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3화 〉 전쟁과 주작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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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릭스 백작은 본래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함부로 하지 않게 되었다가 옳은 표현이기는 하나, 그가 일부러 천박한 표현을 사용한다는 것에 변함은 없었다.
소드마스터라는 영광스러운 칭호를 얻었음에도 밥 먹듯이 야습을 해댄 졸렬함 때문이 아니다.
물론 그로 인해 열이 받은 것은 맞았으나 충분히 선택하고 행할 만한 전략이었으니, 크게 원망하지는 않았다.
문제는 제국군의 피해가 점점 커져만 가고, 그럴수록 헬릭스의 화 또한 점점 뜨겁게 끓어올랐다.
보란 듯이 자신을 피하기만 하는 작태에 초조함을 느끼기도 했다.
같은 경지에 오른 이들이 서로 적으로 마주친 이상 반드시 한 쪽이 꺾여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물론 그로 인해 헬릭스 자신이 목숨을 잃을 가능성도 컸다.
그럼에도 죽어가는 사기를 살리고 적측의 기세를 크게 한 풀 꺾기 위해서라도 꼭 필요한 일이었다.
“ 누가, 누굴 죽이겠다고…? ”
끼이익.
묵직한 무게와 크기 탓에 천천히 열리는 큰 성문 바깥으로, 헬레나가 착 가라앉은 눈빛을 띤 채 걸어 나왔다.
그렇잖아도 배가 비는 날이 많아 불만스럽기 그지없던 기분에 거센 불이 붙은 탓이다.
지금도 성벽 위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남자, 지온을 죽이겠다.
그 말이 헬레나를 도발하는 데 있어 그 무엇보다 적합했음을, 헬릭스는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무저갱과 같이 칙칙하고 어둡기 짝이 없는 눈동자.
너무 지나치게 벼려져 누구도 손에 쥘 수 없을 만큼 예리한 분위기.
헬릭스는 정말 같은 사람인가 싶을 만큼 극단적인 변화를 보며 무심코 마른 침을 삼켰다.
무인으로서 겁을 먹은 것이 아니라 남자로서 겁을 먹은 셈이다.
그래도 이렇게 나왔으면 그만이지.
헬릭스는 좋은 게 좋다 생각하며, 사뿐히 말에서 내려와 검을 뽑아들었다.
“ 흠. 듣자하니 별 능력도 없는 반려를 참 끔찍이 아낀다던데… 그 말이 사실이었나 보군. 얼굴이 반반하고 네년보다 나이가 어려서 그런 것인가? ”
“ 네까짓 게 알 바 아니잖아. ”
헬레나는 버릇처럼 사용하던 존댓말도 버리며, 오른쪽 허리춤에 매었던 검을 뽑아 헬릭스를 향해 겨누었다.
지온의 무능하고 아니고를 떠나 모욕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죽어 마땅하다 생각했다.
“ 그래. 내 알바 아니긴 하지. 어쨌든 이렇게 나와 줬으니 자웅을 가리자꾸나. ”
“ 자웅? 자웅이라……. ”
헬레나에게는 여느 무인들이 가슴에 품고 사는 호승심도 없거니와, 더 높은 경지를 얻고자 하는 향상심도 없었다.
그저 밥을 먹는 것처럼 훈련을 하고, 그러다보니 벽을 깨었을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훈련이 싫지는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지온을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보내는 시간이, 또 훈련하는 자신을 지켜보는 남자의 시선이 좋았기 때문이다.
만약 남자라는 요소가 없었다면 좋고 싫고 따지지도 않았을 테지만, 그가 있었기에 좋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 있었다.
“ 나는 그딴 것에 관심 없으니까, 얼른 목이나 내놔. ”
“ 허허. 그런 통하지도 않을 거짓말을 잘도… 흐읍?! ”
까앙! 헬릭스는 헛웃음을 치다 말고 급히 헛바람을 삼키며 검을 들어올렸다.
그 덕에 눈 깜빡할 사이 지척까지 밀고 들어와, 자신의 목을 향해 휘두른 헬레나의 검을 막아낼 수 있었다.
