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2화 〉 전쟁과 주작 #7
* * *
일기토라.
나는 그 단어를 몇 번이고 곱씹으며, 헬레나와 함께 머무르는 커다란 텐트 안으로 발을 들였다.
고작 두 사람밖에 쓰지 않음에도 내부가 넓고 제법 물건들이 많아 대우받고 있음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 만약 일기토를 한다 가정했을 때, 얼마나 가능성이 높을 것 같아? ”
내가 테이블 아래에 놓인 의자를 빼내 앉으며 묻자, 헬레나도 자연스럽게 옆에 앉아 곰곰이 생각하는 기색을 보였다.
국왕 앞에서는 제법 자신 있게 말을 했지만 사실은 아닌 모양이었다.
내가 생각했던 대로.
“ 잘 모르겠어. 상대가 마스터라면 딱 잘라 말할 수도 없을 거야. 위험하니까. ”
그렇긴 하지.
나는 방심은 적이라는 의도가 깔린 헬레나의 답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검을 섞어 본 사람이 기량을 가장 잘 알 테니 신중한 것도 당연했다.
헬레나가 말한 대로 상대 또한 마스터니까.
“ 그렇지. 방심했다간 이길 수 있는 싸움도 져버릴 수도 있으니까.. ”
“ 응. 마음 같아서는 일기토 따위는 받고 싶지도 않지만… 안 받아도 곤란하니 참 싫어. 아군의 사기가 떨어질 수도 있잖아. ”
헬레나의 말이 옳기는 하다. 만약 상대가 던진 도전장을 피하면 사기가 떨어질 것이 분명했다.
그랬을 경우 적측 마스터가 온갖 비난과 멸시를 붙여가며 비웃을 모습이 눈에 선했다.
물론 헬레나야 그런 부류의 도발에 넘어갈 여자는 아니나, 헬레나는 우리 왕국군의 자존심이라 할 수 있을 사람이기도 하다.
즉, 상대의 도전을 피하는 것은 자존심을 꺾는 셈이니 사기가 내려갈 수밖에.
“ 쯧. 결국 상황이 등을 떠미는 셈이네. 미안해. ”
“ 지온이 왜 미안해? 이렇게 이해해 주는 것만으로도 내겐 너무 과분한걸. ”
슥. 헬레나는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곤, 눈을 감은 채 배시시 웃었다.
가죽갑옷이라 그나마 푹신해서 다행이지, 만약 플레이트 메일이었다면 딱딱하고 차가운 감촉에 인상을 찌푸렸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마냥 어색하지만은 않은 부드러운 침묵이 이어지길 잠시.
헬레나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이 침묵을 깼다.
“ 꼭 돌아올게. 이 품은 내 거고, 누구에게도 뺏기고 싶지 않으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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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토를 받느냐를 두고 이야기를 나눈 다음에도 주기적으로 야습을 감행했다.
본래 성을 지켜야 하는 입장에서 이렇게 야습을 자주 하기가 어렵지만, 특이하게 진영을 세운 덕분에 나갔다 들어오기가 참 수월했다.
상대의 기습은 양쪽 산맥에 매복시켜 둔 엘프 군대가 막지만, 제국 측이 우리를 막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이 험난한 산맥에 진을 치기도 어렵거니와,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가 훨씬 유리했다.
오히려 숲에서 엘프를 맞이하는 결과를 맞아 희생자만 늘어난 꼴이었다.
물론 제국 측도 생각이 없지는 않기에 진영 경계를 철통처럼 강화하거나 산맥 자체를 민둥산으로 만들 시도도 했었다.
하지만 그를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지 않고 방해를 했기에, 제국 입장에서는 참 미칠 노릇이겠거니 싶다.
결국 전면전밖에 답이 없는 상황으로 몰고 가더라도 피로가 가득 쌓인 병사들이니만큼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야습을 하는 우리도 피곤하기는 했지만 저들만큼은 아니었다.
언제 적이 올지 모른다는 압박감으로 인한 피로와 스트레스를 받아 전투력이 제법 깎이기 때문이다.
