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의 기둥서방이 되었다-161화 (161/192)

〈 161화 〉 전승 기념 #1

* * *

무엇을 얼마나 달라고 하면 좋을까.

모두가 잠든 새벽, 이브는 때 아닌 고민에 눈을 뜨며 여전히 어두운 천장을 올려다봤다.

어스름한 달빛 덕분에 어디에 뭐가 있는지는 알 수 있으나, 해가 떠오르는 때만큼 밝지는 못했다.

“ 으읏……. ”

이브는 아랫배를 쑤시는 것만 같은 찌르르한 느낌에 무심코 낮은 신음을 흘렸다.

자칫 같은 침대에서 잠들어 있는 세 사람을 깨울 수도 있어 내심 초조해해하기도 했다.

다행히 낮은 숨소리를 내며 깰 기미가 없어 망정이지.

그 탓에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던 중, 몇 가지 물건들의 모습이 이브의 뇌리를 스쳤다.

시약이나 실험을 위한 재료는 많을수록 좋다고는 하나 선을 지켜야 하기에 적당한 선을 재보기도 했다.

선을 넘는 요구를 하면 주는 사람 기분도 나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브가 때 아닌 행복한 고민에 휩싸여 시간을 보내다,

“ …그러니, 우리 영지에도 전투에서 사용했던 연기를 어떻게 깔아둘 수 없겠소? 물론 늘 연기가 피어오르지 않도록 조치를 해서……. ”

“ 그러고 보니 그 연기는 구체적으로 어떤 효과가 있던가요? 듣자하니 매캐하다는 것 말고는 단서가 너무 없던데……. ”

아침부터 이어지는 귀족들의 무수한 악수세례 탓에 머릿속이 어지러울 지경에 이르렀다.

본래 친목을 다지고 끈을 잇는 자리이니만큼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것이 당연하다고는 하나, 이브는 그런 귀족들의 생리에 서툴렀다.

병단을 이끈다고는 하나 그들 모두가 귀족도 아닌데다, 방에서 연구만 하는 매일을 보낸 탓이다.

물론 잘못한 것은 아니다. 그저 사는 방식이 달랐을 뿐이지.

어떻게 하지.

이브는 홀로 산책을 나왔다 보호자가 없는 틈을 찔린 탓에 내심 당황해하면서도, 겉으로는 태연한 척 하려 애를 썼다.

도저히 좋은 답이 떠오르질 않았던 탓이다.

그러다 앗 하고 눈 깜빡할 찰나, 이브의 뇌리에 헬레나가 했었던 말이 번갯불마냥 강하게 튀는 것을 느꼈다.

국왕 앞에서도 선을 긋고 말하라 했는데 귀족이 대수일까.

“ 아, 그게… 우선 각 귀족 분들의 영지환경이 어떤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어요. 우선 솔론트 백작님의 영지처럼 산맥이 주위를 둘러싸는지, 평지인지, 혹은 바다나 강을 끼고 있는지 부터요. ”

“ 어… 그게 무슨 관련이 있소? ”

귀족들은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들로서는 모를 장황한 이야기는 시작도 않았는데 약간 어지러움을 느낄 지경이었다.

그렇기에 이어지는 이야기가 정녕 같은 대륙어가 맞는지 혼란을 느꼈다.

“ 네. 마법, 특히 대단위 마법을 구성할 때엔 환경변수를 반드시 알아야 해요. 그를 위해서는 조사가 필요한데, 때에 따라서는 며칠부터 몇 달에 이르는 긴 시간이 소요되죠. 이번에는 엘프 측에서 파견한 군대의 도움을 받아 그 정보를 빠르게 수집할 수 있었지만, 보통은 그래요. 더구나 그렇게 수집한다 하더라도 불안정한 측면이 있고요. ”

“ 어… 어… 그건 또 뭡니까? ”

“ 계절에 따른 환경을 가장 알기 쉬운 예로 들 수 있을 것 같아요. 가령 건조한 겨울에는 바람이 건조한데, 이는 곧 날이 따뜻하거나 더운 봄과 여름에 비해 수분의 함량이……. ”

알지도 못하는 전문적인 이야기를 듣고 있으려니 눈앞이 핑 돌고, 정신이 끊어질 것만 같다.

