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의 기둥서방이 되었다-165화 (165/192)

〈 165화 〉 전승 기념 #5

* * *

“ 저, 정말 이런 옷을 입어도 되는 겁니까? ”

“ 입어도 되는 것이 아니라 입어야 하는 것이죠. 저희야 보통 영지민들이 어떤 옷을 입더라도 괜찮지만, 전하는 아니니까요. 정식으로 뵙는 입장이니 그에 맞는 옷을 입어야 해요. ”

왕궁에 도착하자마자 객실로 들어가 씻고, 우리가 준비한 옷으로 갈아입기까지.

리암은 약간 바쁘면서도 정신없던 시간을 보냈음에도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마 난생 처음으로 왕궁에 들어와서 그런 거겠지.

“ 예, 예에. 알겠습니다……. ”

“ 객실을 나가면 시종이 안내를 해 줄 테니 너무 걱정 마세요. 왕궁이 넓다고는 하나 사람들도 많으니 길을 잃을 염려는 없을 테니까요. 그리고 예법에 관해서는……. ”

헬레나는 국왕 앞에서 지켜야 할 점 몇 가지를 가르친 뒤, 바깥에서 기다리던 시종에게 리암을 떠넘겼다.

각 영지 대표만 보고 싶다던 국왕의 요청이 있었으니 이럴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애도 아니니만큼 일일이 따라다니며 챙겨주는 것이 너무 과하기도 하고, 결과적으로 리암을 불편하게 만드는 꼴이다.

물론 리암이 곤란에 처할 때에는 당연히 도와야 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가만히 내버려 두는 것이 좋을 듯싶었다.

국왕이 내린 명령 때문에 기술을 갈고 닦을 수 있도록 도울 수도 없는데다, 알현 후부터는 기사단이 통제할 테고.

“ 빨리 오셨네요? 별 일 없으셨어요? ”

“ 그래. 옷만 갈아입히고 왔으니까. 별 일 없었어. 나머지는 전하께서 알아서 하실 테고. ”

방에 들어오자마자 테이블 쪽에 앉아있던 엘렌이 우리를 반겼고, 헬레나는 그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엘렌의 맞은편에 자리했다.

나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한발 늦게 두 여자 사이에 있던 자리로 갔다.

“ 참. 다른 영지 대표들은 보셨어요? ”

“ 봤었지. 짧은 시간이었다고는 하나 많이 싸워서 그런지… 제법 눈빛들이 좋더라. ”

나는 헬레나의 평가를 들으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헬레나와 같이 있었기에 각 영지를 대표해서 온 사람들을 볼 수 있었고, 또 헬레나와 같은 생각을 했기에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짧다고는 하나 직접 싸워 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다를 수밖에.

“ 다들 비슷한 일을 거쳐 대표가 되었을 테니 그럴 수 있겠네요. 그러면 얼마나 올라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세요? ”

“ 글쎄. 올라갈 만큼 올라가지 않을까 싶어. 잘해주면 좋기는 하지만, 첫 시합부터 탈락하는 일도 있을 수 있잖아. 어차피 누군가는 탈락하기 마련이니까. ”

헬레나는 눈빛을 반짝이며 묻는 엘렌의 질문을 심드렁하게 흘리며 테이블 위에 엎드렸다.

늘어진 모습을 보니 알게 모르게 쌓인 피로가 많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조금이나마 피로를 덜어줄 겸 등을 쓸어주었더니,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맥이 탁 풀린 듯한 모습을 보였다.

햇빛 아래 늘어지는 고양이마냥.

“ 음… 그러면 대공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만약 우리 쪽 사람이 첫 시합부터 지더라도 괜찮으세요? ”

“ 나, 나야 뭐… 열심히만 해 주면 되겠다 싶어. 헬레나가 말한 것처럼 누군가가 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하고. ”

“ 부부는 서로 닮는다고 하더니……. ”

손이 위로 향하면 위를 쫓고, 아래를 향하면 아래를 쫓는 엘렌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딱 봐도 부럽다는 듯한 기색이 가득한 눈빛이었다.

반쯤 체념하듯 말꼬리를 흐리는 모습과 다르게 아주 생생했다.

어쩔 수 없지.

나는 엘렌을 향해 이리오라는 듯 빈 손을 까딱이며 가까이 오도록 했다.

