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8화 〉 전쟁과 주작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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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죽이겠다는 선언 이후에도 병력이 속속들이 모여들어, 솔론트 백작령이 때 아닌 북새통을 이루었다.
외성을 중심으로 중립파와 국왕파의 병영도 지어져 있어 장관이 따로 없었다.
병영은 당연히 성을 기준으로 제법 뒤쪽에 지었다.
근거지를 전쟁터 한 가운데 지을 수는 없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만약 그랬다면 한 번 부딪치는 순간 여러 물품들이 잿더미가 될 테니까.
“ 드디어 간악한 제국군들이 발을 들였구려. ”
국왕은 백작령 외성 남문 쪽에 마련된 막사 회의실에 들어오자마자 한숨을 길게 내뿜었다.
개미떼 같은 제국군의 숫자를 보니 저도 모르게 기가 죽은 모양이었다.
싸움은 쪽수가 큰 영향을 미치니 그럴 수밖에.
“ 예. 보급부대를 제외한 전투 병력만 50만이니 제법 장관이더군요. ”
루크는 무덤덤하게 답하며, 상석에 주저앉는 국왕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표정과 말투가 무덤덤하지만 내심 큰 충격을 받은 듯, 평소보다 딱딱한 느낌이 강했다.
나와 헬레나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국왕 기준에서 왼편에 자리했다.
알론은 맞은편, 루크는 오른편이다.
사람 사이를 가로막듯 자리한 테이블이 사각형이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본래 사이가 나쁜 귀족들이 이런 자리에서 만났을 경우, 상석을 제외한 다음 자리를 두고 신경전을 벌일 수도 있었다.
다만 서로의 사이가 썩 나쁘지 않고 상황이 급박했기에, 누가 어느 자리에 앉았다고 해서 불만을 품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 그래도 당장 오자마자 전투를 벌일 생각은 없어 보이더군요. 제법 긴 길을 걸어 왔으니 그럴 만도 하지요. ”
“ 지친 병사로는 제대로 싸울 수 없으니 당연한 선택이긴 합니다. ”
알론이 중얼거리듯 내뱉은 말에 루크가 답한 것을 시작으로 여러 이야기가 오갔다.
현재 편제가 어떻게 되어 있고, 군량은 어디에 쌓아두었는지 등, 내부 상황을 확인차 보고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국왕은 그 이야기를 듣고 조금 기운이 났는지, 숙였던 고개를 들며 말했다.
“ 그러고 보니 정말 주황깃발이 있던 것을 보았소이다. 그것도 꽤 여럿이더군. ”
“ 예. 제국의 앤더슨 자작이 말한 대로더군요. ”
나는 1황자 파벌을 상징하는 주황 깃발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 황실을 포함한 각기 다른 가문의 문장이 그려져 있는 것은 당연했지만, 공통적으로 주황색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그 외에도 푸른빛, 혹은 칠하지 않은 새하얀 배경을 가진 깃발도 더러 있었다.
각 병력과 파벌을 알기 쉽게 구분하고 운용하기 위해서.
“ 음. 일단 저것만 보면 대공에게 왔었던 자작의 말이 사실이기는 한가보오. 다만… 저들이 정녕 도움이 될까 싶소. 어딘가 위축된 규모를 보면 당장 대놓고 반란을 일으키지는 못할 듯 싶은데……. ”
“ 예. 애초에 반란을 일으킬 생각이라면 처음부터 그렇게 했겠지요. 하지만 그러지 못했으니… 간을 좀 볼 듯싶습니다. ”
“ 허허. 간을 본다라. 그렇겠지. ”
비수를 아무렇지 않게 막 휘둘러서는 크게 의미 없는 것처럼, 그들이 나서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때가 필요했다.
“ 그래. 일단 이 이야기는 이쯤 해 두겠소. 우선 당장 내일부터 벌어질 지도 모를 전투에 신경 쓰는 것이 더 현명할 테니. ”
“ 전하. 그에 관해서 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
헬레나가 낮게 손을 들고 나서자, 국왕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흥미롭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국왕을 지지하는 파벌의 수장이자 마스터가 발 벗고 나서는 것 같으니 기쁠 만도 하겠지.
