이네. 그러면 그 다음 얘기를 할 게. 사실 이게 가장 중요하거든. ”

집안 관리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라.

나는 그게 무엇인가 싶은 마음에 초조함이 싹을 틔우는 것을 느꼈으나, 곧 이어지는 말에 내심 길게 한숨 쉬었다.

“ 한 번 임신하면 지온의 욕구를 풀어줄 수가 없으니, 둘이서 아이를 가질 순서를 정해두도록 해. 짧게는 일 년, 길게는 몇 년 정도 꼭 틈을 두고. ”

“ 아…! 그런 문제가 있었죠? 역시 공작님은 시야가 넓으세요! ”

엘렌이 진심으로 감탄했다는 듯 손뼉까지 치자, 이제는 한숨을 넘어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집안, 더 나아가 공작가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규율을 잡는 것보다 내 성욕 해소가 우선이라는데 그럴 만도 하지 않을까?

물론 내 입장에서 보면 눈물 나게 고맙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이 허탈한 감정이 밀려왔다.

혹시… 죄다 술 취했나? 가만 보면 뺨도 붉은 것이…….

“ 마침 이브와 함께 대공님의 아이를 가질 방법을 계속 찾고 있으니… 최소한 그 시간만큼은 큰 문제가 없을 것 같아요. ”

“ …그래. 다만, 예상보다 답을 빨리 찾으면… 아까도 말했듯 알아서 조정하도록 해. 알겠지? ”

“ 네. 맡겨 주세요. ”

이번에는 이브가 자신 있다는 듯 작은 손으로 주먹을 꼭 쥐며 답했다.

마법으로 어떻게 해 볼 영역이라 생각하는지 제법 자신 있어 보이는 기색이었다.

그 덕분에 헬레나도 한시름 덜었다는 듯 만족스럽다는 기색을 띠며 말했다.

“ 좋아. 이걸로 이 이야기는 이걸로 끝내자. 다만… 기왕 이렇게 된 거, 오늘 가장 처음에 안길 사람을 공평하게 정해볼까 싶은데. ”

“ 네…? 공평하게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늘 처음은 공작님이……. ”

“ 오늘은 묘하게 기분이 좋거든. 그래서 특별히 공평하게 정하자는 거야. ”

헬레나가 다만, 이라고 말한 것치고는 전혀 앞과 상관없는 말을 술술 뱉어내는 와중, 아무도 그걸 지적하는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특별히 공평한 과정으로 순서를 정한다는 말에 엘렌과 이브의 눈이 뒤집혔다.

“ 그런데 어떻게 정하실 거에요? 대련으로 정하기엔 서로 분야가 너무 다르고, 또 다치면 대공님이 슬퍼하시니까 안 되잖아요. ”

“ 당연히 그래야지. 적당하고 간단한 내기로 정해야 돼. 어디……. ”

헬레나는 잠시 말꼬리를 흐리며 주변을 두리번대더니, 서류가 놓인 책상 서랍장으로 다가가 금화 하나를 꺼내왔다.

딱 봐도 동전던지기를 할 모양이다.

“ 이걸로 정하자. 세 번 던져서 가장 앞면이 많이 나오면 그게 일등이야. 알겠지? ”

제안을 던진 당사자를 뺀 두 여자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 동의하자, 헬레나가 기다렸다는 듯 동전을 던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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