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4화 〉 밑준비 #3
* * *
“ 벗으라고…? ”
벗고 있는 와중에 벗으라는 소리를 들으니 황당했지만, 굶주림 탓에 독이 오른 눈빛을 보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먹을거리를 줬다 뺏으면 화가 나는 것과 비슷해 보였다.
그저… 어차피 씻을 생각이었기에 다 벗는다 한들 무슨 상관일까.
나는 며칠 동안 문 앞을 스쳐갈 하인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마지막으로 한 마디 했다.
“ 좋아. 일단 약부터 먹자. ”
피임은 중요하다.
특히 지금같이 큰 일이 터질지 모르는 시기에는 더더욱.
그래서 급히 준비를 다 마치자 기다렸다는 듯 내게 덤벼들었다.
나흘을 넘어 닷새 내리 교성이 끊이질 않았다.
식사는 하인들이 눈치껏 챙겨줘서 괜찮았으나, 시트나 이불이 한껏 물을 먹은 탓에 몹시 무거워졌다.
더구나 지독한 냄새까지 덤으로.
“ 으윽…! ”
우두둑!
워낙 미쳐 날뛴 탓에 근육이 비명을 질러댔다.
번쩍 들기도 했고, 세운 채로 벽에 밀어붙이기도 했으니 그럴 만도 하지.
덕분에 저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려질 만큼 아팠다.
그럼에도 은연중에 쌓였던 욕구와 불안을 전부 토해내니 참 개운했다.
몸이 피곤하고 머리가 몽롱했음에도.
나는 곧 이불 빨래를 하며 속닥거릴 하인들을 떠올리며, 홀로 발코니로 나왔다.
들어 본 적은 없지만 참 민망하고 부끄러운 말들이 자주 오갈 것이 분명해 보였다.
다 스스로 저지른 일이니 어쩔 수 없다고는 하나, 맑은 머리로 생각해보니 새삼 부끄러웠다.
더러운 몸도 씻어낸 참이라 더할 나위 없이 쾌적하긴 한데, 그 탓에 칼튼 백작의 입에서 캐낸 정보가 떠올랐다.
마치 현실도피는 그만하고 얼른 현실을 보라는 듯 아주 선명히 떠올랐다.
개처럼 헥헥 소리를 내며 침까지 흘리며 답하던 남자의 모습을.
“ 쯧. ”
신이라.
나는 그 날, 탁자 하나를 둘러싸고 모여 있던 신들의 면면을 떠올리며 혀를 찼다.
가만히 있던 인간들이 갑자기 왜 뻘짓을 하나 했더니, 그게 전부 예언 때문이었을 줄이야.
반강제로 휘말린 입장에서 보면 한숨만 나올 노릇이다.
내 목적은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무난하게 이루겠지만, 그 무난함이 보기 지루했던 탓인가.
한 고비 넘겼으니 장난질 좀 쳐보겠답시고 전쟁을 부추길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치들 입장에서는 선을 지킨 셈이겠으나 말려든 입장에서 보면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래도 예언 같이 제법 직접적으로 개입을 한 이상 더 큰 놈이 오지는 않을 듯싶다.
자세한 규칙까지는 잘 모르나 개입이 까다로운 절차를 걸쳐 이루어지니까.
“ 주인님. 차 가져 왔어요. ”
일단 이번만 막자는 생각을 하며 의지를 다지던 중, 헬레나가 차 세트가 놓인 트레이를 들고 왔다.
아직 침대 위에서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듯, 나를 주인님이라고 부르면서.
“ 고마워. 같이 마시자. ”
“ …응. ”
달그락. 헬레나는 수줍게 대답하면서도, 기다렸다는 듯 내 옆에 앉아 찻주전자를 들었다.
때때로 요리도 만들고 차도 우리다 보니 몸짓 하나하나에서 익숙함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헬레나의 몸에서 풍기는 짙은 냄새도 사라졌고, 옷도 깔끔한 것으로 갈아입었다.
밤을 위해 만들어 준 얇은 것 중 하나를 입고 있어 군침 넘어갈 모습임에는 변함없었다.
분명 기절할 정도로 살을 섞었음에도 움찔할 만큼.
