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5화 〉 밑준비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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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정신없이 해댔는지, 지금도 허리가 녹을 지경이다.
덕분에 반쯤 미쳐 날뛰던 밤이 끝난 다음에도 몸이 노곤해, 업무를 미루고 저택 뒤편에서 바람을 맞으며 쉬었다.
반대로 헬레나를 비롯한 세 여자는 아주 쌩쌩하게 제 할 일을 하고 있었다.
“ 죄송해요. 너무 그리웠던 나머지 그만……. ”
내 옆에서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앉은 엘렌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헬레나는 서류 처리를 하느라 바쁘지만, 엘렌은 내 호위가 일이었기에 비교적 한가했다.
그 덕분에 쉴 때도 함께였다.
“ 죄송할 게 뭐가 있어? 나도 좋아서 했던 건데. ”
요 닷새 동안 있었던 일은 부끄럽기도 하지만 즐거웠다.
예전에는 꿈도 못 꾸던 일을 몸으로 할 수 있으니 뿌듯하기도 했다.
큰 욕구를 받쳐주는 몸이 있으니 그럴 수밖에.
“ 정말… 좋으셨어요? ”
“ 좋다마다. 덕분에 골치 아픈 일도 싹 잊어버릴 수 있었고, 참 좋았어. ”
나는 수줍어하며 묻는 엘렌을 보고 피식 웃으며 굳건히 버티고 선 저택 벽에 등을 기댔다.
앤더슨이 도착할 동안에는 오늘처럼 느긋하게 보낼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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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작님. 손님께서 오셨습니다. ”
머리를 비우고 평소와 같이 영지 업무를 보던 어느 날.
앤디가 제법 심각한 표정으로 손님이 찾아왔음을 알렸다.
손님은 지금 응접실에 있으며, 간단한 대접을 받고 있는 중이라고.
헬레나는 손님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걸리는 듯 눈을 날카롭게 치뜨며 물었다.
“ 손님? 이름은? ”
“ 전에 공작님께서 편지를 보내라 지시했던 남자입니다. 얼굴은 본 적 없기에 확신할 수는 없었습니다만… 그 이름을 말하며 찾아왔기에 마냥 내칠 수가 없었습니다. ”
“ 그래요? 고마워요. 곧장 응접실로 이동할 테니, 앤디는 그만 제 자리로 돌아가 줘요. ”
“ 알겠습니다. ”
나와 헬레나는 앤디가 떠나가기 무섭게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아마 기다리던 사람이 왔다면, 지금 상황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여기까지 와서 입을 꾹 다물 것 같지도 않았으니까.
덜컥.
응접실 안으로 발을 들이자 측면 소파에 기대 느긋하게 차를 마시는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앤더슨이라 생각했었는데, 그와는 얼굴 생김새가 사뭇 다른 남자였다.
“ 오셨군요. ”
그러나, 그의 영지에서 들었던 목소리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기에 내심 당황스러웠다.
분명 얼굴만 보면 다른 사람인데도목소리가 같으니 영 이상했다.
혹시 목소리를 변조하는 매직 아이템이라도 사용한 것일까.
“ 음? 아. 실례했습니다. 눈에 띄지 않게 변장을 했으니 알아보시지 못할 만도 하겠지요. ”
남자는 나를 비롯한 사람들이 어색해하는 기색을 알아챈 듯, 자리에서 일어나기 무섭게 자기 얼굴을 집어 뜯었다.
처음에는 무슨 짓인가 싶었으나, 가만히 살펴보니 얼굴이 아니라 얼굴에 붙어있던 것들을 떼는 중이었다.
턱에 붙어 있던 살덩이 같은 무언가를 떼어내자 날렵한 턱선이 먼저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 뒤에도 얼굴 변화는 계속 이어져, 이윽고 기억 속에 있던 앤더슨의 얼굴이 만들어졌다.
“ 변장이라고 하셨죠? 정말 감쪽같네요. 분명 느낌은 앤더슨 자작님인데 얼굴이 달라 무척 놀랐어요. ”
탁.
헬레나는 응접실 문을 닫으며 부드러운 미소를 띠었다.