“ 크라우저 공작이? 한 번 말씀해 보시오. ”
“ 본래 우리 왕국군은 저들을 막아야 하는 입장입니다. 병력 차이도 확연하니 그럴 수밖에 없겠지요. ”
“ …음, 그렇겠지. 그런데 그게 무슨 문제라도 있소? ”
“ 문제야 없지만… 전하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제가 직접 별동대를 이끌고 야습을 하고 싶습니다. ”
야습? 그 말에 국왕을 포함한 두 공작의 눈이 번쩍 뜨였다.
수성전이 확실시되는 상황에서 굳이 야습을 하겠다 나섰으니 놀랄 만도 했다.
굳이 성문을 열어 병력을 내보낸다는 위험을 감수하는 셈이기도 하니까.
그러나, 아직 제국군 병력이 성을 포위한 것도 아닌데다 전쟁은 시작도 하지 않았다.
더해 제국군은 아직 피로가 쌓여있을 테니, 그 피로를 풀고자 할 때 통수를 때리면 효과적이지 않을까 싶었다.
물론, 상대 또한 그 점을 예상해서 경계를 좀 더 날카롭게 가다듬을 수도 있다.
저쪽도 참모진이 있을 테니까.
“ 야습? 공작께서 직접? 으음… 생각해 보면 공작의 군영은 밖에 있으니 병력을 내보내기가 쉽겠지. 하지만… 저쪽이 과연 그에 관한 대비를 하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드오. ”
“ 물론 대비는 해 두었겠지요. 다만, 우리에게는 저들에게 없는 이들이 있지 않습니까. ”
“ 저들에게 없는 이들이라면… 엘프들을 말하는 건가? ”
국왕은 성 곳곳에, 그리고 우리 쪽 군영에도 머무르는 엘프 군대를 떠올린 듯 손뼉을 탁 쳤다.
“ 네. 저들도 엘프 군이 우리 쪽에 있는 것을 알고 있겠지만, 그저 궁수 몇 정도가 늘어났다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산맥이 있다고는 하나 주 전장과는 거리가 있고, 평야에 선 엘프들은 별 대수롭지 않다 여길 테니까요. ”
“ 으음……. 그렇긴 하지. 숲 속의 엘프는 귀신과도 같지만, 평지에서는 해 볼 만 하니까. ”
“ 그렇지요. 아마 제국군들도 그렇게 생각 할 테니, 그 틈을 노릴 생각입니다. ”
굳이 엘프 군세를 이끌지 않더라도 야습은 할 수 있다.
애초에 한밤중에 경계가 느슨해질 시기를 노리거나 어둠을 틈타는 행위라, 엘프가 중요한 것이 아니긴 했다.
그래도 장점이 아예 없다는 뜻은 아니다.
민첩하고 마법을 쓸 수 있다는 것만으로 큰 도움이 되었다.
더구나 국왕에게 말은 안 했지만, 여기까지 데리고 온 마법병단을 쓸 생각이라 제법 기대해 볼 만 했다.
“ 좋소. 공작께서 의도하신 대로 한 번 해 보시오. 단, 병력 손실이 크게 나지 않도록 주의해 주시구려. ”
“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헬레나는 국왕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렇기에 나 또한 자연스레 국왕에게 인사를 올린 뒤, 헬레나의 등을 쫓아 성 바깥으로 나섰다.
“ 기습은 좋은데, 저쪽에서도 눈치 채지 않을까? ”
나는 헬레나가 기감이 뛰어나듯, 저쪽 소드마스터인 헬릭스 백작의 감 또한 뛰어날지 모른다는 것을 은연중에 입에 담았다.
워낙 수가 적은 것이 마스터다보니 어떻게 비교하기가 참 곤란했다.
헬레나보다 뛰어난지, 아니면 뒤떨어지는지도 모르니까.
헬레나는 나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마구간 쪽으로 걷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 그럴 가능성도 있어. 하지만 백작은 황제 편을 들고 있으니, 자연스레 황제 곁을 지키고 있지 않을까 싶어. 마스터라고는 하나 나랑은 경우가 다르잖아. ”
“ 신분이? ”
“ 응. 저쪽에서도 큰 지휘권을 가진 것이 황제와 황자들, 그리고 그 밑을 따르는 공작들이야. 우리랑 비슷하게. 그런 상황에서 마스터라고는 하나, 백작인 헬릭스가 큰 영향력을 준다고 보기는 어려워. 물론 신분을 막론하고 존중은 하겠지만, 군사 지휘는 경우가 다르지. ”
영차. 헬레나가 어느새 도착한 마구간에서 말을 꺼내 등에 오르자, 나도 아차 싶은 마음에 얌전히 쉬고 있던 말을 꺼냈다.
