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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기둥서방이 되었다-164화 (164/192)

〈 164화 〉 전승 기념 #4

* * *

“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이브의 목소리를 따르는 것 같은 따끔한 통증이 등 쪽에서 강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다 해서 몸을 비틀 만큼 아픈 것도 아니라 충분히 견딜 만 했다.

온 몸에 돋아난 사마귀를 짜낼 때 느끼는 아픔보다 약간 덜 할 정도였다.

오히려 섬세한 손길과 반대로 숨통을 조이는 듯한 분위기를 견뎌내는 것이 더 고생이었다.

워낙 크게 긴장하고 있는 탓에 시술을 받고 있는 나까지 두려울 지경이지만, 티내지 않고 얌전히 엎드려 숨만 쉬었다.

“ 후우, 후우……. ”

이브는 시간이 갈수록 긴장이 점점 늘어만 가는지, 입으로 숨까지 골라가며 손을 놀렸다.

반응과 모습만 봐서는 처음 작업을 해 보는 초보자 같은 분위기인데, 정작 작업은 순조로워 참 묘했다.

그래서 대략 삼십 분 정도 지났을 무렵, 식은땀을 훔치며 침대 옆에 걸터앉는 이브의 옆모습을 볼 수 있었다.

“ 고생… 많으셨어요. 혹시 많이 아프세요…? ”

쳐다보는 시선이 따가웠는지, 이브가 내 쪽을 돌아보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약간 화끈거리는 느낌과 함께 피부가 따끔따끔할 뿐, 아픔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살을 깊게 팠다면 또 모를까.

“ 아니, 전혀 안 아팠어. 이제 바로 일어나면 돼? ”

“ 아, 아뇨…! 잠시 상처를 달래 피가 멎을 때 까지만 기다려 주세요. 여기 엘프 분들이 만든 약을 발라서……. ”

이브는 허둥지둥 침대에서 벗어나 여러 기구가 놓인 서랍으로 달려가더니, 상을 기둥처럼 떠받치듯 만들어진 서랍을 열고 녹색 무언가가 든 작은 유리병 하나를 들고 왔다.

간간히 수출도 하다 보니 눈에 익을 수밖에 없었던 엘프의 약이었다.

그 뒤엔 곧장 내 옆에 걸터앉아 코르크 마개 같은 유리병 뚜껑을 뽑더니 안에 있던 약을 내 등에 고루 펴발랐다.

시원하면서도 알싸한 느낌이 등줄기 찌르르 울리자 저도 모르게 몸이 부르르 떨렸다.

“ 어떠세요? 아픔이 좀 가셨나요? ”

“ 그래. 시원한 느낌이 아주 좋아. 역시 엘프가 기른 약초로 만들어서 그런지 약발도 좋네. ”

“ …정말 다행이에요 아마 상처 자체가 깊지 않아서 조금만 더 지나면 될 것 같아요. 그동안 불편하게 엎드려 있으셔야 하시겠지만…….”

“ 괜찮아. 침대가 푹신해서 불편하지도 않고, 날도 따뜻하니까 몇 시간 벗고 있어도 춥지도 않아. 대신 잠깐 눈 좀 붙일게. 상처가 나으면 깨워줘. ”

나는 새삼 미안함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이브를 달랜 뒤 천천히 눈을 감았다.

어차피 누워 있기만 해야 했으니 짧게나마 한숨 자는 것도 좋을 듯싶었다.

학교에서 쉬는 시간에 책상에 머리를 박고 자는 것과 비슷하다고도 할 수 있었다.

새삼 떠올려보면 아침 시간에 특히 잠이 오곤 했었는데, 그 중에서도 겨울 아침이 가장 졸렸었다.

그렇잖아도 졸린 몸에 따뜻한 히터바람이 몸을 노곤하게 만드는 탓에 잠이 안 올 수가 없었다.