칼날과 칼날이 부딪쳐 울렸다 보기엔 너무도 둔탁했으나, 이 또한 오러의 충돌로 인한 굉음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헬레나나, 헬릭스나.
“ …한 눈을 팔게 해놓고 기습이라니. 야습을 할 때부터 알아보기는 했지만, 격 떨어지는 행동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대는구나. 마스터씩이나 되었으면서 부끄럽지도 않느냐? ”
“ 전혀 안 부끄러워. 네놈이 소중히 여기는 명예 따위엔 아무런 관심도 없고. ”
꾸우욱.
헬레나는 검의 손잡이를 쥔 두 손이 으스러져라 힘을 주며 원초적인 힘 싸움을 유도했다.
헬릭스로서는 검로의 복잡함을 살려 틈을 찌르는 기교가 아닌 것에 내심 당황하다, 곧 정신을 차리고 검에 힘을 주었다.
본래 이럴 때에는 몸이 가진 힘이 가장 중요하기 마련이지만, 오러를 다루는 이들에게는 마나 또한 중요한 요소다.
오히려 육체적 근력을 보조하고, 그를 몇 배나 살려주기에 중심이라고 할 수 있었다.
결국, 몸에 담아 둔 마나가 누가 더 풍부한가를 겨루는 무식한 싸움이기도 했다.
“ 하하! 이토록 무식한 싸움으로 몰고 가다니! 마나통에 제법 자부심이 있는 모양이나 실력에는 자신이 없나 보구나?! 혹 실력이 아니라 무식한 마나만 믿고 마스터가 된 것이냐! ”
마스터에 오르기 위해 필요한 기술과 깨달음의 수준이 미천하다 조롱했으나, 헬레나는 묵묵히 힘을 다문 채 하반신에 힘을 주었다.
누군가가 말했듯 이런 부류의 조롱을 귀담아듣지 않았기에.
푸른 오러가 빈틈없이 둘러싸인 검과, 검은 오러를 심지로 삼은 검은 좀처럼 떨어질 줄을 몰랐다.
마치 쇠를 연마하듯 격렬한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고, 그에 따른 소음이 사방 구석구석까지 울려 퍼졌다.
헬릭스는 그 소음 탓에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며 힘의 방향을 비틀었다.
오랫동안 수련하며 쌓은 마나가 헬레나보다 떨어진다고는 생각지 않지만, 무식하고 깊이 없는 힘겨루기를 피하고 싶어 했다.
이대로 힘만 뺄 수도 없을 노릇이라는 생각도 있었다.
슥. 순간적으로 힘의 방향이 꺾인 검은 순식간에 대각선 옆으로 미끄러져, 칼날 끝이 바닥에 닿을 정도가 되었다.
어찌 보면 반원을 그리는 것만 같은 궤도였다.
헬릭스는 이대로 힘을 비튼 다음 곧장 날 위를 미끄러지듯 검을 휘둘러 헬레나의 부풀어 오른 가슴을 베어낼 생각이었다.
보통 남자라면 욕정을 품고도 남았을 테지만, 그의 눈에는 노리기 쉬운 약점으로 비칠 뿐이었다.
그러나. 헬릭스의 앞에 서서 검을 맞대는 헬레나 또한 스스로 마스터임을 증명하듯, 예기치 못한 움직임을 보였다.
마치 헬릭스가 힘의 방향을 비틀어주길 기다렸다는 듯 그 흐름을 타고 몸을 한 바퀴 돌렸다.
“ 뭣?! ”
헬릭스가 흠칫하며 놀라는 와중에도 물 흐르는 듯한 동작엔 어색함이 없었다.
너무도 자연스러워 춤이라도 추고 있는 것이 아닐까 착각할 정도였다.
자신이 주도한 흐름을 거역하지 않고 순응하여 속도를 높이고, 그로 인해 휘두른 검 또한 자연스레 속도를 높였다.
