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8화 〉 이겨도 바쁘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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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아지다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
“ 워낙 받기만 하면서 산 인생이라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
운이 아니라 조작에 의해 태어난 것이라고는 하나 좋은 집안에서 태어난 것부터 결혼까지, 전후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의 눈으로 보기엔 운이 좋다고밖에 할 말이 없었다.
내가 제힘으로 이루어낸 것이 아예 없는 것 같다는 것이 아니더라도.
다만, 그에 부끄러움을 느끼거나 열등감을 품고 사는 건 아니다.
제발 조용히만 살다 갔으면 하는 생각만 품고 살 뿐이지.
그러나 홀랜드가 이런 뒷사정을 알 리가 없으니, 그 눈동자가 난처하다는 듯 이리저리 헤엄칠 만도 했다.
“ …쓸데없는 말을 꺼내 죄송합니다. ”
“ 괜찮습니다. 홀랜드가 사과할 만한 일이 아니잖아요. 저는 오히려 좋다는 생각밖에 없습니다. ”
경제적 여유가 넘치는데다 일이 그리 힘든 것도 아니다.
더해, 발작버튼이 눌릴 때를 빼면 부족함 없는 아내와, 생각도 안하고 있다가 품에 안긴 두 첩까지.
누가 조작이라도 한 것 마냥 축복받은 환경이 아닐 수 없었다. 심지어 포장지까지 완벽해 기쁨이 배로 더했다.
물론 이 평화를 이어가기 위해 뒤편에서 설득과 조련을 주기적으로 해 줘야 했지만… 이제는 이것마저 즐거웠다.
“ 어… 그것이… 대공님께서는 참 특이하십니다. ”
“ 칭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칭찬 맞지요? ”
“ 물론 칭찬이지요. 새삼 대공님이 공작님 곁을 지키고 있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
잠시 어색했던 분위기가 가신 뒤.
나는 시답잖은 농담을 나누며 다시 한 번 필요한 것을 기록한 뒤, 홀랜드의 배웅을 받으며 말에 올랐다.
할 일도 다 끝났으니 곧장 집에 돌아갈 생각이었다.
오늘은 무엇을 할까.
나는 두근거리는 기대감을 품으며 말의 고삐를 쥐다, 저도 모르게 주위를 슥 훑었다.
꼭 누군가가 몰래 쳐다보는 것 같은 찝찝함이 뒤통수를 묵직하게 누르는 것만 같았던 탓이다.
그러나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저택으로 돌아가자 시선을 던진 범인이 정말로 있었음을, 그것도 헬레나가 그랬음을 알 수 있었다.
저녁을 먹은 뒤에 나를 놀라게 하려고 몰래 따라왔다는 것을 스스로 고백한 덕이다. 귀엽기도 하지.
그래서 그날 밤 정성들인 보답을 해 주자, 헬레나가 길게 혀를 뺀 채 개처럼 헥헥대는 소리를 냈다.
평소보다 몇 배로 공을 들인 보람이 있었다.
더구나 엘렌과 이브도 쫓아내고 집중했으니 더더욱.
나는 헬레나가 헐떡대던 모습을 떠올리며, 이것이 흔히들 말하는 암캐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약간 천박한 듯싶기도 하지만, 잠자리에서 고상 떠는 것보다는 나아 보였다.
단지 그 일이 있은 뒤 은근히 뾰로통한 기색을 드러내는 엘렌이나, 은근히 눈치를 보는 이브도 달래느라 제법 고생을 했다.
“ 공작님. 제국에서 보낸 제물이 도착했습니다. ”
늘 그렇듯 서류 작업을 마무리하고 집무실 소파에서 한가로이 쉬고 있던 중, 앤디가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와 고개를 숙였다.
평소보다 묵직한 모습을 보이기에 특별한 일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게 배상금인 모양이다.
“ 고생했어요. 혹시 운반 도중에 잃어버린 제물이 있었나요? ”
“ 처음 수도로 제물이 올 때에는 도적떼가 몇 차례 덤벼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만, 다행히도 손실이 없었답니다. ”
“ 그래요? 알려줘서 고마워요. ”
“ 예. 쉬시는 중 끼어들어 실례가 많았습니다. ”
헬레나는 마지막 인사를 마친 뒤 물러나는 앤디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입을 다물었다.
착 가라앉은 눈빛이나 턱을 쓰다듬는 희고 긴 손가락을 보니 제법 깊은 생각을 하는 눈치였다.
제국이 토해내야 할 배상금의 양은 미리 받아 둔 보고서에 적혀 있어 그런지 따로 확인하려는 생각은 없어 보였다.
패전국이 배상금으로 장난을 치면 아주 큰 난리가 날 것이 뻔해서 그런 걸까.
“ 전쟁 배상금을 가로챌 생각을 할 만큼 간 큰 놈들이라면… 여전히 틈을 노릴 가능성이 크겠지? ”
무거웠지만 어색하지 않았던 침묵을 깨고, 헬레나가 입을 열었다.
