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1화 〉 전쟁과 주작 #6
* * *
“ 하하하! 다들 보셨소이까? 제국 놈들이 이를 갈며 도망가던 것을! ”
제법 성공적으로 야습을 마치고, 그날 곧장 한 차례의 공성전까지 치른 후. 국왕은 몹시 즐겁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덕분에 솔론트 저택에 마련된 회의장 분위기도 제법 밝았다.
“ 예. 성벽 위에서 아주 즐겁게 보았습니다. ”
성 안에서 수성을 맡았던 루크도 국왕의 비위를 맞추듯 즐겁게 웃어댔다.
성벽 위에서 전황을 내려다볼 수 있는 입장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당연히 우리보다 볼 수 있는 것이 많았을 테니까.
“ 크라우저 공작. 그리고 대공께서도 참 수고가 많으셨소. 새벽에 기습을 한 탓에 몹시 지쳤을 테인데, 곧장 연전을 치렀으니. ”
“ 황송합니다. 다 전하께서 배려해 주신 덕분입니다. ”
“ 허허.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라는 건 잘 알 알겠는데… 나도 사람인지라 그런 말이 듣기가 참 좋구려. ”
정말로 즐거운 것인지는 몰라도 제법 분위기가 밝기는 하다.
이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사람들 또한 그렇게 생각하는 듯 어색하다는 느낌이 없었다.
적어도 억지로 비위를 맞추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 으음. 참. 그러고 보니 제국의 마스터와 칼을 섞으신 소감이 어떠셨소? 헬릭스 백작이라 했던가? ”
이른 아침.
외곽을 중심으로 주둔지 곳곳을 들쑤신 것 때문에 약이 바싹 오른 제국군이 성을 향해 공격을 감행했고, 그 과정에서 헬레나와 헬릭스 백작이 칼을 섞게 되었다.
여태껏 헬레나와 겨루던 기사들이 채 열 합을 넘기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으나, 같은 마스터와 부딪치고 만 탓에 좀처럼 끝이 나질 않았었다.
고작 몇 분 정도였어도.
“ 예. 마스터와 검을 맞대는 것은 처음이라 저도 모르게 긴장이 되었습니다. ”
“ 으음… 아무래도 상대가 상대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겠지. ”
국왕은 낮게 침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 같았으면 농담도 참 잘한다며 넘어갔겠지만, 이번만큼은 도저히 그럴 수가 없어 보이는 듯했다.
당장 오늘만 봐도 헬레나와 검을 섞다 결판이 나질 않았으니까.
그렇다 해서 헬레나가 부족하다면 그건 또 아니었다.
오히려 훨씬 일찍 태어나 더 많은 시간을 검과 함께 보낸 인간과 엇비슷하게 붙는 것 자체가 놀라울 따름이었다. 더구나,
“ 전하. 백작이 노련하게 대처한 탓에 상대하기 까다롭기는 하나, 크게 불리할 정도는 아니라고 느껴집니다. 적어도 발목은 붙들어 둘 수 있을 테니 너무 심려치는 마세요. ”
“ 오, 그런가? 그렇다면 내 안심이지. ”
헬레나가 드물게 딱 잘라 말하자 국왕도 한 숨 돌렸다는 듯 가슴을 쓸어내리며 웃었다.
평소 자신감 있게 말하는 성격이 아니라 더욱 믿음이 가는 모양이었다. 헬레나가 겸양을 떤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 테니.
“ …그래, 농은 이쯤에서 그만 두어야겠소. 즐겁긴 하지만 여전히 전쟁 중임에는 변함없으니… 슬슬 각 공작께서 피해 상황을 보고해 주시구려. 부족함이 있으면 대비를 해야 하지 않겠소? ”
“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럼 저부터 보고 드리겠습니다. ”
국왕의 비위를 맞추며 보고의 포문을 연 루크를 시작으로 공작들이 전투로 인한 피해를 보고 있다.
성벽 보수의 필요 여부나 당연히 언급해야 할 병력 손실 등이 주였다.
그것들을 다 종합해 보니 제법 피해가 적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불과 몇 시간 전 야습을 당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면전을 걸어왔다.
하루나 이틀 잠을 자지 못한 것과 다른 피로가 온몸에 쌓인 상황에서.
그러니 병장기를 휘두르는 모습에 힘이 없었고, 악으로 버틴다 하더라도 한계가 있었다.
