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2화 〉 밑준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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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눈치를 보되 가장 약한 놈부터 짓밟자는 생각이 남은 무리들 틈을 떠다니던 중,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 수인국 전토를 휩쓸었다.
어찌어찌 버티기는 했으나 곧 탈락할 것이 뻔해 보였던 서인족이 가장 강한 호인족을 꺾었다는 소식이었다.
한낱 쥐새끼라 불리던 놈들이 호랑이의 목덜미를 물어뜯자남은 종족들도 절로 긴장하며 두려워했다.
개중에는 헛소문이다, 믿을 수가 없다고 코웃음 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 오만했던 머리가 깨지자 언제 그랬냐는 듯 그들을 지지하고 나섰다.
이것이 요 두 달 가량에 걸쳐 나타난 흐름으로, 이 흐름을 탄 서인족은 이제 왕위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 아직까지 끈기 있게 버티는 유우인족 하나만 제끼면 다 끝이었다.
“ 마무리를 목전에 두었을 때 가장 긴장을 해야 합니다. 너무 과도하게 긴장해서 몸이 굳어서는 안 되겠지만……. ”
“ 옳으신 말씀입니다. ”
스케빈은 여유와 긴장이 섞인 기색이 섞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경쟁자들을 떨어뜨리며 자신감과 여유가 붙은 덕에 딱 좋은 긴장 상태를 끌고 가는 중이다.
그 후에는 별 말 없이 잠깐 조용한 시간이 이어지다, 스케빈이 한 발 먼저 자리를 떴다.
서인족이 강해졌다고는 하나 종잇장 같은 몸은 여전했던 탓에 그에 맞는 계획이 필요했던 탓이다.
마침 스케빈도 제 할 일을 하러 갔으니 나도 제 할 일을 마쳐야겠다 싶어 주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곳에서 고기 냄새가 풀풀 풍기는 돼지고기 직화구이를 만든 다음, 한적한 감옥으로 갔다.
전리품 대신으로 얻은 칼튼이 그곳에 갇혀있었기 때문이다.
제국의 귀족은 죽이기도 뭣하고, 그렇다 해서 고문을 하기 어려웠다.
자칫 아무 연고도 없던 왕국에서 공격 의사가 있다는 명분 아래 무슨 짓을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이는 복면으로 얼굴을 가려 정체를 숨기는 것과 다른 문제였다.
곤란했지만, 기왕 잡아온 놈에게 아무 말도 안 듣고 내보낼 수도 없을 노릇이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끼니를 굶긴다는 비교적 평화로운 고문이었다.
호인족을 사로잡았을 때는 시간이 촉박했던 탓에 칼을 썼으나, 지금은 그 정도로 급하지는 않았기에 가능한 선택이었다.
“ 으, 으으……. ”
철컹. 감옥 안으로 들어서자 몇날 며칠을 굶어 초췌한 제국의 백작, 칼튼 밀러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나를 응시했다.
정확히는 내 손 위에 놓인 접시와 향기로운 냄새를 풍기는 돼지고기 구이에.
“ 겨우 안 죽을 만큼만 먹고 살면 참 불편하겠지요. ”
나는 돼지고기를 홀린 듯 바라보는 놈의 앞에 앉아 보란 듯이 접시를 천천히 좌우로 옮겼다.
칼튼의 시선도 그를 따라 천천히 움직였고, 입에서는 침이 고이는 중이었다.
주린 배에 돼지고기 냄새를 맡게 하니 꼬르륵 소리도 나고, 참 미칠 지경이겠지.
“ 네놈이… 저지른 짓……. ”
맥이 없어 바람 빠진 풍선 같은 몰골에 쉰 목소리까지.
눈을 부릅뜨고 있음에도 안쓰럽기만 할 뿐 무서움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애초에 정상적인 상태로 위협을 해도 크게 무섭지는 않았을 테지만, 이쯤 되면 하찮아 보이는 수준이다.