.

보통 왕궁이라 하면 제법 규모가 큰 궁전과 그를 감싸듯 마련된 정원 정도만 상상하기 쉬우나, 왕궁이 자리 잡고 있는 땅은 그보다 훨씬 넓었다.

왕족을 지키기 위한 힘이자 얼굴이기도 한 중앙기사단이나 잡일을 도맡아 하는 시종들 또한 부지 내에서 지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각지에서 몰려든 귀족들을 받아들여도, 기사단이 쓰는 연무장에 자리를 마련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설마 일부라고는 하나 왕궁을 개방하여 보통 사람들까지 들일 생각을 할 줄은 몰랐다.

듣기로는 구경꾼이 많을수록 흥이 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상상히 대범한 결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역시 마지막 축제는 이래야지. 생기 넘치는 것이 참으로 좋지 않소? ”

귀족들을 위해 별도로 마련된 공간 중에서도, 가장 상석에 위치한 국왕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물었다.

흔히 야구장 같은 곳에서 볼 수 있는 VIP석을 연무장에 만들어 둘 생각을 한 것이 제법 신기하게 느껴졌다.

“ 예. 처음에는 왕궁을 개방한다기에 몹시 놀랐습니다만, 정말 축제답다는 생각이 들어 좋습니다. ”

“ 하하하! 공작께서도 그리 말씀해주시니 새삼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구려. ”

왕은 바로 옆에 앉아있던 헬레나의 조용한 아부가 마음에 들었는지 껄껄 웃어댔다.

그와 반대로 나란히 앉아있던 나머지 두 공작의 입술은 여전히 닫혀 있어 좀처럼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왕이 헬레나를 아끼는 거야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니 새삼 불편할 것도 없겠지만 몹시 표정이 딱딱했다.

나는 속으로 그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하다, 곧 그들의 눈이 연무장 한가운데 박혀 꼼짝도 않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아마 그들 또한 다른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내심 긴장이 되는 모양이었다.

“ 오… 시작하는가 보구려.”

대진표는 국왕을 포함해서 그 누구도 모르며, 오로지 축제를 통제하고 진행하는 기사단만 알고 있다.

모르는 것이 더 몰입을 높이고 긴장이 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확실히 쫄깃한 맛이 있기는 했다.

국왕이 집중하겠다는 것 마냥 입을 다물고 연무장에 시선을 두자, 나 또한 시선을 돌려 연무장을 응시했다.

연무장 위로 마침 두 남자가 걸어나오고 있었는데, 이 대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체격의 남자와 그보다 키가 작은 사람이 붙게 되었다.

다만 저 보통 체격을 가진 남자, 리암이 처음부터 나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입을 살짝 벌리고 말았다.

“ 리암이 벌써부터 나오다니… 놀랍네. ”

“ 그러게. 처음부터 나오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

헬레나도 내가 작게 소곤거리는 소리에 맞춰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이기던 지던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말한 여자답게 여전히 심드렁한 기색이었지만, 처음부터 싸우게 된 것이 놀랍기는 한 모양이었다.

“ 이야앗!! ”

심판의 시작 구령이 울려 퍼지기 무섭게 리암이 먼저 손에 든 목검을 있는 힘껏 휘둘렀다.

정직하게 위에서 아래로 베는 동작이었기에 막거나 피하기가 제법 쉬워 보였다.

리암을 상대하는 키 작은 남자, 벤은 막는 대신 피하는 길을 택했다.

리암의 가슴께 정도밖에 오지 않는 키를 가져 그런지 몸놀림이 제법 빨랐다.

만약 리암이 전문적인 훈련을 거쳤다면 재빨리 반응했을 법도 하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렇지가 않았다.

여태껏 열심히 한 것은 인정하지만 몸집으로 인한 차이를 좁힐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벤이 재빨리 검을 피한 뒤, 목검으로 리암의 종아리를 후려쳐도 대응할 수가 없었겠지.

“ 아으윽…! ”

휘두르는 목검을 제대로 맞았기에 몹시 아플 법 했으나, 의외로 그 비명소리가 크지는 않았다.

그 대신 리암의 눈빛이 독기로 번들거렸고, 휘청거리던 다리에 힘을 주어 자세를 바로잡았다.

