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5화 〉 전쟁과 주작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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옅다고는 하나 희뿌연 연기가 앞을 가리면 그렇지 않을 때보다 잘 보이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물론 짙은 안개보다는 효과가 덜하지만 애초부터 눈을 가리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들이마시게 만들어 눈물콧물 쏙 빼기 위함이었다.
“ 중렬 왼편에서 군사가 옵니다. 떨어뜨려 주세요. ”
쿨럭, 케흑 등등 사방에서 콜록대거나 반송장 같은 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이브의 덤덤한 목소리가 병단 전체의 귀에 박혔다.
앞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내려다볼 수 있었기에 가능한 지시였다.
그에 지시를 받은 엘프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곤, 시위에 화살을 겨누어 쏘았다.
늘 그렇듯 바람을 휘감은 화살이었기에 대기를 찢듯 매섭게 날아 제국군 병사의 목을 꿰뚫었다.
화생방이 이래서 무섭구나.
나는 새삼 화학병기가 얼마나 무서운지 느끼며, 이 이상 독한 것은 실수로라도 입 밖으로 내지 말자고 생각했다.
이브라면 원리를 모르더라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는 길을 가로막듯 선 병사들을 베어 숨통을 끊고, 거침없이 앞만 보고 달렸다.
황제를 납치하는 것이 목적이라 피해 좀 주겠답시고 발을 멈추면 시간만 버리는 꼴이었으니.
그래서 돌아가는 시간도 아까워 앞을 막거나 다가오는 병사만 죽이고, 텐트는 부수고 전진했다.
그야말로 미친 소떼가 다로 없었다.
그 와중에 지휘관으로 보이는 몇몇 귀족과도 눈이 맞기도 했는데, 선두를 달리는 헬레나가 친히 죽어버린 병사들 곁으로 보내줬다.
“ 점점 황제의 막사가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만약 황제가 제자리에 없다면 흩어져서 수색을 할 겁니다. 미리 계획했던 대로요. ”
“ 그래. 걱정마라. ”
오르커스는 이브의 뒤를 쫓듯 달리며 무덤덤하게 답했다.
흩어져 수색할 경우 그가 병단의 반을 이끌기로 했기에 혼란스러워 하는 기색이 없었다.
이런 난리가 나면 황제가 피난한답시고 자리에 없을 경우도 생각해야 하니까.
“ 다 왔어요. 곧 황제의 깃발이 걸린 막사가 보일 거에요. ”
“ 그래. 내 눈에도 보여. ”
헬레나는 이브의 말에 답하기 무섭게 땅을 강하게 박차며, 날아가듯 황제의 막사로 향했다.
만약 황제가 제자리에 있었다면 주위를 호위하는 병력들이 있을 법 한데, 인기척 없이 조용하기만 했다.
아마 헬레나도 그것을 알았기에 과감히 몸을 던진 것이 아닐까 싶다.
“ …어쩔 수 없지. 엘렌. ”
한 발 늦게 텅 빈 막사 안에 도착하자, 헬레나가 기다렸다는 듯 내 옆에 서있던 엘렌을 불렀다.
“ 네. 공작님. 말씀하세요. ”
“ 지금 같은 상황에선 이브의 시야보다 네가 공중에 올라 찾는 게 훨씬 빠를 거야. 바람으로 잠시 연기를 걷고, 황제가 보이면 바로 그쪽으로 날아가. 그러면 우리가 뒤를 쫓을 테니까. ”
“ 알겠습니다. ”
엘렌은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텐트 천장을 찢어버리고, 그 구멍 위로 빠져나갔다.
우리 중에서 하늘을 날 수 있는 것이 엘렌과 이브뿐이며, 그 중에서 당장 날 수 있는 것이 엘렌 뿐이었기에 당연한 선택이었다.
그 뒤에는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맑은 하늘과 그 품 안을 나는 엘렌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엘렌이 바람을 터뜨려 연기를 걷어낸 덕이나, 곧 언제 그랬냐는 듯 희뿌연 연기가 사방을 둘러쌌다.
