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3화 〉 밑준비 #2
* * *
수인국을 지나 엘프의 숲에 들러, 일꾼을 교대하는 마차에 함께 섞여 공작령으로 들어왔다.
갈 때도 몰래 나갔으니 올 때도 몰래 들어오는 편이 좋았기 때문이다.
집에 있어야 할 사람이 갑자기 바깥에서 들어왔다는 소식을 접하면 누구라도 의심이 들기 마련이다.
특히 그 의심을 품은 것이 혹시 있을지 모를 세작들이라면 뿌리까지 캐내려 들 테고, 그랬다가는 시끄러운 소란이 생길 수도 있다.
그것은 피곤한 일정을 마치고 겨우 집에 도착한 나나 이브에게 있어 썩 반갑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도 엘프 마을에 머무는 며칠 동안 약탕에 몸을 담그며 피로를 풀고, 길게 자란 머리칼도 깎은 덕일까.
크라우저 공작령의 성문을 넘을 때에도 머리가 맑고 개운한 느낌이었다.
“ 허억! 대공님…! ”
이브를 끌어안고 몰래 담을 넘어 뒷문을 통해 저택 안으로 들어오자, 하인 하나가 깜짝 놀라 헉 소리를 냈다.
몇 달 동안 사라진 인간이 갑자기 나타났으니 놀랄 만도 했다.
그 탓에 이브의 뺨이 붉어졌지만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저 부끄러울 뿐이지.
“ 그동안 별 탈 없었죠? ”
“ 예, 예…! 저야 별 일 없었습니다만……. ”
“ 그러면 다행이네요. 헬레나는 위층에 있나요? ” “ …예, 예에! 집무실에 계실 겁니다. ”
“ 고마워요. 제가 마음이 좀 급해서 그러니 정식 인사는 나중에 할게요. ”
나는 꾸벅 고개를 숙인 하인을 뒤로하며 곧장 집무실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그 과정에서 처음 만난 하인 외에 몇몇 사람과 마주쳤기에 가볍게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하나같이 깜짝 놀라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약간 재미있었다.
“ 지온…! ”
덜컹.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려던 순간, 헬레나가 먼저 눈물을 글썽이며 밖으로 나왔다.
아마 바깥이 소란스러웠을 때부터 내가 왔음을 알아챈 듯싶었다.
헬레나는 그게 가능한 여자였다.
“ 그래. 다녀왔어. ”
내가 이브를 조심스레 내려놓자, 헬레나가 기다렸다는 듯 품에 안겨들었다.
아마 문을 열어젖히자마자 안겨 들 생각이었겠지만, 내가 이브를 안고 있는 탓에 잠깐 주춤하는 기색이 보였었다.
그래서 재빨리 이브를 내려놓았다.
나는 헬레나를 안은 채 천천히 집무실 안으로 발을 들였고, 소파 근처에 서 있는 엘렌을 바라보며 웃었다.
초조한 듯이 나와 헬레나를 번갈아 쳐다보는 것을 보니, 어지간히 안기고 싶은 것을 참는 모양이었다.
“ 자, 엘렌도 이리 와. ”
헬레나가 좀처럼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자, 내가 먼저 한 쪽 품을 열어 엘렌을 맞았다.
아마 오늘부터 짧으면 하루, 길면 며칠 이상을 붙어 있으려 할 테니 이러는 것이 옳았다.
마냥 헬레나가 떨어지길 기다렸다간 애간장이 타다 재가 될 것만 같았으니까.
“ 보고 싶었어요……. ”
“ 나도 참 보고 싶었어. ”
옷 너머로 느껴지는 살결이나 피부에서 피어오르는 향이 대체 몇 달 만일까.
나는 두 여자를 품에 안으며 자연스레 끓어오르는 흥분을 차분히 가라앉히며 소파에 엉덩이를 붙였다.
왼쪽을 헬레나, 오른쪽을 엘렌이 차지한 탓에 이브 홀로 소외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러나 이브는 다 이해한다는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소리 없이 내 맞은편에 자리했다.
그에, 두 여자는 기다렸다는 듯 내 품에 얼굴을 묻은 채 몹시 숨을 거칠게 들이 마시기 시작했다.
마치 개가 꼼꼼히 냄새를 맡는 것만 같아 약간 부끄럽기도 했다.
“ 참! 다친 곳은? 다친 곳은 없어? 소식은 세작들을 보내서 간간히 듣고는 있었는데, 자세한 건 알 수가 없어서……. ”
헬레나는 한동안 냄새를 맡다, 아차 싶었는지 고개를 홱 들며 다급한 투로 물었다.
더해, 자연스럽게 옷 안으로 손을 넣어 살결을 더듬기 시작했다.