이브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귀족들은 입을 모아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워낙 열성적으로 이야기하는 터라 쉬이 끊을 생각도 못 했다.

수학을 하나도 모르는 사람에게 수학자들이 연구할 법한 문제를 온갖 수식과 그래프로 치장해 설명한다 한들 머리만 아프듯, 지금도 그와 다를 바가 없었다.

오히려 환경변수를 고려한 마법진의 구성 등, 가면 갈수록 복잡해기만 했다.

“ …결국, 이런 변수를 차분히 계산해서 마법을 설치하려면 몹시 많은 시간이 들어요. 즉, 그 긴 시간을 바깥에 나가 지내야 한다는 것을 공작님께서 허락하실 지가 의문이에요. ”

“ 으, 으음… 그렇군요. 잘… 알겠습니다. 역시 전문가답게 유익한 내용을 쏟아내시는군요. 정말… 즐거웠습니다. ”

이브치고는 제법 완곡하게 돌려 말하는 거절임을 귀족들도 알았기에, 애써 웃으며 자리를 떴다.

아무리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애를 쓴다 한들 거절을 당하면 기분이 안 좋기 마련인데, 터덜터덜 걸으며 떠나는 귀족들의 축 처진 등에서 실망했다는 기색을 엿보기 어려웠다.

오히려 어지러운 지옥에서 풀려났다는 생각을 하며 허탈하게 웃었다.

이브는 그 모습을 아련한 시선으로 좇으며, 사람을 설득하는 데에는 정신을 빼놓는 것이 쓸 만하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 와… 몰랐는데 말을 상당히 잘 했었네? ”

익숙한 목소리와 더불어 손뼉 치는 소리까지.

이브는 저도 모르게 소리가 들리는 뒤쪽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결과 이브가 생각했던 대로 정복을 입은 헬레나가 미소를 지은 채, 손뼉 치던 손을 아래로 슥 내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 아, 공작님. 혹시… 보고 계셨어요? ”

“ 응. 압박이 너무 심하다 싶으면 끼어들려고 했는데… 잘 대처해서 그럴 겨를이 없더라. 훌륭해. ”

“ 감사합니다……. ”

헬레나는 수줍다는 듯 고개 숙인 이브 앞으로 다가가, 이브의 두 어깨를 가볍게 감싸며 웃었다.

본인도 반쯤 정신없이 말했다고는 하나, 제법 훌륭한 대처였다는 평가를 하면서.

“ 그런데… 공작님도 산책하러 나오셨어요? 원래 지금쯤이면 대공님께서……. ”

“ 물론 배야 채웠지. ”

지온을 거론하기 무섭게 헬레나의 뺨이 붉게 달아올랐고, 희고 긴 손가락으로 아랫배를 가볍게 쓸었다.

이브는 그 모습을 보고 헬레나의 기분과 상태를 알았지만, 그래서 호기심을 참지 못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더 많은 것을 얻고자 방에서 나오지 않았을 테니까.

“ 그런데도 왜 나왔나 궁금한가 보구나. 표정에 훤히 드러나네. ”

“ 어…? 그렇게 티가 나나요? ”

“ 나한테는. 아무튼, 네 생각이 맞아. 가볍게 땀을 흘리고 같이 욕실에 들어가려는데 전하께서 부르셨거든. ”

왕이 불렀다면 어쩔 수 없지.

정신이 불안정한 상태라면 또 모를까, 배가 불러 만족한 헬레나가 맨 정신으로 국왕의 부름을 거절할 수는 없을 노릇이다.

이브도 그를 알기에 낮은 소리로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 아… 그러셨군요. ”

“ 그래. 그래서 나는 곧장 전하가 계신 곳으로 갈 테니까, 너는 방으로 돌아가. 알았지? ”

“ …네. ”

얼핏 들으면 귀족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처럼 들리나, 사실 대놓고 허락한 것과 진배없었다.

그를 눈치 챈 이브는 급하게 허둥지둥 고개를 숙인 뒤, 곧장 지온이 기다리고 있을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헬레나는 그 뒷모습을 보며 아쉬운 마음에 혀를 차다, 왕이 기다리고 있을 알현실로 걸음을 옮겼다.

국가정사를 돌보는 홀이 아니라, 둘이서 조용히 이야기하고 싶다는 명령에 따라서.

