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1화 〉 킹 메이커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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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튀어! ”
몇 십 대 여섯은 그냥 생각해 봐도 말이 안 되는 일이긴 하다만, 지금만큼은 작전상 후퇴라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정말로 대책 없이 내빼는 것이 아니라 쫓아오는 짐승들을 낚기 위해서니까.
당연히 호인족 무리들은 악에 받쳐 고함을 지르며 쫓아왔으니, 졸지에 쫓고 쫓기는 상황이 되었다.
어떻게 보면 살벌하기 짝이 없는 경찰과 도둑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후욱.
나는 앞쪽에서 자욱이 피어오르는 안개를 바라보며 크게 소리쳤다.
“ 안개 쪽으로 달려요! ”
축이 되는 나무를 중심으로 안개가 피어오르자, 서인족들 또한 망설임 없이 안개 쪽으로 몸을 던졌다.
안개가 다 펼쳐지기 전에 빠져나오지 못하면 잠에 빠지게 되므로 얼른 나와야 했다.
그래서 속도가 더욱 중요한 시점이다.
“ 쫓아라! 안개에 숨어 암습할 태세를 갖추기 전에 죽여라! ”
호인족 대장으로 보이는 놈이 크게 소리쳤다.
말하는 내용이나 표정에 깃든 초조함을 보니 우리가 안개 속에 숨어 있다 기습을 할 것처럼 느끼는 모양이었다.
아주 좋은 오해를 해 줘서 내심 고마웠다.
발치에서 허벅지, 허벅지에서 가슴께까지.
안개는 눈 깜짝할 사이 주변 일대 일부를 삼켜버린 뒤, 처음부터 여기 있었다는 것 마냥 조용히 자리를 지켰다
다행히 나를 비롯한 서인족들은 안개가 다 피어오르기 직전에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뒤쫓아 오는 놈들은 아니었다.
발을 들이면 눈 깜빡할 사이 안개가 온 몸에 스며든 탓에 강제로 눈을 감게 되었다.
“ 멈춰라! ”
그렇게 제법 많은 수의 호랑이들을 바닥에 눕힌 것까지는 좋았으나, 정작 선두에 섰던 우두머리 놈이 멀쩡했다.
안개가 솟아오르는 순간 잽싸게 범위 밖으로 나가는 것을 얼핏 본 것 같은데도.
나는 생각보다 놈의 감이 좋은 편인 것 같다 생각하며, 주머니에서 더크를 꺼내 거꾸로 쥐었다.
반 조금 안 되게 재워버린 것으로 쪽수를 줄였으니 붙어볼 만 했다.
안개를 사이에 두고 있어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것이 아쉬웠다.
“ 이 쥐새끼 놈들! 마법사까지 끌어들였나?! ”
“ 왜? 너희 동네는 마법사도 없나? 배부른 돼지가 눈이 어두운 시골 촌뜨기라니… 참 총체적 난국이로군. ”
깜짝 놀란 탓에 냉정함을 되찾을 기미가 엿보이자, 다시 한 번 도발을 날렸다.
표정은 안 보이지만 크게 외치는 놈의 목소리에서 차분함이 커져가는 것을 느낀 탓이다.
“ 감히… 겁도 없이 호인족을 또 능멸하다니! 네놈은 절대 고이 죽이지 않을 것이다!! ”
놈이 살기등등하게 외친 직후.
놈의 뒤를 이어 죽이겠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호인족들이 기다렸다는 듯 뛰어들었고, 그에 따라 칼과 주먹을 휘둘렀다.
애초부터 그럴 생각이었으니 새삼스러울 것은 없었으나, 저도 모르게 약간 긴장이 되었다.
여태껏 겪어왔던 일들처럼 지금 또한 실전이었던 탓이다.
다만, 그로부터 몇 분 정도가 흘렀을까.
체감상 30분은 지난 것 같지만 정확히는 모르겠다.
그저 찰나 같으면서도 제법 긴 시간이 흘렀다는 것만큼은 확실해 보였다.
“ 커헉! ”
그저 어지러이 뒤엉켜 싸우는 개싸움의 마지막을 알리듯, 호인족 대표 놈이 피를 토해내며 무릎을 꿇었다.
