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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기둥서방이 되었다-134화 (134/192)

〈 134화 〉 킹 메이커 #3

* * *

“ 엘프의 중심이라더니……. ”

서른의 엘프 마을 중 중심이자, 유산이 잠들어 있는 오베론 마을은 참 컸다.

두 팔로 품을 수조차 없을 거대한 나무가 단단히 뿌리박고 선 모습이나 드문드문 나무 안에 자리 잡은 집 등, 놀랄 거리도 참 많았다.

사방에 널린 나무에 걸린 나뭇잎 한 장 한 장이 반짝이는 모습도 놀랍고, 사람으로서 처음 발을 들인 유산을 보았을 땐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별이 박힌 어두운 하늘로 만든 천장이 너무 인상적이었기에.

“ 와아…! 마법진의 소재부터 각인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

나를 따라온 이브가 눈을 빛내며 시련의 입구 주위를 빙글빙글 돌더니, 품에서 종이와 펜을 꺼내 이것저것 적어대기 시작했다.

힐끗 곁눈질로 보니바닥에 새겨진 영문 모를 문자를 그대로 옮겨 적는 중이었다.

새삼 여기까지 들어오도록 허락해 준 에일렌이 고마웠다.

“ 아마 고대 엘프 문자 같은데… 자세한 건 자료를 뒤져봐야 알 것 같아요. 우선 글자 하나하나의 의미를 대조한 다음에……. ”

“ 그래. 오랜만에 참 즐거운 모양이구나. ”

성역을 둘러본 뒤, 이브는 숙소로 향하는 중에도 눈을 반짝이며 목소리를 높였다.

새로운 마법, 그것도 정령마법과 관련된 것을 접해 어지간히 즐거운 모양이었다.

잠깐이었지만 수인국으로 가야하는 것조차 잊어버릴 만큼.

“ 참. 그래도 급한 불부터 끄고 나서 연구해야겠죠. 그러려면 수인국에 갔다 오는 길에 다시 한 번 엘프 마을에 들러야 할 것 같은데, 대공님께서 허락만 해 주신다면……. ”

“ 좋아. 그렇게 하자. 일단 한 고비 넘기고 나면 여유가 있을 테니까. ”

“ 감사합니다! ”

다행히 에일렌이 잡아 준 숙소, 정확히는 그녀의 집 앞에 다다르자 본 목적을 떠올린 듯 했다.

엘프 마을에도 외부인을 위한 여관 정도는 있으나, 그 수가 매우 적기 때문에 넉넉하지가 않았다.

에일렌이 자기 집에 머무르라 권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나야 덕분에 돈이 굳어서 좋긴 하지만, 사이가 썩 좋지 않았던 여자의 집에서 머무른다는 것이 신기하면서도 긴장되었다.

이제 와서 뒤통수를 칠거라 생각하지는 않으나과거가 단숨에 날아가는 것도 아니니까.

아무튼, 제법 넓은 집에 들어오자 텅 빈 거실이 가장 먼저 우리를 반겼다.

에일렌은 볼 일이 있어 나간 모양이었다.

─저는 잠시 볼 일이 있어 밖으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조촐하지만 도움이 되실 만한 물건을 서제에 마련해 두었으니, 부담 갖지 마시고 사용해 주세요.

나는 거실 한가운데 떡하니 버티고 선 탁자 위에 놓인 쪽지를 읽은 뒤, 곧장 서재로 걸음을 옮겼다.

폐쇄적인 사회성을 가진 이들이라 별 거 없으리라 생각했건만, 생각 외로 자료가 풍부했다.

개방을 하느냐 마느냐를 두고 한창 의견을 조율하는 중이라 그런 것일까.

그저 내 입장에선 무척 고마운 일이었기에 이브와 함께 서재를 뒤지기 시작했다.

마구잡이로 어지르면 예의가 아닌데다 어지러워지기 쉽기에 차분히 정리하며 뒤졌다.

단순한 서적부터 소테른 왕국뿐 아니라 다른 왕국, 제국, 수인국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추세를 기록한 보고서가 제법 두툼했다.

우리가 조사한 것과 내용 면에서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이 문제였을 뿐이다.

단, 이브가 눈을 반짝이며 내 앞에 들어 보인 지도를 빼면.