얼핏, 회전하여 베는 동작은 틈이 크기에 약점을 드러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반동까지 이용해 힘의 흐름을 탄 탓에 너무도 매서웠다.
그에 반해, 눈 깜짝할 사이 흐름을 거슬러야 하는 입장에 몰린 헬릭스로서는 곤란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다.
지금부터 무슨 짓을 해도 반 박자가 늦다.
그래서는 칼을 휘두르기도 전에 목이 날아가고 말 터였다.
헬릭스는 이 찰나의 순간에 그럴 가능성을 계산해 손목을 까딱여 검을 똑바로 세우고는, 주저 없이 몸을 뒤로 뺐다.
그 순간, 날 긁는 소리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커다란 폭음이 두 사람의 귀를 거세게 후려쳤다.
기세로만 봐선 고막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 으음……. ”
방망이에 맞은 야구공마냥 튕겨나가 낮게 하늘을 날던 헬릭스였으나, 눈 깜빡할 사이 자세를 바로하며 땅에 발을 디뎠다.
다만 충격이 온전히 가시지 않은 탓에 미약하게 떨리는 손을 바라보며 침음했다.
온전하게 서지도 못해 한 쪽 무릎을 꿇었다.
슥.
헬레나는 뺨을 타고 흐르는 엷은 피를 닦아내면서도 헬릭스에게 둔 시선을 떨어뜨리지 않았다.
극히 얇은 생채기였으나 자칫 얼굴이 베일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이다.
시선을 떨어뜨리지 못하는 것도 그 이유에서였다.
“ 쯧. 인정하기 썩 내키지는 않지만… 제법이로구나. ”
끄응.
헬릭스는 인상을 찌푸리며 무릎에 묻은 흙을 털며 몸을 일으켰다.
졸지에 거리를 둔 상황이라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듯 달려올 줄 알았는데, 가만히 서 있는 것이 신경 쓰이는 눈치였다.
“ 너야말로 다 늙어 빠졌으면서 제법 민첩하네. 아니면 늙어서 잔꾀만 늘어난 건가? ”
“ 큭큭. 칭찬해 줘서 고맙구나. 늙어서도 꾀 하나 내지 못한다면 인생 허투루 산 셈이니까. ”
“ 그래. 맞는 말이긴 하네. ”
쳐 맞는 말. 헬레나는 뒷말을 입에 담지 않고 삼키며, 헬릭스의 정면을 향해 내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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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 아니면 두 시간 정도 되었을까?
체감상으로는 몇 시간이 훌쩍 지나간 듯싶은데도, 막상 하늘에 떠 있는 해를 보면 그리 시간이 지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아마 그만큼 헬레나와 헬릭스의 싸움이 격렬했다는 뜻이겠지.
얕게나마 살갗이 베이고 있음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죽을 듯이 들이댔던 헬레나와, 그를 노련하게 받아치면서도 진땀을 흘리는 헬릭스의 얼굴이 참 대조적이었다.
비교체험 극과 극을 보는 것만 같았다.
숨은 제대로 쉬고 있는 것일까.
저러다 죽지는 않을까.
보는 사람의 숨통이 다 막힐 지경이었던 혈투는 의외로 싱겁게 끝이 났다.
백작이 간섭하지 않겠다 공언했던 기사 중 하나가 헬레나의 공격에 끼어든 탓이다.
명예를 아는 것이 기사이며, 그렇기에 결투 도중에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고는 하나 마음이 너무 급했던 모양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를 보고 온갖 비난을 서슴치 않았지만, 나는 그런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마 헬레나가 숨이 끊어지기 직전이었다면 나도 그랬을 테니까.
“ 이, 이노옴…! 감히 기사들 간의 신성한 결투를 방해하다니! ”
헬릭스 백작은 그리 말하며 꺼지기 직전의 잔불 같은 오러만이 남은 검을 휘두르려 했으나, 의외로 헬레나가 헬릭스를 막았다.
기습을 받았음에도 언짢은 기색이 없는 것을 보니, 이렇게 될 곳을 어느 정도 예상 했었나보다.