“ 하하! 오늘도 훌륭히 공격을 막아냈습니다! ”
“ 이거 제국이라도 해도 별 거 아니군요! 눈두덩이 새까매진 제국 병사들이 참 불쌍할 지경입니다 그려! ”
아침부터 점심까지 이어진 전투를 한 바탕 치른 뒤.
크라우저 공작가 아래에 속한 국왕파 귀족들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병영으로 돌아왔다.
제국 측이 치른 희생이 훨씬 크다보니 즐거울 만도 했다.
더구나, 그에 따라 병사들의 사기도 점점 올라가고 있어 여러모로 흐름을 탔다고 볼 수 있었다.
흐름을 너무 지나치게 타면 자신감이 오만이 되어 된통 당할 수도 있겠지만, 아직 그 정도는 아니었다.
만약에 그 직전까지 간다 해도 적절히 잘 끊으면 괜찮겠지.
“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황태자 측 병사들은 제법 힘이 있었지? ”
나는 군사회의를 마치고 텐트로 돌아가는 길에 헬레나를 향해 물었다.
밥 먹을 시간이기에 바트를 비롯한 취사병들이 만든 스프 그릇을 손에 든 채였다.
“ 응. 내 눈에도 그렇게 보였어. 군사를 가려서 친 보람이 있었나봐. ”
야습을 할 때도 황태자 쪽 군사들을 최대한 피하다보니 그 차이가 점점 눈에 드러나고 있었다.
공성전에서야 그들 하나하나를 가릴 수 없어 어쩔 수 없지만, 야습은 골라서 조절할 수 있었다.
피로감에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황태자 측도 그런 상황을 잘 이용하고, 또 의심을 피하기 위한 연기도 잘 해내는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진즉 난리가 나고도 남았을 테니.
“ 대공니임~. 오늘도 고생하셨어요. ”
텐트 안으로 돌아오자, 마법병단 곁에 붙어있느라 떨어져 있던 엘렌이 어색한 비음을 섞으며 다가왔다.
그녀의 손에도 알 굵은 감자 몇 개가 든 스프 그릇이 들려 있었다.
“ 엘렌, 어서 와. 네 덕분에 병사들이 많이 살았다고 들었어. ”
“ 에이. 별 거 아니에요. ”
엘렌이 수줍게 웃으며 별 거 아니라고 하지만, 사실 몹시 큰 성과를 거뒀다.
흔히들 적장을 죽이거나 많은 병사를 베어 세운 공이 아니기에 눈에 띄지 않을 수도 있지만, 칼과 창, 활이 어지러이 날리는 난리 속을 누비며 많은 병사를 구했다.
“ 고생했어. 여기 와서 앉아. 같이 먹자. ”
“ 네. 실례할게요. ”
헬레나의 허락이 떨어지자 엘렌이 기다렸다는 듯 그릇을 테이블에 놓고, 의자를 끌어다 내 왼 편에 자리했다.
저택 안에서도 밥을 먹을 때나 집무실에 있을 때에도 늘 이랬기에 무척 자연스러운 느낌이었다.
“ 밖에서 먹으니까 뭐든 맛있네요. 재료도 신경 써서 마련해서 그런가 봐요. ”
“ 다른 전장에서 먹던 밥은 별로였어? ”
“ 그렇죠. 일단 질보다는 양이 우선이었고, 배를 채우는 것이 가장 급하니 맛도 신경 쓸 겨를이 없었어요. 더구나 용병 시절엔 밥값에 너무 돈을 들이기도 뭣해서 아끼던 풍조가 있었고요. ”
두 여자는 밥을 먹으면서도 잘도 음식물이 튀지 않게 대화를 나눴다.
씹을 거 다 씹은 뒤에 입을 열었으니 당연하기는 한데, 빠름에도 여유가 느껴지는 모습이 참 신기했다.
“ 지금 엘렌의 눈으로 본 전장 상황은 어때? 괜찮은 것 같아? ”
“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너무 순조로워요. 엘프를 이용한 빠른 파발에, 중앙과 양 측에서 제국군을 치는 변칙적인 수비로 애를 먹이고 있잖아요. 물론 진짜 전면전을 피해 겉부터 걷어내는 중이라 그리 큰 타격은 못 주고 있지만, 야금야금 갉아먹는 느낌이 좋은 것 같아요. ”
“ 그래?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네. ”
헬레나는 자신감을 얻었다는 듯, 한결 편안한 표정으로 숟가락을 들었다.
