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4화 〉 전쟁과 주작 #9
* * *
“ 그게 정말이오? ”
해가 저물고 샛노란 달이 뚜렷해질 무렵. 나는 홀로 성 안 회의실로 들어와 내일 저지를 계획을 이야기했다.
보고만 하는 것이라 굳이 헬레나가 같이 올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회의실 의자에 앉아있던 국왕과 두 공작은 이브나 엘프들의 고생으로 이루어진 결과물을 듣고 놀라워하며 물었다.
“ 네. 내일이 되면 제국군을 무릎 꿇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완전히 소탕은 못 하겠으나, 피는 적게 흐를수록 좋지 않겠습니까. ”
“ 물론 그렇소. 저들 모두가 전쟁을 원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더구나 신속히 전쟁을 끝낼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지. ”
국왕은 그리 말하며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좋을 대로 하라는 허락을 내렸다.
신속하고 은밀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이유로 보고도 않고 넘어갈 수도 있었으나, 국왕의 체면을 살리기 위함이었다.
더해, 두 공작에게도 알려 합을 맞추는 것이 좋다는 생각도 있었다.
같은 편이 저지른 짓에 같은 편이 혼란스러워하면 여러모로 꼬일 가능성이 높았으니까.
“ 이것 참. 대공과 공작께서 너무 큰 공을 세우셔서 질투가 날 지경입니다. ”
보고가 끝난 후.
나와 함께 성벽 위를 나란히 걷던 루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칼리우드 공작은 한 발 먼저 자기 병영으로 떠난 지 오래였다.
그 탓에 몹시 어색하고 불편한 느낌이 속에서 들끓었다.
나는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애써 숨기며, 겉으로 몹시 곤란하다는 기색을 띠며 답했다.
“ 질투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공작께서 적의 공격을 잘 막아주시는 덕에 저희도 편하게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을요. ”
“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
“ 당연하지요. 성이 든든히 버티고 있으니 저나 칼리우드 공작님의 공격이 먹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만약 성이 종잇장처럼 함락된다면 여태껏 버티지도 못했을 겁니다. ”
약간 아부하는 면도 없잖아 있지만 내가 던진 말 전부가 진심이었다.
루크가 맡은 성 수비는 크게 눈에 띄지 않더라도 몹시 중요한 일이었다.
무슨 짓을 하려고 해도 뿌리가 든든히 버텨줘야지, 그렇지 못하면 어수선하기 짝이 없을 것이 분명했다.
다행히 루크도 내 진심을 조금은 알아줬는지, 좀 더 부드러운 미소를 띠었다.
“ 대공께서 그리 말씀해주시니 마음이 풀리는 것 같습니다. ”
“ 엄연한 사실이니까요. 그리고, 저나 헬레나는 공이 높다 해서 그를 치하해 주길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저 전쟁이 빨리 끝나기를 바랄 뿐이지요. 전하께서 들으시면 속상해 하시겠지만……. ”
“ 여전하십니다. 그저 전쟁 없는 나날을 보내기만을 바라시다니. ”
내 아부가 잘 먹힌 덕인지 제법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서 대화를 마치고 무사히 병영으로 돌아왔다.
최대한 찝찝한 여운을 남기고 싶지 않았기에 다행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병영에 도착하자마자 헬레나와 함께 이브가 머무르는 막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른 아침에 공격을 할 예정이었기에 지금 작전을 되새김질 할 필요가 있었다.
“ 다들 알다시피 내일 전면전을 걸 계획입니다. 물론 그러는 척만 하는 거지만, 혹여 당황하지 말라는 뜻에서 다시 한 번 말하죠. ”
나는 전령을 통해 미리 불러 두었던 엘렌과 마법병단 몇몇, 그리고 엘프 촌장 몇몇의 얼굴을 쭉 훑으며 운을 뗐다.
원래라면 헬레나가 대표로 입을 열었겠지만, 계획을 세운 것이 나였기에 이런 결론이 났다.
