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화 〉 킹 메이커 #2
* * *
내가 따로 나서면 약간이나마 이목이 쏠리지만, 본래 왕래하던 무리 틈에 섞이면 그럴 일이 줄어든다.
그래서 이곳으로 파견을 오는 엘프 무리에 섞여 몰래 영지를 빠져나갈 계획을 세웠다.
이 영지에 제국의 간자가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나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지금쯤 원한에 사무쳐도 이상하지 않을 그 상인 놈이 몰래 보냈을 수도 있고, 다른 귀족에게 선을 댔을 가능성도 없다곤 말 못하니까.
“ 엘프 마을에서 가장 가까운 부족이 어디지? ”
“ 아… 견인족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
외부와 교류를 끊고 살았던 엘프라고는 하나 주변 정세를 모를 만큼 까막눈은 아니다.
그 덕에 에일렌의 입에서 여러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 대부분이 보고서로 접했던 정보들이지만, 근처에 사는 이웃의 입으로 듣는 것은 또 다른 맛이 있었다.
“ 견인족은 열 두 부족 중에서도 애매한 위치에 있어요. 능력이 뛰어나고 충성심이 강해 믿음은 높지만, 그게 또 단점이라……. ”
“ 단점 아닌 단점이란 뜻이군. ”
밑에 두고 쓰기에는 더없이 좋은 인재상이나, 막상 왕과 같이 지배하는 위치에 서는 것이 어렵다.
지금도 거행되고 있는 선별식에서는 살아남았으나 끝까지는 못 간다.
정말 애매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마차가 덜컹대는 소리에 잠시 귀를 기울이다, 내 어깨에 기대 곤히 잠든 이브를 힐끗 쳐다봤다.
누군가는 얼이 빠졌다며 한 마디 할지도 모르나, 새벽 내내 힘을 뺐으니 어쩔 수 없었다.
더구나 몬스터가 득실대는 곳도 아니었으니까.
“ 저… 한 가지 여쭤 봐도 될까요? ”
이브를 보며 고민에 잠겨 있을 무렵 에일렌이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그에 시선을 자연스레 에일렌 쪽으로 옮기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할 말이 있으면 해 보라는 뜻이다.
“ 전쟁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건… 정말인가요? ”
“ 확실하지는 않아. 하지만 그럴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지. 단순히 국가 간의 협정 체결 등이 목적이라면 몰래 움직이진 않을 테니까. ”
“ …그렇겠지요. ”
몰래 움직이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하다못해 도둑질을 할 때도 들키지 않기 위해 최대한 발소리를 줄이기 마련이니까.
에일렌도 그를 아는지 눈꼬리를 축 늘어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얼핏 엘프는 이번 전쟁과 아무 전쟁도 없어 보이나, 제국이 노리는 바가 무엇인지 모르는 이상 마냥 안심할 수도 없었다.
엘프가 직접 압박을 받는다면 당연히 큰 문제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골치 아플 가능성이 보였다.
가령 제국이 확실히 왕국을 노린다 치고, 수인국과 동맹까지 끝마친 상태라고 가정하자.
그러면 왕국과 수인국 사이의 길목에 있는 엘프들이 압박을 받을 수 있었다.
내가 수많은 엘프 마을을 가로질러 갈 생각을 하듯, 상대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 테니.
그 때가 되면 엘프는 선택을 해야겠지만, 에일렌은 그 선택을 할 생각 때문에 괴로워하는 눈치였다.
“ 에일렌. 만일 전쟁이 난다면 다른 촌장들은 어떻게 나올까? ”
“ 확신은 못 드리겠지만… 저희도 자존심이 있으니까요. ”
자존심이 있다라.
그 한마디만으로 엘프가 어떤 선택을 하든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악연도 인연이고, 어찌 보면 좋은 인연보다 훨씬 질기다는 것을 믿었다.
더구나, 요즘 들어 사이가 썩 나쁘지 않기도 했고.
