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6화 〉 전쟁과 주작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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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으음. 일단… 고생 많으셨습니다. 저는 단순히 정보나 정찰만 하리라 생각했건만, 설마 스스로 위험 지역에 파고 들 줄은……. ”
앤더슨이 떠나가고 며칠 뒤.
우리 왕국의 세 공작은 다시 한 자리에 모여 대화의 장을 마련했다.
이번에는 칼리우드 공작령이 아니라 가장 중간에 가까운 지역이었다.
칼리우드 공작은 야외 테라스 의자에 걸터앉은 채 짙은 숨을 토해냈다.
둥근 테이블을 둘러싸고 나나 헬레나, 루크 킬리네어까지 앉아 있으니 답답할 법도 했다.
물론, 정말로 그렇지는 않겠지만.
“ 역시 대공이시군요. 그 행동력이 정말 대단합니다. ”
그에 반해, 루크는 웃는 상으로 놀랍다는 듯 중얼거렸다.
평소 능글맞은 구렁이 같은 느낌이 많이 흐려진 것을 보니정말로 놀라운 모양이었다.
공작과 같은 급이라 할 수 있을 대공이 할 만한 행동이 아니긴 했으니 그럴 수도 있지.
“ 칭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워낙 급한 상황이라 저도 모르게 몸이 나서게 되더군요. ”
“ 그 높은 위치에 서시고도 직접 움직이시다니… 실로 귀족의 귀감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저도 본받고 싶을 정도입니다. ”
루크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술술 내뱉으며 나를 추켜세운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킬리네어 공작가에서 받은 교육의 영향 때문이라도, 본능적으로 흙바닥을 구르길 꺼리게 될 터였다.
그저, 만약에 이 말이 진심이라면 참 어려운 남자라는 평가가 더욱 강해질 듯싶었다.
거만함이 알아서 배일 환경에서 자랐음에도 그럴 수 있다는 건 무서운 일일 테니.
“ 으흠. 그나저나… 제국의 자작과 어떤 말씀을 나누셨습니까? ”
듣는 사람만 낯 뜨거워지는 농담을 주고받던 중, 알론 칼리우드 공작이 기침을 하며 주제를 돌렸다.
어찌 보면 너무 노골적이다 싶을 만큼 대화 주제를 확 꺾은 셈이나, 나로서는 잘됐다는 생각뿐이었다.
우선 듣기 거북한 이야기가 끝나서 다행이었고, 또 칼리우드 공작이 막 뱉은 주제가 본 목적이었으니까.
나는 앤더슨 자작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최대한 자세히 털어놓았다.
특별한 움직임이 보일 경우 즉시 간자를 우리 쪽으로 보내 소식을 전해주기로 했으며, 그 뜻에 찬성하는 이들이 제법 있다는 것 까지.
“ 으음. 군사체계부터 보급경로까지 전부 알아낼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아직 전쟁이 터지지도 않았으니 모르는 것이 당연하겠죠. ”
제법 긴 설명이 다 끝나자, 루크가 참 아쉽다는 듯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그가 말한 대로 적군의 편제까지 사전에 알 수 있었다면 여러모로 도움이 되었을 지도 모를 일이긴 했다.
“ 하지만, 그 자작이란 자의 말을 그대로 믿을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현 황태자의 위치가 위태롭다고는 하나,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지 않습니까? ”
“ 설마요. 설령 상대가 거짓말을 했다 하더라도 대공께서는 다 아시고 계실 듯 한데, 아닙니까? ”
“ 대공과 만나는 것부터 모두 사기라 친다면, 제국 차원에서 정보를 조작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럴 가능성을 아예 배제하지는 못할 텐데……. ”
루크가 짧게 변호하고, 알론이 그에 우려가 섞인 반박을 덧붙이며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의심이라는 것은 한 번 시작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고, 듣는 사람과 말하는 사람 모두를 지치게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했다.
전쟁이 거의 확실시되는 상황에서 느슨하게 긴장을 푸는 것보다야 훨씬 나았다.