“ 계획대로 흘러간다면 황태자 군이 우리랑 맞서는 척을 할 거고, 그 사이 놈들의 본영을 습격해서 황제를 납치할 겁니다. 촌장 분들께서는 마법진이 새겨진 판을 각자 나누어 가지고 가 주세요. 일손은 데려오셨죠? ”
“ 음. 말씀하신 대로 넉넉히 데려 왔으니 걱정 마십시오. ”
연두색 머리칼을 가진 젊은 남성 엘프 하나가 걱정 말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겉으로는 젊고 아름다운 청년처럼 보이나, 사실 촌장을 할 만큼 나이가 많았다.
엘프가 이렇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도 가끔 놀랄 정도였다.
“ 좋습니다. 엘프 군대는 내일 신호에 맞춰 판에 새겨진 마법진을 발동해 주시고, 그를 멀리 날려 보낼 바람도 함께 일으켜 주십시오. 끊임없이, 대규모로 일으켜야 하니 많은 힘이 필요할 겁니다. 흐름이 끊어지지 않도록 호흡을 잘 배분해 주세요. ”
“ 여부가 있겠습니까. ”
“ 감사합니다. 그 다음은 산맥에 매복해 있던 마법병단이 나서서 황제를 납치해 올 겁니다. 목을 베어버리는 것이 훨씬 편하고 후련하겠지만 이후에 생길 마찰을 최대한 피하고자 결정한 사항이니, 죽이지 않도록 신경 써 주세요. ”
알겠습니다. 나와 헬레나를 뺀 전부가 짧고 굵게 답한 뒤, 해산명령에 따라 재빨리 막사를 빠져나갔다.
그로 인해 제법 북적북적했던 막사 안이 텅텅 빈 것만 같았다.
“ 전쟁을 걸어온 놈이 져 놓고서 화를 내는 건 명분이 없지 않나… 라고 하기에도 참 답답하네. ”
허전한 막사에서 어색한 침묵이 흐르길 잠시. 나와 함께 남아있던 헬레나가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분명 시비를 걸어온 것은 제국 측인데, 그를 배려해야 하는 상황이 썩 내키지 않는 모양이다.
“ 나도 그렇긴 한데… 아무래도 어리석은 황제는 저쪽에서 처리하는 것이 나을 거야. 소란이 일어도 제국 안에서 끝내야지, 또 여기로 불똥 튀는 꼴을 보기는 싫어서. ”
“ 그렇잖아도 허전한 시간이 길어져서 불만인데……. ”
헬레나는 가죽 갑옷으로 보호받는 아랫배 부근을 부드럽게 쓸며 한탄했다.
허전함이라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것 같았기에, 저도 모는 사이 입가에 쓴웃음이 맺혔다.
“ 다른 사람이 본다면 놀라겠어. 헬레나가 이렇게 밝히는 여자인 줄은 몰랐을 테니까. ”
“ 다른 사람 앞에서는 안 그래. 부끄러우니까. 그렇지만… 더 이상 허전한 시간이 길어지면 정말 그럴 지도 몰라. ”
“ …그러기 전에 얼른 끝내야겠네. 그런 모습은 나만 보고 싶으니까. ”
나는 은근한 독점욕을 내비치며 헬레나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갑옷을 두르고 있다 한들 허리가 날씬해, 품에 쏙 들어오는 것은 여전했다.
헬레나는 그것이 기뻤는지 눈을 가늘게 뜬 채 배시시 웃었다.
“ 대공님. 병단에게 정화 마법진을 전부 배분했……. ”
제법 좋은 분위기가 흐르던 중, 보고하며 들어오는 이브의 목소리가 그 흐름을 바꿨다.
본인도 그를 알았는지 몹시 죄송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보통 이럴 경우엔 어이없다는 듯, 혹은 약간 짜증을 내며 한 마디 할 법도 했으나… 그러기엔 이브가 너무 불쌍해 보였다.