너무 과하게 힘을 주어 쥐가 나지 않을까 싶을 만큼.

“ 서라앗! ”

리암이 다시 한 번 기합을 내지르며 검을 휘두르는데, 이번에는 위에서 아래가 아니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휘둘렀다.

베는 힘은 약간 부족할지언정 휘두르는 범위가 넓어 공격을 맞추기에 딱 좋았다.

더구나 올곧은 직선이 아닌 대각선으로 휘둘렀다는 점이 보기 좋았다. 어설프게 자세를 낮춰 일자로 베는 것보다 훨씬 나아 보였으니까.

따악! 목검과 목검이 부딪쳐 둔탁하면서도 경쾌한 소리를 내는 가운데, 리암의 검을 막은 벤이 인상을 찌푸렸다.

키가 작기에 위에서 짓누르는 듯한 공격을 막는 것이 약간 힘겨운 모양이었다.

과장해서 말하자면 코끼리가 작은 동물을 짓밟는 것과 비슷했으니까.

“ 으, 으으으…! ” “ 쓰러져라아!! ”

리암은 벤이 힘겨워하며 신음하는 모습에 힘을 얻은 듯 고함을 내지르며, 목검 손잡이가 으스러져라 힘을 주었다.

서로가 양손으로 목검을 쥐고 있기에 그런지는 몰라도 씨름을 벌이는 두 목검이 유난히도 부르르 떨리는 듯했다.

기술도 뭣도 없는 투박하기 짝이 없는 싸움이라 보는 맛이 더했다.

단순하니만큼 누구나 알기 쉽고, 힘겨루기 특유의 긴장감과 쫄깃함은 여느 도박만큼 보는 맛이 있었다.

옆에 앉은 국왕이나 공작들이 주먹을 꽉 쥐고 긴장한 것이 그 증거였다.

“ 지랄! ”

힘겨루기만 계속되면 불리할 것을 알았는지, 벤이 혀를 차며 몸을 옆으로 뺐다.

그 탓에 있는 힘껏 힘을 주던 리암이 제 기세에 못 이겨 휘청댔고, 벤은 그 틈을 노려 리암의 왼쪽 다리를 사정없이 후려쳤다.

허벅지 옆면과 정강이 무릎에 이르기까지, 참 알뜰하기 짝이 없었다.

그 결과, 극심한 고통을 이기지 못한 리암이 고함을 질러대며 괴로워하기 시작했다.

고통 때문에 한껏 일그러진 표정을 띤 채 왼쪽 다리를 축 늘어뜨렸다.

그저 그 와중에도 멀쩡한 다리로 버티고 서서, 여전히 검을 쥔 손에 힘을 풀지 않는 것이 대견스러울 지경이었다.

“ 와… 독종새끼, 라고 말한 것 같아. ”

구경꾼들의 환호성 탓에 어떤 말을 하는지 잘 들리지 않지만, 헬레나가 입술의 움직임을 읽고 친절하게 설명을 해 주었다.

덕분에 은근히 눈치를 보던 공작들과 국왕도 과연 그렇구나 싶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티는 안 냈지만 은근히 궁금했던 모양이다.

“ 다리를 계속 얻어맞았는데도 버티니 그럴 만도 하지. 만약 목검이 아닌 진검이었으면 진즉 다리가 썰려 죽었을 테니까. ”

“ 응. 목검이라 다행이지. 다만 다리가 몹시 욱신거려 제대로 움직이기도 힘들 거야. 아직 뼈는 안 부러진 모양이지만……. ”

공작님. 내가 헬레나의 해설을 들으며 고개를 주억거리던 중, 근처에 앉아 있던 루크가 헬레나를 불렀다.

제법 볼만한 시합이라 생각했는데,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으니 심심하기는 했던 모양이다.

어쨌든.

물렀는데 답을 안 할 수도 없는 법이라, 헬레나는 연무장에 두었던 시선을 루크에게 옮기며 입을 열었다.

“ 예. 무슨 일이시죠? ”

“ 다름이 아니라… 저 리암이라는 사내는 분명 공작님의 영지를 대표해서 나온 이가 아닙니까? 그런데 어떻게 그리 남일 보듯 무덤덤하십니까? ”

하긴. 자기 영지 대표가 불리한 상황에 처하면 조금이라도 당황하는 것이 사람일 텐데, 전혀 그럴 기색이 없으니 신기할 만도 하지.