물론 그 와중에도 잠도 안 자고 잘 버티는 인간들이 있긴 했는데, 어지간한 독기로는 엄두도 못 내겠지.

“ 아, 저어… 대공님. 상처가… 다 나았어요. ”

그렇게 옛날 생각을 하다 깜빡 잠이 들고 얼마나 지났을까.

어깨를 톡톡 흔들며 귀를 간질이는 이브의 목소리가 몽롱한 정신을 일깨웠다.

자다 깨는 것은 언제나 괴롭지만 오늘은 특히 더했다.

그래도 이브가 잘못한 것도 아닌지라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졸린 눈을 비비며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 아… 벌써 시간이 그렇게 지났나보네. ”

“ 네. 등에 발라 둔 약초는 닦아 뒀어요. 혹시 계속 아프지는 않으세요? ”

“ 고마워. 전혀 안 아프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 따끔거리는 느낌도 없거든. ”

나는 마나를 일으켜 남은 잠기운을 급히 몰아내고, 상쾌한 마음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렇게 잠을 깨울 때 마다 새삼 마나를 조금이나마 다룰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함을 느꼈다.

예전 같았으면 최소 삼십 분 이상 멍하게 있어야 잠기운이 달아나곤 했었기에.

“ 참. 이제 상처도 다 나았겠다, 얼른 등에 새긴 마법 효과가 뭔지 실험해 봐야지. 어떻게 하면 돼? ”

“ 아… 대공님께서 방금 하신 것처럼 마나를 몸 안에서 돌려주시면 돼요. 대신… 평소보다 등 쪽으로 보낸다는 느낌으로요. ”

그건 또 쉽지. 나는 이브의 설명을 듣자마자 마나를 일으켰다.

마나를 통해 몸의 힘을 높이는 일은 기본이었고 지금도 꾸준히 하고 있어 숨 쉬는 것만큼 자연스러웠다.

덕분에 별 어려움 없이 등 쪽으로 마나를 보낼 수도 있었다.

“ 오? 뭔가 빨려드는 느낌이 나는데. 마법진 때문이지? ”

“ 네. 대공님의 마나를 먹고 작동하도록 새겼어요. ”

“ 그렇구나. 효과는 뭐야? ”

“ 효, 효과요? 그게……. ”

효과가 무엇인지 물었을 뿐인데, 이브가 얼굴을 붉힌 채 입까지 꾹 다물었다.

어깨를 딱 붙이고 나란히 앉아 있는 덕에 두 손을 모아 손가락을 꼼지락대며 몸을 꼬는 몸짓이 더욱 크고 선명하게 느껴졌다.

내 생각일 뿐이지만 해를 입히려는 것은 아니고, 실수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정말 단순하게 부끄러워하는 눈치였다.

다만, 설령 실수를 했다 하더라도 그럴 수 있다며 어깨를 두드려주고 넘어갈 생각인지라 화도 안 났다.

인체실험을 한 것도 아니고.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브가 꾹 다물었던 입술을 열기 전, 갑작스러운 변화가 한 발 먼저 나를 흔들었다.

마나를 돌렸을 때보다 배 이상 머리가 맑아졌고, 몸 구석구석까지 힘이 통하는 느낌이었다.

“ 어… 혹시 피로를 달래주는 효과야? ”

“ 네, 네에. 그렇긴 한데… 그 뿐만은 아니에요. 다름이 아니라……. ”

아.

나는 유난히 하체 쪽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수줍어하는 이브의 눈을 빤히 쳐다봤다.

부끄러워하는 이유가 이것 때문이라면, 그래.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새삼 생각해보면 아마 이 효과 때문에 더 긴장했던 탓도 있지 않을까 싶다.

이브 입장에서는 낯 뜨겁고 민망하기도 하지만, 있으면 좋은 그런 효과일 테니.

“ 괜찮아. 대충 알 것 같으니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직접 확인을 해 봐야겠는데… 도와줄 거지? ”

나는 보란 듯이 말꼬리를 흐리며 이브의 뺨에 손을 얹었다.

