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9화 〉 이겨도 바쁘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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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마차에 실린 배상금이 많다고는 하나 공작이, 하물며 대공까지 직접 나설 일은 아니다.
바르칸 백작은 집무실에 앉아 두 사람이 왜 직접 여기까지 말을 몰았는지 고민했다.
믿기는 어려우나 바람을 쐬러 왔다는 명분을 내건 이상 그에 질문을 던질 수도 없을 노릇이었다.
헬레나를 의심하고 있다 말하는 것과 같은 의미였으니까.
“ 으음……. ”
바르칸은 홀로 우두커니 집무실에 앉아 무거운 침음을 흘렸다.
말로만 듣던 위용을 전쟁터에서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던 충격이 눈에 생생히 떠오른 탓이다.
귀로만 듣는 것과 눈으로 직접 보는 것에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새삼 깨닫는 순간이기도 했다.
“ 음? ”
설마? 홀로 오랜 생각을 하던 중, 한 가지 가정이 바르칸의 머리에서 번갯불을 튀기듯 뚜렷하고 강하게 떠올랐다.
헬레나의 성향과 평판을 고려해보면 딱 들어맞아 떨어지는 면도 없잖아 있어, 거의 사실시 되는 가정이었다.
“ 거기 누구 있느냐? ”
“ 예, 백작님. 부르셨습니까? ”
바르칸이 낮은 목소리로 사람을 부르자, 미리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던 하인 하나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집무실 문을 열었다.
여느 귀족가가 그러하듯 언제든 부름에 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 공작님께서 가지고 오신 재물은 어찌했느냐? ”
“ 예. 우선 곧장 창고 쪽으로 가지고 간 뒤 깔끔하게, 따로 분류해 두어 구분하기 쉽도록 조치도 마쳤습니다. ”
“ 따로 분류해 두었다고? 잘했구나. ”
만약 생각했던 바가 정말 사실이라면 어지러이 섞어놓는 것보다 훨씬 편하다.
바르칸은 따로 분류를 해 두라고 지시한 누군가에게 내심 고마움을 느끼며, 사뭇 묵직한 목소리를 냈다.
“ 죽거나 다친 병사들의 기록은 다 정리해 두었느냐? ”
“ 예. 로이드 님이 지시를 내리시어 분류가 다 끝났습니다. ”
“ 그렇다면 배상금을 사용해 그 위로를 후하게 하고, 다친 병사들도 치료를 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말거라. 그러다 배상금을 다 써도 상관없으니까. ”
“ 그… 그게 정말이십니까? ”
“ 어허. 너는 네가 허언을 말할 인물로 보였더냐. 아무튼 너는 곧장 방을 나가는 즉시 로이드와 집사에게 가 내 결정을 알려라. ”
여러 상인들과 회합을 가지며 사는 만큼 자기 이윤에 밝은 인물이 손해를 따지지 않는다라.
하인은 그 명령이 혹시 의문스러우면서도, 겉으로는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말꼬리를 잡고 늘어질 처지도 아니거니와 그럴 이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바르칸은 급히 자리를 뜨는 하인의 등을 바라보며 숨을 길게 토해내다,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피 값은 피를 흘린 이들에게 먼저 주라는 것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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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르칸 백작도 그렇고, 귀족들 전부가 묘하게 딱딱하지 않았어요? ”
제법 긴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중, 같은 마차를 탄 엘렌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항구도시부터 분지지형까지 다양한 곳을 돌아 피곤할 만도 했으나, 여전히 생기가 넘치는 모습이었다.
“ 딱딱해? 그럴 수도 있지. 공작이 직접 호송행렬을 몰고 다녔으니까. ”
“ 물론 그것도 있겠지만, 어쩐지 눈치를 보고 조심스레 행동한다는 느낌이 더 강했어요. 물론 공작님이 오시니 눈치를 보긴 하겠지만, 그것과는 다르다고 해야 할지……. ”
“ 듣고 보니… 정말 그랬던 것 같아요. ”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브도 엘렌의 말에 힘을 실어주는 걸 보면 나만의 착각이 아닌 모양이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눈치를 봤음은 분명하고, 그 이유가 단순히 공작이 찾아왔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그저 이미 다 끝난 일이기에 굳이 그 이유를 캐낼 필요는 없어 보이지만, 알고 싶다는 호기심이 조금씩 고개를 들었다.