그렇다 해서 의심이 너무 지나친 나머지 스스로 함정에 빠지는 꼴은 만들지 말아야겠지만, 아무튼.
“ 물론 공작님께서 품고 계시는 의심은 타당합니다. 더구나 그 상대가 제국 측이라면 더욱 그렇겠지요. 다만……. ”
슥. 나는 잠시 말을 끊고, 품을 뒤져 종이 한 장을 테이블 위에 꺼내 놓았다.
앤더슨 자작이 말만 가지고는 의심 할 수 있다며목숨을 걸고 만들어 준 증거이자 약점이었다.
“ 이게 뭡니까? ”
“ 제국 황태자의 친필서한과 서명, 그 증표가 찍힌 문서입니다. ” “ …예?! ”
알론은 저도 모르게 소리치며 테이블에 놓인 문서를 낚아채, 글자 하나하나를 뚫어질 듯 쳐다봤다.
눈을 부릅뜬 채로 저러는 모습이 새삼 두려울 지경이었다.
헬레나나 엘렌이 보여주던 집착과는 다른 부류의 집착을 보는 것만 같아서.
“ 진품이로군요. ”
모든 제국 귀족이 어떤 문장을 갖고 있고 어떤 서명을 하는지는 몰라도, 제국 황제나 황태자 등 핵심적인 인물의 상징이 무엇인지 정도는 안다.
이 자리에 앉은 모든 사람이 그랬다. 일종의 교양필수라 할 수 있었기에.
“ 이것이 제국에 넘어간다면 아주 큰 파란을 불러일으킬 겁니다. 우선 황태자는 당연히 실각되겠지요. ”
“ 그리고 황태자 편에 붙은 귀족들 대부분은 숙청되고, 새롭게 물갈이 될 가능성이 아주 높겠죠. 즉, 우리로서는 이걸 터뜨려 제국 측에 혼란을 유도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
아까도 그렇고, 루크와 알론은 은근히 죽이 잘 맞았다.
공감을 하나 반론을 하나, 하나같이 찰떡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혹여 루크가 알버스 킬리네어가 아니라 알론 칼리우드의 사생아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 물론 그것 또한 방법이겠지만… 그래서는 안 되겠지요. ”
잠시 두 남자만의 대화가 이어지던 중, 가만히 입을 다물고만 있던 헬레나가 천천히 운을 뗐다.
“ 그 말씀은? ”
“ 킬리네어 공작님이 말씀하신 대로, 이 서류를 제국 측에 보내 혼란을 유도할 수는 있을 거예요. 제국의 황제가 이 서류에 연관된 일파를 쳐내느라 애를 쓸 테고, 그러는 동안 시간을 벌 수 있을 테지요. 또, 잘하면 마음이 급한 황태자가 내전을 일으킬 수도 있어요. 그 경우 제국 사람끼리 싸우는 결과를 낳으니, 상대의 힘을 죽이는 데 더욱 효과적이라 할 수 있을 지도 모르고요. ”
헬레나는 루크의 물음에 우선 긍정하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를 가만히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루크의 표정을 보니 정답인 모양이었다.
제법 만족한 기색을 엿볼 수 있었기 때문에.
“ 공작께서는 제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오기라도 하셨습니까? 어떻게 제 의도를 이렇게까지 읽어 내신건지 원……. ”
“ 부족한 머리로도 열심히 생각하다보니, 우연히 들어맞은 모양이네요. ”
“ 하지만 공작께서는 제 의견에 반대하시겠죠. 괜찮으시다면 이유를 여쭤 봐도 괜찮을까요? ”
루크는 정면에서 자기 의견에 반박하는 기색을 읽었음에도 전혀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내는 헬레나의 모습에서 그런 기색을 읽어낸 것도, 그러고도 호기심 가득한 모습만 보이는 것이 대단했다.
헬레나는 그런 모습이 제법 마음에 들었는지, 상대가 기분 나쁘지 않도록 배려하며 답을 내놓았다.