나는 루크의 물음이 지당하다 생각하면서도, 헬레나가 내놓을 답을 알기에 연무장에 둔 시선을 옮기지 않았다.

마침 벤이 집요하게 다리를 노리고 휘두른 검을 리암이 억지로 막아내는 중이었다.

“ 그야… 누군가는 반드시 질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렇다고 해서 목숨을 잃는 것도 아니고. ”

“ 아니. 그야 그렇습니다만… 처음부터 지는 것도 모양새가 영 묘하지 않습니까? ”

“ 묘하다라. 그럴 수도 있겠네요. ”

워낙 건조하다 못해 찬바람이 쌩쌩 부는 답을 듣자, 루크가 황당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평소 표정관리도 잘 하는 구렁이 같은 인간이 저러는 것을 보니 정말 당혹스럽기는 한 모양이었다.

“ 전부터 생각하긴 했습니다만… 공작님께서는 정말 신기하신 분이시군요. 열을 내며 시합을 관람하는 이들과 너무도 다르시니까요. ”

“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는 법이죠. 또, 저는 리암이 진다고 해서 자존심이 상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면 부끄럽다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 저 모습을 보세요. ”

헬레나가 연무장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리암을 가리키자, 루크의 시선이 자연스레 헬레나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쫓았다.

그러자 오른쪽 무릎을 꿇은 채, 낮은 자세로 벤의 목검을 받아내는 리암의 모습이 보였다.

고통이 수그러들지 않는 탓에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여전히 독기가 넘치는 기색을 엿볼 수 있는 모습을.

“ 저렇게 온 힘을 쥐어짜내 싸우고 있으니 부끄러울 리가 있나요. 설령 진다하더라도 자랑스러울 겁니다. 그저, 약간 아쉬울 수는 있겠지요. ”

“ 대공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겠죠? ”

“ 물론입니다. ”

최선을 다해 싸웠는데 욕을 할 수 있을 리가 있나.

그건 나나 헬레나의 입장에서 해서는 안 될 일이라 생각했기에 짧고 단호하게 답했다.

덕분에 루크도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싸움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싸움의 양상이 제법 묘하게 돌아가고 있어 신기했다.

끈덕지게 버티고 또 버티던 덕에, 그를 뚫어내야 하는 벤이 몹시 부담스러워 하는 기색이 엿보이기 시작했다.

비 오듯 땀을 흘리는 건 둘 다 매한가지였으나, 벤이 좀 더 지친 기색이 역력해 보였기 때문이다.

“ 아니, 이게 왜…? ”

그 기묘한 상황에 루크가 고개를 갸웃거렸고, 다른 사람들도 그와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확실히 우세했던 벤의 기세가 기묘하게 꺾이고 있으니 의문스러울 만도 했다.

그리고 그 의문을 풀고자 약속이라도 한 것 마냥 헬레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 대륙에서도 몸을 가장 잘 쓰는 축에 속하는 사람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헬레나도 그를 알았는지, 짧게 숨을 고른 뒤 입을 열었다.

“ 제풀에 나가떨어진 거죠. 벤은 작은 체구에서 오는 민첩함을 살려 리암의 공격을 피하고, 피해 없이 결투를 이끌어 갔어요. 하지만 그 와중에 계속된 힘겨루기, 피하는 동작으로 인해 힘이 빠지고 말았어요. 리암보다 몇 배나 많이 움직였으니 당연한 결과겠지요. ”

“ 아… 그래서! ”

국왕이 무심코 손뼉을 탁 치며 소리치자, 헬레나가 그게 정답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네. 이게 실전이었으면 리암이 과다출혈로 죽었겠지만, 목검을 이용한 결투라 이런 일이 일어난 거겠죠. 그래서 다리가 멍투성이가 되었어도 계속 싸울 수 있었고, 지금처럼……. ”

상황을 뒤집은 것이겠지요.

헬레나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땀을 줄줄 흘리며 헉헉대던 벤의 목 뒤를 정확히 후려치는 리암의 목검을 응시했다.

다소 황당하고 어이없기는 하지만… 근성의 승리였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