“ 공작님, 오셨습니까. ”

알현실 앞에 다다르자 문을 지키고 있던 하인 하나가 고개를 숙였다.

왕궁에 몸 담고 있어 그런지 하인들 모두가 집사가 입을 법한 연미복을 걸치고 있었다.

헬레나의 눈앞에서 고개 숙인 남자도 마찬가지였고.

“ 네. 고해주세요. ”

“ 알겠습니다. ”

전하, 크라우저 공작께서 오셨습니다.

문을 지키고 있던 하인이 목을 곧게 세우고 목소리를 내자, 안쪽에서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헬레나가 기다렸다는 듯 하인이 열어주는 문 너머로 발을 들이자, 미리 상석에 앉아 있던 국왕과 눈이 맞았다.

“ 공작, 어서 오시오. 내 아침부터 따로 불러서 미안하게 되었소. ”

“ 아닙니다. 전하께서 부르신다면 왕국의 귀족으로서 그에 응하는 것이 당연하겠지요. ”

국왕은 몹시 반갑다는 듯 만면에 미소를 띠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옆자리를 향해 손짓했다.

긴 사각형 테이블을 두고 마주 앉기엔 모양새가 이상하다 생각했기에, 본인과 가장 가까운 자리를 권한 셈이다.

헬레나도 그를 알기에 거리낌 없이 고개를 숙인 뒤, 왕이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 음. 내 공작과 의논할 일이 있어 부르기는 했소만, 바로 본론부터 들어가는 것도 예의가 아니겠지. 우선 숨부터 돌리시구려. ”

“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배려란 곧 국왕이 사람을 시켜 가져오게 한 차 한 잔 이었으며, 헬레나는 그를 고맙게 받아들였다.

여유로운 기색을 보아하니 급한 일은 아닌 듯 했고, 수염 난 입가가 호선을 그리는 것을 보니 나쁜 일도 아닌 듯싶었다.

“ 후우……. ”

달그락.

헬레나는 받침대 위로 오른 국왕의 텅 빈 찻잔을 향해 시선을 떨구다, 다시 긴 숨을 토해내는 국왕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대화할 준비가 끝났음을 은연중에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헬레나의 생각을 뒷받침하듯, 국왕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 내 이렇게 공작을 모신 것은 다름이 아니라, 한 가지 의논할 것이 있어 그랬소. ”

“ 말씀하시지요. ”

“ 음. 다름이 아니라… 우리 왕국의 병사, 귀족들이 한데 힘을 모아 합치는 일이 참 드물지 않소? 어찌 보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안 그렇소? ”

그야 그렇긴 하지.

헬레나는 속으로 그리 생각하며, 옳으신 말씀입니다 라는 말로 공감하는 뜻을 내비쳤다.

운을 떼는 모습이 제법 장황한 것을 보아 제법 큰일을 하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과 함께.

“ 네. 잘 없기는 하지요. 다만… 이런 위기 상황에서 잡음 없이 뜻을 모은 것만 보아도, 우리 왕국의 귀족들이 썩지 않았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

“ 그에 관해서는 반박할 말이 없지. 옳으신 말씀이오. 그래도 그 뜻을 모을 계기가 없던 것 또한 사실이지. 그리고 그 뜻을 모으는 계기가 된 제국 놈들이 간악하기는 하나, 그 점 하나만 보면 은근히 도움이 되었다 할 수 있겠소. ”

“ 예. 그렇기는 하지요. ”

“ 그렇지. 그래서 말인데… 모처럼 모은 뜻을 최대한 잊지 않도록 이어갈 생각을 하나 떠올렸소. 물론 언젠간 잊히고 스러지기 마련이겠지만, 적어도 내 대에서는 그러지 않도록 바라는 뜻에서 말이오. ”

뜻을 잊지 않도록 기념관이라도 세울 작정인걸까.

헬레나는 국왕이 돈 내놓으라는 이야기를 이렇게 돌려 한다며 은연중에 결론을 내렸으나, 곧 이어지는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 뜻을 모았던 그 날을 기념하며, 또 우리의 승전을 이름 높이 알릴 겸 전승 축제를 벌이고 싶소. 기사를 선발하는 축제 말이오. ”

“ 기사를… 축제로 선발한다고요? ”

“ 허허. 그렇소. 전혀 생각도 못한 일이라 그런지 공작께서도 몹시 놀란 모양이오. ”

국왕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워하는 헬레나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너털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놀랄 수밖에.