“ 그렇지요. 내가 저질렀습니다. 그러니 슬슬 이야기하시죠. 아니면, 이 끝도 없는 굶주림을 계속 이어나가실 생각입니까? ”
“ 정녕… 이러고도… 무사 할 줄, 아느냐…? ”
“ 제가 무사하고 말고를 따지기 전에 죽을 것 같은데요? 아무튼, 슬슬 편해지는 게 어떻습니까? 보세요. ”
나는 좌우로 옮기던 접시를 칼튼의 코앞에 들이대며 웃었다.
양 팔이 사슬에 묶여있기 때문에 허튼 짓을 할 수도 없는데다, 고기가 코앞에 있으니 죽을 맛이 아닐까 싶다.
킁킁.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존심 높은 모습을 보이던 칼튼이 언제 그랬냐는 듯 코를 킁킁댔다.
냄새를 맡는 모습을 보니 가히 거지가 따로 없었다.
한껏 먼지가 낀 옷이나 날로 피폐해져 가는 정신 상태가 그리 만드는 것 같았다.
“ 엇?! ”
돌연, 가만히 냄새만 맡던 칼튼이 입을 쩍 벌린 채 저 큰 돼지고기를 한 입에 물어뜯으려 덤볐다.
그 속도와 변화가 얼마나 빨랐던지, 여느 야생동물 못지않은 모습이었다. 듣기로는 문관이라고 하던데, 비밀스러운 훈련을 하는가 하는 망상이 떠오를 정도였다.
내가 집안에서, 또 헬레나 밑에서 구르지 않았다면 반응도 못하고 고기를 빼앗겼을 터였다.
하지만, 구르고 굴러서 실력을 키운 것이 현실이었기에 재빨리 접시를 뒤로 뺄 수 있었다.
“ 네, 네노옴…! 고기, 고기를 내 놔아…! ”
“ 아직 답할 생각이 없나 보군요.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그 때는 부디 좋은 답을 기대하지요. ”
칼튼이 발악하는 것을 보니 아직 멀었구나 싶어, 쉰 소리로 소리치는 그를 뒤로했다.
접시에 담긴 구이는 여전히 향기로웠고, 따뜻했다.
그러므로, 남은고기는 나와 이브가 맛있게 먹어치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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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죽지 않을 정도로 물을 주고, 먹을 것을 준 지 얼마나 지났을까.
우인족의 공격 계획과 놈의 회유 등으로 날짜 가는 것도 모르다, 어느새 따뜻한 봄기운이 만연한 날씨가 되었음을 느꼈다.
“ 끝났습니다. ”
그러던 어느 날.
벙커 대용으로 쓰던 지하실에서 벗어나, 땅 위에 지어 둔 집에서 스케빈이 중얼거렸다.
그의 손에는 서명과 종족을 상징하는 인장이 찍힌 서류 한 장이 들려 있었다.
마침내 선별식을 계속할 의지를 꺾은 우인족의 항복의사가 적힌 문서였다.
“ 이겼다! 드디어 이겼어! ”
“ 우리 서인족이, 서인족이…! ”
그 소식을 접하자마자, 우리와 함께 마을회관 같은 곳에 우후죽순 모여 있던 서인족들이 기뻐 소리쳤다.
감격에 겨워 우는 이들도 많았고, 서로 얼싸안으며 기쁨을 나누는 이들도 있었다.
길고 긴 역사에서도 서인족이 왕이 된 경우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
그러다 나와 이브를 보고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였다.
모두 하나같이 감사하다는 말을 입에 담으며 눈을 반짝였다.
이브는 그것이 부담스러웠던지 몸을 배배 꼬다 슬그머니 내 등 뒤로 숨었다.
“ 다 여러분의 악과 깡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승리입니다. 누구의 덕이 아니에요. ”
그들에게 맞는 기술을 가르치고 무기를 가공하도록 몇 마디 내뱉기는 했으나, 독하게 마음먹었기에 이길 수 있었다.