함께 뒤를 따라온 엘렌은 자신이 끼어 들 분위기가 아니라는 것을 느꼈는지 밖을 지키고 서는 중이었다.
그런데, 헬레나는 앤더슨이 다른 얼굴로 변장하고 있었음에도 한 눈에 그를 알아본 모양이었다.
확신에 찬 말투로 느낌을 말하는 것을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마 소드마스터라 가능한 기예가 아닐까 싶다.
“ 놀라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아무래도 제 얼굴로 다니면 쓸데없는 이목을 살 우려가 있었으니까요. 그건 저나 공작님, 그리고 함께 계시는 대공께서도 바라는 바가 아니겠지요. ”
“ 배려해 주셔서 감사해요. 자, 앉으시죠. ”
헬레나가 가장 상석 쪽으로 다가가 앉기를 권하자, 앤더슨은 고개를 끄덕이며 소파에 엉덩이를 붙였다.
헬레나는 앤더슨과 마주보고 앉은 나를 안타까운 눈빛으로 슬쩍 바라보다, 앤더슨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마 마음 같아서는 나를 상석에 앉히고 싶었겠지.
“ 우선, 여기까지 먼 걸음을 옮겨주신 것에 감사드려요. ”
“ 저야말로 감사드립니다. 설마 이렇게 빨리 공작님과 다시 만날 기회가 찾아오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으니까요. ”
“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으신다니 다행이네요. ”
헬레나는 우선 간단한 인사치례로 대화의 물꼬를 틀었다.
나는 끼어들 필요가 없는 대화였기에 적당히 맞장구만 쳐 줄 뿐, 대화에 끼어들지 않고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었다.
늘 그랬듯이.
“ 참. 요즘 제국이 참 활기차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얼마나 활기찬지 우리 왕국까지 그 소문이 들려 올 정도네요. ”
헬레나는 간단한 인사치례와 근황보고로 시간을 때우던 중, 갑작스레 핵심을 파고들었다.
여전히 웃고는 있지만 질문이 워낙 날카롭고 갑작스러워 아주 잘 갈린 칼날이 떠올랐다.
또는, 예고도 없이 갑자기 확 꺾는 드리프트처럼.
“ 예. 아주 활기차지요. 그 때문에 여러모로 곤란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
“ 자작께서도 그 곤란하신 사람 중 하나인가요? ”
“ 그렇지요. 어차피 빙 둘러 말할 만큼 여유로운 것도 아니거니와, 그럴 수도 없는 입장이니… 다 터놓고 얘기하겠습니다. ”
보통 정치하는 사람들이나 사회적 위치가 높은 인간들이 다 터놓고 얘기하자는 말은 믿어서는 안 된다.
나는 어디선가 본 듯한 문구를 떠올리며 정신을 바짝 차렸다.
무겁고 짙은 그늘이 깔린 앤더슨의 표정이 꾸며낸 것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만약 연기라면…….
상상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 공작께서도 듣는 귀가 있을 테니 둘러댈 필요가 없지요. 예. 맞습니다. 제국은 지금 전쟁 준비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
“ 네. 구체적으로는 어느 나라부터 공격할 생각이지요? ”
이 소테른 왕국을 포함해 크고 작은 몇 개의 나라가 제국 주위를 둘러싼 형편이다.
그 기세가 한 풀 꺾였다고는 하나 아직도 내전중인 블루네일 왕국도 그러하며, 그들이 손을 뻗으려 했던 수인국도 그 중 하나였다.
물론, 우리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 엘프 군락지도.
앤더슨은 헬레나의 말을 듣자 눈을 가늘게 뜨며,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 그 말씀을 들어보면… 제국의 뜻이 어떤지 알고 계시는 겁니까? ”
“ 통일전쟁을 치른다고 하지요? ”
헬레나는 뭘 당연한 것을 묻느냐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칼튼 백작에게 캐낸 정보를 알고 있기에 가능한 물음이자 답이었다.
만약 몰랐다면 좀 더 자세한 정보를 캐내고자 한 마디라도 많은 질문을 보탰으리라.
그에 앤더슨은 천천히, 아주 무거움이 느껴지는 몸짓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곡이었던 모양이다.
