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의 기둥서방이 되었다-131화 (131/192)

〈 131화 〉 공작회의 #3

* * *

“ …후우. ”

점심 식사가 끝나고알론의 무거운 한숨이 식당을 뒤덮었다.

드디어 본론에 들어갈 기미가 보이자, 나도 자세를 바로하며 그가 내뱉을 한 마디를 기다렸다.

적당한 긴장감 덕분에 집중하기도 쉬웠다.

“ 다시 한 번, 바쁘신 와중에도 이리 모여주신 것에 감사를 표하오. ”

세 공작 중 가장 나이가 든 남자이자 이 집의 주인이 운을 뗐다.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주의를 환기시키려는 듯한 인사치례였다.

“ 가장 연륜 있으신 칼리우드 공작께서 직접 초대장을 보내셨으니 모른 척 할 수도 없는 일이겠지요. 그래서… 무슨 일입니까? ”

아직까지 희뿌연 김이 오르는 차를 반쯤 비운 루크가 먼저 질문을 던졌다.

나도 몹시 던지고 싶었던 질문이었기에 잘했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에 알론은 먼저 입으로 짧게 숨을 토해내더니, 식탁을 톡톡 두드리며 목소리를 냈다.

“ 본래 두 분, 정확히는 두 공작가가 사이가 좋지 않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분간 그 반목은 멈춰야 할 듯싶소. ”

반목이라.

크라우저와 킬리네어 사이가 좋지 않음은 당연하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정작 킬리네어 측의 루크는 적대적인지 우호적인지 모를 만큼 애매하게 행동하곤 있지만… 그의 말이 틀린 건 아니다.

더구나 서로가 경쟁 관계에 있는 파벌의 머리이니까.

나도 그 점은 잘 알지만 굳이 칼리우드 공작이 그 점을 집으며 마찰을 멈추라 말했다.

크라우저와 킬리네어의 실질적인 관계를 떠나, 가만히 입 다물고 있던 중립파의 머리가 이렇게 말을 꺼낸 이유가 궁금했다.

나는 오늘 아침 헬레나와 미리 이야기를 나눈 대로대공으로서 공작을 대신해 물었다.

“ 반목이라. 그 점은 그렇다 치고,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던 공작께서 이렇게 말하시는 이유가 뭔지 참 궁금합니다. 그것도 우리를 전부 부르신 상태에서요. ”

“ 음. 마침 그에 대해 설명하려던 차였습니다. 이보게! ”

알론이 식당 문쪽을 향해 크게 목소리를 내자기다렸다는 문이 열렸다.

그러곤 서류더미와 같은 두꺼운 종이다발을 품은 하인 하나가 들어오더니, 그 서류더미를 조심스레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알론은 하인의 노고를 간단히 위로한 뒤, 급히 자리를 뜨는 하인의 움직임에 맞춰 종이다발을 집어 들었다.

자세히 보니 핀으로 고정한 제법 묵직한 서류더미가 셋이었다.

그는 그 중 하나를 나와 루크에게 건네며 말했다.

“ 우선 훑어보십시오. ”

훑어보라니 훑어봐야지.

나는 헬레나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서류에 적힌 빼곡한 글자들을 읽어나갔다.

하루 단위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빼곡하게 적힌, 일종의 일기와도 같은 보고서였다.

나는 숨을 죽인 채 그 보고서를 읽어나가다, 천천히 고개를 들며 알론에게 물었다.

“ 제국이 이런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고요? ”

“ 음. 아시다시피 내 영지는 수인국에서 질 좋은 옷감을 바로 들여오는 곳입니다. 즉, 수인국과 교류가 있으며 자연스레 왕래할 수 있다는 뜻이지. ”

“ 그 왕래하는 사람을 이용해 이런 정보를 얻으셨다는 뜻이겠지요? ”

“ 바로 보셨소. 비록 수인국이 우리 왕국과 멀리 떨어져 있다고는 하나 가만히 내버려둘 만큼 만만하지도 않지요. 거창하게 간자를 보낼 것 까지는 없으나, 거래를 위해서라도 돌아가는 상황 정도는 파악해 둬야 하고.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습니다. ”

나는 알론의 목소리를 들으며 다시 보고서로 시선을 떨궜다.