“ 신의에 어긋나기 때문이에요. ”
“ …허어? 신의요? ”
“ 네. 신의요. 저쪽이 매국을 하던 어쨌든, 우리를 믿고 위험을 감수했는데… 거기에 대고 뒤통수를 칠 수 없는 법이지요. 딱 잘라 도울 수 없다고 말할지언정, 도우려는 척 하며 배신하는 것은 안 될 일이에요. ”
하다못해 물건을 살 때에도 믿음이 필요하니, 이런 일에 믿음이 더더욱 필요하다는 뜻은 이해가 간다.
다른 사람은 모를까, 나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당장 황당하다는 듯 되묻는 루크도, 마찬가지로 황당하다는 기색으로 듣고 있는 알론도 그를 알고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신의를 이유로 드는 것이 어처구니없게 들리는 모양이었다.
“ 정말… 그것 때문입니까? ”
“ 물론 그것 때문만은 아니죠. 정말 중요한 건 신의를 어김으로써 생기는 부작용을 막는 것이니까요. ” “ 부작용이라 하심은…? ”
루크가 얼른 말해보라는 듯 재촉하자, 헬레나도 기다렸다는 듯 숨을 고른 뒤 입술을 뗐다.
그 짧은 순간에 눈빛과 호흡을 가다듬은 것을 보면 제법 긴 이야기를 하려는 것만 같았다.
“ 사람은 배신한 상대를 결코 용서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흔히 보복하고 싶다는 마음이 싹트죠. 그 마음을 현실로 옮기느냐 마느냐는 둘째 치더라도요. ”
“ 그야 그렇겠지요. 누가 자기를 배신한 인간을 좋아하겠습니까? ”
“ 그렇죠. 그러니 되도록 신의를 배신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이번 사태를 예를 들어 볼까요? 만약 제가 킬리네어 공작님의 의견에 따라 이 문서를 제국 측에 폭로한다고 치면, 아마 두 가지 경우가 생길 지도 모를 일이니까요. ”
문서를 폭로함으로써 분노한 황제의 칼날을 그대로 맞느냐, 피하느냐고 악을 쓰느냐.
여기까지는 루크도 한 번 언급했었기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 문제는 그 다음이지요. 이 경우 황제와 황태자의 싸움이 될 테고, 둘 중 누가 이겨도 우리 입장에서는 손해에요. 하나같이 독이 바싹 올라, 복수심에 불타겠죠. ”
“ 복수, 복수심이라……. ”
루크는 복수라는 말을 가만히 곱씹었다.
그로 인해 의도치 않게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으나, 루크가 곧 낮은 탄성을 내지르며 그 침묵을 깼다.
그 스스로도 깨달은 바가 있는 모양이었다.
“ 그렇군요. 공작께서 말씀하신 대로, 누가 이겨도 짙은 앙심이 피어날 가능성이 높겠습니다. 황태자가 승리한다면 더더욱. ”
“ 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해요. ”
우선 황제가 이길 경우에는 반란세력을 먼저 정리한다.
당연히 세력 전체가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책임자를 비롯한 친족들의 목을 치는 것이니, 반란세력의 기반 자체는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다.
남은 반란세력은 당연히 그 불씨를 터뜨린 우리를 원망할 것이고, 황제세력 또한 대륙 통일에 찬물을 끼얹은 우리를 용서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 결과, 통일을 향한 야심과 우리를 향한 복수심의 환장할 콜라보가 이루이지는 셈이다.
만약 황태자가 이긴다면 어떨까.
마찬가지로 손을 내밀었던 우리가 거세게 통수를 쳤으니, 황제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못하지는 않을 복수심을 품게 될 것이 분명했다.
전쟁으로 인한 희생을 막고자 했던 생각과 행동도 다 잊을 만큼 강렬한 복수심을 품을 가능성이 높았다.
복수심을 품으면 그것을 풀기 위해 움직일 테고, 이는 곧 전쟁으로 이어지는 셈이다.
당장은 전쟁이 아니더라도 거세게 시비를 걸고 걸다, 결국 전쟁으로 이어질 발판을 마련하겠지.
나는 헬레나가 덧붙인 설명을 들으며 그럴 듯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내 입장에서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을 만큼.