“ 예. 폐하께서 계시를 받으시어, 그를 받들고자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첫 번째 대상으로 이 왕국을 염두에 두고 계시지요. ”
“ 이유를 여쭤 봐도 될까요? ”
“ 가장 강한 적을 가장 먼저 쓰러뜨려 위용을 과시하고, 후환을 덜기 위함입니다. ”
“ 후환이라. 제법 합리적인 생각이기는 하네요. 우리 왕국이 가장 걸리적거리기에, 대대적인 비상체계에 들어가 충분한 준비를 할 시간을 주지 않겠다는 뜻이로군요. ”
가장 강한 적은 제일 나중에 친다는 생각도 있지만, 오히려 무엇보다 먼저 꺾는다는 선택도 가능했다.
물론 이 상황이 게임이라면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유감스럽게도 현실에서는 가능했다.
더구나 제국은 강대한 힘을 갖고 있으니 그 가능성이 더욱 높을 수밖에.
“ 예. 정확히 꿰고 계시는군요. ”
“ 그렇군요. 그런데… 자작께서도 제국의 사람이자 귀족일 텐데, 어째서 이런 말씀을 우리에게 전하러 온 건가요? 나라의 입장에서 보면 자작의 행동과 말 모두 매국행위가 아닌가요? ”
누군가를 직접 몰아붙여 정보를 캐내는 것과, 알아서 정보를 들고 오는 것은 성질이 전혀 달랐다.
더욱이 전쟁과 같은 기밀정보는 최대한 알려져서는 안 될 일이다.
헬레나는 그 점을 지적하고 들었다.
“ 알고 있습니다. 매국일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
앤더스는 이미 그 정도는 생각했다는 듯,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답하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 저는 제국을 팔아넘길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일개 자작이기에 그럴 능력도 힘도 없지만, 마음가짐 또한 아니라고 자신 있게 답할 수 있습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이 보았을 때는 충분히 매국이라 볼 수 있겠지요. ”
“ 이미 결심이 확고하신 모양이군요.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여쭤 봐도 될까요? ”
“ 실패로 인한 몰락을 막고자 함입니다. ”
몰락이라.
헬레나는 그 단어가 몹시 흥미로웠는지 눈을 반짝였다.
재정이나 군사 등, 여러 측면에서 단단한 제국의 사람이 입에 담을 만한 단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 몰락이라뇨? 고작 전쟁 한 번에 제국이 몰락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총동원령을 내린 것도 아닐 텐데. ”
“ 예. 물론 제국민 전체에 대고 총동원령을 내리시지는 않았지요. 그랬다가는 보급 등 여러 면에서 문제가 일어날 테니까요. 문제는, 왕국에게… 정확히는 공작께 명분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
“ 제게요? ”
헬레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앤더슨이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대륙에 몇 없는 소드마스터에게 빌미를 주었다간, 제국의 중심은 단숨에 쑥대밭이 될 겁니다. 가령 공작께서 변장을 한 뒤 은밀히 제국에 침입해 왕족이나 주요 대신들을 전부 죽이면… 중심을 잃은 제국은 단숨에 휘청거리게 될 테니까요. ”
“ 너무 저를 높이 사시는 것 아닌가요? 더구나 제국에도 황제의 곁을 지키는 마스터께서 게신 것으로 아는데요. ”
“ 물론 발로르 경이 계시기는 하지만… 같은 마스터께 선공을 양보했다간 무척 불리해지실 테지요. ”
같은 급이 한 발 먼저 기습을 하면 좀처럼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다.
앤더슨은 그것을 걱정하는 모양이었다.
실제로 달리는 속도가 똑같은 사람이 거리를 두고 달리면 끝까지 따라잡지 못하는 것과 비슷한 걸까.
나는 팔짱을 낀 채 숨을 죽이고, 두 사람의 대화에 더욱 귀를 기울였다.