버티는 왕국군 또한 악에 받치기는 마찬가지였기에.
“ 구태여 무리하게 전투를 앞당긴 이유가 무엇인지 나로서는 잘 모르겠소. 하지만 나름대로 이유가 있어 그런 결정을 내렸겠지. 허나, 앞으로도 그럴 것일까 생각하니 걱정이 되오. ”
“ 아마 당분간은 진영을 정비하고 휴식을 취할 것 같습니다. 이쯤 되면 머리에 오른 열이 식었겠지요. ”
“ 음. 좋소. 그동안 세 공작께서도 부족한 것을 보완해 주시오. 필요한 것이 있다면 칙령을 내려 보충하리다. 명분은 충분하고도 남으니 거절할 수도 없겠지. ”
국왕은 칼리우드 공작과 몇 마디 주고받다, 제법 눈에 힘을 주며 회의를 끝냈다.
평상시에도 왕권이 약한 것은 아니지만 전시 상황이다 보니 그 힘이 더욱 강해져 있었다.
그리고 그 힘을 휘두를 생각을 하자 절로 힘이 들어가는 모양이었다.
.
조용하다.
연속된 전투로 인한 피로를 달래고자 잠시 낮잠을 취하자, 어느새 밤이 되어 있었다.
나와 함께 나란히 잠들어 있던 헬레나도 그에 놀라 몇 번이고 눈을 깜빡댔다.
비현실적인 광경을 접한 사람들이 보일 법한 반응이라 속내가 훤히 보이는 듯 했다.
“ 늦은 시간에 일어나서 참 애매한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
“ 일단 산책 겸 군영이라도 돌아보는 게 어때? ”
나는 헬레나의 답이 정답이라 생각하며 함께 막사 밖으로 나왔다.
전쟁 중이라 벗어두었던 몬스터의 가죽으로 만든 갑옷도 걸치고, 무기도 빠뜨리지 않고 챙겼다.
양쪽 산맥에 엘프 군대를 매복시켜 두었기에 안전하기는 해도, 너무 나사 빠진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였다.
척. 스쳐가는 많은 군사들이 우리를 볼 때마다 묵묵히 군례를 올렸고, 그 때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받았다.
곳곳에서 갑옷이 달그락대는 소리가 낮게 울렸고, 병사들의 눈빛도 날카롭게 살아 있었다.
두 차례에 걸친 전투에서 성과를 거뒀으니 그럴 수밖에.
“ 다행히 부상이 크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당장 전투에 나설 수는 없으니, 당분간 후방에 두고 치료를 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
부상자들을 모아 둔 구역에 들르자, 그곳에 머무르던 약사 한 사람이 한숨을 쉬며 답했다.
현대에도 그렇듯 이곳에도 간단한 교육을 받은 의무병이 곳곳에 있기는 하나, 전문적인 의술을 익힌 약사보다는 못했다.
그렇기에 아무런 강요 없이 스스로 전쟁터까지 와 준 약사들은 고맙고 귀한 존재였다.
헬레나는 우리를 보고 몸을 일으키려는 부상자들을 막아 세우며, 그들 모두와 한 번씩 눈을 맞추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나도 마음 같아서는 하나하나 손을 잡고 자그마한 위로나마 건네고 싶었지만… 수가 너무 많았다.
또, 인사 때문에 시간을 잡아먹으면 이들 또한 편히 쉴 수 없을 테니 적당한 선에서 대화를 마무리했다.
“ 약사께서도 너무 무리하지 마시고 제대로 쉬도록 하세요. 잠도 충분히 주무시고요. 물론 부상병들의 용태가 악화되면 어쩔 수 없이 이곳으로 뛰어오셔야 하겠지만……. ”
“ 어휴. 그렇게 말씀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큰 영광입니다. 더구나 공작님께서 제휴를 맺고 들여오시는 엘프의 약이 효과가 참 좋습니다. 덕분에 큰 짐을 덜고 있어 그리 부담스럽지도 않습니다. ”
“ 그러시다니 다행이네요. 그러면, 저는 이쯤에서 실례할게요. 모두들 편히 쉬세요. ”
그 후.
나는 부담스러울 만큼 뜨거운 시선을 뒤로하며 헬레나의 등을 쫓았다.
거침없는 걸음을 보니 미리 어디로 갈지 정해 둔 모양이었다.