대놓고 부추겼으니 본인이 그 책임을 져야하지 않겠냐며 은근히 압박을 주기도 했다.

괘씸한 짓을 했으면 그만큼 벌을 받아야지.

“ …네. 책임… 질게요. ”

다행히 이브도 책임감이 있는 여자인지라, 당장 터져버릴지도 모를 만큼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크라우저 공작령의 대공은 반반한 외모 하나와 접근성 좋은 배경으로 성공을 한 하급 귀족에 지나지 않는다.

처음 헬레나와 지온이 혼인했을 때만 해도 모든 귀족들이 그렇게 소곤거렸고, 왕국의 백성들도 그 이야기를 귀에 듣곤 했다.

심지어 공작령의 영지민들마저 그런 소문을 주제로 이야기를 하기도 했으니 오죽할까.

단지 헬레나가 가진 광기가 널리 알려졌기에 몹시 눈치를 보며 들키지 않았을 뿐,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이야기였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공작령 내에서 이를 주제로 지온을 깎아내리는 경우는 없어졌으나, 다른 영지는 별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그 은밀한 여론이 제국과 전쟁을 치른 후로 크게 뒤집혔다.

밤을 대낮처럼 환히 밝히는 화마를 등지고 적병의 목을 손수 꺾어 죽였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진 결과였다.

처음 소문을 퍼뜨린 범인은 지온과 함께 제국병영을 기습했던 마법병단 소속 다크엘프 중 하나였으며, 그가 퍼뜨린 소문은 입소문을 타고 곳곳에 퍼졌다.

현대에도 그러하듯, 한 번 소문이 퍼지면 거센 산불처럼 삽시간에 커지는 것이 군대였으니까.

결국, 그로 인해 광기 넘치는 헬레나 곁에 있을 만하다는 평이 지온의 꼬리표가 되었다.

그가 가진 능력은 둘째 치더라도 적병의 목을 손수 꺾어 죽이는 광기만큼은 헬레나 못지않다는 이유에서였다.

그 본인이 어떤 의도를 갖고 그랬는지 상관없이.

하지만 그와 같은 소문을 듣고도 존경을 품는 이들 또한 제법 많았다.

연구를 명분으로 출석을 거부한 이브를 뺀 지온과 헬레나, 엘렌과 같은 마차에 올라 수도로 향하고 있는 리암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그 방식이 흉악할지언정 제법 공을 세웠다는 것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 처음 마차를 타면 울렁증에 고생하는 사람도 많은데… 괜찮으세요? ”

“ 예, 예엣! 괜찮습니다! 난생 처음 이런 마차를 타 봐서 그런지 신기하기만 합니다! ”

“ 그래요?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그래도 속이 울렁거리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잠깐 바깥바람을 쐬면 좀 괜찮아 지거든요. ”

공작과 대공은 신기하게도 신분을 가리지 않고 존댓말을 사용한다고 하는데, 그게 정말이었구나.

리암은 한낱 농사꾼에 불과한 인간을 세심하게 배려하는 모습을 보며 크게 감동했다.

본래 급격히 신분이 오르면 유난히 허파에 바람이 들어가 거만한 모습을 보인다고 하던데, 전혀 그런 기색이 안 보였기에.

왜 저러는 걸까. 헬레나는 어딘가 호들갑스럽게 반응하는 리암을 보고 내심 고개를 갸웃거리다, 천천히 입술을 뗐다.

“ 마음 같아서는 같이 훈련이라도 하며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고 싶었는데… 전하께서 그를 막으신 탓에 어쩔 수가 없었네요. 도움을 못 줘서 미안해요. ”

“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렇게 큰 기회를 주신 것만으로도 크나큰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

리암은 투박하지만 최대한 예의를 갖추며 목소리를 높였다.