더구나, 그럴 생각도 없었기에 더 안쓰럽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 고마워. 여태껏 정말 고생했어. ”
나는 조심스레 막사 입구에 선 이브의 곁으로 다가가, 조심스레 품에 안은 채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직 전쟁이 끝난 것이 아니라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 없지만, 일단 한 숨 돌려도 될 것 같았다.
적어도 이브는 그럴 자격이 충분했다.
“ 아, 저기… 감사… 합니다. ”
폭. 막사 입구가 가려져 있어 보는 눈이 없다는 것을 안 덕인지, 이브도 제법 대범하게 내 품에 얼굴을 묻었다.
갑옷이 사이를 가로막고 있어 썩 만족스럽지는 않겠지만, 일단 만족하는 눈치였다.
헬레나도 이브가 고생했음을 알기에 내가 이브를 품에 안아도, 분위기를 깼어도 크게 화나지 않은 눈치였다.
“ 이런 말로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조금만 더 힘내자. 방심하지 말고. ”
“ …네. ”
나는 이브의 고생을 위로하면서도, 집에 돌아가면 그만한 상을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지금까지 고생했고, 내일 전투에도 나서기로 했으니 당연히 그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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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겠습니다. 황태자 전하께 두 분의 뜻을 빠짐없이 전하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
초병을 뺀 모두가 잠들어 있을 시각.
나는 며칠 전에 마주했던 앤더슨 자작의 연락책을 보내며 짧게 한숨 쉬었다.
시간으로 보면 대충 한 두 시간 정도라 잠에 들기도 애매했다.
더해, 산맥 가운데서 잠들만큼 재주가 좋지도 않고, 또 춥기도 해서 그럴 수도 없었다.
그저 나무에 비스듬히 기대 때를 기다릴 뿐이었다.
“ 정말 병단만으로도 괜찮겠소? ”
최대한 피곤함을 덜고자 눈을 감고 있던 중, 오르커스가 낮게 목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혹여나 찾아올지도 모를 적군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굳이 목소리를 낮춰야 하나 싶은 생각이 순간 뇌리를 스쳤으나, 너무 안일했다는 생각을 하며 눈을 떴다.
제국군 근처이니만큼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것이 당연했다.
“ 네. 괜찮을 겁니다. ”
“ 작전내용도 다 알고, 대장으로부터 자세한 내용도 듣긴 했는데… 정말 그 시에스라는 것이 효과가 있는지 영 찝찝해서. ”
“ 아. 오르커스는 실험할 때 다른 곳에 있었던가요? 그러면 불안하실 만도 하죠. ”
마법진이 제대로 작동하는 실험에 참가한 것이 병단 중 몇몇에 불과했으니 그럴 만도 하지.
나는 다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믿음을 심어주기 위해 단호하게 답했다.
“ 걱정 마세요. 이미 실험을 통해 마법진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또 그 효과가 예상했던 것과 같은지도 다 확인했으니까요. ”
“ 으음… 대공이 그렇게 말하니 믿어지긴 하오만, 영 찝찝해서. 이 멀리서 연기만 뿌린다고 정말 앞도 분간 못할 상태가 되겠소? ”
“ 어디, 정 못 미더우시면 품에 가지고 계신 정화 마법진을 한 번 빼고 들어가 보시겠어요? 한 번 맛보면 도저히 잊을 수 없는 매운맛이라 크게 감동하실 텐데……. ”
“ 크, 크흠. 굳이 그럴 것까지야 있겠소? ”
오르커스는 당혹을 금치 못해 뒷목을 긁적이다, 몸 조심하라는 말을 남기며 자리를 떴다.
막상 자기 몸으로 검증을 해 보려고 하니 불안한 모양이었다. 현명하기도 하지.
그가 다녀간 후에는 조용한 침묵만이 주위를 흐를 뿐이라, 얕은 숨소리까지 다 들리는 것만 같았다.
내가 이럴 정도니 나보다 훨씬 귀가 날카로운 헬레나나 엘프 무리는 더 많은 것이 들리겠지.
어쨌든, 그 덕분에 눈을 감은 채 제법 편안히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때때로 작은 벌레가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렸지만 거슬릴 정도는 아니었다.
