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2화 〉 킹 메이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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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터지고 남았어야 할 전쟁을 피한 탓인지, 아니면 평화가 오래가서 그런지.
나로서는 잘 모를 노릇이지만 돌아가는 상황이 찝찝하다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모르고 있을 때야 괜찮았지만 흐름이라는 걸 알고 나니 묘하게 긴장되기도 했다.
아마, 멘탈의 힘이 아니었다면 긴장한 나머지 잠도 제대로 못 잤을 듯싶다.
새삼 멘탈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 느꼈다.
“ 평화롭기에 힘을 주체하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것인지……. ”
내가 들고 온 서류를 쭉 훑어보던 이스가 한숨을 토해내며 중얼거렸다.
그가 손에 쥔 것은 수인국에 보냈던 세작들이 보내 온 보고서였다.
제국 측이 어떤 행동을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몇 가지 특이한 소식이 실린.
“ 단순히 설레발을 치는 것일지도 모르지요. ”
“ 설레발 정도에서 그친다면 다행이지. 하지만 제국 쪽에서 전에 없던 움직임을 보이는 것도 사실이지 않은가. ”
벌써 세작을 보내기 시작한지 한 달.
그들은 제국과 수인국의 여러 지역에 파견되어 지금처럼 정보를 보내느라 고생하고 있었다.
제국 측에서 눈치 채지 못하도록 가볍게 주변 분위기를 파악하거나, 아주 조심스럽게 선을 대며 귀를 열었다.
덕분에 시작할 때만 해도 지지부진했던 정보는 질적, 양적으로 크게 나아졌다.
이스도 그를 아는지 얼마 전보다 밝아진 기색을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지만은 않은 상황이나 암울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겠지.
“ 아무튼, 제국이 수인국에 모종의 권유를 하려 한다면… 우리도 손을 뻗어두는 게 좋을 것 같네. ”
“ …방법이 있으십니까? ”
이스는 내 물음을 듣기 무섭게 책상 위에 놓인 서류를 톡톡 두드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이 보고서에 적힌 선별식에 끼어드는 게 좋을 것 같네. 만일 제국이 전쟁을 결심했다 치고, 그를 위해 수인국을 끌어들이려 한다면… 최소한 중립을 지키도록 만들어야 해. 위험한 일임에는 틀림없지만, 위험 없이 일을 해결하기엔 어려울 테니. ”
맞는 말이다. 나는 이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표했다.
정말로 전쟁이 일어날지 아닐지는 알 수 없지만멍하니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저 전쟁은 아니겠지, 라고 느슨하게 있다간 죽을 수도 있을 터였다.
묘한 상황임에는 분명하기에.
“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수인국으로 향해야 하겠지요. ”
“ 음. 보고서에 따르면 선별식에 참여한 열 두 부족의 후계 중 다섯이 떨어졌고, 일곱만이 남았다고 하네. 선을 대려면 서둘러야 할 것 같군. 상대가 우리가 내미는 손을 받을지 말지는 알 수 없으나……. ”
“ 가만히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겠지요. ”
이스가 옳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며, 시선을 보고서로 떨궜다.
이미 반년 전부터 선별식이 시작되어 거의 반수가 탈락했다.
그러니 수가 더 줄어들기 전에 얼른 접촉을 해야 했다.
죽이 되던 밥이 되던 그것만이 답이었다.
이스도 그리 생각하는 눈치였고.
“ 그를 위한 방법이라면… 아무래도 가장 세가 약한 쪽에 손을 뻗는 것이 좋을 거라 생각하네만, 자네 생각은 어떤가. ”
“ 어렵지만 그 길 뿐이겠지요. ”
잘나가는 놈들은 굳이 아쉬운 소리를 감수하며 손을 뻗을 이유가 없다.
이스의 그 말은 일리가 있었고, 나 또한 그렇게 생각했다.
하나라도 아쉬운 쪽에 협상을 걸어야 먹히지, 배부른 놈의 졸린 귀에는 권유가 들리지도 않을 테니까.