아무래도 전쟁터에서는 누구보다 닳고 닳은 엘렌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 신뢰도가 높은 모양이었다.
대륙 전체를 뒤져도 다크엘프 용병만큼 전투 경험이 많은 이들도 드물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어쨌든, 그 덕분에 좋은 분위기 속에서 목 막히는 일 없이 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 자. 차 마셔. ”
나는 그릇을 반납하고 돌아온 뒤, 텐트 안에 있던 화구를 이용해 차 세잔을 끓였다.
전쟁터에서도 평소처럼 차를 끓일 수 있도록 설비와 찻잔 등이 놓인 것을 보면 지금도 신기했다.
야외 연습 때야 그러려니 했지만, 진짜 실전에서는 너무 사치스러운 여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 고마워. ”
“ 감사합니다. 잘 마실게요. ”
마음 같아서는 과자도 곁들여 먹고 싶기는 하지만 너무 얼빠져 보일 것 같아 그만두었다.
지금은 식량 같은 물자에 여유가 있다고는 하나 최대한 계획적으로 쓰는 것이 옳기도 했고.
움찔. 엘렌은 차를 마시다 말고 몸을 떨다, 의자를 빼어 내 맞은편에 자리했다.
제법 멀리서 들려오는 발소리를 듣고 한 행동이었다.
복잡한 사정을 잘 아는 저택 식구들만 있는 것이 아니니만큼, 여러모로 신경 쓰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 모습에 미안함과 고마움을 담아 한 마디하고는, 입구 쪽에서 헐레벌떡 달려오는 병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병사는 가쁜 숨을 가다듬으며 군례를 올린 뒤,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 공작님! 쉬시는 중에 실례합니다! 급보입니다! ”
“ 급보? 혹시 제국이 또 공격을 해 왔나요? 하지만 그런 것 치고는 병영 전체가 이상하게 조용한데……. ”
“ 예! 군사적인 움직임은 없습니다. 제국 측의 귀족 하나가 성 근처까지 와 공작님의 이름을 외치고 있는 것이 이유입니다. ”
귀족이라. 나도 그 귀족이 누구인지 대충 예상이 가니, 헬레나도 당연히 그 남자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을 터였다.
조용히 찻잔을 내리며 한숨 쉬는 모습을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라면 분위기 다 깨졌다는 듯한 기색을 띠지는 않겠지.
“ 그 귀족이라는 게 혹시… 헬릭스 백작인가요? ”
“ 예. 정확히 꿰뚫어 보셨습니다. ”
하아. 헬레나는 그 답을 듣기 무섭게 한숨을 내쉬며, 의자 옆에 비스듬히 세워 두었던 검을 집으며 몸을 일으켰다.
싸움을 걸기엔 시간이 조금 애매한 감도 없잖아 있었지만, 어찌 보면 적절한 시간이기는 했다.
보통 아침보다 오후가 긴 편이니까.
“ 그래요. 부른다니 가야겠지요. 전하나 다른 분들은 어찌하고 있나요? ”
“ 전하나 두 공작께서는 이미 성벽 위에 이르시어, 놈이 도발하는 것을 들으며 말을 주고받으시는 중입니다. ”
“ 그분들께서 고생이 많으시네요. ”
어처구니없다는 기색이 헬레나의 표정에 생생히 떠오르는 가운데, 병사가 고개를 숙이며 한 발 먼저 등을 돌렸다.
제 역할이 끝났으니 곧장 자리로 돌아가는 모양이었다.
며칠 전처럼 안내가 필요한 경우라면 모를까, 성과 진영 모두 우리 영역이었기에 그럴 필요가 없었다.
“ 오오, 공작! 잘 오셨소! ”
재빨리 말을 몰아 소란의 근원지에 이르자, 국왕이 헬레나의 손을 맞잡으며 제법 격하게 반겼다.
표정에 지긋지긋하다는 색이 배여 있는 것을 보니 제법 고생한 모양이다.
