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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기둥서방이 되었다-130화 (130/192)

〈 130화 〉 공작회의 #2

* * *

남의 집에 머무르면 자기 집에 있을 때 보다 긴장하기 마련이다. 눈치라도 한 번 더 보고, 편하지 않은 구석이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 남의 집이 공작의 거처라면 더더욱.

“ 실례합니다. 잠시 안에 들어가도록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

똑똑. 이곳 하인이 무언가 용건이 있는 듯 문을 두드렸다.

꿇릴 것이 없었던 나는 당연히 알겠다고 말하며, 하인을 안으로 들어오도록 했다.

“ 음. 다들 편히 쉬시고 계셨나 보군. ”

그러나. 하인 대신 얼굴을 드러낸 중년 남성이 나를 약간 놀라게 했다.

국왕의 생일파티 때나 몇 번 보았을 뿐 친분이라고는 없던 이 집의 주인이 들어왔으니 그럴 수밖에.

“ 예. 신경써 주신 덕분에 아주 편안해요. ”

“ 그러시다니 참 다행입니다. 신경을 쓴 보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침대에 앉아 나와 노닥거리던 헬레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 공작 쪽으로 다가가 악수를 청했다.

동작이 워낙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빨라 위화감이라고는 없었다.

마스터에 걸맞은 순발력이었다.

칼리우드 공작은 헬레나의 손을 맞잡으며, 천천히 헬레나의 뒤로 다가오는 나를 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 대공께서도 오셨군요. 그러고 보니… 이렇게 사석에서 만나는 건 처음이었던가요. ”

“ 예. 죄송하게도 경황이 없어 연락도 제대로 주고받지 못했네요. ”

“ 그러시다면 나 또한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서로가 할 일이 많다보니 참 고생스럽군요. ”

알론 칼리우드, 현 칼리우드 공작은 무뚝뚝해 보이는 인상과 다르게 대화를 제법 부드럽게 이끌어 나갔다.

덕분에 어깨에 들어갔던 힘이 약간 풀리는 것 같았으나 완전히 긴장을 놓을 수는 없었다.

그 또한 공작이니까.

“ 이렇게 직접 찾아오신 걸 보면… 무언가 하실 말씀이라도? ”

“ 특별히 이렇다 할 만 한 이유는 없습니다. 그저 손님을 초대한 입장으로서 대접이 소홀했는지, 불편한 것은 없는지 확인 차 들렀을 뿐이니까요. ”

공작은 내 물음에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기색으로 답했다.

또, 그가 말하는 것도 하나같이 당연한 일이었기에 미심쩍은 구석도 없었다.

같은 공작을 초대해놓고 얼굴조차 비추지 않을 수는 없었을 테니.

“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편히 지내고 있습니다. ”

“ 편하게 지내신다니 다행입니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식사, 혹은 다른 물건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말씀하시고요. 하인을 시켜 방으로 가져가도록 조치를 하겠습니다. ”

공작은 제 할 말을 전부 마쳤는지, 가벼운 인사를 마치고 방을 나섰다.

나는 점점 멀어져가는 공작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근처에 서 있던 하인을 불러 물었다.

“ 아. 그러고 보니 킬리네어 공작은 어떻게 됐습니까? ”

“ 킬리네어 공작님 말씀이십니까? 아직 도착하시지 않으셨습니다. ”

“ …그렇군요. 고맙습니다. 물러나도 좋아요. ”

“ 예에, 알겠습니다……. ”

여전히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하인이 밖으로 나가자, 방 안에 침묵이 찾아왔다.

아주 잠깐의 침묵이었다.

헬레나가 눈을 반짝이며 질문 하나를 던졌기 때문에.

“ 참. 옷감은 언제 사러 갈 거야? 지금이 딱 좋을 때라고 생각하는데. ”

“ 지금? 지금이라……. ”

내일은 칼리우드 공작 주최 하에 회의가 열릴 터.

헬레나가 말한 대로 옷감을 사오려면 지금밖에 없었다.

회의가 끝나면 곧장 이곳을 벗어나 집으로 돌아 갈 예정이니까.

고로, 나는 그 말이 옳다 생각하며 몸을 일으켰다.

시장을 둘러보며 시간을 때우다 보면 얼마 없던 긴장감도 가실 것 같았다.

“ 네? 옷감은 왜요? ”

자기가 낄 때가 아니라 생각했는지, 여태껏 입을 다물고 있던 엘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헬레나에게만 이야기를 해 뒀기에 지금처럼 모르겠다는 모습을 보일 만 했다.

나는 약간 치밀어 오르는 쑥스러움을 무릅쓰고 최대한 덤덤하게 이야기했다.

그러자, 엘렌의 눈빛이 묘한 기대감에 물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헬레나와 다르면서도 비슷한 반응이라 무심코 마른 침을 삼켰다.

.

칼리우드 공작령의 시장은 사람의 왕래가 많아 활기가 넘쳤다.