대륙의 기사는 각 귀족이나 왕족이 임명권을 가지고 있으며, 자유기사라 함은 그 귀족의 아래에 있다가 벗어난 이들을 뜻했다.

즉, 어떤 이유에서든 지배층의 입김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 기사였다.

더욱이 입김을 넣으려 해도 그 아래에 기사를 가르칠 경험 있는 기사도 필요해 그 수가 적은 것이 당연했다.

물론, 국왕이 말한 선발이 그런 식이었다면 놀라지도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헬레나는 축제로 선발한다는 말을 통해 그 과정이 일반적이지 않음을 깨닫고 놀란 듯한 기색을 보였다.

“ 뜻이 훌륭하시어 따로 덧붙일 말이 없기는 합니다만, 어떤 식으로 선발하실 생각이십니까? ”

“ 우선 왕국 전 영토에 내 뜻을 알리고 참여자를 모을 생각이오. 그것만 해도 제법 긴 시간이 걸리겠지. 아무튼, 그렇게 참가자를 모으면 그 이름을 정리한 목록도 만들고… 그 다음엔 이긴 사람이 계속 위로 오르는 구조를 생각하고 있소. ”

간단히 말하자면 토너먼트 식으로 승자를 정하고, 그 승자가 기사로 임명될 자격을 갖는다는 뜻이다.

단지 토너먼트라는 개념이 없던 탓에 어쩔 수 없이 설명이 길어지고 말았다.

다행히 헬레나는 국왕의 말뜻을 제대로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이긴 했으나, 선을 그어둘 필요가 있음을 깨달았다.

“ 그렇다면 선을 그어두어야겠군요. 우선 오늘 연회에서 정식으로 발표를 하시고, 귀족들이 돌아가는 날을 기준으로 한 달이라는 시간을 둠이 어떻겠습니까? ”

“ 선이라. 좋은 생각이시오. 또 다른 의견은 있소? ”

“ 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기사가 기사를 기르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나 그런 이들만 축제에 참여해서는 전하께서 의도하신 바와 거리가 먼 결과를 낳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 참가 자격에도 선을 긋는 것이 옳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 흐음. 그것 또한 옳으신 말씀이오. 모두가 보고 즐겨야 할 자리에 수련 기사들이 득실대면… 아무래도 맛이 떨어지기 마련이지. ”

정식으로 임명된 것은 아니나, 우연히 기사의 눈에 들어 그 아래에서 훈련을 받는 이들을 수련 기사라 불렀다.

국왕도 그를 알기에 자연스레 그 단어를 사용하며 턱을 쓰다듬었다.

중앙기사단은 제대로 임명된 기사들 중에서 뽑지만, 각 영지의 기사들은 수련을 시켜 자격을 부여한다.

간혹 연줄로 기사가 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 경우 저급한 기사들만 많아지니 드문 일이기는 하지.

국왕은 조용히 입을 다문 채 머리에서 떠오르는 여러 가지 생각을 정리하다, 머리가 맑아지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 음. 아무래도 각 귀족들의 양심에 맡길 수밖에 없겠지만… 평민과 용병들로 그 자격을 제한함이 좋겠소. 우선 각 영지에서 일차로 선별식을 진행하고, 각 영지에서 이긴 자들을 따로 꾸려 수도에서 대련을 치르도록. ”

“ 좋은 생각이신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시지요. ”

제법 재산이 부유한 이들의 경우 그 영지의 귀족에게 뇌물을 찔러 넣어 결과를 조작할 가능성도 있으나, 기사 하나를 뽑는 과정에서 그러는 것이 손해였다.

결국 각 영지에서 선발된 대표끼리 겨룰 경우 실력이 뛰어난 쪽이 이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만약 한 사람을 기사로 만들고자 여러 영지의 귀족들에게 밑 작업을 하고자 한다면… 멍청하다고밖에 할 말이 없었다.

명예가 높다고는 하나 권력이 그리 크지 않은 직종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실력도, 노력도 없는 기사는 자리를 지킬 수 없기 마련이고.

헬레나는 기사를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그 생리를 잘 알았기에, 크게 걱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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