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2화 〉 전승 기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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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 위에서 몸과 머리가 나른할 점심 무렵. 왕을 만나러 자리를 떴던 헬레나의 입에서 다소 황당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이야기가 허무맹랑한 것이 아니라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라 그렇게 느꼈다.
“ 승리를 기념해서 축제를 벌이는 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지. 그런데 굳이 기사와 관련짓는 걸 보면……. ”
“ 어지간히 과시하고 싶었나봐. 하긴, 국력차이가 큰데도 큰 피해 없이 이겼으니 그럴 만도 하지. ”
그 말이 맞지.
나는 말을 끝맺기도 전에 답하는 헬레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 같은 생각을 했기에 더 들어볼 필요도 없다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어떻게 보면 소름이 돋기도 하지만, 또 어떻게 보면 더 길게 말할 필요가 없어 고맙기만 했다.
여태껏 몸을 섞다보니 무겁고 몸이 나른하기도 했으니까.
“ 그래도 취지 자체는 나쁘지 않은 것 같기도 해. 경쟁이 너무 가혹한 것 같기도 하지만, 눈에 띄면 기사가 될 기회가 늘 테니까. ”
“ 응. 꼭 끝까지 기어올라 이기지 않아도 기사 임명은 각 귀족들이 가진 고유의 권리니까. ”
한 사람만 기사가 되는 경쟁이 가혹하지 않을 수가 없지만, 꼭 그렇지 않아도 기사가 될 기회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령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우승한 사람 외에도 데뷔하는 경우가 있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지.
물론 거기까지 가기 위해 몹시 험한 경쟁을 치르며 살아남고, 그렇게 함으로써 눈에 띄어야 할 필요가 있기는 했다.
“ …쯧. ”
나는 혀를 차며, 너무 가진 자 위주로 결론 내린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현실적으로 봐도 참가한 사람 전부를 기사로 육성할 수도 없을 노릇이기는 해도, 그냥 딱 잘라 버리는 것도 찝찝했기 때문이다.
“ 왜 그래? 어디 마음에 안 드는 거라도 있어? ”
내가 언짢아하는 모습이 보기 불편했는지, 헬레나가 몹시 불안한 듯 떠는 눈빛을 띠며 물었다.
이렇게 저도 모르게 눈치를 보는 모습을 볼 때마다 상전이 따로 없어 보여, 내심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결국 각 영지에서 뽑히는 후보는 하나잖아. 결국 나머지는 다 떨어질게 분명한데, 그 사람들에게도 뭔가 위로가 될 만한 것이 없을까 싶어서. 경쟁이라고는 해도 결국 승전을 기념하는 축제니까, 축 처진 채로 돌려보내기가 뭣해서. ”
“ 아……. ”
헬레나는 내 답을 듣고서야 불안했던 기색을 풀고, 낮게 감탄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경쟁에만 초점을 두고 이야기를 하다 보니 축제라는 사실을 깜빡 잊은 모양이었다.
“ 일리가 있긴 해. 기왕 벌이는 축제를 우울하게 보내게 할 수도 없지. ”
“ 이해해 줘서 고마워. 그래도…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
“ 글쎄. 돈이 많기는 해도, 몇이나 참여할 지도 모르는데다, 설령 수가 적다고 해도 너무 값나가는 물건은 안 될 것 같아. 기사가 될 생각도 없으면서 물건만 노리고 올 사람이 늘어날 지도 모르니까. ”
한 번으로 끝날 축제라면 모를까, 아마 주기적으로 개최될 가능성이 높은 축제다.
그렇게 결론 내리고 있었기에 훗날 참여할 사람들까지 고려해 적절한 선을 지켜야 한다고 하는데,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물론 뭔가 주자는 건 좋다고 생각해. 단지 상황을 지켜보며 그 정도를 정해야겠지. ”
“ 좋아. 그러면 이 이야기는 이쯤에서 마무리 하자. 그 외엔 국왕이 뭐래? ”
“ 그 외엔… 조정을 거쳐서 각 영지에서의 선발 기간을 두 달 정도로 두고, 각 영지에서 대표가 나오는 즉시 보고하라고 하더라. 그 뒤에 곧바로 날짜를 정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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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엘렌은 귀족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정식으로 기사 작위를 받았고, 간간히 귀족들 틈에 끼여 시달렸던 이브는 겨우 살았다는 듯 한껏 풀린 표정을 지으며 안도했다.
본래 눈에 띠는 사람은 언제든 자기 영지로 끌어들이고 싶기 마련이나, 공작가라는 배경이 있었던 덕에 그런 시도도 몹시 드문 편이었다.
더구나 헬레나가 전투에서 활약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모습이 귀족들의 뇌리에 또렷하게 살아있는 덕이기도 했다.
특히 제 몸 가리지 않고 헬릭스와 처음 칼을 섞었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 공작님의 말씀이 있었다고는 해도… 은근히 힘들었어요. ”
영지로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 이브가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축 늘어뜨렸다.