밀리는 쪽에 붙으면 어쩔 수 없이 힘들어지겠지만, 단추 하나도 꿰지 못하는 것보다야 훨씬 나았다.
애매한 놈은 애매한 대로 시간만 끌다 그칠 가능성도 높아 보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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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인 부족은 열둘이고, 그 부족에서 하나씩 선별식에 참여 할 대표를 선발한다.
선별식은 강자존이라는 사상에 맞게 거행되는데, 독살시도나 암살, 정면에서 치고 박는 것까지 전부 허용한다고 한다.
죽이거나 꺾어서 한 명이 남을 때 까지 계속된다는, 그야말로 살벌한 야생의 논리를 그대로 옮겨 담은 행사였다.
약육강식이 야생의 기본이니까.
“ 으으……. ”
짐을 꾸리는 나를 보며 헬레나가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상인 놈에게 복수를 하고자 제국에 들어가려 했을 때와 다르게위험하다는 이유로 말릴 수도 없었던 탓이다.
돌아가는 꼴이 그만큼 심각하다는 소리다.
물론 집착 심한 헬레나가 내가 순순히 가겠다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충분히 반대를 했고, 자신도 꼭 같이 가겠다며 떼를 쓰기도 했다.
더구나 엘렌도 놔두고 갈 생각이었기에 더욱 격렬한 반대를 맞이했었다.
불과 세 시간 전 까지는.
“ 너무 걱정하지 마. 이브도 같이 가니까. ”
“ 그렇긴 하지만… 지금이라도 생각을 바꾸면 안 돼? ”
“ 헬레나도 알다시피 가만히 넋 놓고 있을 수 없는 상황이잖아. ”
선별식에서 공을 세우려면 당연히 그만한 능력이 있어야 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헬레나나 엘렌은 최고의 인재가 아닐 수 없었지만, 워낙 화려하기에 데리고 갈 수가 없었다.
나는 그 점을 강조하며 밤새도록 육체적인 설득을 했었다.
“ …꼭 무사히 돌아와야 해. ”
그러다 결국 할 말이 궁해졌는지잘 다녀오라는 한 마디만을 힘겹게 내뱉었다.
이브와 함께하기에 크게 위험한 일은 없을 것 같지만, 세상일은 어떻게 굴러갈지 모르기에 나온 걱정이리라.
나도 그를 알기에 교단에서 꾸준히 보내주는 성수도 챙겨두었고, 무기도 넉넉하게 준비했다.
성수는 몰래 들여오는데다 생각지도 못하게 받은 것이라 얼마 없기는 해도효과가 뛰어나기에 든든했다.
이 대륙에도 몬스터의 피를 가공해 만든 포션이 있기는 하나, 성수는 그보다 효과가 더 좋았으니.
처음 이 이야기를 꺼냈을 때, 굳이 내가 가야하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우리 침착하신 장인어른의 추천도 있고, 나 또한 그 생각에 동의했기에 이렇게 길을 나서기로 정했다.
더구나 나 혼자 가는 것이 아니라 여러 상황에서 대응할 능력을 갖춘 이브가 함께한다.
든든하기게 두렵지 않을 만도 했다.
“ 저어, 대공님… 준비 다 됐어요. ”
양반은 못 된다는 걸까. 마침 똑똑,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이브가 그 틈으로 고개를 슬며시 내밀었다.
“ 고마워. 나도 준비가 끝났으니까, 슬슬……. ” “ 잠깐만. ”
막 출발하려 몸을 일으키려던 차, 헬레나의 목소리가 발목을 잡았다.
이번에는 무슨 일인가 싶어 헬레나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내가 아닌 이브를 바라보는 시선을 볼 수 있었다.
“ 이브랑 잠깐 둘이서 할 말이 있으니까… 잠시만 기다려 줄래? ”
할 말이 있다.