그 주위에는 주로 발목 위쪽이 제법 깊게 베인 놈들이 고통을 호소하며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덩치 작은 서인족을 잡기 위해 발차기를 하다, 오히려 서인족이 휘두른 칼에 맞은 결과였다.
물론 이 참상을 만든 서인족들도 멀쩡하지는 않았다.
군데군데 타박상을 입은 것은 기본이며, 팔과 갈비뼈가 부러진 이들도 드문드문 엿보였다.
그럼에도 고통보다 희열이 더 강한 낯빛을 띠고 있었다.
여태껏 그들을 짓밟아왔던 놈들에게 크게 먹여줬으니 기쁠 만도 했다.
“ 쥐새끼 놈들이 어떻게 이럴 수가……. ”
호인족 놈이 피를 토하면서도 눈을 힘껏 부릅뜨며 놀라워했다.
서인족들의 실력이 몰라보게 늘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더구나 악과 깡까지 더해지니 참 살벌하기 짝이 없었다.
“ 쥐새끼도 이빨이 있으니 싸우지 말란 법은 없지. ”
“ 그러는 네놈은 쥐새끼가 아니지 않나! 비겁하게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지 말고, 얼른 정체를 밝혀라! ”
아니, 이놈은 왜 졌으면서 이렇게 당당한 걸까?
나는 그것이 너무 궁금해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끔 가다 이해 못할 사람을 만나는 경우가 있긴 했는데, 지금이 딱 그랬다.
그래도 이해 못할 것을 억지로 이해하려 하면 머리만 아플 뿐이라, 근처에 있던 서인족을 불러 단검 하나를 빌렸다.
“ 예로부터 말 안 듣는 놈에게는 이게 약이라던데……. ”
나는 몽둥이 대신 칼날이라는 것에 약간 미안함을 느끼며, 날 끝을 놈의 허벅지 깊숙이 떨어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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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가장 높으신 분이 하나의 계시를 들었다고 했다.
이 대륙의 뜻을 하나로 모으라는 계시였다.
처음 그 말을 들은 귀족들은 황제가 미친 것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눈빛에 담긴 총기는 여전했다.
물론 욕망에 의해 어느 정도 탁해졌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으나 광기로 치닫게 될 정도는 아니었다.
더구나, 간혹 누군가의 입을 통해 계시를 내려주는 것은 이 대륙에서 상식이었다.
그저 이번에는 그 대상이 제국의 가장 꼭대기였을 뿐.
“ 후우……. ”
주인의 밀명을 받아 온 제국의 백작, 칼튼 밀러는 한숨을 내쉬며 창문 밖 초원을 응시했다.
희고 커다란 천막이 모여 마을을 이루는 호인족의 생활에도 제법 익숙해졌건만, 마음만큼은 여전히 초조했다.
대륙일통을 위해서는 우선 동맹이 필요했다.
제국은 그 동맹 대상으로 가장 옆에 있는 수인국을 택했고, 그를 위한 실무자로서 칼튼을 파견했다.
거기까지는 좋았으나 하필 선별식 시기라는 것이 발목을 잡았다.
─지금은 새 왕을 정하는 선별식이 거행되는 중이오. 그대가 가져온 안건은 곧 내려갈 내가 처리하기에 무거우니, 훗날 후계가 정해는 대로 논의해 보시오.
본래 이토록 딱 잘라 거절하면 반감을 살 법도 했으나, 이 또한 수인국의 전통임을 칼튼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동맹을 맺고 나머지 국가를 먹어치운 뒤 마지막 목표로 삼으려 했다.
누구에게나 단호하게 말할 수 있는 힘을 최대한 뽑아먹기 위해서.
그러나, 그로 인해 심기가 편치 않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막힘없으리라 생각했던 길 앞에 거대한 벽이 가로막은 탓에 방향을 꺾어야 한다면 누구라도 그럴 터였다.
적어도 칼튼은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 오늘도 걱정이 많으시군. ”
얼른 성과를 내야 할 터인데.
칼튼이 홀로 답답함을 곱씹으며 한탄하던 중, 이제는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익숙한 목소리가 칼튼의 시선을 돌리게 했다.
목소리의 주인이 호인족의 대족장이였으니까.
대족장은 그 직함에 걸맞게 크면서도 날렵한 몸과 인상을 가진 남자였다.