걱정해주는 것은 참 고맙고 기쁘지만, 움직임이 워낙 매끄러운 탓에 쓸데없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 세작? 세작까지 보냈었어? ”
“ 응. 마냥 손 놓고 기다리기는 싫어서 몰래 보냈었어. 그리고, 만에 하나 지온이 다치면 나도 그만한 대처를 해야 하니까……. ”
나는 헬레나가 세작을 보냈다는 사실에 놀라워하며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혹여 내가 크게 다쳤다는 소식이 전해진 순간 어떻게 될 까를 생각하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평소 잘 드러날 일이 없기는 하나, 헬레나의 과격함이 어디 가는 것이 아니었으니.
“ 괜찮아. 이브도 같이 있었으니까 위험하지는 않았어. ” “ 정말? ”
“ 정말이지. 그건 오늘 밤에 천천히 확인시켜 줄 테니까, 이제 그만 걱정해도 돼. ”
밤 이야기를 꺼내자 헬레나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기대감에 반짝이는 눈빛이 아니었다.
보통 하루가 멀다 하고 몸을 섞던 사람이 오래 떨어져 있다 오면 사뭇 다르게 반응할 텐데, 뭔가 묘했다.
“ 이브는 잠시 여기 남고, 지온은 방에 가서 기다려 줄래? 곧 방으로 넘어갈 테니까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않을게. ”
아. 나는 이브만 남으라는 말을 듣고 눈이 트이는 것을 느꼈다.
둘이 떨어져 있는 동안 이브 홀로 나와 붙어 있었으니여러모로 묻고 싶은 것이 많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 씻으면서 기다리고 있을게. ”
.
“ 몇 번 했어? ”
탁.
헬레나는 직접 끓인 허브티를 이브 앞으로 내밀며 곧장 본론에 들어갔다.
워낙 질문이 날카로운 탓에 코에 스며드는 청량한 향마저 한껏 날이 선 비수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이브는 두려워하는 기색 하나 없이 고마움을 표한 뒤, 찻잔을 들며 입술을 뗐다.
약간 긴장하기는 했으나 겉으로 드러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던 덕이다.
“ 저, 그게… 두 번이요. ”
그저, 질문의 내용이 노골적이었던 탓에 쑥스러워하는 기색으로 답했다.
“ 두 번? 그 긴 몇 달 동안 고작 두 번밖에 안 했어? ”
앞뒤가 전부 잘린 말이었음에도 원하는 답을 내놓는 이브를 바라보며, 헬레나가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몸을 섞은 수가 어느 정도 되었다면 적당히 질투하고 넘어갔을 테지만, 적어도 너무 적었던 탓이다.
더구나 엘렌도 그리 생각하기는 마찬가지였기에, 헬레나의 옆에 앉은 채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워했다.
“ 네. 상황이 제법 급박하게 돌아가서 그런지 그럴 여유가 없었어요. 특히 대공님은 그쪽에서도 워낙 바쁘셨거든요. ”
“ 그쪽이라면 서인족 진영이지? 조금 자세히 말해 봐. 세작들은 깊이 침투할 수가 없어 지온의 무사 여부나 상황만 보냈었거든. ”
하긴, 근처까지 왔으면 지온이나 서인족이 무슨 반응이라도 보였겠지.
이브는 세작을 보냈음에도 눈치 챈 낌새 하나 보이지 않았던 지온을 떠올리며, 천천히 생각을 정리한 뒤 입을 열었다.
“ 서인족은 작고 약하지만 민첩하기는 했어요. 대공님은 그 장점을 살리는 기술을 가르치시느라 하루하루를 바삐 보내셨어요. 맨몸으로 싸우는 방법이나, 단검술과 같은 거요. ”
“ 기술을 가르쳤어? 보고를 받아 대략적인 성향도 알지만, 대체 얼마나 약했으면……. ”
본래 인연도 없는 남의 나라 백성에게 기술을 가르쳤다는 소식을 들으면 화가 날 만도 했으나, 헬레나는 그들을 불쌍하게 여길 뿐이었다.
지온이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면 그게 무조건 옳다는 광기 어린 믿음이 바탕에 깔려 있었기에.
후우.
이브는 내심 한숨 돌리며 안도한 뒤, 조금 더 여유가 느껴지는 기색을 띠었다.
“ 네. 제 입으로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많이 약했었어요. 그래도 워낙 독하신 분들이라 밤낮도 안 가리고 계속 훈련을 하시더라고요. 그 탓에 분위기도 워낙 날이 서 있었고요. 결국 모두 노력하신 만큼 결실을 거두시긴 했지만, 참 처절했었어요. ”
“ …그래. 분위기가 그랬었다면 어쩔 수 없겠지. ”
아무리 지온에게 눈이 먼 헬레나라 하더라도, 땀과 피가 튀고 고함이 난무하는 곳에서 몸을 섞는다는 생각을 하기 어려웠다.
더구나 이브가 말하기로는 생활 대부분을 지하실에서 했다고 하니, 더욱 꺼려지기도 했다.