하루하루 있었던 일을 꼼꼼하게 기입했기에 많은 글자가 쓰여 있으나, 그 내용은 한 줄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껏 가만히 있던 제국이 수인국에 은밀히 접촉 중이라고.

“ 은밀한 접촉이라……. 동맹입니까, 아니면 압박입니까? ”

“ 동맹이라 생각합니다. 아무리 제국이라 하더라도 수인국과 정면으로 싸우기는 부담스럽기 때문이지요. ”

“ 그렇죠. 옆구리가 빌 테니까. ”

루크는 알론의 답을 들으며 턱을 쓰다듬었다.

제법 깊은 고민에 빠진 것을 보니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경우를 생각하는 듯싶었다.

그 또한 제법 깊은 생각을 할 줄 아는 인간이었으니.

나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곧 알론이 던진 말뜻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

“ 전쟁이 날 가능성이 있으니 힘을 합치라는 말씀이시군요. ”

“ 눈치가 빠르시군요. 서로가 서로의 이익을 지키는 것이 당연하고, 그 이익을 더 얻으려 하는 것 또한 당연한 생리입니다. 허나… 이럴 때는 잠시 미뤄두는 것이 좋을 거라 생각합니다. ”

큰일을 위해 뜻이 맞지 않는 사람과도 잠시 손을 잡아라.

흔히 오월동주라 표현할 만한 상황이라고 알론은 생각하는 듯하나, 그렇게까지 사이가 나쁜 건 아니었다.

껄끄럽고 가까이하기 싫다는 건 변함없지만 현실이 그랬다.

루크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입꼬리를 슬쩍 들어 올리며 웃었다.

“ 칼리우드 공작께서는 약간 오해를 하시는 듯한데… 킬리네어와 크라우저 사이가 썩 나쁜 건 아닙니다. 물론 저의 친부 알버스 킬리네어와 이미 목이 잘린 아그네스가 큰 무례를 저지르긴 했지만… 그건 그들의 문제일 뿐이지요. ”

알버스와 아그네스. 우리 입장에서, 그리고 루크의 입장에서도 썩 듣기 편한 이름이 아닐 텐데도 거리낌이 없었다. 오히려 후련하기 짝이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알론은 그것이 의문이었는지, 고개를 슬쩍 갸웃거리며 물었다.

“ 두 사람은 공작의 혈육일 테지요. 그런데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으십니까? ”

“ 예. 아그네스는 제 주제를 몰랐고, 알버스는 너무 오만했습니다. 귀족다움을 품고 당당한 것은 좋았지만 그게 지나쳐서 오만해져버린 불쌍한 남자이지요. 그러니 망종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것도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또……. ”

분명 제 가족임에도 남 일처럼 대하는 루크가 이질적이기 짝이 없었다.

다만, 곧장 말을 이어간 덕에 루크가 왜 이런 태도를 보이는지 조금 이해가 갔다.

대를 이을 장남이 아닌 차남으로 태어나 받아 온 대우에 불만이 많아 보였으니까.

“ 아무튼, 제 사적인 이야기는 이쯤 하지요. 지금 중요한 건 제국의 동향을 주시하며 힘을 모아야 할 시기라는 걸 잘 알아두는 것 아니겠습니까? ”

“ 맞는 말씀이오만… 듣기 영 편하지는 않으시겠죠. ”

“ 하하. 공작께서는 저 루크를 일단 이득을 우선하는 남자로 아시는 모양입니다. 뭐, 그럴 수도 있지요. ”

하지만. 루크는 잠시 말을 끊은 뒤, 느긋하게 팔짱을 끼며 숨을 골랐다.

어찌 보면 돈만 밝히는 졸부라 돌려 말하는 꼴이었으나, 그를 알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넘겼다.

아주 약간이나마 기분 나쁘다는 기색을 보일만 했음에도.