생각해보면 늘 각 귀족들의 영지를 떠날 때마다 각 잡힌 신병 같은 모습을 보이기도 했었으니까.
“ 아마 우리가 제 주머니를 별로 채우지 않으니까 눈치가 보인 거겠지. 그리고 그 상황에서 자기네들 영지로 직접 찾아갔으니, 은근히 이렇게 하라는 압박처럼 보였을 지도 모를 일이고. 그러니 그 이야기는 그만해. 너무 시끄러워. ”
가만히 내 어깨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던 헬레나가 한 마디 하자, 저도 모르게 입을 꾹 다물었다.
엘렌이나 이브도 나처럼 입을 다물었지만, 동그랗게 뜬 눈이 무척 놀라워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여러 귀족들이 그런 모습을 보여도 관심 없다는 듯 무난하게 행동하면서도 다 생각이 있었던 걸까.
직접 확인한 이야기가 아니니만큼 단순한 가정에 불과할 뿐이겠지만, 내 귀에는 엄연한 진실로 들렸다.
“ 와… 설득력이 넘치네. 대단하다. ”
“ 정말? ”
내가 무심코 중얼거리듯 칭찬하자, 헬레나가 눈을 가늘게 뜨며 배시시 웃었다.
남이 칭찬하면 부담스러워하면서, 내 칭찬은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모습은 여전했다.
날카로운 설득력을 가진 말을 지나가듯 뱉었다고 믿기 어려운 느낌이다.
“ 그럼, 정말이지. 헬레나가 곁에 있어서 얼마나 든든한지 몰라. 괜한 고민으로 마음이 무거울 일도 많이 줄어드니까. 물론 엘렌이나 이브도 같이 있어 든든하고. ”
나는 혹시 헬레나만 칭찬하는 것이 서운할까봐 은근슬쩍 두 여자도 끼워 설명했다.
특히 엘렌과 이브가 없었다면 오늘 같은 기적적인 결과를 얻을 수도 없었을 테니 고맙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행히 진심이 전해졌는지 모두가 서운해 하는 기색 없이 기뻐했고, 덕분에 훈훈한 분위기를 잃지 않고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 후로는 자잘하게 남은 전후처리를 마치고, 세금과 농업에 관한 일을 느슨하게 처리하는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 와중에 짬짬이 파견 오는 엘프 인부들을 맞아들이기도 하고, 다크엘프를 불러 같이 훈련을 하기도 했다.
같은 적을 두고 손을 잡은 적이 있어 그런지 전보다 우호적인 느낌이 강했다.
나로서는 참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다만, 시간이 흘렀기에 늘 치러야 하는 중요한 행사가 부쩍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다름 아닌 국왕의 생일 축하 연회가.
“ 벌써 이럴 때라니… 시간 참 빨라. ”
나는 손에 쥔 국왕의 친서를 집무실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한숨 쉬었다.
초대장이라고는 하나 국왕이 직접 쓴 칙서를 너무 소홀하게 다루는 게 아닌가 싶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만한 충성심을 가진 인물이 이 안에 없었다. 나나 헬레나나.
“ 다행히 이번에는 선물을 지참하지 말라는 명령이 있으니, 가는 길이 편하긴 하겠어. ”
헬레나는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국왕의 칙서를 읽다, 다행이라는 듯 안도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 말은 그렇게 해도 은근히 기대하는 게 아닐까? ”
“ 그랬다가는 국왕 본인의 마음이 좁다는 것만 증명하는 셈이잖아. 설령 정말로 그렇다 하더라도 뭐라 할 수는 없지 않을까 싶어. 물론, 국왕은 한 입으로 두말하는 남자가 아니니까… 숨겨진 뜻이 있는 건 아닐 거야. ”
그렇다면 다행이지.