헬레나의 목소리에 너무 귀를 기울인 탓에 멍하게 서 있었던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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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진에 직접 기습을 가하시겠다니, 너무 위험하신 것 아닙니까?! ”
성 안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전하자, 바르칸 백작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이곳에서는 헬레나가 가장 강하기에, 그녀를 따르는 다른 귀족들 또한 자연스레 헬레나가 머무는 구역까지 발을 옮겨야만 했다.
“ 바르칸 백작님이 걱정하시는 것도 충분히 이해해요. 하지만 마스터는 방 안에 장식해 놓는 보검이 아니잖아요. 이럴 경우에 쓰라고 떠받들어 주는 것이죠. ”
“ 그러나… 공작께서는 단순한 마스터가 아니라, 한 나라의 공작이시지 않습니까? ”
“ 아직 아버지가 건재하시니 괜찮아요. 만약 제가 죽으면 새 후계자를 만들기 위해 힘을 쓰셔야 할 테지만, 공작가는 괜찮겠죠. ”
때 아닌 농담을 내뱉자 바르칸 백작을 시작으로 하는 귀족들 모두가 넋 나간 표정을 지었다.
평소 얌전한 헬레나가 내뱉었다고는 믿기 어려운 부류의 농담이었기 때문이다.
“ 고, 공작님도 그런 말씀을 할 줄 아십니까? ”
“ 어머. 저도 곧 스물여덟이 되는걸요. 이제 어린아이가 아니잖아요. 더구나 이곳은 전장이니까 이 정도 농담은 충분히 할 만 하죠? ”
“ 크, 크흠…! 그야 그렇습니다만……. ”
바르칸 백작은 차마 뭐라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듯,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갔다. 그에 다른 귀족들도 연신 헛기침을 해대며, 위를 향하는 입꼬리를 억누르려 애썼다.
그로 인해 본의 아니게 회의실 안이 헛기침으로 가득 찼으나, 그만큼 분위기가 제법 밝아졌다.
“ 으음……. 대공께서도 같은 생각이십니까? ”
“ 물론이죠. 저도 함께 할 생각이라 반대 할 이유가 없습니다. ”
처음 내가 따라 오겠다고 했을 때엔 헬레나를 비롯한 여자들이 당연히 반대를 했지만, 꼭 붙어 있겠다는 뜻을 꾸준히 전하고 나서야 마지못해 고집을 꺾었다.
물론 손 놓고 구경만 해도 그만이기는 했지만, 부인 될 사람 혼자 보내는 것이 영 마음에 걸렸던 탓에.
“ 후우…! 선대 공작께서도 행동력이 남다르시긴 했습니다만, 두 분은 그것보다 더하시군요. ”
“ 칭찬해 주셔서 고마워요. 아무튼, 제가 없는 동안에는 바르칸 백작께서 지휘를 맡아 주세요. 부탁드려요. ”
각 파벌의 후작들은 너무 나이가 들어 전쟁터에 나오기가 어려워, 각자 영지에 머무르며 별동대가 들어올지 감시하는 중이다.
그래서 이 자리에 선 귀족들 중 바르칸 백작이 헬레나 다음으로 지위가 높았다.
바르칸 백작도 그를 잘 알기에, 할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푹 쉬며 이야기했다.
“ 명령이시니 받아들이겠습니다. 하지만, 부디 무사히 돌아오시기를 빕니다. 저로서는 이 대군을 끌고 갈 능력도 없거니와, 그랬다가는 머리가 터져 죽어버릴 지도 모를 일이니까요. ”
“ 백작님의 머리가 터져버리면 저도 무척 곤란하죠. 반드시 돌아올 테니 너무 걱정 마시고 기다려 주세요. ”
가벼운 농담으로 회의를 마무리 지은 뒤, 각 귀족들은 각자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갔다.
헬레나는 그들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나와 함께 텐트를 빠져나왔다.