“ 둘은 아직도 자고 있나봐. ”
“ 네. 푹 잠들어 있어요. 얼굴도 풀어져 있는 것이 참 만족스러웠나 봐요. ”
다만, 서서히 피어오르기 시작한 욕구는 향긋한 차향 앞에서 허리가 꺾이고 말았다.
아직 움직일 만 하기는 해도 더 이상 했다가는 정말 쓰러질 지도 모를 일이라 참 다행이다.
“ 좋았다니 다행이네. 힘쓴 보람이 있어. ”
나도 사람이라 여자 셋을 쓰러뜨렸다는 것이 내심 만족스럽기 그지없었다.
물론 그 중 한 사람은 언제 그랬냐는 듯 내 옆 앉아 실없이 웃고 있지만, 그것마저 좋았다.
살면서 숨 돌릴 틈도 있어야지.
헬레나는 내 말에 얼굴을 붉히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다, 차 한 잔을 더 내밀었다.
“ 참. 저녁은 어떻게 할까? 점심은 이미 때가 늦었으니까 어쩔 수 없고. ”
“ 글쎄. 일단 시간을 고려해서 너무 무겁게 먹는 건 피하고, 부담이 안 가면서 배가 찰만하게……. ”
다행히 덥다 한들 30도도 채 안 되는 대륙이라 여름이 와도 크게 덥다고는 못 느끼지만, 점점 따뜻해지는 공기를 몸으로 느낄 정도는 되었다.
그래서 겨울처럼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음식은 피하고 싶었다.
아무래도 뜨거운 것이 당기는 시기가 아니니까.
“ 어…? ”
무난한 대화를 주고받던 중, 헬레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 발 먼저 발코니를 떴다.
순간 화장실에 가고 싶어 서두르는 것으로 착각했으나, 곧 헬레나가 방문 쪽으로 급히 걸음을 옮긴 이유를 알게 되었다.
방으로 다가오는 인기척이 바로 그 이유였다.
“ 공작님, 바쁘신 중에 실례합니다. 급히 전해드릴 소식이 있어, 이렇게 무례를 범하게 된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
옷매무새를 가다금고 문 앞에 서자, 곧 다급하면서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머리가 희는 등 점점 노인 티가 나는 앤디였다.
“ 무슨 일이에요? ”
“ 공작님께서 전에 명령하신 곳으로부터 소식이 왔습니다. 여기……. ”
헬레나가 기다렸다는 듯 문을 열어젖히자, 앤디 또한 이때다 싶어 품속에 넣어두었던 편지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하얀 편지봉투를 봉한 붉은 밀랍에 본 적 없는 인장이 찍혀 있었다.
귀족이나 왕실의 문양은 아니었으니, 아마 상인 쪽이 아닐까 싶다.
“ 읍…! ”
문득, 한껏 긴장한 표정으로 편지를 넘긴 앤디가 저도 모르게 헉 소리를 냈다.
헬레나는 편지를 뜯어보고 읽느라 그 모습을 보지 못했지만, 한가했던 나는 그 변화를 아주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사람이라면 본능적으로 악취를 맡을 때 인상이 찌푸려지고는 하는데, 지금 앤디의 표정이 딱 그랬다.
그에, 나는 내심 민망하다는 생각을 하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 크, 크흠. 미안해요. 또 폐를 끼치게 생겨서……. ”
“ 예? 아, 아닙니다. 부부 사이가 견고하다는 건 그만큼 공작가가 안정되었다는 뜻이지요. 저로서는 참 다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
앤디는 아차 싶었는지 급히 표정을 수습하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표정 변화가 워낙 갑작스러운 탓에 자기감정을 숨기는 것이 아닐까 착각할 법 했지만, 목소리가 시종일관 부드러웠다.
즉, 지금 말한 이야기는 앤디의 거짓 없는 진심이라는 뜻이었다.
“ 그러시다면 저로서도 다행이고요. ”
“ 예, 예에. 아무튼 저는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참, 식사는 또 방으로 가져다 드릴까요? ”
“ 아뇨. 식당으로 가서 먹겠습니다. ” “ 알겠습니다. ”
나는 급히 고개 숙인 뒤 떠나가는 앤디의 등을 바라보다, 헬레나가 손에 쥔 편지지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무슨 내용인가 싶어 유심히 들여다보니 누군가 이쪽으로 오겠다는 내용이었다.