나는 귀찮은 일이 한 가지 줄어들었음에 감사하며, 올해 준비해 두었던 선물을 어디다 쓸지 고민했다.
국왕에게 잘 보여야 했던 때와 비단과 보석 등 무난한 사치품이라 쓸 데가 많았다.
그냥 닦아먹은 뒤 보관만 해도 괜찮고.
“ 아. 그리고 엘렌과 이브는 꼭 참석하라고 되어 있네. 제국 병영을 기습해서 성과를 올린 대표로서. ”
“ 쯧. 대충 유하게 넘어가면 좋았을 텐데……. ”
내 욕심이지만 엘렌과 이브가 지나치게 주목 받는 것은 영 내키질 않았다.
두 여자가 가진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게 두면 골치 아프고 마음 무거운 일이 생길 거라 늘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전쟁에 나서게 할 때에도 적당한 선을 그은 것인데, 그마저도 컸으니 어쩔 수 없겠지.
그나마 변명의 여지를 남겨 둔 것이 다행 아닌 다행이라 할 수 있었다.
“ 어쩔 수 없지. 국왕의 부탁은 어떻게 보면 명령보다 더 무거우니까. ”
“ 사실상 명령을 돌려 말하는 거라 괜히 음침한 느낌이 더 강해 보이지. ”
헬레나는 기다렸다는 듯 나와 말을 주고받으며, 은근히 국왕을 깎아내렸다.
그렇다 해도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수준은 아니라 적당히 웃고 넘어갈 정도였다.
이곳에 국왕이 있다면 내심 진땀을 뺐겠지만, 애초에 국왕이 있었다면 이야기 자체를 안 꺼냈을 터였다.
그런데 말이야.
헬레나는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나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눈치를 보니 궁금한 것이 생겼나보다.
“ 응? 왜 그래? ”
“ 엘렌이야 내가 준 정복을 입고 가면 그만이지만… 이브는 그런 게 없잖아? 연회에 참석해야하니 평소 같은 옷을 입으면……. ”
“ 곤란하지. 오히려 차려입지 않아 눈에 띌 거야. 요즘에야 많이 나아졌지만, 그렇다 해서 그 성격이 어디 가는 것도 아니니까. ”
나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사람마냥 마음이 급해지는 것을 느끼며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그 과정에서 머리를 떼느라 헬레나가 불만스럽다는 듯 입술을 삐죽였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평소에 입던 옷을 그대로 입고 갈 수 없을 노릇이니까.
하여튼, 이래서 귀족도 귀찮은가보다.
“ 기간이 그리 넉넉하진 않으니 어쩔 수 없지. 내가 적당히 만드는 수밖에. ”
“ 뭐…? ”
웨딩드레스도, 속옷도 만들었는데 파티용 드레스가 대수일까.
나는 손에 배인 기술과 자신감을 믿고 기세등등하게 집무실을 나서려다, 몹시 서늘한 헬레나의 목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그럴 수밖에.
“ 지온이… 직접 만들어 줄 거야? ”
함께 나를 공유한다고는 하나 상하관계가 분명했던 덕에 헬레나가 화를 내는 일이 잘 없었지만, 오늘은 달라 보였다.
헬레나는 가지지 못한 것을 직접 만들어주려는 것 때문에 질투심에 불이 붙은 눈치였다.
그리고, 그 불은 보는 즉시 꺼두어야 뒤탈이 없었다.
“ 응. 그렇게 하려고. 가게에 맡기고 작업하게 두기엔 시간이 없을 것 같거든. 가게 사람들도 미리 맡아서 하는 일이 있을 테고. ”
“ …우리가 급하니까 밀어붙여서 시켜. ”
물러날 생각이 없다는 듯 단호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라, 바늘 하나 들어갈 틈이 없어 보였다.
내가 멘탈이 강하지 않았다면 쫄아버린 나머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참. 이럴 때 마다 멘탈이 강한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나는 집무실 의자에 앉은 채 죽은 눈빛을 띠는 헬레나 곁으로 다가가, 매끄러운 두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 헬레나. 잠깐 일어나 볼래? ”
헬레나는 여전히 질투로 인한 화가 가라앉지 않은 모습을 보이지만, 그 와중에도 내 말을 잘 따랐다.