그를 말하는 헬레나의 눈빛에 힘이 있는 걸 보니 꼭 해야 할 말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두말 않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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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나가 자리를 뜨면 자연스레 소란이 일기 마련이고, 그 소란은 입에서 입으로 퍼진다.
다만 헬레나가 자리를 잡고 있으면 그럴 일은 없으며, 당연한 일이 이루어지고 있기에 의심의 눈길을 피할 수도 있었다.
바늘 가는 곳에 실 간다고 하던가.
헬레나의 집착과 광기는 이미 세상에 알려진 지 오래로, 그를 증명하듯 헬레나 크라우저는 그 남편 지온이 있는 곳에 머무른다.
크라우저 공작령의 영민들, 더 나아가 왕국 내에서도 가히 상식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렇기에 지온은 헬레나를 두고 수인국으로 가기로 결정을 굳혔다.
설마 지온이 떠나는데 헬레나가 그를 두고만 보겠냐는 틈을 찌른 행위였다.
이는 이스와 이야기를 나눈 뒤, 그 상황을 해결할 만한 권한과 힘이 있는 사람이 지온밖에 없다는 결론에 따른 행동이었다.
더구나 공작령의 마법사 이브도 붙어있다.
내가 키운 남자의 역량이라면 마스터가 상대라도 도망칠 수는 있다.
헬레나는 편애가 아니라 냉철한 눈으로 그런 결론을 내렸음에도걱정 때문에 지온을 보낼 수가 없었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하더라도 그랬었다.
늘 당해왔던 그 설득만 없었다면.
“ 준비 단단히 했어? ”
“ 네. 걱정 마세요. ”
책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앉은 헬레나가 걱정스러운 듯이 묻자, 이브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외견상 헬레나나 엘렌처럼 화려한 특징이 없어 조용히 다녀오기 좋은데다, 능력 또한 모자라지 않아 이번 일에 적격이다.
헬레나는 한 땅의 영주로서 그를 잘 알지만, 마지막으로 다짐을 받고자 이렇게 자리를 마련했다.
“ 그래. 지금 지온의 실력이나 네 힘을 고려해보면 무사할 거라 생각은 해. 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긴장은 놓으면 안 돼. 알지? ”
“ 네. 잘 알아요. ”
자만과는 거리가 먼 성품인데다, 지금 가는 길이 위험하다는 것도 안다.
헬레나는 이브의 표정과 평소보다 훨씬 딱딱한 느낌이 드는 목소리를 들으며 불안했던 마음을 제법 가라앉혔다.
“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안심이야. 하지만, 너도 몸 조심해. ”
불만스러운 출발이기는 했으나 여전히 빠져서는 안 될 사람이며, 같은 남자의 품에 안기며 동질감이 싹텄다.
젊음이라는 큰 선물도 주었다.
그러니 헬레나가 이브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도 당연했다.
이브도 그 진심을 깨달았기에 약간 감격에 겨운 듯, 눈에 한층 더 힘을 주며 답했다.
“ 감사합니다. 대공님은 제 목숨을 걸어서라도, 또는 위험이 되는 사람을 전부 죽여서라도 지킬게요. ”
여차하면 앞뒤 가리지 않고 손에 피를 묻히겠다는 오싹한 뜻이 담겨 있었으나, 헬레나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모를까, 같은 수준의 집착을 품은 사람끼리 통하는 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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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이브는 몇 년 전까지는 엘프 ‘노예’ 마을이었으나, 지금은 보통 개척촌으로 바뀐 곳으로 말을 몰았다.
본래 내가 죽을 때 까지 노예로 부릴 생각이었지만생각을 바꿔 노예에서 해방시켰다.
그 대신 몇 가지 조건을 달기는 했는데,그리 버겁지는 않은 수준이었다.
노예의 멍에를 벗길 때부터 끊임없이 대화를 나눴고, 교류하고, 때로는 마찰을 겪었다.
그러다보니 콧대 높은 엘프들의 생각도 제법 바뀌었고, 이 공작령을 향한 시선에도 독기가 많이 빠졌다.