그렇게 몇 번의 바람 터지는 소리와 연기가 제자리를 찾아 꾸물대는 풍경을 바라보길 잠시.
찾았다는 엘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다행히 흩어져서 수색 할 필요는 없겠네요. 다들 가죠. ”
그에 헬레나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며, 곧장 엘렌이 날아간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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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하, 이쪽입니다! ”
빌어먹을. 헬릭스는 속으로 이를 갈면서도, 다 죽어가는 황제를 모시고 후방 마구간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희뿌연 연기가 병영 쪽으로 슬금슬금 기어오기 시작할 때부터 의심을 품고 급히 황제가 있는 곳으로 달려간 결과였다.
화생방이라는 개념이 없다고는 하나 연기를 마셔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헬릭스 백작의 뇌리를 스쳤다.
다만, 스치기만 했을 뿐 그를 실천하지는 못했다.
황제를 모시느라, 또 호흡을 계속 억누를 수도 없었던 탓이다.
마스터 정도가 되면 육체능력이 뛰어나기에 몇 분 정도는 숨을 참고도 격렬하게 움직일 수 있지만, 결국 인간이기에 언젠간 숨을 쉬어야 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 질식해서 죽는다는 우스꽝스러운 꼴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빌어먹을.
헬릭스는 장작을 쬐며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 따위와는 비교가 불가능한 다른 매캐함에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어떻게든 제정신을 유지하려 애썼다.
보통 병사들은 제자리에 주저앉아 기침과 콧물을 토해내고, 그로 인해 연기를 들이마시는 악순환을 겪느라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나마 그였기에 이 상태에서도 제법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다.
만약 말도 무사하지 못하다면 계속 업은 채 빠져나가야겠지, 하는 불길한 느낌이 헬릭스의 뇌리를 스치는 순간.
그 느낌만큼이나 날카로운 선이 헬릭스의 눈앞에 번뜩였다.
“ 으윽…! ”
헬릭스는 그 날카로운 선이 검의 날임을 알아챈 듯, 신음하면서도 재빨리 검을 뽑아들어 오러까지 씌웠다.
눈앞에 번뜩이는 선을 온전히 막아내기 위함이었다.
“ 제국에서 이름 높은 마스터다운 솜씨네요. 훌륭합니다. ”
깡, 하는 소리와 함께 그를 조롱하는 듯한 여자의 목소리가 헬릭스의 귀를 파고들었다.
헬릭스는 그 목소리의 주인, 헬레나를 죽일 듯 살기등등한 눈빛으로 노려보며 으르렁댔다.
“ 이, 빌어먹을 년… 케헥?! ”
겨우 한 마디 흘린 것 치고는 그 대가가 너무도 컸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코와 입 안으로 파고든 매캐한 연기가 호흡을 방해하고 눈물샘을 쏟게 만들었다.
삶과 죽음이 오고가는 칼을 나누는 동안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부동심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생리현상을 뒤흔드는 매캐함 탓에.
그에 반해, 헬레나의 품에는 정화마법진이 있었기에 무척 차분하기 그지없는 표정을 보였다.
“ 끄, 끄으으…! ”
꾸욱. 헬레나가 처음 날을 부딪쳤을 때와 같은 무식한 힘 싸움을 걸자, 헬릭스 또한 어쩔 수 없이 힘을 주며 버텼다.
매캐함 때문에 차분하게 생각할 여유마저 빼앗겨 검을 흘릴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 풍경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지온은 내심 헬릭스를 불쌍하게 생각하면서도, 기다렸다는 듯 등에 업혀 있던 지저분한 얼굴의 황제를 양 팔로 끌어안아 있는 힘껏 잡아당겼다.
기척을 숨긴 채 때를 기다림으로써 얻은 성과였다.
“ 엇?! ”
등 뒤를 점하고 있던 묵직함이 떨어져나가자, 헬릭스가 저도 모르게 헛바람을 삼켰다.
그 탓에 연기가 다시 몸 안으로 파고들었으나 그 순간만큼은 그 매캐함조차 잊었다.