다른 영지에서 옷감을 사러 온 이들도 부지기수였고, 끼리끼리 소규모로 사들이는 이들도 있었다.

바늘 가는 곳에 실 있다는 말처럼, 옷감이 많은 곳이다 보니 그와 관련된 가게도 많았다.

나는 혹시나 싶은 마음에 옷가게부터 살폈지만 원하던 것을 찾을 수는 없었다.

결국 계획했던 대로 옷감 자체를 사는 것이 답이었다.

─크라우저 공작령은 다크엘프가 득실댄다더니… 진짜였나 보네.

─소문대로 참 시꺼매.

시장을 돌자 작게 수군거리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내가 들을 수 있을 정도니 엘렌 또한 당연히 들었을 테지만, 표정에 미동조차 없었다.

고작 이 정도에 흔들릴 멘탈은 아니겠지만… 새삼 갈 길이 멀다는 것을 느꼈다.

“ 흑단이라. 이걸로 할까. ”

이 시대의 속옷은 대체로 하얀 천으로 만드는 것이 대부분이고, 그 외에는 맑은 빛이 느껴지는 색을 주로 삼았다.

하늘색이나, 연두색 같은 계열의 색상들이 그 예라고 할 수 있겠지.

“ 흑단으로? ”

내가 검은 비단을 들어 보이자 헬레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검은색을 꺼리는 것은 아니지만 몹시 의문스러워하는 눈치였다. 상식적인 선택은 아니니 그럴 만도 했다.

“ 나는 검정이 마음에 들거든. 혹시 싫어? ”

“ 싫기는. 전혀 안 그래. 그냥 신기해서 그랬지. ” “ 그럼 다행이다. ”

혹시나 마음에 안 들면 어쩌나 싶은 생각을 했는데, 다행히 그런 것은 아닌 모양이다. 덕분에 망설임 없이 흑단 몇 필을 사들여, 곧장 칼리우드 공작 저택으로 돌아갈 수 있을 듯싶었다.

가끔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긴 하지만 아쉬운 쪽이 발품이라도 팔아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말을 맡겨 둔 곳으로 걸음을 옮기던 중, 근처를 지나던 한 마차에 절로 눈이 갔다.

어디서 많이 본 문양을 새긴 마차였다.

더구나, 그 마차도 우리를 본 적이 있다는 듯 앞으로 가다말고 천천히 멈춰 섰다.

그럴 만도 하지.

마차에 새겨둔 문양은 명백히 킬리네어 공작의 것이고, 조금 멀리 떨어진 마차에서 내려 다가오는 남자 또한 그 마차의 주인이었으니.

“ 오. 대공께선 벌써 도착하셨습니까? 역시 빠르시군요. ”

마차의 주인, 루크 킬리네어가 반가운 듯이 다가와 손을 뻗었다.

나는 그 손을 마주잡으며 가볍게 인사를 나눈 뒤루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 예. 어쩌다보니 빨리 오게 되었습니다. 공작께서도 제법 이른 때에 오셨군요. ”

“ 왕국의 공작 중에서도 가장 연륜이 깊은 분의 초대가 아닙니까. 제 간땡이가 아무리 부었어도, 그런 분의 초대를 소홀하게 다룰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

이미 세대교체가 된 킬리네어나 크라우저 공작가와 다르게칼리우드 공작가는 아직 알론 칼리우드의 세상이다.

루크는 그를 은근히 꼬집으면서도 실없이 웃고 있었다.

“ 이런. 공작님도 같이 오셨나봅니다. 여전히 금슬이 좋으시군요. ”

“ 네. 킬리네어 공작께서도 건강해 보이시니 다행이네요. ”

루크는 내 뒤에 가만히 서 있던 헬레나를 보고는 급히 인사했다.

어찌 보면 공작을 병풍취급 하는 것이 아닐까 싶은 오해를 살 만도 했으나, 헬레나는 덤덤하게 인사를 받았다. 겉으로 티는 내지 않아도, 금슬 좋다는 말이 제법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 아참. 그나저나 제가 저번에 빌려드린 신분은 결국 쓰시지 않은 모양이더군요. 결국 스스로 다 해결하셨다고 들었습니다. ”

다소 형식적인 인사를 주고받은 뒤, 루크가 생각지 못한 일로 운을 뗐다.

그 또한 상인 놈 때문에 크게 손해를 본 사람 중 하나이니만큼 이 주제를 언급할 자격이 있었다.

“ 예.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혹시 서운하셨나요? ”

“ 조금 서운했지요. 겉으로나마 대공님을 제 아랫사람으로 부릴 기회가 언제 또 있겠습니까? ”

“ 오호. 생각해 보니 그렇게 해석을 할 수도 있었겠군요. 공작 입장에서는 몹시 안타깝겠습니다. ”

“ 하하. 왜 아니겠습니까. ”

헬레나나 엘렌에게 있어 진즉에 화를 내고도 남았을 주제이건만, 사실상 우스갯소리임을 아는지 무덤덤한 표정을 지키고 있었다.