“ 대공님. 이거 보세요. 지형이나 나라 이름, 또 그 사이에 나눠진 선을 보니 수인국의 지도인 것 같아요. ”

“ 세상에. 진짜 세상에 밖에 할 말이 없네. ”

이 대륙에서 지도는 귀한 물건이다.

축척이 칼날처럼 날카롭게 들어맞지는 않아도 세작들이 짬을 내어 정성스럽게 만들기에 제법 정확한 편이다.

그래서일까.

어느 정도 지위를 쌓은 인물이 아니면 가질 수 없는 물건이 바로 지도다.

그 탓에 사람들 대부분은 나라나 지역의 위치를 입에서 입으로 전하거나 경험으로 기억하곤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 대략 2년 전부터 엘프들이 개방을 하느냐 마느냐를 두고 주변 정세를 꼼꼼히 살핀다고 했었잖아요? 그 때문에 이런 지도를 만든 게 아닐까요? 혹은 어디서 구해왔거나. ”

그럴 수도 있지.

나는 이브의 그럴싸한 추리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인 뒤, 지도와 몇 가지 필기구를 들고 거실로 향했다.

만들다 만 다른 지도들도 많았지만 눈이 가질 않았다.

그럴 여유도 없었고.

탁.

나는 책상 근처에 놓인 의자에 앉자마자 지도를 펼쳐, 외곽에 있는 마을과 가장 가까운 수인국의 경계를 콕 찍었다.

지금도 선별식에서 살아남아 열을 올리는 견인족의 영역이다.

영토를 나누는 선이 대략적으로 표시되어 있기에 자세한 구성은 당연히 모르지만, 이 정도만 해도 감지덕지했다.

“ 지도를 보면서 한 번 정리하자. 이쪽이 견인족이고… 그 근처에 두 부족이 국경을 대고 있어. 묘인족과 양인족이야. ”

“ 그렇죠. 그리고 대공님께서 가시려는 곳은……. ”

견인족 영역을 중심으로 오른쪽 대각선 위가 묘인족, 아래가 양인족 영역이다.

그렇기에 묘인족과 양인족은 자연스레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이 세 부족의 국경선이 겹치는 곳도 당연히 존재했다.

그리고, 이브가 손가락으로 짚은 곳은 그 너머에 있는 서인족의 영토였다.

수도와 가까우나 땅의 크기가 작은 곳이다.

“ 여기, 서인족 영토죠? ”

“ 그래. 약하다 알려진 서인족이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도 참 용해. 수가 줄어서 더 위태롭기는 하지만… 그래서 좋아. ”

서인족은 쥐 계열 수인으로, 덩치가 작고 근력이 약하나 빠르고 어느 정도 머리를 굴릴 줄 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약한 이들이기 때문에지금껏 버티고 있는 종족 중 가장 열세였다.

“ 제 생각이지만… 서인족 영토로 가려면 국경이 겹치는 지대로 간 다음, 거기서 양인족 쪽으로 빠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묘인족은 약삭빠르고 날카롭기 때문에 골치 아픈 일이 생길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

몇 년 동안 헬레나를 설득하기 위한 연구에 혼을 쏟았다고는 하나, 이브는 엄연한 마법병단의 단장이다.

그러니 지금 같은 판단을 내리는 것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 뿌듯함을 일단 속에 담아둔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좋아. 그렇게 하자. 양인족은 칼리우드 공작령에서 보낸 사람들이 자주 왕래하는 곳이라 외부인이 그렇게 신기하지도 않아. 더구나 같은 왕국 출신이면 더욱 무난하게 통과할 수 있겠지. ”

나는 위장용으로 만든 증명서를 품에서 꺼내 가볍게 흔들었다.

지금까지는 몰래 숨어 검문 없이 다다랐다고는 하나, 앞으로는 그럴 수가 없었다.

보통 시골 마을처럼 개방된 곳이 많기는 하지만, 성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 참. 슬슬 가방 정리도 해야겠죠? 물건은 아까 사 뒀으니까……. ”

“ 그래야지. ”

나는 이브와 함께 에일렌이 빌려 준 방으로 들어가 가방 정리에 애썼다.

