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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기둥서방이 되었다-138화 (138/192)

〈 138화 〉 킹 메이커 #7

* * *

짙은 한숨이 집무실에 짙게 깔리며, 그렇잖아도 무거웠던 분위기를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자칫 어깨가 짓눌리는 것이 아닐까 싶을 만큼.혹은숙인 고개를 꾹 누르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벌써 한 달이 넘었다니.

헬레나는 책상에 놓인 서류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다시 한 번 짙은 한숨을 토해냈다.

“ 대공님은 무사하신가요? ”

“ 그래. 무사해. 서인족과 거래도 잘 풀린 모양이야. 그러니 선별식을 무사히 마치면 끝이 나지만… 끝이 언제인지 알 수가 없어. ”

엘렌은 애매하게 말꼬리를 흐리는 헬레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다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엘렌 또한 기약 없는 기다림을 하며 제법 애가 닳고 있는 탓이다.

그나마 헬레나가 수인국에 은밀히 세작을 보내 주기적으로 소식을 듣고 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못했다면 말로 표현 못할 만큼 칙칙한 기색을 띠고 다녔을 터였다.

“ 정말 한숨만 나오는 상황이네요. ”

“ 그러게. 마음 같아서는 전부 목을 베어버리면 끝이 날 테지만, 너무 대놓고 설쳤다간 복잡한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

“ 대공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죠. ”

물밑에서 도움을 주어 중립을 이끌어내는 것이 목적이기도 하고, 둘 중 하나는 집을 지켜야 하는 시기다.

헬레나는 그를 잘 알았고 납득도 했지만, 여전히 잔금 같은 미련을 털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엘렌도 마찬가지였기에 헬레나의 말에 공감하며 함께 한숨 쉬었다.

“ 이브, 고 계집애……. ”

한창 우울함과 걱정에 풀이 죽어 있던 중, 문득 헬레나가 눈을 부릅뜨며 중얼거렸다.

여태껏 지온과 떨어져 있던 것에 맞춰져 있던 초점이 옆자리를 지키는 여자에게 향하자, 저도 모르게 질투를 느낀 탓이다.

안전하다 믿고 있으니 질투를 할 여유도 있는 거겠지.

비교적 냉정한 엘렌은 깍지 낀 손에 으스러져라 힘을 주는 헬레나를 바라보며, 지온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도했다.

만약 지온이 크게 해라도 입는 날에는 한바탕 피바람이 불어 닥칠 테니까.

.

드디어 수도로 가는 날이 밝았고, 가능한 만큼 철저히 준비했다.

기술을 갈고 닦았음은 물론 전투를 위한 장비나 매직 아이템, 비상식량도 넉넉히 마련해 두었다.

제발 아무 일 없이 지나가는 것이 가장 좋기는 하나 부질없는 희망이겠지.

“ 떠나기 전, 다시 한 번 계획을 확인하마. ”

스케빈이 일렬로 늘어선 짐마차 네 대와 뒤, 짐칸 앞쪽에 둥글게 뭉친 서인족 무리 가운데 선 채 입을 열었다.

눈빛에 담긴 독기는 여전했지만, 그를 포함한 서인족들 모두가 굳은 표정을 띠고 있었다.

“ 훈련을 했다고는 하나 굳이 정면에서 붙어서는 안 되니까, 최대한 마찰을 피하는 방향으로 움직여라. 가는 길에는 별 방해가 없다고 생각은 하지만… 경계는 풀지 말고 대기해라. 그로 인한 정신적 피로를 고려해서 조를 세워 번을 서고……. ”

수도가 안전하다고는 하나 다 같이 우르르 몰려들면 눈에 띄는 것은 물론, 병력이 얼마 있는지 추측할 여지를 주게 된다.

그래서 수도 안으로는 스케빈을 포함해 셋 정도만 들어가고, 나머지는 밖에서 대기한다.

어차피 서인족 영토로 돌아가는 길이 위험할거라 예상되는 만큼, 수도에 숨어 벌벌 떤다한들 크게 의미가 없었다.

오히려 수도 근처에서 기습을 한다면 가는 길이 그만큼 안전하다는 뜻이 되니, 차라리 낫다고 볼 수도 있었다.