“ …그래서, 손을 뻗은 자들과 협력해서 이 전쟁을 헤쳐가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해요. 어찌 보면, 이것 또한 일종의 거래니까요. ”
“ 잘 알겠습니다. 그러면, 이들과 협력해서 전쟁을 이끌어나가는 방향으로 간다 생각하면 되겠지요. ”
“ 저도 동의합니다. ”
가만히 듣고만 있던 알론도 반론할 거리가 없다는 듯,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이로 인해 의견이 하나로 모인 셈이다.
“ 우리의 의견이 하나로 모였으니, 빠른 시일 내에 전하께도 이 사실을 알려야 할 것 같습니다. ”
“ 그렇지요. 국가의 우두머리이신 전하께서 이 사실을 모르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일이니까요. ”
더욱이 크라우저 공작가가 국왕파의 우두머리라고는 하나, 결국 국왕을 전면적으로 지지하는 파벌이기에 그 꼭대기는 자연스럽게 국왕이 되는 셈이다.
그것이 설령 별 의미 없는 꼭대기라 해도, 꼭대기인 이상 알 것은 알아야 했다.
괜히 뒷말이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그러므로, 나와 헬레나는 두 공작과 헤어지기 무섭게 수도로 말을 몰았다.
마침 수도와 가까운 곳이었기에 문안인사차 들렀다고 하면 크게 의심을 살 일도 없을 듯싶었다.
많은 이들이 알고 있듯 우리는 국왕파이며, 두문불출하던 예전 시절과는 달랐으니까.
“ 그래. 공작이나 대공이 이렇게 독대를 신청한 것도 얼마만인지 원. 좀 자주 들르고 그러시구려. ”
왕궁에 도착해 사람 드문 응접실에 발을 들이기 무섭게, 국왕이 피식 웃으며 앓는 소리를 냈다.
몇 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을 뿐인데도 제법 나이 먹은 티가 뚜렷했다.
나이로 따지면 마흔 중반 정도 되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좀 더 자주 들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헬레나도 국왕의 앓는 소리가 반쯤 농담인 줄 알기에 부드럽게 웃으며 답했다.
국왕이 정말 아쉬운 소리를 내는 중이라면 웃지도 않고, 고개를 숙이며 자세를 낮췄을 테지.
어쨌든, 분위기 자체는 나쁘지 않아 이야기를 꺼내기 딱 좋았다.
“ …그랬었구려. 제국 사정도 제법 복잡한 모양이오. ”
“ 예. 그래서 말씀입니다만… 이 사실은 우선 전하께서만 알아 두셔야 할 듯싶습니다. 적어도 전장에서 제국군을 마주하기 전 까지는 아는 이가 적은 것이 좋을 테니까요. ”
“ 옳으신 말씀이구려. 내 공작의 뜻에 따르리다. 괜히 소문이 새다 바깥까지 들어가면 골치만 아프지. ”
전후사정을 전해들은 국왕 소테른도 헬레나의 뜻에 공감했는지, 별 불평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의 결정이 정말 옳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단지 그 뿐만은 아닌 것 같았다.
아마 공작 셋이 모아 결정한 것이라 의문을 품거나 거절하기도 애매했을 테지.
“ 그나저나, 전쟁이라. 몇 대 동안 평화로운 시기가 계속되어, 언제까지고 평화롭게 지나갈 줄 알았건만… 내 욕심이 너무 지나쳤던 것인가. ”
“ 그럴 리가요. 평화를 바라는 마음이 어찌 욕심이겠습니까? ”
나는 표정에 그늘이 진 국왕의 넋두리를 들으며,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전하고자 제법 단호하게 말했다.
덕분에 국왕의 입꼬리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 대공께서 그리 말해주어 고맙소. 다만, 힘이 쌓이고 쌓이면 결국 분출할 곳을 찾기 마련이니… 결국 예정된 수순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소. 특히 강한 자라면 더더욱. ”
“ 그럴 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
저희도 약하지는 않습니다.
국왕은 확신에 찬 투로 말하는 헬레나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표정에 드리운 그늘을 걷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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