빨리 이동하기 위해 짐마차가 아니라 최소한의 짐을 넣은 배낭을 준비했고, 최대한 필요한 물건만 넣으려 애썼다.

더크 몇 자루.

병에 넣은 엘프의 약초로 만든 약이나 옷.

말린 먹거리 등이다.

이브는 이브 나름대로 배낭을 꾸렸고, 서로 최소한의 짐만 챙겨 그런지 썩 무겁지는 않았다.

식수나 불은 정령마법을 쓰면 깔끔히 해결되었기에 편하기 그지없었다.

“ 출발은 언제쯤 하실 건가요? ”

가방을 다 챙기고 나자, 이브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나는 그제야 마음이 급했던 나머지, 에일렌이 전령을 보냈다는 것도 까맣게 잊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 어… 에일렌이 보낸 전령이 소식을 들고 와야 하니까… 며칠 정도는 머물러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

“ 그러면… 너무 일찍 챙긴 건 아닐까요? ”

“ 크흠. 정신이 없었어. 미리 챙겨두면 그만큼 여유롭고, 여차하면 바로 갈 수도 있긴 한데… 그걸 고려해도 너무 빠르긴 하네. ”

나는 머쓱했던 나머지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고, 이브는 그런 나를 보며 한껏 당황하여 손사래를 쳤다.

“ 대, 대공님은 아무 잘못 없으세요! 그리고 말씀하신 것도 하나도 틀린 것이 없으시고요! ”

“ …그래. 그렇게 얘기해줘서 고마워. ”

묘하게 비참하다는 생각이 내심 들었지만, 당장이라도 울듯이 쩔쩔매는 이브 앞에서 이 감정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머리를 박고 죽여 달라 말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탓이다.

.

“ 각 마을에서 소식을 듣고, 제 부탁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전해 받았어요. 만일 필요한 것이 생기시면 입구를 지키시는 이들에게 말씀하시면 될 겁니다. ”

대략 사흘 정도 지났을 무렵.

에일렌이 아침식사를 마치자마자 기다렸던 소식을 전했다.

만에 하나 우리를 막는 일이 없도록 당부함과 동시에, 나중에라도 필요한 물자를 지원받을 수 있도록 조치했다는 소식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감사 인사를 전한 뒤, 이브와 함께 에일렌의 집을 나섰다.

“ 본래 마음 같아서는 조금 더 머무르시라 부탁드리고 싶지만… 상황이 상황이라 그러지도 못하네요. ”

“ 네가 부담스럽지 않다면… 할 일이 끝나면 또 들르도록 할게. ”

“ 아, 네…! 기다리겠습니다. ”

에일렌은 다시 들르겠다는 말에 어두웠던 기색을 싹 지우곤 참 평온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덕분에 큰 부담 없이 말에 올라타 목적지로 향했으나, 찝찝한 느낌이 입 안에서 도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계속 찝찝한 느낌을 담고 갈 수는 없었기에 털어내려 노력했다.

지금은 하루 빨리 수인국의 국경을 넘어 최대한 빨리 서인족 영토로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서인족이 선별식에서 고꾸라지기 전에.

말을 달리게 하고 또 달리게 하며, 가끔 말의 숨이 차오르면 근처 수풀에 묶어둔 채 휴식을 취하게 했다.

말에 타서 균형을 잡는 것도 제법 진이 빠지는 일인지라우리도 그 틈을 타 선잠을 자기도 했다.

아마 짐이 무거웠다면 숨 차는 속도가 더욱 빨랐을 테지만, 최대한 줄인 덕에 한 번에 좀 더 먼 거리를 달릴 수 있었던 것 같다.

“ 대공님, 국경이에요. ”

길을 가는 도중 엘프 마을에 들러 간단히 식량을 사고, 노숙을 하며 끊임없이 달리길 며칠.

마침내 엘프의 숲을 지나고, 약간 붕 뜬 중립지대를 지나거대한 개활지를 목전에 두었다.

이브의 목소리는 그를 알리고 있었다.

“ 후우──. ”

국경이라.

나는 드디어 목적지가 코앞까지 다가온 것 같아 가슴이 두근거렸다.

기대나 흥분 때문이 아니라 이제 시작이라는 생각 때문에 허리가 빳빳이 서는 것만 같았다.