귀족, 상인 등 때때로 우리 저택을 찾아오는 이들이 드물지 않으니당연히 오겠다는 내용 자체가 놀랍지는 않다.
그럼에도,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편지를 보낸 이가 다름 아닌 제국의 귀족이었던 탓에.
“ 앤더슨 클로스…? 그 항구도시에서 만났던 귀족? ”
“ 응. 지온의 소식을 듣자마자 곧바로 이 남자에게 편지를 보냈어. 딱 봐도 낚여달라는 듯이 말을 했었잖아. ”
그랬었지. 그날 밤 저녁식사 자리에서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던 것을 아직도 기억은 하고 있었다.
요 사이 워낙 정신이 없었던 탓에 잠시 기억 한 구석에 묻어두었지만, 잊지는 않았다.
“ 그랬었지. 나중에 만날 수도 있다는 투로 말했었는데… 그게 마음에 걸린 거야? ”
“ 정말로 예언을 받은 건지, 아니면 단순히 돌아버린 건지는 몰라도… 제국 황제가 전쟁을 염두에 두고 있는 건 확실하잖아. 당연히 제국 귀족인 그 남자도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을 거고. 그래서 이참에 속내를 캐내보고 싶어. ”
“ 그래. 슬슬 물어볼 때가 된 것 같기도 해. ”
언젠가 만나자는 건 꼭 먼 훗날에 만나자는 뜻과 같지는 않다.
그러니 내일, 혹은 몇 달 지난 지금 만나자 해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아마 편지를 보낸 남자도 같은 생각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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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국의 바닷바람도 별 반 다르지는 않군.
앤더슨은 바르칸 백작령으로 향하는 선박 갑판에 오른 채, 바람을 쐬며 한숨을 내쉬었다.
본래 영지를 지키는 귀족으로서 바깥에 나설 일이 잘 없지만, 필요할 때는 직접 나서곤 했다.
더구나, 그 영지도 장남이 지키고 있으니 큰 걱정은 없었다.
영지 살림을 관리하는 실무진이 그대로 남아 있으며, 고작 하인 두 셋 정도만 데리고 왔을 뿐이었던 덕이다.
“ 자작님. 식사 준비가 곧 된다고 합니다. ”
현대에 있는 호화 여객선 정도는 아니더라도 충분히 규모가 큰 상선이기에 그 위용이 남달랐다.
더구나 가끔 배로 여행하는 돈 많은 졸부나 귀족들을 위해 내부도 그럴듯하게 꾸며 두었으며, 서비스도 높은 편이었다.
그러니 식사 또한 따로 준비하는 이들이 있어, 앤더슨의 뒤를 따라 온 하인들이 따로 준비할 필요가 없었다.
지금처럼 식사 준비가 되면 그 소식을 알리러 오면 될 뿐이었다.
“ 음. 가도록 하지. ”
앤더슨은 하인의 말을 들은 뒤 곧장 식당으로 향했다.
넓고 긴 테이블 곳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웃음꽃을 피우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 전체적으로 밝은 분위기였다.
단순히 대화를 즐기고 싶은 사람들.
외로움을 잊고자 덧없는 만남을 꿈꾸는 사람들부터 간을 보는 이들까지.
앤더슨은 다양한 인간군상을 훑으며, 그들의 대화에 적당히 귀를 기울였다.
그에게 있어 이 떠들썩함은 식사 자리를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조미료와 같았기 때문이다.
─참, 소식 들으셨습니까? 최근 각 영지에서 곡식 매매량이 조금씩 늘고 있습니다.
─예에. 덕분에 때 아닌 물량 확보에 곤란을 겪고 있지요. 미리 저장해 둔 곡식을 얼마나 파느냐로 고민이 많습니다. 아직 수확철이 아니니만큼 정도를 조절해야 하니까요.
─참 아름다운 목걸이로군요. 어디서 구입하셨습니까?
─후후. 원석만 따로 구한 다음, 아는 세공사에게 부탁해서 특별히 만든 제품이에요. 마음에 드셨나봐요?