마스터를 죽인 마스터로 명성이 높아진 헬레나가 직접 손을 대면 그 흐름이 몹시 뻔하고 재미없어 질 가능성이 높다.

그를 염려한 국왕의 뜻을 리암 또한 잘 알았기에 정말로 서운하다 생각하지 않았다.

다른 영지의 대표들 또한 마찬가지이기도 했고.

“ 그렇게 말해줘서 정말 고마워요. 다행히 몸 상태를 점검하고 다듬는 것에 관해서는 별 말이 없었으니… 최대한 배려하도록 할게요. ”

“ 예, 예엣. 정말 감사합니다. ”

배려라는 말이 몹시 감동적이었는지 리암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본래 똑바로 마주보는 것조차 허락을 맡아야 할 만큼 하늘 높은 곳에 사는 이들이 이러니 그럴 수밖에.

더구나, 그 귀족이 직접 저녁을 짓고 땔감을 패 올 때는 눈이 뒤집힐 지경이었다.

“ 아, 아니…! 공작님과 대공님께서 직접 준비를 하신단 말입니까?! ”

“ 예? 그렇죠. 일손이 모자라니까. ”

거의 기절할 만한 충격적인 광경이 펼쳐지는 가운데, 지온은 그게 무슨 대수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야영 준비를 직접 하는 것은 헬레나나 지온이나 당연하게 여기는 일이라 그 행동거지가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야영 준비에, 요리에, 불침번 면제까지. 리암은 평민이 받을 수 없는 대접을 받으며, 순간 자기가 사실 공작이 아닐까 싶은 착각까지 했다.

일을 돕는 것이야 당연했지만 그 수준이 너무 미약했으니.

“ 부담가지라고 하는 말은 아니지만, 리암은 우리 공작령의 대표잖아요. 그러니 불침번을 세워 피로를 쌓게 할 수는 없지요. 그렇잖아도 바깥에서 자면 안에서 자는 것보다 개운하질 못하니까요. ”

“ 하, 하지만 그것이……. ”

“ 으음. 정 부담스럽게 느끼신다면… 명령입니다. 편히 쉬도록 하세요. ”

지온의 배려에 헬레나가 한 술 더 뜨자, 리암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공작령의 백성으로서 공작이 직접 내린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소 과장하자면 명령 불복종으로 인한 반역이라는 오해를 살 수도 있었으니까.

“ 세상에……. ”

리암은 홀로 쓰는 텐트 안에 들어와 몸을 누인 채, 멍한 눈빛을 띠며 중얼거렸다.

날이 어둑어둑해진지 오래라 어둠밖에 안 보였지만, 그래서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기 좋았다.

간혹 행상인 등을 기습해 죽이고, 재물을 빼앗는다는 도적들을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오히려 도적을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 으음……. ”

승리에 대한 부담을 갖지 말라고 공작과 대공은 말했지만, 정말 부담을 안 가질 수는 없을 노릇이다.

리암도 그를 잘 알았고, 그렇기에 마음이 차분해진 지금 가슴을 짓누르는 듯한 부담이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정말 이기지 않아도 괜찮지는 않겠지. 만약 첫 싸움부터 꼴사납게 지면 어떻게 하지.

리암의 뇌리에 어두운 생각이 한껏 소용돌이치다, 그를 잡아먹을 듯 아가리를 쩍 벌렸다.

혹시 죽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쑥 떠오른 탓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도 잠시.

리암은 곧 흔들리던 마음을 다잡으며 눈에 힘을 주었다.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천장조차 꿰뚫어 보려는 것만 같았다.

“ 후우……. ”

사람이라고 다 같은 사람이 아니듯, 귀족이라고 다 같은 귀족이 아니다.

그 말을 오늘만큼 절실히 느낀 적이 없었던 리암은 공작 부부의 평판과 자신에게 보여주었던 모습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점점 작아져만 가는 어두운 생각을 완전히 털어내려는 듯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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