“ 그 정도면 충분하겠어. ”
제국 쪽에 붙으면 이중간첩으로 쓰고, 우리 쪽에 붙는다면 그에 맞는 지원을 하면 그만이다.
나는 그리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자그마한 의리에서 빛을 본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 쏴라! ”
“ 후방도 제대로 경계해! ”
바람이 불꽃처럼 튀고, 불꽃이 폭풍처럼 일대를 휩쓸었다.
그 사이사이로 엘프들의 고함소리가 송곳처럼 울려퍼졌고, 그럴 때마다 한 마리씩 몬스터가 죽어나갔다.
네 발 달린 짐승같이 생긴 놈들부터 두 발로 걷는 놈들에 이르기까지, 종류도 각양각색이다.
나는 에일렌과 이브를 근처에 둔 채 그 광경을 구경만 하고 있었다.
괜히 돕겠다고 끼어들었다가 저 호흡을 깨뜨릴 가능성도 있는데다, 걸리적거리다 엘프들의 짜증을 살 수도 있었다.
그러니 가만히 있는 편이 나을 듯싶었다.
─크어어어…!!
오크를 비롯한 상급 몬스터가 울부짖고 쓰러질 때마다 주위가 쩌렁쩌렁 울렸다.
더해 정령마법의 폭발음까지 섞이다보니 귀가 따갑다 못해 터져버릴 지경이었다.
만약 마나로 청력을 높였다면 고막이 터질 지도 모를 일이었다.
“ 엇?! 죄송합니다! 옐로우 캣이 그쪽으로…! ”
옐로우 캣. 직역하면 노란 고양이인데, 몸집은 작으면서 민첩하고 발톱과 이가 날카로워 몹시 까다로운 놈들이다.
내 기준에서는 흉악하기 짝이 없다던 삵보다 훨씬 더했다.
그런 놈이 엘프 무리가 세운 진형의 틈을 파고들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으니, 놓친 엘프가 한탄을 지를 만도 했다.
─샤아악!
세로동공이 새겨진 샛노란 눈을 부릅뜨며 날아오는 꼴이 너무 무서워, 무심코 발을 뒤로 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다 발톱은 또 왜 저렇게 긴지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였다.
“ 후우. ”
나는 잠시 숨을 고르며 고양이가 날아오는 모습을 유심히 살폈다.
힘찬 도움닫기를 통해 높게 뛰어올라 기다란 발톱을 크게 휘두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마 가만히 있으면 얼굴이 찢어지는 것은 기본이요, 눈이 크게 다칠 수도 있었다.
놈이 가진 발톱의 길이나 굵기를 보면 충분히 그럴 만 했다.
그렇기에, 오러를 씌운 오른손을 비스듬히 뻗어 칼날과 같은 발톱을 막아낼 수밖에 없었다.
깡, 하고 쇠가 부딪칠 때 날 법한 소리가 귀를 때렸다.
아마 오러를 씌우지 않았다면 최소한 오른손 뼈가 반은 잘려 걸레짝이 되었을 것 같았다.
제법 저릿한 느낌이 워낙 소름 돋았던 탓이다.
나는 발톱을 막아내기 무섭게 손을 움츠려 주먹을 꽉 쥐었다.
그 결과 칼날을 손에 쥐는 듯한 묘한 감각이 느껴졌고, 발톱을 잡힌 옐로우 캣 또한 고함 아닌 고함을 지르며 발버둥 쳤다.
“ 대공님…! ”
내 주위를 지키던 이브가 놀라 소리쳤다.
그녀 또한 주의를 기울여 다가오는 몬스터를 잘 걷어냈지만, 이놈이 워낙 작고 빨랐기에 한 발 늦은 반응을 보였다.
후회가 가득한 표정이 그로 인한 죄송함을 여실히 드러내는 듯했다.