대화는 나누는 것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지만, 유난히 귀에 거슬리는 것들이 더러 있었다.
제국의 움직임을 거론하는 상인들이 바로 그랬다.
그저, 움직임이 대대적인 이상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무역도시를 운영하는 앤더슨은 그를 잘 알았기에 굳이 변장을 하고 이 배에 올랐다.
제국의 도시 중 하나를 다스리는 수장으로서 제법 얼굴이 알려진 탓이었다.
특히 제국에서 출발한 배 안이라면 더더욱.
“ 잘 먹었소. ”
앤더슨은 제법 잘 구운 스테이크 접시를 깨끗이 비운 뒤, 곧장 자기 방으로 향했다.
갑판에서 시원한 바람을 충분히 쐬어 머리를 맑게 했으니, 다시 한 번 앞으로 벌어질 일을 더듬어보기 위함이었다.
침대 하나에 테이블 하나. 의자가 여럿. 그 외에도 서랍 등 정말 필요한 가구만이 놓인 방이다.
앤더슨은 그곳 침대 밑에 놓아두었던 가방을 꺼내, 안에 고이 모셔두었던 서류 한 장을 꺼내들었다.
정확히는 서류가 아니라 현 상황을 정리한 요약 보고서와 같은 것이었지만, 아무튼.
“ 음……. ”
어느 날, 문득 황제의 꿈을 통해 신탁이 내려왔다.
제국의 입장에서 보면 신의 뜻을 황제가 섬긴 셈이니 제법 명예로운 일이라 할 수 있으나, 꼭 그렇지만도 않은 이들이 있었다.
현재 앤더슨을 포함한 온건파들의 뜻이 그랬다.
물론 황제를 위시로 하는 강경파의 세력이 워낙 강한 탓에 제대로 된 반대를 표할 수는 없을 노릇이었다.
그랬다가는 전쟁을 치르기 전에 자신이 먼저 매국행위를 했다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죽을 판이었으니까.
그렇다면, 신의 뜻을 핑계 삼았을 뿐인가.
그건 또 아니라고 자신 있게 답할 수 있었다.
과거 신의 뜻을 받든 이들은 황제 이외에도 있었고, 신을 모시는 것으로 이름 높은 교국의 사람이 아니더라도 예언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니 황제의 말이 거짓일 가능성은 낮았다.
그러나, 신의 예언이라 해서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지라는 법은 없었다.
냉정한 눈을 가진 자들은 신의 말씀이 예언이 아니라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려는 의도임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실패도 있었다.
신의 개입이 절대적이지는 않다는 뜻이다.
신이라.
앤더슨은 얼굴 한 번 본 적 없고, 앞으로도 볼 일 없을 신의 얼굴을 떠올리며 한숨 쉬었다.
대륙의 뜻을 하나로 모으고자 전쟁을 일으키면 크고 작은 모든 나라와 부딪칠 터인데,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피가 흐를지 상상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제국이 제국답지 못한 상황이라면 모를까, 그것도 아닐 텐데 굳이 전쟁이라.
물론 제국의 방대한 영토는 전쟁을 통해 마련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으나, 지금은 구태여 욕심을 부릴 필요가 없었었다.
과거와 상황이 많이 다르기도 하고, 국력은 여전히 강성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 신의 말에 따라 전쟁이라.
앤더슨, 그리고 앤더슨이 몸 담은 파벌로서는 몹시 불만스럽고, 불안한 상황이다.
심지어 그와 뜻을 함께 하는 주인은 황제에게 잠시 온건적인 주장을 말하다, 굳건했던 황위 계승의 자격마저 위태로운 꼴이 되었다.
더해, 그 반대급부로 황제와 뜻을 함께하는 2황자가 총애를 받고 있으니…….
“ 위아래로 참 곤란하기 짝이 없구나. ”
그러던 차, 돌파구가 될 지도 모를 편지가 도달했다.
잠깐 식사를 대접했던 왕국의 귀족으로부터 은밀하게, 아무도 모르도록.
앤더슨은 그 편지의 내용을 읽고 깊이 고민하다, 결국 만나보자는 결론을 내렸다.
자신의 행위가 진정 매국인지 아닌지는 둘째 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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