나는 그 점을 몇 번이고 강조하며 고개 숙인 사람들 한 명 한 명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그 탓에 그늘을 잃은 이브가 잠시 허둥대다, 언제 그랬냐는 듯 자세를 바로하고 섰다.
마치, 처음부터 침착했다고 자랑하는 것 마냥.
“ 어쨌든, 이것으로 선별식이 완전히 끝난 셈이군요. 혹여 앙심을 품고 기습을 하는 놈들이 있지는 않겠지요? ”
“ 없을 겁니다. 만약 그랬다가는 범행이 들키는 순간, 그 종족의 반이 숙청당합니다. 또, 다른 종족들이 율법을 존중하지 않았다는 졸렬함을 경멸하며 교류를 끊습니다. 더해, 허튼 짓을 못하도록 감시까지 하지요. 사실상 말라죽는 셈입니다. ”
나는 스케빈의 막힘없는 답에 감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전에도 승자에 대한 예우를 갖추는 덕에 위험하지는 않다는 말을 들었지만, 너무 두루뭉술해서 내심 걱정했었다.
그러나, 그 처우에 대한 확실한 답을 듣자 더 이상 그를 걱정할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다.
“ 축하드립니다. 마음 같아서는 대관식까지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좋은 소식을 들은 김에 바로 돌아가야겠군요. ”
“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돌아가신다니요? 그것도 지금 당장? ”
스케빈이 황당하다는 듯 입을 살짝 벌렸다.
갑자기 내빼겠다는 말을 했으니 놀라는 기색을 띠는 것도 당연했다.
어찌 보면 공로자가 할 짓이 아니기도 할 테니까.
하지만 이 낯선 땅에서 무려 몇 달을 잡혀 있었다.
그것도 추울 때부터 따뜻해 질 때 까지.
물론 더 얻을 것이 있다면 좀 더 머물러야 할 테지만, 칼튼의 입에서 필요한 정보까지 다 캐낸 마당이다.
길게 머무를 이유가 없었다.
“ 스케빈이 이렇게 서운해 하시는 걸 보니 제 마음도 무겁습니다만, 자리를 비운지가 벌써 몇 달입니다. 그 탓에 제 아내의 걱정도 이만저만이 아닐 겁니다. 더구나, 저도 집이 참 그리워서요. ”
고향과 그리움을 언급하자 스케빈의 표정에서 놀라움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차분함이 깃들었다.
크라우저 공작령을 언급하자 여러모로 느낀 바가 많은 모양이었다.
“ …그렇지요. 생각해 보니, 벌써 그만한 시간이 지났다는 것을 깜빡 잊었습니다. ”
“ 이해해 주신 것 같아 감사합니다. 듣기엔 서운하실지 모르겠지만, 객지 생활이 너무 길어서 참 곤란했거든요. ”
풋. 스케빈은 내 농담을 듣자마자 피식 웃으며 심각하게 구겨져 있던 표정을 폈다.
기왕 떠날 때는 서로 웃는 얼굴로 마주하는 것이 좋으니, 나로서는 참 반갑고 고마운 일이었다.
“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지요. 지금 당장 떠나실 겁니까? ”
“ 예. 채비는 미리 다 마쳐둔 상태거든요. ”
“ 참 마음도 급하십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요. ”
슥. 스케빈이 먼저 고개를 숙이자, 다른 서인족들도 뜨거운 눈빛을 보내며 고개를 숙였다.
미우나 고우나 치열한 상황을 함께 이겨낸 사람이라 아쉬움이 남다른 모양이었다.
나도 상당히 아쉬우니 오죽할까.
어쨌든, 나와 이브도 그들과 마주하며 고개를 숙였다.
본래 귀족이 넙죽넙죽 고개를 숙이는 일이 잘 없기는 하나, 숙일 때 숙인다 해서 눈치 볼 이유가 없었다.
더구나 내게 고개를 숙이는 작은 남자 또한 곧 왕이 될 테니, 오히려 자연스럽다고 볼 수 있었다.
