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7화 〉 전쟁과 주작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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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을 하나로 모은다는 건, 결국 언젠가 대면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겠지요.
새로이 오베론의 촌장이 된 헬렌은 대회의의 시작을 이렇게 알렸다. 그 후로는 기다렸다는 듯 여러 촌장들이 손을 들고 나서며 각자의 생각을 토해냈다.
“ 남의 나라 전쟁에 발을 들이는 것은 꺼리는 것이 당연하겠지요. ”
“ 물론 그 또한 옳은 말씀이시긴 합니다만, 정석만으로 헤쳐 나가기엔 상황이 영 좋지가 않습니다. 대륙 통일을 염두에 둔다 하지 않습니까? 그 말은 즉슨, 우리 엘프도 무사하지만은 못하다는 뜻입니다. ”
“ 우리가 원하던, 원하지 않았던 대공에게 진 빚이 있어요.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먼저 외면하기도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
촌장이 되고 얼마 지나지도 않아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리게 되다니.
헬렌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신입 촌장들을 훑어보며 낮게 한숨 쉬었다.
긴 삶을 사는 엘프의 기준에서 보면 몇 년이라는 시간도 짧은 편이라, 마치 촌장이 된 직후 곧바로 큰 일이 터진 느낌이었다.
“ 그런데 말입니다. ”
대화가 시작되고 제법 시간이 흐를 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헬렌이, 촌장들의 시선을 모으며 입을 열었다.
촌장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다보니 굳이 열을 올릴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 생각해 보니… 대공 측에는 유산을 얻은 그 다크엘프가 있지 않습니까? ”
“ …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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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하여, 엘프는 왕국을 지원하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정확히는 공작령을 돕는 것이지만, 아무튼. ”
엘프 무리를 대표해 특사로 온 헬렌은 그리 말하며, 내 앞에서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늘 있는 사람밖에 없는 집무실이라서 고개 숙이기가 쉬웠던 것일까, 아니면 고개 숙이는 것이 습관이 된 것일까.
나로서는 잘 모르겠지만, 거창하게 시작한 대회의에서 내린 결론이 허무하다는 것만은 잘 알 수 있었다.
“ 그렇군요. 엘프가 전면에서, 그것도 도움을 청하지 않았음에도 손을 내밀어주어 고맙습니다. ”
그에 헬레나는 공작으로서 감사를 표했다.
군사는 많을수록 좋으며, 엘프와 같이 특별한 능력을 가진 이들이라면 더더욱 환영이었다.
전쟁터에서도 말을 잘 들어줄까 하는 걱정도 되었지만, 돕겠다고 나선 이상 어느 정도는 따라 주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여러모로 나쁠 것이 없어 보였다.
“ 단순히 왕국의 존망만 걸린 문제가 아니니 당연한 결론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봐도 옳은 선택이라 생각하고요. ”
“ 옳은 선택이라. 저희가 그만큼 마음에 드셨다는 뜻인가요? ”
“ 그건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문제라… 답을 해 드리기 곤란할 것 같습니다. ”
헬렌은 쑥스럽다는 듯 얼굴을 붉히며 답을 피했다.
에일렌 다음으로 촌장에 임명되었다 하기에 그만큼 능글맞은 줄 알았더니, 사람 대하는 것이 몹시 서투른 모습이었다.
자칫 다루기 쉽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 크흠. 어쨌든, 전쟁이 터질 경우 저희는 공작령 휘하에서 일하고 싶습니다. 공작령을 돕는 것이 왕국을 돕는 것이라고는 하나, 왕이 착각하지 않도록 잘 말씀드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 무슨 뜻인지 잘 알겠습니다. ”
공작령을 돕지만 왕국, 혹은 그에 속하는 귀족들의 명령까지 따를 생각은 없다는 뜻이다.
헬레나도 그 점을 알았는지 별 말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헬레나가 국가에 대한 충성이 넘치는 사람이었다면 곤란한 기색을 보이거나 화를 냈으리라.
“ 감사합니다. 이것으로 제 용건은 끝났으니…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
헬렌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응접실을 떠났고, 우리도 기다렸다는 듯 앞으로 벌어질 일을 대비했다.
제국보다 조금 늦었지만 식량, 약 등을 포함한 전쟁물자를 조금씩 긁어모으고, 좀 더 강한 훈련을 시키기도 했다.
“ 보통 이럴 경우에는 전면전이 벌어지겠지만… 후방 쪽으로 병력을 돌려 기습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
“ 그러려면 국경선을 뚫어야 할 텐데, 그 경우에는 상대 군사 움직임이 들통 나서 안 될 거야. 또 들키지 않게 움직이려면 그만큼 병력 수를 줄여야 하니 크게 의미가 없고. ”
그 와중에 지도를 펼쳐놓고 대화를 나누기도 했고, 헬레나의 설명을 들으며 잔걱정을 털어내기도 했다.