“ 마지막으로 저기 계신 크라우저 대공과 협의한 대로, 내가 수도에서 나올 때 까지는 대공께서 지휘권을 잡으실 거다. 다들 불만 업이 따라줬으면 좋겠다. ”

“ 에! ”

“ 좋아. 이야기는 다 끝났으니… 다들 마차에 올라타라. 출발한다. ”

스케빈이 우렁찬 목소리를 뒤로하며 지시를 내리자, 서인족들이 기다렸다는 듯 마차 짐칸에 올라탔다.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기에 서른 정도만 마차에 올라탔다.

상대 또한 병력을 우르르 몰고 다니지는 않음을 고려한 결과다.

“ 괜찮겠죠? ”

함께 짐칸에 올라탄 이브가 제법 침착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예전 같았으면 불안해하는 기색이 제법 뚜렷이 보였을 텐데, 제법 담이 커진 듯 같았다.

“ 괜찮길 빌어야지. ”

덜커덩. 나는 잠시 뜸을 들은 뒤, 마차가 출발하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이 짐마차에도 몇 명의 서인족이 타고 있었지만, 우리가 나누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기색은 아니었다.

그것이 배려인지, 혹은 긴장해서 그러는 것인지나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단지 마차는 별 탈 없이 앞으로 잘 나아갔고, 기다렸다는 듯 쏟아지는 기습도 없었다.

좀처럼 밟아도 밟히질 않는 서인족 때문에 바짝 약이 오른 것 치고는 조용했다.

돌아갈 때를 노린다는 스케빈의 말이 딱 맞아 떨어진 셈이다.

그렇게 한동안 마차를 몰자 넓은 평야가 보였다.

삼림이 풍부해서 곳곳에 숲이 있는 소테른과 다르게, 서인국에서 수도로 가는 길 대부분이 평지였다.

이런 장소는 숨을 곳이 없고 시야가 탁 트여 있어 수가 많을 때나 좋지, 추격을 뿌리쳐야 하는 입장에서는 썩 달갑지 않았다.

자칫 이브가 좀 더 고생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 이브. 만약 적이 여기까지 쫓아온다면… 어떻게 해야 좋을까? ”

“ 우선 마차를 세우고, 근처에 간이 토벽을 만들어 시야를 가리는 편이 좋겠죠. 그러면 마차와 벽, 양쪽으로 벽이 생기는 셈이라, 일종의 간이 진지로 쓸 수 있을 거에요. 그리고 상대가 마차나 벽을 부수려 들 때엔……. ”

이브는 내 물음에 기다렸다는 듯 답을 쏟아내기 시작했고, 함께 앉아있던 서인족들도 둥근 귀를 쫑긋거리며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지금 가정하던 일이 터질 경우 직접 칼을 휘둘러야 하는 입장이니 당연한 반응이라 할 수 있었다.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도 마차는 끊임없이 달려, 어느 새 해가 기울어질 무렵이 되었다.

“ 오늘은 여기에서 야영을 하마! 다들 번을 세우고 텐트를 세우는 등, 준비를 하도록! ”

스케빈은 평야 한 가운데 멈춰선 서인족들을 향해 지시를 내렸다.

그러자 서인족 전사들이 짐마차에 실려 있던 땔감이나 야영 도구를 꺼내는 등 분주한 움직임을 보였다.

나와 이브도 그 틈에 섞여 가볍게 한 손 거들었다.

“ 아니, 귀한 손님께서 굳이 이런 잡일을 하시다니요! ”

“ 괜찮습니다. 야영은 자주 하던 일이고, 이렇게 직접 준비하는 것도 제법 익숙합니다. ”

그에 스케빈이 놀라 헐레벌떡 달려왔지만 부드럽게 달랜 뒤 마무리를 지었다.

본래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야영 준비를 하던 습관 때문이기도 했지만, 좋은 인상을 주려는 목적도 있었다.

덕분에 분위기가 제법 화기애애했다.

“ 불침번은 굳이 설 필요 없을 겁니다. ”

“ 예? ”

잠깐 숨을 돌릴 겸 모닥불을 쬐던 중, 스케빈이 황당하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아무리 다른 인기척이 없는 곳이라고는 하나 불침번을 세우는 것이 상식이니 그럴 수밖에.