“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리고 그 탓에 전하께 쓸데없는 수고를 끼쳐드려 버린 것 같아 송구합니다. ”
“ 무슨 말씀을. 점심 후에 한 숨 돌리려던 때 들어온 저놈이 예의가 없는 것이지. ”
국왕은 고개 숙여 사과하는 헬레나를 위로하며 성벽 위를 걸었다.
나는 그 사이 눈이 마주친 다른 두 공작과 눈을 맞추며 가볍게 인사를 하고, 헬레나를 따라 성벽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헬레나의 표정을 보기 무섭게 함박웃음을 짓는 중년 사내의 얼굴이 한 눈에 들어왔다.
제법 거리가 있기는 해도 말과 표정이 보일 정도는 되었다. 물론, 지금의 내 기준에서.
“ 드디어 왔구나! ”
“ 그래요. 왔습니다. 당신이 저를 애타게 찾으신다던 분이지요? ”
“ 그렇다, 이 비겁한 종자야! ”
비겁이라.
헬릭스 백작은 날렵하고 지적인 분위기가 느껴지는 얼굴과 다르게, 제법 걸걸한 목소리로 거침없는 도발을 날렸다.
“ 비겁이라. 그리 말씀하시는 근거가 무엇인가요? ”
“ 명색이 마스터라는 경지에 이르고서 암습 따위를 서슴없이 저지르지 않았느냐?! 그러니 비겁이라 표현하지 않고 어찌 하겠는가! ”
“ 전쟁터에서 야습은 충분히 합리적인 전략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데… 아닌가요? ”
제법 목소리를 높인데다 마나까지 실리자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제법 크게 울렸다.
제국 병영까지 들릴지는 잘 모르겠지만, 헬릭스 백작이나 그를 따르는 수십의 기마대가 들을 정도는 되었다.
“ 흥! 보통 병사라면 모를까, 경지에 오른 무인이 할 짓은 아니지! 계집이라 그런지 참 뻔뻔스럽게도 네 비겁함을 포장하는구나! 네년의 손에 쥐어진 검이 통곡을 하겠어! ”
“ 네. 참 유감이네요. 아무튼, 이렇게 무모하게 들이닥친 이유나 말해 보세요. ”
“ 네년도 명색이 기사, 혹은 마스터라면 걸어 온 결투까지 피하지는 않겠지! 계속 꽁지 빠지게 도망만 치지 말고, 목숨을 걸고 제대로 된 끝을 맺자꾸나! 나와라! ”
싸우자는 것은 예상했던 답이다.
헬레나도 그를 알았기에 크게 동요하지 않고, 그의 뒤에 선 기마병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 결투를 하자 하시는 분이 기마병을 끌고 오나요? ”
“ 이놈들을 핑계로 도망갈 생각은 접어라! 하도 끈질기게 따라붙기에 어쩔 수가 없었어! 물론 결투 시에는 멀찍이 물려 둘 테니 걱정 꺼라! ”
그 외에도 계속 비겁하게 도망만 칠 것이냐. 그렇다면 네년은 마스터도 뭣도 아닌 비겁한 계집일 뿐이라는 말을 내뱉었다.
놈은 헬레나를 매도하는 것이 재밌었는지 흐름을 타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장황하게 지껄여댔다.
말하다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지는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로 인해 성벽 위에 선 사람들의 얼굴에 새빨간 열이 피어올랐다.
도발을 받는 본인이 아님에도 그 본인만큼 화가 치밀어 오르는 기색이었다.
헬레나를 모욕하는 것은 곧 자신을 모욕한다는 것일까.
이래서 자존심이라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던 가운데, 놈의 입에서 해서는 안 될 말이 튀어나왔다.
“ 듣자하니 네년은 남자 하나를 죽어라 싸고돈다던데, 그 남자의 목이라도 베어야 튀어나오겠느냐! 아니면 제 목숨이 중하니까 그것마저 그냥 보고 있을 셈인가?! 그 잘난 사랑도 목숨 앞에선 다 부질 없구나!! ”
까드득!
나는 발작버튼이 눌리기 무섭게 이를 가는 헬레나의 모습을 보며, 내심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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