그 덕분에 편한 마음으로 엘프의 도움을 받아 수인국까지 갈 계획을 세우고, 행동으로 옮길 수 있었다.
수인국으로 가려면 엘프들의 영역을 가로질러 가는 것이 가장 빨랐기 때문이다.
“ 어서 오세요. ”
약초밭이 가득한 마을에 다다르자, 미리 기다리고 있던 여자 엘프가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맞았다.
솔선해서 우리를 이용해야 한다 주장했던 에일렌이었다.
예전 내 입장에서는 여러모로 껄끄럽기 짝이 없었던 여자였지만, 세월의 힘이 참 대단하긴 했다.
지금 와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부드럽고 싹싹하게 굴어댔으니까.
“ 아. 오늘 인솔자가 에일렌이었나? ”
진심어린 반성과 양보가 잘 섞인 덕에 제법 편한 관계가 되었으나, 내가 그녀를 편히 부르는 것은 여전했다.
본래 관계가 나아졌을 때부터 존댓말을 쓰려 했는데 에일렌이 극구 반대한 결과였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그 도도했던 여자가 이토록 허리를 잘 숙인다는 생각에 내심 참 놀랐었는데…….
“ 네. 마침 교대도 다 마친 참이었어요. 어머, 이브 님도 오셨군요. ”
“ 아, 안녕하세요…? ”
에일렌이 먼저 반갑게 인사를 건네자, 이브도 수줍게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이브를 님이라 부르는 건 우리 영지 내에서 그 직위가 높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또 얼마 전에는 촌장직에서도 물러나기까지 했으니, 참 많이도 바뀌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브와 함께 말에서 내린 뒤, 에일렌 앞으로 다가가 입을 열었다.
“ 소식은 들었지? ”
“ 네. 우선 저희 행렬에 섞여 숲까지 가신 뒤, 거기서 빨리 이동하시려 하신다고요? ”
“ 그렇지. 수인국에 가려면 너희 영역을 가로지르는 게 확실하니까. ”
엘프는 자존심이 높고 외부와 교류를 거의 하지 않아, 자연스레 그 영역에 발을 들이는 이가 적다.
지금은 좀 더 문을 크게 여느냐 마느냐에 기로에 서 있는 듯싶지만, 아직은 결정이 나지 않았다.
우리로서는 그 덕분에 눈치 보지 않고 편히 이동할 수 있어,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 하필 그 냄새나는 수인들 틈에 섞이셔야 한다니… 정말 고생이 많으시겠어요. ”
에일렌은 비꼬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안타까운 마음에 한 마디 건네는 모습을 보였다.
더구나 수인들이 보통 사람과 다르게 진한 체취가 난다는 건 유명한 사실이라 반박할 수도 없었다.
괜히 편을 드는 것도 꼴이 이상했고.
“ 냄새가 나 봐야 거기서 거기겠지. 아무튼, 우리는 어디에 타면 될까? ”
“ 네. 저쪽에 짐마차를 마련해 뒀어요. 제가 앞장설게요. ”
에일렌은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은 채 등을 돌려, 마차가 있는 곳으로 앞장섰다.
묘하게 둔부를 강조하는 듯한 걸음걸이라 보는 사람이 고개를 갸웃거릴 지경이었다.
자연스러운 위화감이라는 말도 안 되는 말이 떠오르기도 했다.
이브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내 옆에서 몹시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 왜 굳이 엉덩이를 살랑살랑 흔드는 걸까요? ”
“ 글쎄. 굳은 몸이라도 푸는 것 아닐까. 말을 타고 왔으면 그럴 만도 하잖아. ”
“ 아……. ”
아, 는 무슨.
눈치 없는 내가 딱 봐도 누군가를 유혹하는 몸짓인데도, 이 순진한 아이는 내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듯 감탄하기까지 했다.
쉽게 사기를 당할 것만 같은 순진함에 한숨이 절로 나올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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