다른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만큼 혼란스러운 일은 없었지만 마음이 무거웠다.
“ 그나저나, 이번에 마법병단을 데리고 가야 할지 고민이야. 본래 지온이 우리 영지의 방어를 위해 만든 부대지만, 이 전쟁도 넓게 보면 영지 방어전인 셈이잖아. ”
나는 헬레나가 몹시 우물쭈물하며 말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속으로 피식 웃었다.
충분히 일리가 있는데도 잘못한 사람마냥 주눅 들어 있는 모습이 참 귀여워 보였다.
직접 허락을 내렸다고는 하나 내가 생각하고 만든 부대라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 맞는 말이야. 넓게 보면 영지를 지키는 일이니까 마법병단을 쓰는 게 맞겠지. ”
“ 그렇지? 그럼 이브에게 말해 둘게. ”
헬레나는 보란 듯이 짙은 숨을 뱉어내며 가슴을 쓸어내리더니, 사람을 시켜 이브를 집무실로 불렀다.
같은 저택에서 지내기에, 여기까지 오는데 걸리는 시간이 당연히 짧았다.
헬레나로부터 소식을 들은 이브는 기다렸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기꺼이 돕겠다는 뜻을 밝혔다.
눈이 반짝인다고는 하나 무언가를 기대하기에 빛나는 것이 아니라, 방해물을 걷어치우고자 하는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위대한 헬리오스 황제의 이름 아래, 소테른 왕국에게 항복을 종용하노라.
그렇게 서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긴장감 느껴지는 매일을 보낸 지도 몇 달.
마침내 제국 측에서 선전포고를 했다.
본래 효과적인 타격과 충격을 주려면 선전포고 없는 기습이 효과적일 테지만, 이 대륙의 예법에는 들어맞지 않는 생각이었다.
물론 기습이라는 개념이 없지는 않지만, 규모가 큰 전쟁을 치를 때에는 반드시 선전포고를 해야 하는 것이 규칙이었다.
어디까지나 관습이기는 하지만, 이 대륙의 국제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기습이 벌어지는건 그 후였다.
만약 이 규칙을 어기고 효율을 중시하여 기습을 하면 도적 취급을 받으며, 그에 맞는 비난 또한 꼬리처럼 따라붙는다.
이는 흔히 말하는 명분을 잃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지금도 명분과는 거리가 먼 상황이라 그까짓 것 없어도 그만이라 생각할 법도 했으나, 정말 그랬다가는 끊임없이 불타는 저항의 불길과 직면해야 한다.
그것은 대륙 통일을 염두에 두는 황제에게 있어 몹시 거슬리는 상황이 될 터였다.
즉, 일방적인 침략전쟁이라고는 하나 선전포고라는 명분을 갖추고 꺾어야 저항의 기세를 최대한 줄일 수 있었다.
전쟁 소식이 들려오자 모든 이들이 불안한 기색으로 웅성거리곤 했으나, 생각만큼 정도가 심하지는 않았다.
약간 흐트러지기는 했지만 질서 잡힌 것도 여전했다.
아무래도 전쟁이 퍼질지 모른다는 소식이 진즉부터 퍼지기 시작한 탓이 아닐까 싶다.
“ 대륙을 정복하고자 하는 제국의 야욕이 터전을 지키려는 우리보다 결코 강하지 않을 터! 그러니, 그들의 침략을 물리치고 왕국의 평화를 지킬 수 있을 것이다! ”
헬레나는 외성 밖, 몇 만이나 되는 군사들의 선두에 서서 큰 목소리로 연설을 해댔다.
제법 규모가 큰 군사들 앞에서 소리치느라 평소와 다른 말투를 썼다.
아무래도 사기를 고양시키기 위해 굳이 강한 말투를 쓰는 모양이었다.
그것이 정말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있는 힘껏 함성을 내지르는 병사들을 보니 약간 마음이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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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하는 쪽은 반드시 국경부터 밀고 들어와야 했으며, 갑자기 왕국 내에 나타날 수가 없을 노릇이다.
전투기와 같은 운송수단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고로, 제국은 반드시 그들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솔론트 백작령을 거쳐 가야만 했다.
긴 산맥이 자연스레 선을 긋는 와중, 그 가운데에 뚫린 평야 위에 세워진 영지였다.
“ 어서 오시오. 기다리고 있었소. ”
그 솔론트 백작령에 발을 들이자, 미리 백작 저택에 도착하여 기다리고 있던 국왕이 웃으며 나와 헬레나를 반겼다.