황제가 떨어져 나갔다는 것이 몹시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안 된다. 헬릭스는 반쯤 흐려진 이성이 반짝이는 것을 느끼며, 있는 힘껏 헬레나의 검을 밀어냈다.
밀어내려 했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주위에서 느껴지는 수많은 기척과 헬레나의 압박에 견뎌내지 못할 것이 뻔히 보였으니까.
“ 으윽…! ”
하지만.
헬릭스가 느꼈던 불길한 가정은 이미 현실이 되어 있었다.
소리 없이 연기 속을 뚫고 온 화살이 그의 허벅지를 꿰뚫은 탓에 다리의 힘이 풀리고 말았다.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린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렇다 해도 쓰러지지 않고, 오히려 꿰뚫린 근육을 보충하려는 듯 더욱 힘을 주었다.
그 결과 근육으로 피가 흘러나오는 것을 막고 근육을 보강할 수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절대 흉내도 못 낼 재주였다.
비겁하고 추잡한 년.
헬릭스는 마스터씩이나 되었으면서 이러한 연기와 기습을 밥 먹듯이 하는 헬레나를 경멸했다.
헬레나의 입장에서 보면 어처구니가 없을 생각이겠으나, 감정은 합리적이지 못한 것이라 어쩔 수가 없었다.
정작 헬릭스 또한 기습을 합리적이라 생각하던 한 사람이었으니.
“ 끄아아악! ”
화살촉이 살갗에 부드럽게 박히는 소리가 몇 번이나 들려오고 나서야, 헬릭스가 고통스럽게 울부짖었다.
연기의 매캐함으로 인한 고통보다 살갗이 찢기고 꿰뚫림으로써 얻은 고통이 더 컸기에.
헬레나는 그가 고통으로 얼굴을 찡그리는 순간의 틈을 놓치지 않고, 양 손으로 쥐던 검을 한 손으로 쥐었다.
그리곤 자유롭게 놀릴 수 있는 나뭇가지 같은 앙상한 오러를 길게 늘어뜨려, 헬릭스의 목을 꿰뚫듯 휘둘렀다.
“ 끄, 끄르르……. ”
옆에서부터 목이 꿰뚫리기 무섭게 헬릭스의 입가에서 진한 피거품이 끓어올랐다.
생전 겪어본 적 없는 연기가 그의 정신을 흐트러뜨리고, 헬레나의 주위를 둘러싸듯 마법병단의 화살이 그 틈을 거침없이 벌린 결과였다.
그는 죽어가면서도 헬레나의 비겁함을 힐난하듯 날카롭기 짝이 없는 눈빛을 보였다.
그 분위기나 기세 또한 꺾이지 않고 여전히 흉흉하기만 했다.
헬레나도 그를 알았는지, 괜한 원망하지 말라는 생각을 하며 입을 열었다.
“ 먼저 조용히 지내던 우리를 공격한 것은 제국입니다. 이건 그 대가고요. 그러니 같잖게 원망하지 말고… 죽어. ”
우드득, 하고 섬뜩한 소리가 조용히 울림과 동시에 헬릭스의 눈동자에서 빛이 사라졌다.
목에 쑤셔 박았던 오러가 나무를 톱질하여 썰 듯 헬릭스의 목뼈를 반쯤 뜯어버렸기에.
헬레나는 툭 소리를 내며 떨어진 헬릭스의 머리카락을 쥐어 그 목을 들더니, 어느새 황제를 기절시켜 둔 지온을 바라보며 말했다.
속으로 화려하게 이름을 날린 소드마스터의 초라한 최후를 잠깐 곱씹으면서.
“ 빨리 후퇴하자. 황제는 병단을 시켜서 데려가게 할게. 곧 연기가 끊어질 테니 서둘러야해. ”
“ 그래. 하지만 황제는 내가 업고 갈게. 배려는 고맙지만 할 일 없는 사람이 짐짝을 옮겨야지. ”
“ …지온이 그렇게 하겠다면 어쩔 수 없지. ”
이만큼 넓은 범위에 걸쳐 마법을 사용하면 그만큼 마나가 바닥나는 속도도 빨라진다.