“ 명예보다 소중한 것이 있는 것 또한 사람이지요. 그러니 너무 탓하지 마시고, 목숨을 거두지도 마세요. ”
“ …기습을 당한 그대가 그런 말을 하는가? ”
“ 예. 애초부터 사람을 끌고 온 시점에서 이렇게 될 것 같았으니까요. 그 반대도 있을 수 있었을 테고요. ”
헬레나는 검을 휘두르며 화가 많이 가라앉았는지, 평소와 같이 부드러운 말투를 사용했다.
헬릭스는 그런 헬레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짧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였다.
“ 오늘 대결은 내 패배요. 부하의 체면을 살려주어 고맙소. ”
“ 네. 다음에 또 뵙지요. ”
헬레나가 가볍게 사죄를 받아주자, 헬릭스 또한 부하의 멱살을 잡아끌며 말에 올랐다.
분위기가 식어 결투를 할 만한 상황도 아니었으니 물러나는 것도 당연했다.
“ 오오, 공작! 크게 다치신 곳은 없소?! ”
왕은 헬레나가 성문 안으로 들어오기 무섭게 호들갑을 떨어댔다.
어딘가 과장된 기색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 정도가 크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구경꾼이 다 쫄깃할 정도였으니 어련할까.
또, 다른 공작들도 마찬가지였다는 듯 왕을 따라 한두 마디씩 거들며 위로와 감탄의 뜻을 표했다.
“ 걱정해 주신 덕분에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그에 헬레나는 고개 숙여 감사의 뜻을 표한 뒤, 곧장 왕의 허락을 받아 자리를 떴다.
조심스럽게 피곤하다는 말을 꺼내자 흔쾌히 진영으로 돌아가라고 했기 때문이다.
더해, 언제 꺼내왔을지 모를 말까지 준비되어 있던 덕에 쓸데없이 끌리는 시간을 줄일 수 있었다.
“ …미안해. 고생했어. ”
우리가 머무는 텐트에 도착한 직후.
나는 헬레나와 단 둘이서 마주보고 앉아 조심스레 약을 바르며 중얼거렸다.
약은 이 텐트에 미리 마련해 두었던 것을 쓰고 있었다.
“ 지온이 왜 미안해? 전혀 그럴 필요 없어. 나는 이렇게 지온에게 치료를 받을 수 있어 고맙고 기쁘기만 한걸. ”
나는 배시시 웃는 헬레나와 눈을 마주하며 억지로 웃었다.
얕다고는 하나 몸 곳곳에 생긴 생채기를 보니 마음이 무거웠다.
“ 그리고… 원한 건 아니지만 제법 큰 성과도 얻었고. ”
성과?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헬레나가 말하는 뜻이 무엇인지 물었다.
헬릭스도 마찬가지로 자잘하게 상처를 입었고 몸 안이 상했을 지도 모르나, 성과라 하기에는 애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헬레나가 말하는 성과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 흐름이 끊겨서 아쉽기는 했지만, 곧 그놈의 목을 끊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아. 점점 검로가 뚜렷하게 보이고 있었거든. ”
“ 검로가 보여? ”
“ 응. 내 검을 그만큼 받아내는 사람이 없었기에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생전 처음 깊게 집중하다 보니 보이는 게 많았어. 그러니까 기대해 줘. 곧 지온에게 망언을 지껄인 그 남자의 목을 따다 바칠 테니까. ”
다른 사람이라면 폭발적인 성장을 이룬 점에 기뻐할 법 한데도, 헬레나는 내 생각만 하며 몽롱한 눈빛을 띠며 웃었다.
그러다, 갑자기 아쉽다는 기색을 띤 채 한숨을 쉬었다.
“ 아… 그래도 정면에서 맞부딪칠 일은 없겠네. 내일이 되면 다 끝날 테니까. ”
“ 끝나다니? ”
“ 이브가 있잖아. ”
아.
나는 저도 모르게 손뼉을 탁 쳤다.
오늘 저녁이 되면 작업이 다 끝날 것이라고 수줍게 말하던 이브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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