또한 위압감 또한 어느 국가의 왕 못지않았기에, 칼튼은 그를 마주할 때 마다 자연스레 긴장하게 되었다.
대족장이라는 직위와 사람 자체가 가진 힘이 그렇게 만들었다.
“ 서두를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어쩔 수가 없나 봅니다. ”
“ 뭘.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결국 승리는 우리 호인족의 것이 될 터이니. ”
수인국이 가진 긴 역사에서 가장 많은 왕을 배출한 종족이 바로 호인족이다.
대족장의 말 한마디에는 그 역사에 대한 믿음과 자부심이 짙게 배어나오고 있었다.
더해, 호인족은 여러 종족 중에서도 상당히 호전적인 이들이다.
그렇기에 함께 손을 잡고 대륙을 휩쓸어보자는 야망에 뜻을 함께 하기로 했다.
즉, 단순히 재물이 탐이 나서 손을 잡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칼튼 또한 그것을 알기에 왕을 만난 후, 곧장 호인족의 영토로 달려와 거래를 했다.
환심을 사기 위한 사치품부터 군을 강하게 하기 위한 자금이나 물자의 조달 등을 미끼로 성공시킨 거래였다.
그래. 그랬었지.
칼튼은 대족장의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보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 그렇지요. 대족장과 이렇게 이야기를 하니 마음이 참 안정이 되는 것 같습……. ”
칼튼이 겨우 입가에 희미한 웃음꽃을 피우려던 차, 기다렸다는 듯 사방이 술렁였다.
커다란 폭음이나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처럼 요란하지는 않더라도, 혼란스러운 시장바닥 정도는 되었다.
칼튼과 대족장, 두 남자는 무슨 일인가 싶어 밖으로 나섰다.
사람이라면 호기심 때문이라도 소란스러운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 하고, 알아보고 싶다는 마음을 갖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 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토록 소란스럽나?! ”
“ 아, 대족장님! 마침 잘 오셨습니다! 저기를……. ”
대족장이 여럿이 뭉친 무리로 다가가 외치자, 그 중 한 남자가 먼 곳을 가리키며 말꼬리를 흐렸다.
그에 대족장과 그를 뒤따라 온 칼튼의 시선이 자연스레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으로 향했다.
여러 대의 마차. 그리고 그 위에 팔이 묶인 채보란 듯이 처참한 몰골을 하고 있는 호인족의 전사들.
대족장은 그들이 자신의 아들 에릭을 따랐던 이들임을 알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제법 정예라 할 수 있을 이들을 저런 꼴로 마주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탓이다.
더구나, 그 중에는 대족장의 아들 또한 섞여 있었다.
그것도 당당히 선두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여느 패잔병들과 함께 섞인 채 그 누구보다 더 초췌하기 짝이 없는 몰골로.
“ 에릭이…! ”
“ 이럴 수가. 분명 저 남자는 대족장의 아들이었던 걸로…? ”
칼튼이 죄인들의 호송 행렬과 같은 충격적인 광경을 바라보며 떠들던 중, 갑자기 입을 꾹 다물었다.
그 강한 호인족 전사들이 대패했다는 것도 믿기 어려운데, 생전 보도 못한 기묘한 무언가가 시선을 사로잡은 탓이다.
그것은 생전 처음 보는 옷을 입고, 흉악한 얼굴을 가진 인왕상이었다.
지온이 에릭의 무리와 붙었을 때도 조각에 새겨진 번개를 내뿜는 마법을 요긴하게 사용했지만, 이렇게 위협을 할 때도 제법 쓸 만했다.
지온은 호인족 전사들의 반응을 통해 그를 확인할 수 있었다.
호인족들은 가장 앞쪽에 복면을 두른 남녀 한 쌍이 두려웠던 나머지저도 모르게 길을 트고 있었다.
상상도 못한 충격적인 상황과 그 뒤를 따르는 서인족들과 다른 기세를 느낀 결과였다.
끼익.
지온은 두 손에 쥐던 고삐를 잡아당겨 말들을 멈춰 세우곤, 옆에 앉아 있던 스케빈을 향해 눈짓했다.
서인족 대표로서 홀로 압박하라는 뜻이었다.
스케빈도 그를 이해했기에 말없이 마차에서 내려, 멍하니 서 있는 대족장을 향해 걸어갔다.