그로 인해 말씨름을 할 시간도 없음을 헬레나 또한 알았기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후퇴명령을 내렸다.
지온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묵직한 소리로 외쳤다.
“ 전원 후퇴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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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억, 허억……. ”
달리고 또 달렸으니 입에서 단내가 나고, 숨을 헐떡일 수밖에.
나는 병영에 도착하자마자 바닥에 주저앉아 가쁜 숨을 토해냈다.
쉴 새 없이 화살을 퍼부으며 후퇴한 엘프들 또한 마찬가지로 몹시 지쳐 있어 똑같이 헐떡댔다.
그 와중에 황제를 짐짝 던지듯 떨어뜨려 꽈당 소리가 나기도 했으나, 다행히 깊게 잠든 덕에 깨어날 기미는 없어 보였다.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더러운 얼굴을 한 채로.
“ 대공! 괜찮으십니까!? ”
그러자 입구를 지키고 있던 병사 하나가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부상자를 포함해 몇몇 귀족들이 이끄는 부대도 남아 있었기에 몹시 휑하다는 느낌은 없었다.
“ 예… 괜찮습니다. 이렇게 계속 달려본 적이 없어서 숨이 좀 찼을 뿐이에요. 그보다, 지금 병영에 남은 귀족은 누가 있습니까? ”
“ 아, 예에! 아셈즈 자작께서 계십니다. ”
“ 잘 됐네요. 그러면… 그 분께 이 늙은이를 건네주고, 당장 성 안에 계신 전하께 보내주십시오. 그것으로 다 끝날 겁니다. ”
“ 예! 알겠습니다! 이봐! 이 늙은이를 옮기게 몇 사람만 좀 도와줘! ”
병사는 제 자리를 떠날 수 없었기에 근처를 지나던 몇몇 병사를 우렁찬 목소리로 불러, 늙은 황제를 옮기도록 유도했다.
그들은 처음 보는 제국 황제의 얼굴을 보고 헛바람을 삼켰으나, 곧 죽일 듯이 노려봤다.
전쟁의 원흉이 눈앞에 있으니 당연한 모습이라 할 수 있었다.
나는 화려한 갑옷과 옷을 걸친 제국 황제를 질질 끌며 떠나가는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바닥에 드러누웠다.
흔히 말하는 교양 없어 보이는 모습이었으나, 전쟁터에서 교양이 무슨 소용일까.
그저 살아남으면 그만인 것을.
“ 괜찮아? ”
바닥에 드러누운 채 숨을 고르던 중, 땀으로 범벅이 된 헬레나가 눈을 흘기며 다가왔다.
자기도 몹시 지쳐있을 텐데 내 걱정부터 하는 것이 무척 감격스러웠다.
“ 후우…! 나야 괜찮지. 헬레나는? 다친데 없어? 정신없이 달리느라 어디가 다쳤는지 볼 겨를도 없었는데……. ”
“ 지온이 걱정해 준 덕분에 안 다쳤어. 이브는 마법을 써도 못 견뎌서 기절했지만… 그 외엔 이상 없어. ”
육체능력이 부족하기에 흔히들 말하는 버프를 썼는데, 결국 버티지 못했구나.
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브를 품에 안은 채 바닥에 앉은 다크엘프 여성을 바라보며 짧게 한숨 쉬었다.
“ 그래… 다행이다. 다행이긴 한데……. ”
“ 왜? 무슨 다른 걱정이라도 있어? ”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는 헬레나의 얼굴을 바라보며, 약간 우울한 기색이 녹아 든 목소리로 물었다.
다 알고 저지른 일이라고는 하나 막상 그 때가 다가올 생각을 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 미안해. 아마 이 일로 비겁하다는 평이 퍼질 지도 모르는데……. ”
“ 아… 그거? 괜찮아. 명예가 그리 고픈 것도 아니고, 미련도 없는걸. ”
헬레나는 그것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웃었지만, 내 눈에는 억지로 밝게 웃는 것처럼 보였다.
그에, 나는 바닥에 누였던 몸을 일으키며 헬레나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앞으로 잘 달래줘야겠다는 결심을 드러내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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