그곳은 다름 아닌 이브와 몇몇 엘프들이 밑준비를 하느라 바쁜 병기창고 근처의 넓은 공터였다.
“ 이브. 그리고 모두들. 고생이 많아요. ”
“ 아. 공작님! 어서 오세요! 승전보는 익히 들었는데… 직접 뵈러 가지 못해 죄송해요. ”
나무판에 복잡한 마법진을 새기던 이브가 정말 반갑다는 듯 헬레나를 맞았다.
우리의 간단하고도 복잡한 관계 때문에 사실상 막내 취급을 받게 되어 그런가, 지금처럼 제법 살가운 모습을 보였다.
헬레나나 엘렌이나.
“ 고생은 이브나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더 고생이죠. 저야 몇 시간 정도 칼만 휘두르다 왔을 뿐인 것을요. ”
“ 어… 그게 훨씬 고생 아닌가요? ”
“ 저 많은 나무판에 마법진을 새기는 여러분만큼은 아니죠. ”
헬레나는 여러 사람이 함께 잘 수 있는 커다란 텐트, 정확히는 그 옆에 산처럼 쌓인 나무판을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얼핏 보기엔 도저히 그 쓰임새를 알기 어렵고, 낭비처럼 보이나 전황을 한 번에 뒤집기 위한 한 수였다.
사실 이렇게 거창한 준비를 할 필요도 없지만, 이런 과정을 거치는 것 또한 보여주기 위한 명분 쌓기였다.
능력이 너무 뛰어나면 자연스레 질시를 받기 마련이라 이렇게 변명거리 하나 정도는 마련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 생각은 그랬고, 다른 사람들도 그에 공감해 주었기에 이러고 있었다.
단,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쓸데없는 행위는 아니다.
그저 쉬운 길을 좀 더 복잡하게 돌아갈 뿐이다.
이브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이윽고 생각을 포기했는지 부드럽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 감사합니다. 앞으로 하루나 이틀 정도면 다 끝날 것 같아요. 옮기는 것은 엘프 분들이 해 주실 테니 얼마 걸리진 않을 테고요. ”
“ 좋은 소식이네요. 전쟁은 길어봐야 좋을 것 하나 없으니, 빨리 끝내는 것이 좋겠죠. ”
헬레나는 바닥에 앉아 나무판을 긁는 이브 앞에 쪼그려 앉아, 그 손을 맞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제법 훈훈하게 흘러가는 광경을 마음 놓고 지켜보다, 이쪽으로 달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 대공님! 쉬시는 도중에 죄송합니다! ”
헬레나가 쪼그려 앉아있던 탓에 얼굴을 보지 못했는지 그 다음으로 급이 높은 나를 보고 달려왔다.
일단 동급이라고는 하나 엄밀히 따지면 헬레나가 위였으니, 헬레나를 보았다면 공작님을 외치며 달려왔겠지.
어쨌든, 제법 급히 달려온 병사는 내게만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 예. 무슨 일이시죠? ”
“ 그것이…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
기세로 봐서는 큰 소리로 외칠 것 같이 보였으나, 기다렸다는 듯 내 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말하기 전에 실례 하겠다 그랬으니 엄한 오해는 안 하고 넘겼다.
그저 병사를 노려보는 헬레나의 싸늘한 눈빛이 심상치 않았을 뿐.
“ 제국 측에서 연락책을 보내왔습니다. 앤더슨 자작령 소속이라고 합니다. ”
앤더슨이? 나는 가늘게 치뜨고 있던 눈을 크게 뜨며, 정면을 보고 물었다.
“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
“ 본 진영으로 오기 위한 오른편 산맥 초입에 있습니다. 백기를 들고 오기에 매복해 있던 군사들이 죽이지 않고 전령을 보냈습니다. ”
“ 그렇군요. 당장 안내해 주실 수 있을까요? ”
“ 예. 모시겠습니다. ”
병사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한 발 먼저 등을 돌리자, 나도 헬레나와 이브를 향해 가볍게 눈짓하며 입을 열었다.
작별인사를 건넴과 동시에, 헬레나는 나를 따라오라는 뜻에서.
“ 이브. 미안해요. 급한 일이 생겨서 당장 가 봐야할 것 같아요. 내일 또 들를게요. ”
“ 아. 네에. 부디 몸 조심하세요……. ”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답하는 이브의 인사를 뒤로한 채, 나와 헬레나는 급히 움직이는 병사의 등을 쫓았다.