“ 만약 이 나라가 멸망할 위기에 쳐했다고 가정을 해 보죠. 저나 저를 따르는 귀족들은 귀족다움을 중시하지만, 그 대외적 인상이 좋지 않으니… 여차하면 자기 보신만 우선한다 생각하실 수 있을 겁니다. ”

“ 으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킬리네어 공작께서 혹여 기분이 상하셨다면……. ”

“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실익을 좀 더 따지는 편이기는 합니다만, 아무튼 이야기를 이어 가지요. ”

크흠. 루크는 다소 당황한 기색의 알론을 달래느라 끊긴 흐름을 헛기침 몇 번으로 되돌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 자기 보신적 성향 때문에 나라가 멸망해도 가문을 보존했다고 칩시다. 그러나 예전만 하겠습니까? 공작이라 한들 패망한 나라의 물 빠진 귀족에 지나지 않으며, 그 입지 또한 점점 좁아질 겁니다. 안 그렇습니까? ”

맞는 말이다.

아무리 공작이라 한들 왕국이 있었을 때야 공작이지, 왕국이 망하고 나서도 공작으로 살아갈 수는 없을 터였다.

체급이나 나라에서 쌓아 온 공이 없기에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일단 가문이나 영지를 보존하기 위해 적에게 붙어 도움을 줬다 한들 배신자라는 딱지 속에 평생을 살아야 하고, 제국 입장에서도 그런 배신자를 가까이 두기가 찝찝할 터였다.

통수도 한 번이 어렵지, 두 번부터는 쉬이 할 수 있을 테니까.

일이 잘 풀렸다 쳐도 영지가 일부 압수당하고, 작위도 내려간다.

그리고 가장 나쁜 상황은 몰리고 몰린 끝에 비참하게 죽는 길이겠지.

“ …옳으신 말입니다. ”

“ 그렇지요. 결국 제 보신을 위해 주변을 팔아넘긴다 한들 잠시 뿐, 비참하게 추락한다는 건 변함이 없습니다. 그건 공작으로서의 자존심이 허락지 못하지요. ”

자존심이라.

어찌 보면 귀족파의 수장다운 말이기도 했으나공작다운 가치를 품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위기에 처해도 이런 태도를 바꾸지 않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만약 끝까지 뱉은 말을 지킨다면…….

“ 아무튼, 상황이 그렇다면 저는 거리낌 없이 손을 잡을 겁니다. 이게 제 결론입니다. ”

“ 음. 공작의 진심은 아주 잘 이해가 되었소. 덕분에 한 시름 놓겠구려. 크라우저 공작께서는 어떻습니까? ”

어떻게라. 나라면 어떻게 답할까 고민하는 사이, 헬레나의 눈빛이 맹수처럼 날카롭게 빛났다.

“ 만약 정말로 제국이 왕국에 전쟁을 일으킨다면… 가장 높은 자리에 앉은 인간부터 피로 대가를 치러야 할 겁니다. 제 소박한 바람을 해치려는 대가는 아주 크니까요. ”

헬레나에게 던진 질문이었으니 내가 답할 수는 없을 노릇이다.

헬레나도 그를 알기에 나지막이 몇 마디 했으나, 그 내용이 흉흉하기 짝이 없어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그 증거로 루크나 알론의 어깨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알론은 그 상황에서도 가볍게 손뼉을 친 뒤,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깨가 떨리고 있음에도 침착한 것을 보니연륜이 어디 가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 여러분의 의견이 하나로 모였으니 일단 안심입니다. 내뱉은 말을 꺾으실 분들도 아니니까요. ”

“ 그야 그렇지요. 그런데, 전하께서는 이 일을 아십니까? ”

루크가 새삼 깜빡하고 있었던 일을 거론하자, 알론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물론입니다. 여러분께 초대장을 보낸 그 날, 전하께도 따로 사람을 보내 소식을 전해 두었습니다. 공작들이 모여 논의를 할 거라는 것도 포함해서요. ”

“ 그렇다면 괜찮겠지요. ”

“ 예. 그렇게 되었으니… 지금부터 각 공작께서는 내부 정리를 포함해 정보 수집에 조금 더 주의를 기울여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저 또한 그리 하는 중입니다. ”

할 것이다가 아닌 하는 중이라는 말에서 칼리우드의 진심을 느꼈다.

일부러 거짓말을 할 사람도 아니고, 이런 거짓으로 이득을 얻을 상황도 아니기에 믿음이 갔다.