그나마 멘탈 덕분에 이 정도에서 그쳤지, 자칫 잘못했다간 지나친 긴장감에 과호흡이 오거나 진즉에 기절을 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남의 나라 왕위 쟁탈전에 끼어드는 건 그만큼 마음이 무거운 일이니까.

그래서 국경을 눈앞에 두고 잠시 호흡을 고르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부담과 함께 몸에 쌓인 피로를 날리듯 몇 번을 반복했다.

“ 가자. ”

“ 네. ”

그리고 이제 되었다 싶었을 때, 말을 돌려 수인국의 국경으로 향했다.

긴 선을 따라 곳곳에 성벽과 관문이 세워진 국경은 제법 살벌한 분위기를 냈으나, 동시에 여유롭기도 했다.

“ 오. 그냥 인간이로군. 무슨 일로 왔나? ”

말을 타고 국경에 다다르자, 그곳을 지키고 있던 병사 중 하나가 놀란 듯 중얼거렸다.

보통 사람의 귀가 있어야 할 곳에 개의 귀가 달린 남자였다.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아마 견인족임이 분명하겠지.

나는 그 남자의 물음에 답하기 전, 품에서 증명서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상인으로 위장한 가짜 신분증명서였다.

“ 소테른 왕국에서 왔습니다. 칼리우드 공작령이 양인족이 만드는 물품을 공급하곤 있지만, 저희 상회는 독립적인 유통망을 통해 그를 들이고자 하거든요. ”

“ 양인족이 만드는 옷감이라. 그게 참 좋긴 해. 우리나라 특산품이기도 하고. ”

“ 그렇지요. 수인국은 종족에 따라 개성이 뚜렷한 곳이라 참 부럽습니다. 예를 들면 견인족도……. ”

보통 수인과 접할 일이 없는 사람은 어떤 종족인지 구분을 잘 못한다.

종족에 따라 아주 명확한 특징이 드러나긴 하지만, 겉으로는 크게 차이가 없는 경우도 있다.

나는 그 점을 알았기에 적당히 흘러가듯 여러 종족을 칭찬했고, 눈앞에 선 사내는 그 칭찬에 낚여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견인족이라는 것도 털어놓았다.

덕분에 견인족이 충성심이 강하고 날카롭기도 하지만, 사실 단순한 종족이라는 말이 사실임을 느낄 수 있었다.

“ 아 참! 이거 너무 잡담만 하느라 시간을 잡아먹었군. 원래 국경이 좀 한가해서 그만 실수를 했어. 미안하네. ”

“ 에이, 괜찮습니다. 상인에게 있어선 이런 소소한 이야기도 다 돈이 되는 정보 아니겠습니까? 오히려 감사할 지경이네요. ”

“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 생김새가 번듯해서 그런지 마음도 좋군. ”

견인족 사내가 하하 소리를 내며 내 어깨를 두드리다, 조금 전에 내밀었던 증명서를 다시 돌려주며 말했다.

“ 그래. 장사 잘 해보게. 선별식이 한창이긴 하다만, 자네 같은 보통 사람하곤 상관없으니 괜찮겠지. ”

“ 아! 그 왕을 뽑는다는 수인국 전통의…? ”

“ 오. 잘 아는군 그래. 그 전통적인 선별식이 한창 진행 중이지. ”

선별식 때문에 또 말문이 트였는지, 견인족 사내가 또 신나게 떠들어댔다.

마치 잠시를 가만히 못 있는 지랄견을 보는 것만 같았다.

그것보다 훨씬 온순했지만 그 에너지가 지랄견과 같은 수준이었다.

“ 아차차! 이거 가는 사람 붙잡고 또 막 떠들어댔어. 미안하게 됐어. ”

“ 아까도 똑같은 답을 드린 것 같지만, 한 번 더 말씀드리죠. 괜찮습니다. ”

“ 진짜 미안하군 그래. 얼른 가 보게. ”

나는 짧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마친 뒤, 견인족 사내가 가리키는 활짝 열린 문을 향해 말을 몰았다.

남자의 수다를 들으며 맞장구까지 친 탓일까.

며칠 동안 쉴 새 없이 말을 몰았던 훨씬 피곤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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