“ 정말… 반갑습니다. ”
까드득! 스케빈은 서인족을 가장 핍박했던 놈들의 수장 앞에 서자 분통을 견뎌내지 못하고 이를 갈았다.
그것이 억지로 웃는 표정과 어우러지니 제법 살벌한 인상이 만들어졌다.
정말 이놈이 그랬다는 건가. 대족장은 작은 스케빈을 눈이 휘둥그레진 채 내려다보며 말했다.
“ 쥐새끼. 네놈이 저지른 짓이냐? ”
“ 예. 여태껏 우리 서인족을 벌레 취급하며 밟으시기에, 아주 크게 갚아줬습니다. 아마 인왕신의 가호가 함께 한 덕이겠지요. ”
“ 인왕신…? ”
듣도 보도 못한 신의 이름이 나오자 대족장의 눈살이 자연스레 찌푸려졌다.
적어도 수인국이 모시고 귀로 전해들은 신들 중 그런 이름을 가진 신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눈앞에 보이는 해괴한 조각상이 인왕신이라는 존재를 표현하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 그렇습니다. 아무튼, 중요한건 그 점이 아닐 텐데요. ”
스케빈이 살기를 담아 대족장을 째려보는 사이, 지온과 이브는 조용히 마차에서 내려 천막 뒤로 크게 돌아갔다.
대족장의 바로 옆에 서 있는 칼튼이 도망갈 때를 대비해 미리 퇴로를 막으려는 작정이었다.
그래. 중요한 건 따로 있겠지.
대족장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에릭을 한 번 흘겨보더니, 스케빈이 서 있는 아래로 시선을 떨구었다.
“ 그래. 이유야 어찌되었던 네놈이 이겼으니… 그 대가를 치르라는 거냐. 쥐새끼 주제에 제법 대범해졌구나. ”
“ 대는 이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오만한 발톱 아래 쓰러져 간 동족들을 떠올리면 당장 찢어 발겨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죽이지 않고 이렇게 데리고 온 것에 감사하시죠. ”
“ 흥. 쥐새끼에게 질 후계 따위는 필요 없다. 하지만……. ”
패배는 곧 죽음이니, 우리가 뭐라 할 처지도 아니겠지.
대족장은 옆에 선 채 낯빛이 허옇게 질린 남자에게 미안함을 느꼈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라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사지로 들어온 것은 그만한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며, 그 자신감을 시험하려 들다가 부족 전체가 궁지에 몰릴 수도 있다.
대족장은 그럴 가능성을 느꼈기에 한탄하듯 긴 숨을 토해냈다.
“ 그래. 우리 지지를 원하는가? ”
“ 앞으로 제가 왕위에 오르면 껄끄러운 것보단 원만한 것이 좋을 테니까요. ”
“ …쥐새끼가 왕위를 당당히 거론하는 것을 보게 될 줄이야. 참 어처구니가 없군. ”
“ 그 쥐새끼가 호랑이를 잡아먹었으니, 왕위도 곧 손에 쥐게 될 겁니다. ”
“ 한낱 망상이 아니라는 점이 더욱 소름 돋는군. ”
이미 에릭으로부터 항복의사는 받아낸 지 오래다.
스케빈이 그 점을 언급하자, 대족장 또한 그 의견을 받아들이기로 결정을 내렸다.
후보도 꺾인 마당에 선별식을 이어나갈 수도 없었으니까.
“ 좋다. 호인족은 너희 쥐새끼… 서인족을 지지하도록 하마. 대족장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 ”
“ 서인족 대표로서 맹세를 받아들이겠습니다. 이로서 호인족은 서인족의 협력자이자 신하가 된 것이죠. ”
“ 네놈이 끝까지 이겼을 경우에만 해당하는 맹세다. 잊지 말도록. ”
스케빈은 끝까지 자존심을 꺾지 않는 대족장을 보며 사납게 웃은 뒤,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는 칼튼을 바라보며 말했다.
“ 하지만 아직 패배하지도 않았으니 당신네들을 다룰 권리가 있겠죠. 그러니 명령하겠습니다. ”
저기 뒷걸음질 치는 남자를 넘기세요. 그 말을 들은 칼튼의 낯빛이 새하얗게 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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