예전 같았으면 벌레가 싫어 신경이 날카로웠을 텐데, 간이 참 커졌음을 새삼 느꼈다.
“ 대공님. 진영이 움직이고 있어요. 양 측에서 군을 내보내려 정비를 하고 있어요. ”
조금씩 햇살이 무거운 눈꺼풀 사이를 비집고 들어올 무렵. 엘렌의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쟁터에서 닳고 굴렀다고는 해도 늘 긴장되는 모양이었다.
끄으응.
나는 굳은 몸을 천천히 풀며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든든한 나무에 기댔다고는 하나 경사진 산맥 위였으니까.
“ 그래? 슬슬 준비해야 하겠네. 헬레나는? ”
“ 엘프 군대에게 명을 내려 이미 배치를 다 끝냈어요. 아마 반대편 산맥에서도 준비를 하고 있을 거에요. ”
“ 부지런하기도 하지. ”
헬레나가 명령을 내렸다면, 또 전황이 그렇다면 곧 움직여야 한다는 뜻이다.
나도 그 정도는 잘 알았기에 잠을 자며 혹여 빠뜨린 것이 없는지 확인했다.
그 후에는 마나를 몸 구석구석에 돌려 최대한 뻐근함과 피로를 털어냈다.
덕분에 머리도 아주 맑았고, 내가 생각해도 눈이 반짝이는 것을 알 수 있을 만큼 신경이 예민하게 곤두섰다.
─와아아!
그렇게 시간을 보내던 차, 땅이 진동할 만큼 커다란 함성이 귀를 간질였다.
엘렌의 보고가 없어도 전투가 벌어졌음을 알 수 있을 만큼.
“ 주황깃발이에요. 다행히 계획했던 대로 황태자가 이끄는 군이 나왔나 봐요. ”
“ 그거 참 반가운 소식이네. ”
나는 엘렌의 중개를 들으며 몸을 온전히 일으킨 뒤, 헬레나가 있을 전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실 나무와 나무 사이를 뛰어 다녔기에 걸었다는 것이 약간 어폐가 있기는 했다.
“ 잘 왔어. 곧 충돌할 테니 슬슬 움직이자. ”
헬레나는 내가 곁으로 다가가자마자 눈을 반짝이며, 손을 높게 치켜들었다.
내 애매한 설명을 현실로 만드느라 고생한 이브의 마법을 쓸 때가 다가왔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엘프 군사들도 그를 알기에 묵묵히 품속에서 마법진이 새겨진 나무판을 꺼내 땅에 놓았다.
마법진을 놓은 이들은 마나를 불어넣어 마법을 유지하고, 그 뒤에 있는 이들은 정렁마법으로 바람을 일으켜 매운 안개를 퍼뜨릴 준비를 마쳤다.
스윽.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동시에 헬레나가 팔을 내리자, 엘프 군대도 기다렸다는 듯 마법진에 손을 얹었다.
그 결과, 마법진에서 희미한 푸른 불빛과 함께 희뿌연 연기가 삽시간에 덩치를 불리며 커져갔다.
“ 병단 전원은 정화마법진을 사용하세요. 엘프 군대는 바람을 일으키시고요. ”
헬레나의 지시가 떨어지자 나를 포함한 마법병단 전부가 품에 넣었던 정화마법진을 사용했다.
방독면을 만들 시간도, 원리도 모르기에 그를 대체한 셈이다.
다만, 방독면보다 유용하고 편했다.
답답하지도 않고, 머리가 무겁지도 않으며, 시야가 좁아지지도 않았으니까.
연기는 엘프들이 일으킨 바람을 타고 순조롭게 산맥 아래로 흘러, 이윽고 제국군 진영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더구나 반대쪽 산맥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어 그 속도가 무척 빨랐다.
“ 돌격하겠습니다. 전군, 앞으로. ”
안개가 제국군 진영을 반쯤 집어삼켰을 무렵.
헬레나의 서늘한 목소리가 묵직하게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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