백작령에 오기 전에 국왕파 귀족들을 모아 오느라 시간이 걸렸지만, 그래도 꼴찌는 아닌 모양이었다.
“ 전하? 전하께서 이렇게 빨리 나와 계실 줄은……. ”
몬스터의 가죽으로 만든 검은 갑옷을 걸친 헬레나가 놀란 듯 중얼거렸다.
본래 거드름을 피우며 가장 늦게 도착할 법도 했는데, 누구보다 빨리 도착해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한 탓이겠지.
다만, 이는 겉으로 드러내는 반응만 보고 내린 결론이다. 사실은 국왕이 이미 도착했다는 것을 진즉 알고 있었다.
백작령에 들어서고 얼마 안 되어 국왕이 있다는 소문을 들은 덕이다.
그저, 미리 출발하겠다는 소식을 보내지 않은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 우리 왕국의 존망이 걸린 일이니, 내 어찌 게으름을 피울 수 있겠소. 부족한 몸이나마 빨리 달려오는 것이 인지상정이지. ”
“ 부족하다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어쩐지 사람들이나 병사들의 사기가 제법 높더니, 다 이런 이유에서였군요. ”
“ 하하! 공작께서 나를 이토록 높게 평가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구려. ”
두 사람은 가볍게 환담을 나누는 것부터 시작하여 현 상황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았다.
오면서 보니 아직 제국군이 도착하지는 않은 모양이지만, 곧 보이는 곳까지 도달할 것이 분명했다.
“ 참. 병사들은 어찌 하셨소? ”
“ 성 바깥에 군영을 설치했습니다. 후속 부대까지 합류할 것을 고려해 보면 미리 자리를 잡는 것이 좋을 것 같아 그렇게 결정했습니다.
이 백작령 안에 모든 군사를 들이면 너무 좁을 테니까요. ”
솔론트 백작령이 넓은 평야 위에 세워진 영지라고는 하나, 그 성벽이 모든 외곽을 감싸는 것은 아니었다.
안에 들일 수 있는 사람 수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 당연했다.
더구나 국왕 직할의 기사단이나 병사들이 이미 발을 들였으며, 남은 공간은 귀족파 병사들로 채울 예정이었다.
사실상 이미 여유 공간이 없는 상황이라 할 수 있었다.
“ 본디 총사령관의 직책을 맡았으면 다르게 행동할 법도 한데… 공작께서는 참 대단하구려. ”
“ 과찬이십니다. 그저 많은 군사들을 지휘할 기량이 없는데다, 앞에 나서는 것이 더 적성에 맞을 뿐인 것을요. ”
“ 으음… 그렇지. 더구나, 공작께서는 마스터이니 더더욱 나서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겠소. ”
“ 그렇지요. 저쪽도 마스터가 버티고 있으니까요. ”
헬레나는 제국의 상징이라 할 수 있을 수염 난 남자, 헬릭스 백작을 은연중에 거론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또한 마스터, 그것도 헬레나보다 인생경험이 더욱 많은 남자이기에 방심할 수가 없었다.
국왕 또한 그를 잘 알기에 침음을 흘리며 입을 다물다, 한층 그늘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 참. 소식 들으셨소? 저쪽 군사는 50만이라 하오. 그에 반해, 우리 왕국의 군사는 20만이지. ”
“ 네. 들었습니다. 본래 공성을 하는 자는 수성을 하는 자들보다 세 배 많아야 하는 것이 정석이라고 하죠. 그런 점에서 보면 우리가 조금 유리하다 볼 수 있을지도 모르나, 모든 병력이 성 안에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
“ 이길 수 있겠소? ”
이길 수 있겠느냐. 나로서는 당연히 잘 모르겠다고 답하겠지만, 질문을 받은 대상이 헬레나라도 별반 다르지 않은 답이 나올 듯싶었다.
본래 자신감과 거리가 먼 성격이라 겸손한 답을 내놓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그러나 그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답과, 답을 말하는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내게 손을 댔던 아그네스나 홀리를 바라볼 때와 같이 싸늘하고, 날카로우며, 어두컴컴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 장담은 못 할 듯 싶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죽이겠습니다. ”
이기는 것도 아니고 죽이겠다.
그 말 한마디만으로그동안 헬레나가 쌓아 둔 분노가 얼마만큼 커다란지 짐작할 수 있었다.
국왕도 그를 알기에 식은땀을 흘리다,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너무 억지스러운 웃음이라 불쌍할 지경이었다.
“ 허허…! 죽이겠다, 라. 공작께서 그리 강하게 말씀하시니 내 안심이 되는구려. 부디 그래주시길 바라오. ”
“ 네. 평화를 깨뜨린 대가를 반드시 치르게 하겠습니다. ”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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