수도로 향하는 배상금을 빼앗으려 들 만큼 눈이 시뻘개진 놈들이라 혹시 모를 일을 걱정하는 것 같았다.
지금이야 그 배상금이 세 갈래로 갈려 각 공작의 영지에 다다랐으니 위험이 줄어들었다고는 하지만… 글쎄.
“ 그렇긴 한데, 적어도 우리가 나눠 줄 경로로 올 것 같지는 않아. 그렇잖아도 국왕파의 몫을 전하께 일부 떼어드린 것도 있고, 기습을 하려면 다른 공작들의 몫을 노리는 것이 쉬울 테고. ”
“ 그 말도 일리가 있어. 일리가 있긴 한데……. ”
헬레나는 여전히 걱정이 가시지 않는 듯, 눈을 가늘게 뜬 채 입술을 꾹 다물었다.
욕심에 눈이 멀면 앞뒤를 생각하며 재는 힘도 사라지고, 심장은 욕심 때문에 강하게 쿵쿵대며, 손에 쥐고 싶다는 조급함이 등을 떠밀기 마련이니까.
“ 정 걱정되면 호위 병력을 늘일까? ”
“ 아, 그게… 전쟁으로 인한 피로가 풀린 지 얼마 안 돼서 또 밖으로 나돌게 하는 건 내키지 않아. 병사들이야 기쁘게 따라주겠지만 내가 미안해서……. ”
헬레나는 평상시에도 병사를 배려하기에 새삼 어색하지도 않고,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다.
그런데도, 어쩐지 정말 하고 싶은 말을 쉽사리 꺼내지 못해 질질 끄는 느낌이 강했다.
내 말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모습과 다른 것도 그렇고.
그렇다고 해서 헬레나가… 말대꾸? 라는 생각에 화가 나는 건 아니다. 그저 무심코 고개를 갸웃거릴 만큼 이상할 뿐이지.
“ 그러면… 헬레나는 어떻게 하면 좋을 것 같아? ”
“ 아! 그게… 지온만 괜찮다면 우리가 직접 파벌 휘하 귀족들의 몫을 나눠주고 싶은데, 안 될까? ”
공작이 사람을 시키는 것도 아니고 각 영지를 돌며 손수 나눠준다?
이럴 때 보통 귀족이라면 굳이 그렇게 해야 하나 싶은 생각과 함께, 너무 엉덩이가 가벼운 것 아니냐는 비판을 할 법도 했다.
아니면 부담을 줘서 이루고자 하는 꿍꿍이가 있다고 오해하거나.
뭘까.
내 부족한 머리로는 헬레나의 속내를 알 길이 없기에, 최대한 부드럽게 웃으며 답을 부추겼다.
굳이 머리 싸매며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간단하며 속 시원한 선택이었으니.
“ 그러고 싶은 이유가 있어? ”
“ 응. 사실 도적을 핑계 삼아서 같이 각 영지를 돌아보고 싶어. 그러면서 시원한 바람도 쐬고, 구경도 하고……. ”
즉, 여행을 하고 싶다는 뜻이구나. 나는 그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막힌 속이 뻥 뚫리는 것을 느꼈다.
특별한 명분이 없고서야 마음껏 영지 바깥을 돌아다닐 수도 없어 이참에 좋은 기회가 왔다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아무튼 여행이라. 나쁘지 않지.
“ 좋아. 헬레나가 그러고 싶다면 그러자. 대신 배상 물자를 운반한다는 명목이라 짐마차를 몰고 갈 사람들, 또 호위 병력도 조금 필요하지만…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해. 알지? ”
“ 물론 잘 알아! ”
내가 흔쾌히 허락하자, 헬레나가 뛸 듯이 기뻐하며 내 오른팔을 꼭 껴안았다.
기세만 봐서는 품에 안겨들 법 했는데, 조용히 입을 다문 채 반대쪽을 지키는 이브가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 저, 대공님……. ”
이브도 헬레나를 따라하듯 내 팔을 꼭 껴안으며, 어딘가 울먹이는 기색이 녹아든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평소 엘렌이 있던 자리에 있는 것도, 이렇게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것도 제법 신선했다.
“ 응? 무슨 일이야? ”
“ 혹시 허락해 주신다면… 저도 따라가고 싶어요. 안… 될까요? ”
“ 안 될게 뭐가 있겠어? 그런데 이브도 여행 같은 걸 좋아할 줄은 몰랐는걸. ”
그저 달라붙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변덕이 생겨 바람을 쐬고 싶어서인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지만 따라오겠다는 이브를 뿌리칠 이유도 없어 기꺼이 그러기로 했다.
다행히 내게 딱 달라붙은 헬레나도 이미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기분 나빠하는 기색도 없었다.
나는 양팔에 달라붙은 두 여자를 슥 훑어보다 입을 열었다.