“ 이브. 난 괜찮으니까 계속 주변을 경계해. 아직 맘 놓을 때도 아니고, 나한테만 한눈 팔 때도 아니야. ”
“ …네, 네! ”
일부러 낮은 목소리를 내며 차갑게 대하자, 이브가 정신을 차린 듯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등을 돌리기 전 얼핏 보인 표정에 서운함도, 죄책감도 없어 보여 다행이었다.
─캬아악!
이브와 잠깐 이야기를 나누는 그 사이, 허공에서 버둥거리던 놈이 남은 발톱을 휘둘렀다.
불안정하고 고정된 자세에서 휘두른 발톱이라 그런지 아까 전보다 느렸고, 매서움도 덜했다.
덕분에 남아돌던 왼 손으로 낚아챌 수 있었다. 물론 오러는 씌워둔 지 오래다.
두 앞발이 모두 잡힌 놈은 여전히 눈을 부라리며 반항의 기색을 보였다.
사냥꾼으로서 가지는 반항감인지, 혹은 먹이에 대한 집착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없다는 것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우드득! 우선 놈이 발톱을 휘두르지 못하도록 양 손에 힘을 주어 놈의 앞다리를 있는 힘껏 뒤틀었다.
덕분에 아기 울음소리와 꼭 닮은 소름끼치는 비명이 바람을 타고 멀리까지 퍼져나갔다.
아마 현대의 동물보호단체가 보았다면 거품을 물고도 남았겠지.
그러나, 지금 이곳은 몬스터의 영역이며, 제법 안전하다고는 하나 자칫 목숨을 잃을 만큼 위험한 곳이다.
괜히 어설프게 행동하다 명줄이 끊길 수도 있었기에 단호해야만 했다.
지금처럼 두 다리를 힘껏 뒤틀어 망가뜨린 뒤, 한 번 더 직각으로 꺾어 완전히 박살낼 수 있을 만큼.
나는 힘없이 축 늘어진 옐로우 캣의 눈을 바라보며 오른손에 힘을 풀었다.
다리를 완전히 망가뜨렸으니 발톱을 휘두를 수도, 제대로 걸을 수도 없으니 문제없었다.
그저 목각인형의 팔처럼 덜렁거릴 뿐이었다.
덕분에 여유를 찾은 오른손을 놈의 목덜미로 뻗어, 목을 조르듯 꽉 쥐었다.
순간 공포에 질린 옐로우 캣의 눈동자와 마주쳤으나, 먼저 죽이겠답시고 달려든 것은 놈이었다.
이제야 불쌍하답시고 살려 둘 법도 했지만 그럴 이유가 없었다.
내게는 몬스터를 길들이는 기술도 여유도 없었으니까.
그러므로, 놈의 목을 조른 손에 힘을 주어 단숨에 숨통을 끊을 뿐이었다.
“ 대공님! 다친 곳은 없으세요?! ”
“ 응. 괜찮아. 이브는 어때? 혹시 마나가 고갈되거나……. ”
“ 마나도 넉넉하고, 다친 곳도 없어서 괜찮아요. 대공님도 아시다시피 정령마법이 가성비가 좋아서요. ”
잠시 후. 내게 헐레벌떡 달려오는 이브를 달래고, 흉흉한 기세가 한 풀 꺾인 주위를 살폈다.
달려들던 몬스터도 승산이 없다 판단했는지 달아나고 있었고, 그를 증명하듯 수많은 사체가 사방에 널브러져 있었다.
거기에 피까지 더해져 가히 지옥의 바닥이 따로 없을 지경이었다.
엘프들은 소매로 땀을 훔치며 주위를 점검하고 있었고, 그 중에는 에일렌도 섞여 있었다.
촌장이 아니라고는 하나 여전히 마을의 큰 어른이기에 권위가 죽지 않은 것이 아닐까 싶다.
“ 혹여, 대공께서는 어디 다치신 곳이……. ”
“ 괜찮아. 철 없는 자랑같이 들릴 지도 모르겠지만… 내 한 몸 정도는 지킬 수 있으니까. ”
나는 뒤늦게 달려와 안부를 묻는 에일렌을 향해 웃으며 답했다.