그러다 근처를 지나던 병사 하나를 불러다 명령했다.
“ 지금 당장 엘렌과 오르커스를 이쪽으로 불러 주시겠어요? ”
“ 예, 알겠습니다! ”
병사는 헬레나의 명령을 듣기 무섭게 우렁찬 목소리로 답하며, 마법병단이 머무르는 방향으로 힘차게 달려갔다.
본래 병단의 대장은 이브지만, 큰 거 한방을 준비하기 위해 잠시 물러난 상태였다.
오르커스가 불린 것도 그 때문이었고.
이브가 갑작스레, 그리고 처음으로 입에 담았던 큰 것은 제법 꼼꼼한 준비가 필요했고, 또한 우리 쪽에도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
고로 마법병단을 이용한 기습에 데리고 갈 수가 없었다.
그에, 나는 내심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이미 선별식을 헤쳐 나가며 몇 번의 살인을 해 보았다고는 해도, 최대한 사람을 죽이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물론 헬레나나 엘렌의 손에도 가능한 피가 묻지 않기를 바라고는 있다.
바라고는 있는데, 현실이 그렇지 못하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두 여자를 빼버리면 아주 큰 공백이 생기니 안 될 일이니.
“ 하아, 하아…! 다녀오셨어요? 국왕은 뭐라고 하던가요? ”
잠시 후.
오르커스와 함께 급히 달려 온 엘렌이 약간 거칠어진 숨을 고르며 물었다.
어지간히 마음이 급했는지 달려온 모양이었다.
괜히 휘말린 저 남자만 불쌍하다.
“ 별 거 없어. 허락한다더라. ”
“ 그랬구만. 그럴 것 같아서 지시받은 대로 준비는 다 시켜 놨는데, 언제 시작 할 거요? ”
오르커스는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목을 한 바퀴 돌렸다.
오랫동안 거친 생활을 한 피가 어디 가지는 않았다는 듯, 몹시 호전적인 모습이었다.
“ 늦은 밤에 시작할 생각입니다. 새벽이 무르익었을 무렵에요. ”
“ 불침번도 피곤하고, 다 곯아떨어져 있을 시각이라. 나쁘진 않네. 대신 기습하는 우리 쪽도 피곤하겠어. ”
“ 네. 그러니 정비를 마치는 대로 잠을 자 주세요. 그렇잖아도 새벽에 나서야 하는데, 평소처럼 지내면 더 피곤하잖아요. ”
“ 그 정도로 지칠 만큼 순한 놈들은 없지만… 알겠소. 그렇게 하리다. ”
오르커스는 한 번 고개를 끄덕인 뒤, 엘렌에게 슬쩍 곁눈질 하며 자리를 떴다.
나와 엘렌을 번갈아 쳐다본 것을 보니, 아마도 여기에 남아 있으라는 신호 같았다.
엘렌도 그리 생각했는지, 오르커스의 뒤를 따르지 않고 여기에 남았다.
“ 저어, 대공님. 정말 제 힘을 제대로 쓰면 안 되는 건가요? 허락만 해 주시면 지금 당장이라도 전쟁을 끝낼 수도 있는데……. ”
엘렌은 할 필요 없는 전쟁을 하게 된 것이 마음에 안 드는 듯, 이미 끝난 이야기를 한 번 더 끄집어냈다.
그녀 입장에서 보면 당장 쓰나미로 쓸어버리고 태풍만 일으켜도 깔끔히 정리될 테니그럴 만도 했다.
그러나.
전에도 말했듯, 유산의 힘을 제대로 쓸 경우 그 뒤에 찾아올 혼란이 더 클지도 모를 일이다.
“ 정말 궁지에 몰렸을 때라면… 나중에 욕을 처먹더라도 써야겠지. 하지만 그 전까지는 적당한 수준에서 끊어줘. 부탁해. ”
“ …네. ”
그 날 밤처럼 엘렌의 잿빛 손을 꼭 잡고 이야기하자, 그녀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미련이 남은 모양이지만, 두 번이나 같은 결론을 내렸다.
그러니 같은 이야기를 또 하지는 않겠지.
“ 그래. 엘렌도 이제 슬슬 눈을 붙여둬. 그래도 너무 잠에 취하지 않게 신경 쓰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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