여행 준비를 하기 위해서.
“ 일단 보내 준 물자부터 확인해보자. 미리 나눠야 뿌리기 쉬울 테니까. ”
“ 옳은 말이야. 얼른 서두르자. ”
헬레나가 기다렸다는 듯 벌떡 몸을 일으키자, 이브도 제법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소파에서 엉덩이를 뗐다.
돈과 관련된 일에 연이 없다고는 하나 까막눈은 아니었기에 큰 도움이 될 듯싶었다.
마법사는 대체로 계산능력이 뛰어나니까.
얼른 밑작업을 끝내고 간다.
우리는, 적어도 나는 그럴 생각으로 제물을 분류할 하인 몇몇을 데리고 저택 뒤편으로 향했다.
“ 예? 공작님의 몫이 이렇게 적어도 괜찮은 겁니까? ”
금과 보석 등이 한가득 든 커다란 보석상자를 분류하던 중, 하인 하나가 깜짝 놀라 물었다.
헬레나가 입에 담았던 공작가의 몫이 상당히 적었기 때문이다.
“ 네. 가진 자가 더 가지기를 원해 탐욕을 부리면 마음이 메마른다 했어요. 그러니 제 말대로 해주세요. ”
“ 아, 알겠습니다……. ”
그에 대한 헬레나의 답변이 사뭇 감동적이었는지 짐을 분류하는 하인들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게 반짝였다.
거기다 처음 질문을 던졌던 하인은 아예 반쯤 울먹이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잘 보이려 과장하는 모습이 아니라 진심으로.
“ 저어… 혹시 허리를 낮춘다고 얕보지는 않을까요? ”
“ 얕보라면 얕보라고 해. 나는 크게 상관없으니까. 다만, 그 결과 지온을 건드리게 된다면……. ”
헬레나는 이브의 물음에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다, 몹시 섬뜩한 눈빛을 띠었다.
무저갱을 떠올리게 하는 눈동자에 새까만 소용돌이가 거세게 몰아치는 느낌을 주는 눈빛을.
이브는 그 눈을 보며 마른 침을 꿀꺽 삼키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헬레나의 눈빛이 흐려진 말꼬리 뒤에 이어질 어떤 답보다 뚜렷했기 때문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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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어! 공작님과 대공께서 이렇게 직접 찾아오실 줄이야…! ”
그로부터 며칠.
우리가 가장 먼저 바르칸 백작의 영지를 찾자, 그 또한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눈을 껌뻑이며 놀라워했다.
엘렌과 이브는 함께 바르칸 백작령을 둘러보고자 자리를 떴기에, 나와 헬레나만이 백작 저택을 찾았다.
다행히 여기까지 오는 동안 도적을 만날 일이 없었던 덕에 조용하고 편안한 여행길이 되었다.
“ 네. 피 냄새를 너무 많이 맡은 탓인지, 운송을 핑계 삼아 바깥바람을 쐬고 싶어서요. ”
“ 하하. 피 냄새라……. 그럴 수도 있겠지요. 아무튼, 이렇게 찾아 오셨으니 오늘 하루는 여기서 머물러 가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
“ 괜찮습니다. 불쑥 연락도 없이 찾아와놓고 신세까지 지는 건 너무 죄송한걸요. ”
“ 죄송하다니요! 간악한 제국 놈들을 몰아내고자 일선에서 싸우신 두 분께 그렇게 생각하셔서는 안 됩니다! 특히 공작가를 따르는 제 영지에 오셨으니 더더욱 그러셔야지요! ”
순간, 아주 충신 나셨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 지났다.
비꼬는 마음에서 떠오른 것이 아니라, 태도가 너무 달라져 버린 나머지 황당한 마음이 앞선 탓이다.
예전부터 헬레나에게 예의를 지키고 공손하게 대하기는 했어도 지금처럼 과한 충성심이 없었으니까.
헬레나는 저도 모르게 버럭 목소리를 높이는 백작을 앞에 두고,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리며 중얼거렸다.
“ 그것이, 혹여… 폐가 되지는 않을까 싶어서……. ”
“ 폐라니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대공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시지요?! ”
“ 예? 저 말씀입니까? ”
나는 갑작스레 날아온 화살을 맞고 당황을 금치 못하다, 곧 헛기침을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때 아닌 난리에 휘말린 탓에 잠깐 어질어질해진 정신도 맑게 하고.
“ 으음…!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는데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겠지요. 백작님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하룻밤 신세를 지고 싶습니다. ”
“ 예! 당연히 그리 하셔야지요! 두 분께서 데리고 온 사람들이 머무를 곳도 마련해 둘 테니 걱정 마십시오! ”
“ …백작님의 배려에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감사드립니다. ”
뜨거워서 부담스럽지만, 그렇기 때문에 거절할 수가 없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잠시 할 말을 잃은 채 멍하니 있던 헬레나도 그를 알았는지, 한결 부드러운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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