긴장을 풀어서 방심을 유도하면 유도했지, 일부러 신경을 곤두세우라고는 하지 않을 테니까.

나는 눈앞에 놓인 서류를 말끔히 정리한 뒤, 알론에게 시선을 던졌다.

“ 참. 기왕 말이 나온 김에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

“ 여쭤보고 싶은 것이라. 제가 답할 수 있는 거라면 답해 드리지요. ”

“ 칼리우드 영지는 예부터 수인국과 교류가 있는 영지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는 건, 그들의 문화에 대해서도 제법 아는바가 있으시겠지요? ”

“ …깊은 속사정까지는 모르지만 어느 정도 잘 아는 편이지요. 오늘 내로 제가 아는 내용을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말로 꺼내는 것보다 그 편이 더욱 좋겠지요. ”

본래 회의가 끝나면 곧장 돌아갈 생각이었으나, 직접 정리를 해서 준다고 하니 사양할 수도 없을 노릇이다.

더구나 내가 바라 마지않던 일이었기에 감사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었다.

.

“ 오. 제가 머물렀을 때랑 별 차이는 없네요. ”

칼리우드 공작이 직접 작성해 준 보고서를 받은 그날 밤.

엘렌은 내가 내미는 보고서를 쭉 훑으며 약한 감탄사를 터뜨렸다.

마침 교차검증을 쉽게 할 수 있겠다 싶어 보여줬는데, 이로 인해 칼리우드 공작의 신뢰도가 한층 더 높아졌다.

구라는 안 쳤다는 뜻이니.

“ 그럼, 이 강자존이라는 것도 사실이야? ”

“ 네. 수인국은 대를 이어 왕을 하는 보통 사람들과 다르게 강한 놈이 옥좌에 앉을 자격이 있다 생각해요. ”

혈통이 아니라 힘으로 왕을 뽑는 구조라.

참 원시적이면서도 신기하다는 느낌이 강했다.

어찌 보면 합리적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한편으로는 통합이 잘 될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그러나, 여태껏 잘 사는 걸 보면 그 점도 크게 문제없어 보였다.

왕이 되려는 자는 힘과 지능을 시험받게 되는데, 지능보다 힘을 조금 더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비율로 따지면 힘이 6, 지능이 4 정도 되지 않을까 싶다.

“ 그런 나라가 제국과 손을 잡으면… 참 끔찍하겠어. ”

그러잖아도 태생부터 뛰어난 능력을 타고나는 것이 보통인 수인들인데, 그것들이 제국 편을 들면 참 골치 아플 것이 분명했다.

더구나 제국은 제국답게 강한 국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 이걸 어떻게 하면 좋을까. ”

“ 가장 쉬운 방법은 제국의 머리를 죽이는 거지만… 먼저 시비를 걸면 손해가 너무 커. ”

헬레나는 평화가 깨질 생각에 짜증이 난 탓인지, 광기에 빠졌을 때나 할 법한 소리를 냈다.

극단적이고 과격한 소리 말이다.

더구나, 허무맹랑한 소리가 아니라는 점이 더욱 간담을 서늘케 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엘렌까지 힘을 합하면 가능성이 더욱 높아질 테고.

그저, 헬레나도 그렇게 할 경우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되도록 꺼리는 눈치였다. 참 다행히도.

“ 그래. 시비는 걸어왔을 때 치는 걸로 하고, 일단은 정보부터 캐내야 할 것 같은데……. ”

“ 그야 그렇지. ”

칼리우드 공작이 캐내 온 내용을 의심하는 건 아니나, 그도 말했듯이 계속 정보를 얻는 것이 중요하다.

한 번 얻어냈다고 해서 끝나는 일이 아니니만큼, 상황이 안정될 때 까지는 끈을 풀어야 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단, 그렇다고 해서 영지 전체에 비상을 걸 생각은 없었다.

어렴풋이 전조가 있을 뿐 전쟁이 터진 것도 아니거니와, 벌써부터 난리를 피우다 피로에 지칠 수도 없을 노릇이었으니.

“ 아. ”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며 생각을 정리하던 중, 뇌리에 번갯불이 튀어 올랐다.

정보를 캐낸 뒤에 할 일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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