“ 암습이라. 그럴 듯한 말씀이기는 한데, 그건 오히려 제국 측에서 해야 할 행위가 아닌가요? 제국의 마스터를 은밀히 왕국으로 보내, 제게 했던 말씀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 말이죠. 제국 입장에서는 무척 효율적이고 좋을 텐데요. ”
“ 발로르 경께서는 자존심이 강한 분이십니다. 그것은 제국 사람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요. ”
“ 즉, 기사로서 비열하기 짝이 없는 암습은 못 하겠다는 거네요. 하지만… 그 말씀을 뒤집어 생각해보면, 저는 비열한 행동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다고 들리는 것 같은데? ”
“ 예. 공작께서는 할 수 있으시다 봅니다. ”
어떻게 보면 너는 비열한 년이라고 대놓고 비난하는 소리처럼 들렸으나,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다.
나나 헬레나나 그것을 알았기에 화내는 기색 하나 없이, 얼른 답을 내 놓으라 재촉했다.
그저 앤더슨이 무슨 소리를 할까 궁금했다.
“ 어째서요? ”
“ 공작께서는 대공만이 소중하실 뿐, 자기 명예에 아무런 가치도 두지 않으시지 않습니까? ”
나만이 소중하다.
듣는 당사자 입장에서는 얼굴이 화끈거릴 만큼 낯 뜨겁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정곡을 찔린 것 같아 숨이 턱 막히기도 했다.
헬레나를 정확히 꿰뚫는 말이었던 탓이다.
하지만. 정작 헬레나는 화를 내거나 움찔거리기는커녕, 부드럽게 웃을 뿐이었다.
“ 정확하시네요. 제 소문이 먼 제국 땅까지 크게 울려 퍼진 모양이에요. ”
“ 유감스럽지만… 그렇습니다. ”
“ 어머. 자작께서 죄송하실 것이 뭐가 있나요.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 그 생각을 듣고 싶은데요? ”
헬레나가 잠시 다른 방향으로 빠질 뻔한 대화를 억지로 되돌리자, 앤더슨 또한 그에 동의했다.
“ 희생을 내지 않는 것이 가장 최선이겠습니다만… 결국 전쟁이 터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을 겁니다. 더구나, 신께서 직접 계시를 내렸다 한들 그대로 이루어지지라는 법도 없는 것이 이 세상이니까요. ”
“ 네. 그렇긴 하죠. ”
개입을 하고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는 하지만, 그것보다 더 강하게 손을 댈 수는 없을 노릇이다.
그것을 알기에 앤더슨의 말 한마디가 더욱 와 닿는 느낌이었다.
“ 그래서… 전쟁이 터질 경우, 긴밀하게 정보 공유를 통해 그 전황을 유도하고자 합니다. ”
“ 그건 아주 고마운 말씀이네요. 하지만 자작께 그만한 정보를 알 수 있을 만한 권한이 주어질까요? ”
“ 황태자께서 도와주시면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이미 재가도 받은 일입니다. ”
와.
헬레나는 황태자라는 이름이 나오자마자 손뼉을 탁 치며 놀라워했다.
나 또한 놀랍기는 마찬가지라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자작이라고는 하나 무역도시를 다스리기에 여러 군데 끈을 댈 수 있다고는 생각했는데, 설마 황자까지 닿아 있을 줄이야.
“ 놀랍네요. 그… 황태자와는 제법 친밀하신 사이인가요? ”
“ 자세한 사정은 말하기 복잡하기에 생략하겠습니다만… 예. 맞습니다. ”
“ 흐음. 그 말씀이 사실이라면 정보 면에서는 크게 부족함이 없겠군요. 자작께서 건네주시는 정보에 맞춰 군대를 움직이면 되겠네요. ”
치도살인지계. 나는 순간 사극에서 보았던 옛 고사를 떠올리며 입을 꾹 다물었다.
헬레나의 보복이 두려워 이렇게 찾아온 것도, 그로 인해 찾아올 지도 모를 혼란을 막고자 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갔다.
그러나, 그 뿐만이 아니라는 것이 지금 대화로 확실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가장 큰 명분을 해결하는 김에, 그들을 압박하는 세를 줄이고 우위에 서겠다는 것이리라.
더해, 가능하다면 전쟁을 일으킨 황제까지 치워버릴 속셈이 아닐까.
지금 2황자를 높게 사는 황제가 그의 입장에서 반갑지 않을 테니.
나는 속으로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여전히 딱딱하기 그지없는 앤더슨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가 매국을 하던 말던 우리 입장에서는 상관없지만, 저도 모르게 식은땀이 흐르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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