“ 부디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
“ 감사합니다. 앞으로 하시는 일에 축복이 있기를 기원하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
마지막 인사를 나눈 뒤, 우리는 스케빈이 건네 준 나무 상자를 싼 보자기와, 본래 가지고 왔던 짐을 가지고 말에 올랐다.
그 후 중립을 선언하겠다는 계약서를 고이 품에 모셔둔 것을 확인한 뒤, 가끔 은밀히 연락을 보내겠다는 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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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별식이 끝났다.
그 말은 곧 지온이 돌아온다는 것과 똑같은 뜻이다.
헬레나는 몰래 파견한 세작으로부터 그 소식을 접하자마자 지온 근처를 돌던 연락책을 전부 철수시킬 것을 명령했다.
정확히는 지온이 오는 속도에 맞춰 함께 돌아오라는 명령이었다.
그러는 한편, 돌아올 날을 계산하여 지온을 맞이할 준비를 계획하기도 했다.
“ 끝났어요?! 정말로?! ”
잠시 바깥에 나갔다 온 엘렌은 그 소식을 접하자마자 크게 소리치며 놀라워했다.
누가 보아도 기대감에 부풀어 있음을 알 수 있을 눈빛과 표정을 띤 채, 입꼬리를 파르르 떨기까지 했다.
너무 기뻤던 탓이다.
“ 그래! 드디어 끝났어! ”
평소 차분한 헬레나도 뛸 듯이 기뻐하다 집무실 안에서 허둥대는 모습을 보였다.
기쁨이 생각하는 힘마저 앗아간 나머지 머릿속이 백짓장처럼 하얗게 물들었기 때문이다.
“ 아, 뭐, 뭐부터 하지! 아!일단 몸부터 씻고…! ”
“ …진정하세요. 대공님께서 돌아오시려면 최소 닷새는 넘게 걸리잖아요. 그 동안 천천히 밑 준비를 하면 되지 않을까요? ”
엘렌 또한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으나, 유난히 헬레나가 허둥대는 모습을 접하자 금세 제정신을 차렸다.
자신과 비슷하게 허둥대는 모습을 보며 거울치료를 받은 덕이다.
그렇지! 헬레나는 그 말을 듣고 호흡을 고른 뒤 최대한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엘렌이 말한 대로 벌써부터 허둥댄다 한들 손 쓸 것이 없음을 깨달은 덕이다.
“ 거기! 누구 밖에 있어요?! ”
“ 예. 부르셨습니까. ”
헬레나가 높은 목소리를 내며 바깥사람을 부르자, 기다렸다는 듯 하녀 하나가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
누군가는 교대로 집무실 근처를 지키고 있기에 대답과 반응이 빨랐다.
헬레나는 그런 하녀를 잠시 바라보다 급히 빈 종이 한 장을 집어 들어 무언가를 쓰고는, 봉투에 넣은 뒤 입을 열었다.
“ 이 편지를 앤디에게 전해줘요. ”
“ 알겠습니다. 누구에게 보낼까요? ”
“ 앤더슨 클로스라는 남자에게요. 아마 앤디에게 말하면 알 거에요. ”
앤더슨 클로스.
교국으로 가던 중 만난제국의 항구도시 중 하나를 다스리던 귀족이다.
앤디는 헬레나로부터 그 이름을 전해 들어 알지만, 하녀는 그를 모르기에 얌전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만약 앤더슨이 누구인지 알았다면 하녀의 반응이 사뭇 달랐겠지.
“ 앤더슨? 그 남자는 왜요? ”
하녀가 집무실 문을 닫으며 떠나가자, 엘렌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제국과 물밑에서 껄끄러운 관계가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굳이 제국의 귀족에게 연락을 보낸다는 상황을 이해하기 어려웠던 탓이다.
그러나, 그에 답하는 헬레나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그 날, 식사자리에서 건넨 수상쩍은 말 한마디를 풀어내야 할 때가 온 것 같거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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