헬레나의 훈련으로 몇 년을 굴렀으니 실력이 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에일렌도, 내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브도 새삼 그 사실을 깨달은 눈치였다.
마치 잊고 있었던 사실을 떠올린 듯, 눈을 크게 떴으니.
“ 정말 다행입니다. ”
“ 그래. 걱정해 줘서 고마워. 다른 엘프들은 어때? ”
“ 다들 익숙하다보니 큰 문제는 없습니다. 다친 사람도 없으니 이대로 나아가도 될 듯싶지만… 혹여 피곤하시다면 잠시 휴식을 취했다 갈까요? ”
“ 나야 짐마차에 가만히 앉아 갈 뿐인데 피곤할 게 있을까. 그러니 엘프들만 괜찮다면 계속 갔으면 하는데……. ”
“ 알겠습니다. 뜻이 그러하시다면 정비를 마친 뒤에 곧장 출발하겠습니다. ”
에일렌은 참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인 뒤, 엘프 무리 속에 뛰어들어 재빨리 상황을 정리했다.
인솔자답게 통솔력도 좋았고, 차분히 주위를 살필 줄 아는 모습도 잘 어울렸다.
“ 대공님. 준비가 다 끝났습니다. ”
후열에 세워 두었던 말들도 안정되었고, 시체도 대충 치워 길을 열었다.
리슬링 변경백의 영지처럼 용병들이 모이는 곳과 거리가 멀어 그런가, 이 난리를 피웠음에도 낯선 인기척 하나 느껴지질 않았다.
“ 좋아. 다시 출발하자. ”
내 구령에 따라 무리가 다시 숲을 향하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마차 바퀴가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가 짐마차를 타고 있었기에 걷는 엘프는 아무도 없었다.
수송과 이동에 드는 피로를 최대한 줄이기 위한 결과였다.
몇 개나 되는 짐마차엔 엘프들이 조를 이루어 타고 있었고, 간단한 먹을거리나 텐트 등의 야영장비도 함께 실려 있다.
다만, 대충 앞으로 갈 수 있을 정도로만 치운 탓일까.
바퀴 군데군데 몬스터의 피가 묻은 것이 흠 아닌 흠이었다.
일단 닦아두긴 했으나 마을에 도착하면 마차 청소부터 해야 할 듯싶었다.
가공을 한 나무라 쉽게 썩지는 않겠지만…더러웠으니까.
“ 대공님. 무례한 줄은 알지만 마을에 도착하시마자 출발하시는 건… 잠시 미뤄두실 수 있을까요? ”
한창 숲을 헤치며 나가던 중, 같은 짐칸에 타고 있던 에일렌이 조심스럽게 권유했다.
워낙 조심스럽고 눈치를 보는 기색이라 보는 내가 다 미안해질 지경이었다.
“ 무슨 일 때문에 그래? ”
“ 마을에 도착하면 곧장 전령을 보내, 대공님의 이동에 방해가 없도록 조치를 하고 싶어서요. 또, 잠시 머무르시는 동안 빠뜨린 것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을 테고……. ”
일리가 있는 말이다. 비록 될지 안 될지도 모를 일을 위해 서둘러 가고 있기는 하나,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옛 말이 문득 떠올랐다.
그러니 에일렌이 말한 대로 방침과 필요한 물품을 다시 점검하는 것도 좋을 듯싶다.
나는 그녀의 말이 일리가 있다 생각하며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지. 들어가기 전에 한 번 더 확인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오히려 좋다고 할 수 있겠지. 이브는 어때? ”
“ 저야… 대공님의 뜻을 따를 뿐이에요. 하지만, 개인적으로도 좋은 생각이라고 봐요. 마을을 둘러보다 보면 괜찮은 물건을 구할 수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니까요. ”
이브도 이렇게 말하니 반대할 이유가 더더욱 없다.
그 결과, 오베론 마을에 도착하고 하루나 이틀 정도마을에 머무르며 정비하는 시간을 갖기로 결정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