워낙 빠른 걸음이었던 탓에 혹시 기사가 아닐까 착각할 정도였다.
우리는 고작해야 셋 정도 움직이는 일이었기에 가장 먼저 마구간에 들렀다.
설령 엘프가 제국 측에 붙어 있다 하더라도 볼 수 없는 거리에, 땅도 울리지 않을 것 같아 내린 결정이었다.
“ 이럇! ”
그 후, 진영 입구로 나오기 무섭게 산맥 쪽으로 말을 몰았다.
확실히 뛰는 것보다 이렇게 말에 올라타는 것이 속도도 빠르고 편해서 좋았다.
위치를 잡고 몸을 고정하는 등 아예 힘을 안 쓰는 것은 아니더라도, 뛰는 것보다 훨씬 덜했다.
그렇게 산책 초입에 도착한 뒤엔 근처 나무에 말을 묶어다 놓고, 곧장 경사진 비탈길을 올랐다.
흙이 튀고 다리에 자연스레 힘이 들어갔으나, 몸은 깃털처럼 가볍게 위로 오르고 있었다.
우리를 마중했던 병사는 산 밑에서 헤어져 다시 병영으로 돌아갔다.
“ 보통 병사를 산맥 쪽으로 오게 하는걸 보면, 어지간히 중요한 소식인걸까? ”
“ 어차피 한 번 정도는 연락을 취해야 했을 테니까, 단순히 은밀하게 오고자 산맥을 이용했을 가능성도 있어. ”
그렇긴 하네.
나는 헬레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경사면을 내달리는 다리에 더욱 힘을 주었다.
고지가 눈앞이었으니 빨리빨리 가고 보자는 생각 때문이었다.
“ 오셨군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비교적 평탄한 경사면에 오르자, 비스듬히 선 나무에 눕듯 기대어 있던 엘프 하나가 우리를 맞았다.
여유로운 모습을 보니 진즉에 기척을 느끼고 대비한 모양이었다.
“ 네. 아주 기묘한 소식이 있다 해서 왔습니다. 제국 측에서 보낸 병사는 어디 있죠? ”
“ 여기 있습니다. ”
내 질문에 답한 것은 엘프가 아니라 그 뒤에서 대범하게 경사면을 타고 내려오는 한 병사였다.
그런데 생김새도 준수했으며, 무엇보다 몸짓이나 보통 병사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무심코 고개를 갸웃거릴 정도로.
“ 앤더슨 자작께서 보내셨습니다. 제리코라고 합니다. ”
자신을 제리코라 소개한 가죽 갑옷의 남자는 꾸벅 고개를 숙이며 정중하게 인사부터 건넸다.
그것도 경사면 위로 자란 나무 하나를 붙잡고 흔들리는 기색 하나 없이.
나는 그 모습에 더욱 수상쩍음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 혹시 기사이십니까? ”
“ 예. 자유기사였습니다. 지금은 자작님 아래에 들어간 지 5년 정도 흘렀고요. ”
“ 그러셨군요. ”
기사면 그럴 수 있지.
나는 내심 생각했던 가능성이 들어맞았음에 만족하며, 헬레나에게도 고개를 숙이는 제리코를 향해 물었다.
“ 참. 자작께서 당신을 보내신 이유가 뭡니까? ”
“ 예.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여기 자작께서 직접 보내신 친서입니다. ”
제리코는 길어질 대답 대신 품을 뒤져, 동그랗게 말린 종이 한 장을 건넸다.
내 입장에서도 이야기가 빨라서 좋고, 무엇보다 자작이 보냈다는 증거 또한 되기에 받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나는 제리코가 내미는 종이를 받아 펼친 뒤, 어깨에 딱 달라붙은 헬레나와 함께 내용을 읽어나갔다.
제법 내용이 길었지만 앞으로 며칠에 걸쳐 군영 배치를 바꾸겠다, 조만간 헬레나에게 결투를 신청할 지도 모른다가 요지였다.
진영을 바꾼다는 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주요 인물을 쉽게 제압하기 위함이겠지.
그리고 결투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헬레나의 기습이 마음에 안 든 탓인지, 아니면 단순히 검을 섞어보고 싶은 것인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