나는 내심 순종적인 헬레나의 태도에 감사하며, 어깨에 얹은 손을 허리까지 내린 후에 꽉 끌어안았다.
품 안에 담기도록.
“ 왕궁 연회에 가야 하니까 이브 것부터 먼저 만들어야 해. 하지만……. ”
“ 하지만…? ”
이야기가 묘한 방향으로 흘러갈 것을 아는지, 헬레나가 약간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소리에 담긴 서늘함은 여전했으나 기대감이 녹아든 눈치였다.
조금만 더 흔들면 기분이 풀릴 것이라 느껴질 만큼.
“ 이참에 잘 됐다는 생각이 드네. 헬레나에게 입혀보고 싶은 옷이 많고, 해 보고 싶은 것도 있어서.. ”
“ 그게 뭐야? ”
뭐긴 뭐야. 그거지.
나는 그 말을 애써 삼키며, 차분히 숨을 고른 뒤 몸을 웅크렸다.
내가 헬레나보다 키가 크기에, 귓가에 대고 속삭이려면 고개를 숙이고 몸을 웅크려야 했다.
“ 사실 여태껏 말은 안 했지만… 귀부인들이 입은 옷을 올 때마다 절로 상상이 돼. 헬레나가 저 옷을 입었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
의외로 풍성하고 노출 적은 것들만 있을 줄 알았더니, 현대에 있었던 파티 드레스처럼 몸에 꼭 붙는 드레스가 주를 이루고 있었다.
어깨나 위쪽 가슴이 훤히 드러나는 것도 많았다.
정작 그 드러낸 부위를 가리고자 털목도리 등의 장식을 걸치는 경우가 많았지만… 아무튼.
“ 상상했어. 저런 옷을 헬레나가 입고, 나는……. ”
나는 벗는 것보다 적절한 옷을 입는 것이 흥분도 높아지는 법이라는 것을 말하며, 질투가 아닌 욕구에 불을 붙이려 애썼다.
평소 정복을 선호하기에 쉬이 말을 꺼내기 어려웠지만, 드레스를 입은 헬레나를 인기척 없는 벽에 처박고 범하고 싶었다.
난폭하게, 번식욕에 미친 짐승처럼 그렇게 하고 싶었다.
때로는 아까운 돈이 날아갈 것을 알면서도 반쯤 찢어버리고, 옷이 체액으로 흠뻑 젖어 걸레짝이 되어도 멈추고 싶지 않다.
“ 흐으응… 그건… 너무, 위험해애……. ”
헬레나는 싸늘함이 사라지고, 약간 열을 띤 달콤한 목소리를 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약간 갑갑할 만큼 꽉 끌어안고 있어 스치는 부위가 많은데다, 늘 하던 설득을 위해 부추기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나는 거의 다 넘어왔다는 생각을 하며, 질투심을 가라앉히기 위한 마지막 과정을 밟고자 입을 열었다.
“ 내가 만든… 여느 귀부인들처럼 야한 옷을 입고, 문란한 귀족들처럼 몸을 섞기 위해 은근하고 천박하게 유혹해 줘. 할 수 있겠지? ”
“ …으, 으응. 할 수… 있어. ”
“ 고마워. 헬레나는 착하니까 내 말을 들어줄 거라 믿고 있었어. ”
톡톡.
나는 아이를 칭찬하듯 헬레나의 등, 정확히는 꼬리뼈 부근을 손바닥으로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쓰다듬기도 했다.
마침 팔을 그쯤에 두르고 있었으니 어렵지도 않았다.
“ 네, 네에……. ”
다 녹아버린 듯한 달콤한 목소리가 한 고비 넘겼음을 알려 줬으니, 이제 몸으로 때울 일만 남았다.
나는 헬레나를 끌어안은 채, 귓가에 대었던 입술을 목덜미로 떨어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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