제법 사이가 친해진 덕에 이렇게 늘어진 모습을 보이는 데도 거리낌이 없어 보였다.
누군가가 이 모습을 봤다면 너무 긴장감이 없다 한 마디 할 법도 했지만, 내 눈에는 좋아 보였다.
적당한 예의는 필요하겠지만 정이 없는 사이도 아니었으니.
“ 그래. 고생했어. ”
거의 붙어 있었다고는 하나 떨어질 때도 있었지.
나는 그 틈을 찌르던 귀족들을 떠올리며 이브의 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세 여자 중에서는 가장 나이가 적은 덕인지, 늙지 않는 마법 덕인지 몹시 매끄러운 느낌이었다.
“ 전쟁 후에 필요한 처리도 다 끝났는데, 또 일이라니……. 불만스럽지는 않으세요? ”
엘렌은 뺨을 쓰다듬던 내 손을 부럽다는 듯 쳐다보며 한 마디 했다.
아마 이 마차 안에 있는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왕명으로 벌어진 일이라 거절할 수도 없었다.
좋은 명분을 안고 하는 것이라면 더더욱.
“ 일이 많아지는 건 반갑지 않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풀어 줄 기회가 와서 좋다는 생각은 들어. 넓게 보면 이것도 영지민을 돌보는 일이고, 그 말은 곧 귀족의 의무라는 뜻도 되니까. ”
그렇기에 조금만 참아 달라는 말을 하며, 이브에게 해줬던 짓을 똑같이 해 줬다.
덕분에 약간 불만스러운 기색이 엿보이던 표정도 풀어져, 엘렌 또한 반쯤 노곤한 상태가 되었다.
헬레나는 이미 내 무릎을 베개 삼아 누운 채 잠들어 있어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모르고 있었고.
그 덕분일까.
붉은 석양이 마지막으로 붉게 타오르는 늦은 오후 무렵, 저택에 다다를 때 까지 조용하게 올 수 있었다.
너무 조용했기에 도중에 잠깐 졸기도 했으나, 그만큼 별 일 없었다는 뜻이라 만족스러웠다.
“ …그렇게 돼서 할 일이 많아질 거에요. 그렇다 해서 지금부터 당장 하라는 건 아니고요. 단지 내일부터 이런 일이 시작될 테니 알아 두라는 뜻에서. ”
“ 알겠습니다. 전하의 뜻이 훌륭하시기는 하나… 할 일이 많아지겠군요. ”
헬레나는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앤디를 불러 내일 할 일을 지시하고, 간단한 청사진을 그렸다. 일단 기한을 두고 참가자가 전부 다 모일 때 까지는 기다려야만 했기에, 그동안 늘 처리하던 서류를 다루며 시간을 보냈다.
기한은 소식을 전하고 알릴 것을 고려해 열흘로 정했다.
참가자는 영지의 동서남북에 배치되어 있는 각 병영 입구로 가서 신청을 하면 되었다.
굳이 먼 길 가지 말고 가까운 곳에 가라는 뜻이다.
단지, 이럴 경우 중심 쪽에 사는 사람들은 어디로 갈지 애매했기에 근처에 큰 텐트를 설치해 두었다.
그로 인해 영지 곳곳이 몹시 시끄러웠고, 사람마다 다른 반응을 보였다.
신경도 안 쓰는 사람이 있고, 구경거리가 생겼다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고, 나가고는 싶었으나 겁이 나서 그만두는 사람도 있었다.
기다렸다는 듯 이름을 쓰는 사람 또한 있었다.
그렇게 약속한 열흘이 다 지나, 헬레나의 손에 참가자 명단이 쥐어졌다.
“ 이백하고도 서른셋이라……. ”
나는 떨떠름한 듯이 중얼거리며 종이를 넘기는 헬레나를 보며 안타깝다는 생각을 했다.
짝수가 되었다면 딱 맞아떨어져서 좋았을 텐데, 홀수라서 그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서로 죽고 죽이라는 서바이벌이 아니라 토너먼트이기에 부전승이 안 나올 수가 없었다.
“ 어쩔 수 없지. 한 사람은 부전승으로 올리는 수밖에. ”
“ …응. 그저 운이 좋았다고 넘겨야겠어. 하지만 명단을 보고 정하면 찝찝한 느낌이 들어서 내키질 않아. ”
“ 그렇다면 명단을 안 보고 정해야겠네. ”
나는 잠시 어떻게 라고 묻는 헬레나를 내버려두고, 홀로 연구에 매진하고 있을 이브를 불렀다.
전쟁이 끝난 뒤부터 알 수 없는 과제가 생겼다며, 거기에 꽂혀 방에서 틀어박힐 때가 많아, 방에 있던 이브를 불러와야 했다.
그저, 그 와중에도 잠자리엔 꼬박꼬박 얼굴을 비추는 것이 신기하기는 했다.
이브의 성격 같아서는 잠도 안 자고 박혀 있을 것 같았으니까.