차라리 밖이라면 모를까, 음습한 지하실은 꺼림칙했다.
깨끗하고 말고를 떠나서.
“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너도 고생 많았어. 다치지 않고 돌아와 줘서 고마워. ”
먹음직스러운 식사를 두고 먹지 못하는 것 보다, 강제로 참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차라리 나았다.
헬레나는 그리 생각하며, 날카로운 눈매를 풀고 안쓰럽다는 듯 이브를 응시했다.
이브는 그를 아는지 모르는지, 약간 주눅이 든 기색을 띤 채 짧게 감사를 표했다.
“ 아! 여기, 다음 왕위 계승자로부터 받은 계약서에요. ”
조금 미적지근해진 차를 반쯤 비워냈을 즈음. 품 안을 뒤지던 이브가 종이 한 장을 꺼내 테이블 위로 내밀었다.
지온이 쓰고 스케빈이 서명과 인장을 찍은, 중립을 표명하는 계약서였다.
이것 하나 때문에 그 고생을 하다니.
헬레나는 지온의 노력과 고생으로 이루어진 계약서를 밉살스럽다는 듯이 째려보다, 숨을 길게 토해내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분명 왕국이, 더 나아가 공작가가 필요로 하는 거대한 명분의 족쇄를 얻은 것이 영 기쁘지만은 않았던 탓에.
“ 이 종이 한 장 때문에 참……. ”
“ 그래도 대공님께서 직접 나서신 덕에 일이 잘 풀려서 다행이에요. 수인국까지 나서면 수습에 시간이 걸리잖아요. ”
엘렌이 헬레나의 곁에 앉아 물끄러미 계약서를 바라보다 한 마디 하자, 헬레나도 일리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제국과 왕국의 국력 차이가 명백해 일반적인 경우라면 이기기 어렵겠지만, 이들에게는 아니었다.
만에 하나 수틀리는 일이 터지는 경우엔 숨겨둔 패를 꺼내 깔끔히 정리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물론, 지온은 전쟁이 터지더라도 최대한 엘렌이나 이브의 능력을 온전히 드러낼 생각은 없었다.
두 여자가 힘을 써서 희생을 막는 것보다, 그 후에 찾아올지 모를 가열찬 추궁을 피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기에.
“ 그래. 만약 일이 터지면 그 때 생각하기로 하고, 오늘은 이쯤 정리하자. 어차피 답이 나올 것도 아니고. ”
헬레나가 한 발 먼저 계약서를 들고 일어나 금고 쪽으로 다가가자, 엘렌과 이브도 기다렸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본래 일을 해야 할 시간임에도 여느 방탕한 귀족처럼 그를 미루었다.
이유야 뻔했다.
지금 방에서 기다리고 있을 남자의 품에 안겨 쌓였던 욕구를 마음껏 풀어내기 위함이었다.
더구나 다른 때라면 모를까, 몇 달이나 밖에 나갔다 온 집안의 기둥을 맞이하는 일이라 더욱 의욕적이었다.
끼이익.
헬레나는 문을 열기 무섭게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던 하녀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 아마 며칠 동안은 방에서 안 나올 것 같아요. 앤디에게 미리 알려 주세요. ”
“ …예에. 집사에게 전하겠습니다. ”
세상에. 못 나오는 것도 아니고 안 나온다니.
하녀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 기어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였다.
헬레나의 노골적인 명령과 더불어저택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교성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한 매일같이 교성이 울렸고, 문을 지키던 하인들은 저도 모르게 뜨거운 숨을 토해내곤 했다.
그나마 헬레나나 선대 공작이었던 이스가 수면시간을 충분히 보장해 주었기에 다행이지, 밤새 교대로 번을 서야 했다면 뜨거운 숨결이 저택 곳곳에서 새어 나왔겠지.
헬레나와 두 여자는 종종걸음으로 떠나가는 하녀의 등을 바라보다, 급히 방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머리가 빨갛게 익어 생각하는 힘이 사라지고, 거의 본능만 남은 상태였다.
“ 어…? 좀 길어질 줄 알았더니 빨리 끝났네? ”
마침 짐 정리를 마치고, 한 발 먼저 씻을 겸 옷을 벗고 있던 지온이 멍한 눈을 한 채 중얼거렸다.
최소한 씻고 나오는 동안엔 집무실에 있을 줄 예상이 빗나갔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두 여자는 그것을 우연이라 생각하지 않고 다르게 받아들였다.
이쯤 되면 필연이 아닐까라는 생각으로 앞으로 벌어질 일을 합리화했다.
그래. 내심 지온도 기대하는 것이 당연하지.
헬레나와 엘렌은 우연히 같은 생각을 하며, 천천히 상체를 벗은 지온의 곁으로 다가갔다.
“ 벗어. ”
다만 흥분이 너무 지나쳤던 나머지, 헬레나의 입술에서 몹시 거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