물론 나 또한 그런 상식을 가진 사람이었으나, 정작 상식이 필요 없는 사람이 함께 하고 있었다.

내 부탁을 듣고 이 일대에 알람마법을 설치하고 있는 이브가 바로 그랬다.

“ 지금 이브가 알람마법을 깔아두는 중입니다. 당연히 범위 안으로 발을 들이면 이 넓은 땅이 떠나가도록 시끄러운 소리가 울릴 것이고, 마법을 해제하려 해도 소리가 울릴 겁니다. ”

“ 허어… 마법이라. 생각도 못 해 봤습니다. ”

“ 그럴 수밖에요. 마법사들 대부분은 마탑에서 연구하느라 여념이 없어, 이렇게 함께 여행할 경우가 잘 없으니까요. ”

스케빈이 놀라워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가끔 밖으로 흘러나오는 마법사도 소수인데다, 이브는 마법사들 중에서도 뛰어난 재능을 가진 여자였으니까.

그 후에는 할 말이 없었는지 절로 입을 꾹 다물었고, 그 탓에 본의 아니게 어색한 침묵이 잠깐 이어졌다.

다행이도 곧 마법을 설치하고 온 이브가 저녁 준비에 여념이 없는 사람들 덕에 다시 활기를 띠었다.

간단하게 건어물 등으로 식사를 때우고, 잠을 자고, 동틀 무렵이 되어 일어나 수도로 향했다.

그렇게 이틀 정도를 부지런히 달리자, 저녁 무렵이 되었을 즈음 커다란 성 하나를 마주할 수 있었다.

여느 나라의 수도 못지않은 거대한 성이었다.

다행히 수도 근처 지역은 몸을 숨길 곳이 제법 많았다.

수풀이 무성한 곳도 있었으며, 올록볼록한 언덕이 솟아오른 곳도 있었다.

군데군데 낡거나 썩어가는 목책의 흔적이 보이는 것을 보니, 유사시에 방어선으로 이용한 듯싶었다.

“ 오늘은 밤이 늦었으니 왕궁에서 하루 머물러야 할 듯싶습니다. ”

끼익. 마차를 세운 스케빈이 내게 다가오자마자 한껏 굳은 표정을 띠며 말했다. 가장 위험한 때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 이 시간에 왕궁에서 받아줍니까? ”

“ 예. 왕을 알현할 수는 없지만 들어갈 수는 있습니다. 물론 평상시라면 왕궁에 들어가는 것조차 어렵겠지만, 선별식 대표에 한해서 문을 활짝 엽니다. ”

나름 각 종족을 대표하여 왕위 계승에 열을 올리는 사람들을 대우하는 것일까.

나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생각하며, 조용히 인사한 뒤 떠나가는 스케빈의 등을 쫓던 시선을 돌렸다.

수십의 서인족들이 나를 둘러싼 채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 후우──. 다들 아시다시피, 스케빈과 미리 협의하여 잠시 지휘권을 받았습니다. 당연히 이에 불만을 가지고 계실 분도 있겠지만, 지금만큼은 그 불만을 삭혀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서로 목숨이 걸린 일이니까요. ”

“ 물론입니다. ”

서인족 전사들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내 지시에 잘 따를 것을 다시 한 번 약속했다.

덕분에 조금 편한 마음으로 지시를 내릴 수 있었다.

그래서 작은 언덕 뒤라는 상황을 고려해 양 옆으로 불침번을 세우고, 마차를 두 대씩 배치해 벽으로 삼았다.

“ 스케빈 님이 도착했다면 그 소식이 다른 대표들에게도 알려질 겁니다. 그 말은 즉, 오늘이 가장 기습당하기 좋은 밤이라는 뜻이겠죠. ”

자고로 기습은 밤에 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더구나 끊임없이 움직인 탓에 피로까지 쌓였으니, 틈을 노리려면 지금이 가장 좋았다.

내가 적이라면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할 것 같았다.

“ 그렇지. 얼른 수도에 들어간 이들이 정보를 가지고 나와야 할 텐데……. ”

나는 이브의 말에 공감하며, 스케빈과 함께 들어간 서인족들이 얼른 돌아오기를 기도했다.