“ 아… 부르셨어요? ”
하인을 보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브가 집무실로 발을 들였다.
잠을 잘 자지 못하는데다 연구에 신경을 쏟으면 피곤할 만도 한데, 전혀 그런 기색을 엿볼 수가 없었다.
“ 바쁜데 불러서 미안해. 별 거 아니지만 부탁할 게 하나 있어서. ”
“ 아, 네…! 뭐든지 말씀하세요! ”
이브는 부탁이라는 말을 듣기 무섭게 눈을 반짝이더니 큰 소리로 답하기까지 했다.
그 탓에 입을 열기가 더욱 미안할 지경이었다.
바쁜 사람을 부를 필요가 없을 만큼 하찮은 일이었던 탓이다.
그래도 할 일은 해야겠다 싶어, 미안함을 곱씹으며 입을 열었다.
“ 1부터 233 중에서… 숫자 하나만 불러볼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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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허, 세상에……. 기사를 이런 식으로 뽑을 줄이야. 세상 살다 별 일을 다 보겠어. ”
“ 그러게 말이야. 전하께서 참 기똥찬 생각을 하셨어. ”
어린아이부터 늙은 노인에 이르기까지, 여러 인간이 한두 마디씩 거들며 어느 한 곳으로 분주히 움직였다.
얼마 전부터 동쪽 공터에 분주히 마련한 결투장에 가는 길이다.
결투장은 간이식으로 만들어 두었기에 다소 초라해 보였지만 구경하는데 불편하지는 않을 정도는 되었다. 무엇보다 날씨가 따뜻해서 바깥에서 놀기에 적당했다. 여름이라 하더라도 그리 덥지 않은 날씨니까.
“ 오… 제법 그럴 듯 하구만. ”
영지 내의 군사들을 굴려 만든 투기장은 제법 그럴듯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투우장을 떠올리게 하는 원형 구조부터 그 위로 설치된 간단한 벤치 무리에 이르기까지. 그럭저럭 갖출 것은 다 갖추고 있었다.
그렇기에 영지 군사들은 죽을 맛이었고, 기사들과 마법병단까지 일손을 거드느라 초췌한 이들이 많았다.
만약 헬레나가 성과금과 물품을 챙겨줘서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피곤해서 쓰러질 이들도 있었으리라.
그렇게 완성된 투기장에 사람이 하나 둘 모여들어, 어느새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앉은 자리가 꽉 찼기에 서서 보는 사람도 상당히 많아, 마치 사람으로 벽을 만든 것만 같았다.
“ 다들 잘 오셨소! ”
시장바닥마냥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를 가라앉히듯 누군가 큰 소리를 내자 기다렸다는 듯 침묵이 잦아들었다.
소리를 낸 남자는 황량한 결투장 한가운데 서 있었으며, 사람들의 시선을 받고 있었다.
갑옷을 입은 모습도 그러하며, 투기장 구석구석까지 들릴 만큼 큰 소리를 내는 것을 보아 기사가 분명하다.
사람들은 그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느끼며, 천천히 열리는 남자의 입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 지금부터 공작님의 명에 따라 기사를 뽑기 위한 결투를 주최하도록 하겠소! ”
결투 선언이 높게 울리기 무섭게 사람들이 큰 환호성을 질러댔다.
살아생전 결투를 볼 일이 없다보니 기대감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설령 그것이 오러와 오러가 튀기는 화려한 결투가 아니라 둔탁한 싸움이라 할지라도.
아니, 오히려 동네 싸움이라서 더더욱 보는 맛이 있을 지도 모른다.
지온과 헬레나는 숨겨진 상석에서 똑같은 생각을 하며, 결투장에 선 이들을 흥미로운 눈빛으로 지켜봤다.
목검을 들었다고는 하나 체계적으로 배우지 못했기에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모습이 애처롭기는 했다.
그러나 서로 진땀을 빼며 목검을 휘두르고, 둔탁한 소리가 울릴 때마다 짜릿한 긴장감을 주었다.
농사일을 하기 때문에, 또 기사가 될 생각을 했던 이들이라 그런지 둘 다 건장한 몸을 갖고 있었다.
간발의 차이로 상대의 손목을 후려쳐 승기를 얻었던 남자를 시작으로, 하나같이 몸이 나쁜 이들이 없었다.
하다못해 체격이 작고 약간 가느다란 느낌이 드는 청년마저 탄탄하다는 느낌을 강하게 주었다.
“ 오늘은 몇 시합 정도지? ”
“ 일단 서른 시합 정도…? 물론 때에 따라선 중간이 끊어버릴 수도 있어. 시합 수를 더 늘이기는 어렵지만 줄이기는 쉬우니까. ”
일리가 있지.
지온은 시선을 투기장에 둔 채 고개를 끄덕였다.
내심 적지도 많지도 않은, 딱 적당한 수준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더해, 대략 백이 넘는 시합을 하루 안에 전부 끝낼 수도 없기도 했다.
또, 그렇게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 급하게 진행해서는 즐길 틈도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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