덕분에 별 탈 없이 대화를 끝마치고, 함께 저택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 혹시 루크 킬리네어와 조금 친해진 거야? ”

저녁 식사 후. 방 안에서엘렌의 도움을 받아 머리를 말리던 헬레나가 물었다.

겨울임에도 얇은 잠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보니 그 꿍꿍이가 은근히 보이는 듯 했다.

“ 친해져? 아니. 친하다고는 절대 생각 안 해. 오히려 더 거북하면 거북했지. ”

“ 정말? 그런 것 치고는 바깥에서 제법 즐겁게 얘기하던데? ”

“ 나름대로 분위기를 맞추려 노력했거든. ”

루크 킬리네어는 여전히 거북하고, 어지간하면 상대하기가 싫다.

각자 귀족파와 국왕파를 이끄는 머리이니만큼 대외적으로도 그 사이가 좋지는 않다.

그래서 킬리네어 공작가의 탐색관으로 위장을 하려 했었다.

설마 마찰을 빚는 상대의 아랫사람으로 위장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할 것 같았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루크에게 친밀감을 느끼는 일 따위는 없었다.

내 부탁을 들어준 것은 고마운 일이나, 그를 계기로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엔 몹시 찝찝했다.

그저 지금처럼 적당히 긴장감을 유지하는 편이 나아 보였다.

내 나름대로 분위기, 즉 킬리네어의 비위를 맞추려 했던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이 영지는 중립파의 영지이며, 귀족파의 거두도 있다.

칼라우드 공작의 초대에 응했다고는 하나, 그가 우리 편이라는 뜻은 아니다.

결국 똥개도 제 나와바리에서 반은 먹고 들어간다는 표현을 떠올리며,최대한 무난하게 넘기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다.

이 말을 뒤집어 생각해 보면, 지금 우리가 상황을 반도 못 먹고 있다는 뜻도 되었으니까.

“ 반도 못 먹고 들어가는 상황이라……. 맞는 말이야. 괜히 날 세워서 좋을 게 없으니까. ”

“ 그렇죠. 아무래도 남의 집, 하물며 중립파 파벌 거두의 영지이니 썩 편안하지도 않고요. ”

엘렌과 헬레나도 내 말에 공감했는지 가볍게 한 마디씩 거들고 나섰다.

그러다 갑자기 발작한 것 마냥 누가 나를 더 추켜세우나 경쟁을 했고, 그 탓에 과하게 열이 올랐다.

결국 내가 식히기는 했는데… 유난히 더 지치는 느낌이었다.

“ …미안해. ” “ 죄송해요. ”

“ 알았으면 됐어. ”

다행히 내 피곤함을 알았는지 알아서 고개를 숙였다.

덕분에 더 크게 싸울 일이 없을 것 같아 내심 안도했다.

“ 그런데… 정보를 캐내라고 하시질 않는데, 따로 생각하신 바가 있으신가요? ”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피로를 달래던 중, 침대 끝에 앉아있던 엘렌이 물었다.

다른 귀족의 저택에 들르면 귀를 열어놓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도 들으려 했었으니 당연한 물음이었다.

그저 이번에는 굳이 그래야 힐 필요를 못 느꼈기에 엘렌을 부리지 않았을 뿐이다.

“ 아니, 없어. ”

“ 아… 그러면 지금이라도 간단히 조사를 해 볼까요? ”

“ 괜찮아. 그러지 않아도 돼. 오히려 속내를 캐내려 하다가 내 속만 더 복잡해 질 것 같아. ”

애초에 공작 셋을 불러다 놓고 회의를 할 정도라면 그만큼 심각한 일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 일을 미리 알아봐야 머리만 아플 뿐, 별 대책은 없을 것 같았다.

더해, 어차피 내일이 되면 다 알게 될 일이라 급할 것도 없었다.

또 루크라면 모를까, 그저 조용히 살고 싶은 입장에선 굳이 얌전히 있는 칼리우드 공작의 약점을 잡아야 할 필요도 없어 보었고.

“ 급할 건 없어. 어차피 다 알게 될 일인데다 사람도 적잖아. 그 말은 즉, 지금까지 발 들였던 귀족들의 연회처럼 칼리우드 공작의 비밀을 캐낼 환경이 아니라는 뜻이라고 생각하거든. ”

“ 그런가요? ”

“ 그렇지. 물론 그 때도 별 생각 없이 네게 부탁한 거지만……. ”

어쨌든, 지금으로서는 엘렌을 시켜 기밀을 캐내려 애쓸 필요가 없었다.

그것이 내 결론이었고, 엘렌은 그 말에 따르겠다는 듯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앞서 말했듯, 어차피 내일이 되면 다 알게 될 테니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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