상대도 바보가 아니라면 기습을 위한 병력을 따로 숨겼을 테니, 그 규모를 알아내기는 어려울 터.

그러니 어느 종족이 참여했는지 정도만 알아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타닥.

모닥불 타는 소리가 귀를 간질이고, 탄내 나는 연기가 밤하늘에 섞여 오른 지도 몇 시간.

어느새 늦은 밤에도 잠을 자기 보다는 운동을 하는 일이 늘어난 지도 몇 년이 되어 그런가, 제법 견딜 만 했다.

그저 지루해서 가끔 하품이 나왔을 뿐이다.

적당한 긴장은 하고 있지만 졸음이 달아날 만큼 긴장이 높아지지는 않았다.

이것도 다 멘탈 덕이라고 할 수 있겠지.

“ 대공님! ”

휙!

언덕 위 능선에 몸을 붙인 채, 밖으로 얼굴만 살짝 내밀던 남자가 황급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목소리를 높이지 않은 것을 보니 조금은 침착한 듯 했으나, 목소리나 몸짓에서 긴박감이 느껴졌다.

나는 내심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을 하며 질문을 던졌다.

“ 예. 무슨 일입니까? ”

“ 스케빈 님과 함께 수도로 들어갔던 놈이 돌아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상태가…! ”

나는 남자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급히 몸을 일으켜 언덕 위로 달려갔다.

옆으로 돌아가는 것보다 위로 가는 것이 더 넓은 지역을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어 좋았다.

미리 접선 장소를 정해 두었기에 서인족 남자가 이리로 오는 것은 당연했으나, 그 뒤를 쫓는 놈들은 본 적이 없었다.

더구나 남자가 왼쪽 어깨에 손을 얹은 채 비틀거리는 것을 보니, 이미 한바탕 일이 벌어진 뒤였나보다.

제법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으니, 나 또한 여유롭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아래에 있는 남자를 향해 역건 목소리를 높였다.

“ 우선 당신은 자고 있던 이들을 깨워 무장을 시키세요. 이브와 제가 먼저 나서서 구하겠습니다. ”

“ 예! ”

언덕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던 남자가 힘차게 답하며 달려갔고, 함께 밤을 지새우던 이브가 기다렸다는 듯 내게 다가왔다.

부유마법을 사용해서 그런가, 두둥실 떠올라 다가오는 모습이 참 가벼워 보였다.

그 사이 나는 마스크 대신으로 사용할 검은 천을 얼굴에 두른 뒤, 매듭을 질끈 묶었다.

“ 앞에 셋은 나 혼자 손을 쓸게. 이브는 그 뒤에 붙었을지 모를 다른 놈들을 경계해 줘. 여유가 있으면 살리고. ”

“ 네. 조심하세요. ”

이브에게 혹시 모를 추격을 막도록 한 뒤, 언덕을 따라 힘껏 내달렸다.

경사가 심했다면 자살행위가 따로 없었을 테지만, 완만해서 그런지 달리기 딱 좋은 기울기였다.

─한 발 늦었군…! 후퇴하자.

마나를 끌어올려 전신을 강화한 덕에무리와 제법 거리가 있었음에도 대화 내용이 어렴풋이 들려왔다.

왼쪽 어깨와 다리에서 피를 흘리는 서인족 남자를 두고 도망갈 속셈이었다.

도망? 어림도 없지.

나는 딜도를 들고 사냥감을 쫓는 게이마냥 눈을 부라리며 더욱 빠르게 앞으로 치고 나갔다.

서인족 남자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오로지 덩치 큰 남자 셋의 등만을 응시했다.

그렇게 서인족 남자를 스쳐, 일찌감치 수도 쪽으로 향하는 놈들의 등 뒤를 바짝 쫓았다.

보통 사람보다 훨씬 빠른 것을 보니 수인이 분명했지만, 마나로 강화한 인간보다는 속도가 약간 느렸다.

덕분에 거리를 점점 좁힐 수 있었다.

하지만 본진과 너무 멀리 떨어져도 문제다.

그렇기에 나는 주머니에 쟁여 두었던 더크 세 자루를 꺼내, 아주 훤히 드러난 등짝을 향해 내던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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