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화 〉 공작회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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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세지감.
흔히 세상 참 많이 변했다는 것을 조금 있어보이게 표현한 말인데, 요즘 들어 저 말이 자꾸 떠오르곤 했다.
세상보다는 내가 참 많이 바뀌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 후우……. ”
아직까지 한기가 쌩쌩히 도는 1월의 어느 날.
나는 저택 뒤편 연무장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는 중이었다.
맞은편에선 목검을 든 헬레나가 눈을 가늘게 뜨며 배시시 웃고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진즉에 몇 군데 얻어맞고 땅을 굴렀어야 했을 텐데, 이제는 그럴 일이 많이 줄었다.
그 뿐 아니라 헬레나의 틈을 노려 가볍게 몇 대 정도도 때릴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맞아도 크게 문제없을 만큼 약했지만 닿았다는 것에 의의를 뒀다.
그렇다 해서 재능이 뛰어나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그저 마스터의 정성어린 지도 덕분에 효율적이고 빠르게 성장한 덕이다.
다른 사람들이 목적지를 찾아 길을 빙 둘러 가거나 이리저리 해매일 때, 혼자 지름길로 내달린 셈이니까.
“ 음… 냄새나. ”
헬레나가 뒷문을 통해 저택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나를 보며 중얼거렸다.
겨울임에도 땀을 비 오듯 흘렸으니 냄새가 날 만도 했다.
“ 그래? 일하기 전에 얼른 씻어야겠네. ”
“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
곧장 연무장으로 통하는 저택 뒷문은 창고로 이어져 있어 평소에 사람이 잘 오지 않는 곳이다.
그래도 사람이 아예 안 오는 것은 아니기에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당연히 헬레나도 집의 주인으로서 그를 모르지 않을 텐데, 침실에서나 할 법한 행동을 서슴없이 하고 있었다.
“ 침대에서 늘 맡는 냄새라 그런가? 나도 모르게 길들여 졌나봐. ”
“ …그래, 그래. 조금만 참자. ”
헬레나가 내 품에 안겨들며 교태 섞인 목소리를 냈다.
대놓고 야릇한 분위기를 내고 있어 그런지 머리에 열이 오르는 느낌이었다.
덕분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침실에 들어가 머리를 식혀야 했다.
그 탓에 평소보다 조금 더 늦게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 둘 밖에 없어 다행이지……. ”
나는 다크엘프 마을에서 실전훈련을 하고 있을 엘렌과, 저택 방구석에서 마법 연구에 여념이 없을 이브를 떠올리며 한숨 쉬었다.
각자 할 일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평상시처럼 착 달라붙어 있었다면 한 시간 정도는 더 늦어질 수도 있었다.
헬레나도 그를 아는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일 뿐, 별 말 없이 일에만 몰두했다.
곧 찾아올 봄을 대비해 여러 가지 물자나가뭄 등을대비해 미리미리 예산을 모으기 위한 준비였다.
경우에 따라선 자구책이 없는 사람도 있으니까.
“ 참. 그러고 보니, 슬슬 칼리우드 공작령에 가야하지 않던가? ”
탁. 헬레나는 검토가 끝난 서류더미를 책상 구석에 고이 쌓아놓은 뒤, 나를 보며 물었다.
“ 아… 칼리우드 공작이 초대했었지. 워낙 일찍이 초대장을 보내서 깜빡 잊고 있었어. ”
나는 손뼉을 탁 치며 기억 구석에 처박아 두었던 일을 떠올렸다.
공작끼리 할 이야기가 있다는 명분 아래 초대장을 보낸 지가 벌써 한 달이라 그랬나보다.
그동안 가만히 놀고먹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으니.
공작은 할 일이 많기에 미리 일정을 조율해 두라는 배려였는데, 그 배려가 너무 빨라 문제였다.
만약 영영 잊고 있었다면 무례하기 짝이 없다는 평가를 받았을 테니까.
“ 크게 실수할 뻔했네. 요즘 너무 긴장이 풀려서 그런가? ”
“ 실수? 실수는 한 달이나 빨리 초대장을 보낸 칼리우드의 나사 빠진 행동이지. 지온은 아무 잘못 없어. ”
헬레나는 자기 탓을 하는 내가 안쓰러웠던지 칼리우드 공작을 까고 나섰다.
무지성으로 나를 옹호해주는 모습이 든든하기는 하나, 예나 지금이나 부담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
만약 여기서 또 내가 잘못이라고 하면 이야기가 끝이 없을 테니, 나는 적당히 고맙다는 인사로 흐름을 끊었다.
“ 아무튼, 이제라도 기억이 났으니 나름대로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은데… 헬레나 생각은 어때? ”
“ 예물 같은 것을 챙기자는 말이라면…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공작끼리 대화를 하자는 명분을 걸고 초대를 했으니, 우리는 몸만 가면 되지 않을까 싶어. 더구나 칼리우드 공작이나 그 가족들의 생일도 아니고. ”
생일이라.
이럴 때 보면 정말 귀족이라는 티가 난다는 생각이 든다.
그 가족의 생일이나 기념일 등을 파악하는 정치질의 기본을 늘 잊지 않는 모습 때문에.
물론 다른 사람이 보면 당연한 일 아니냐 할 수 있겠지만, 그 당연한 일을 당연하다는 듯 챙기는 모습에서 꼼꼼함을 느꼈다.
보통 크라우저 공작가와 같은 큰 조직의 머리는 사소한 일에 신경을 쓰지 않을 법도 했으니까.
그렇다 해서 다른 공작의 생일이나 기념일이 사소한 일이냐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었다.
그저 신중한 접근이나 급히 해결을 요하는 안건에 비해 그 중요도가 낮을 뿐이었다.
“ 음… 그러면 몸만 가는 걸로 할까. 혹시 모르니 여비만 조금 넉넉히 챙겨두자. ”
“ 여비? 뭐 사고 싶은 거라도 있어? 필요한 물자는 꼼꼼히 챙겨 둘 거라 구멍이 날 걱정은 안 해도……. ”
“ 칼라우드 공작령에 가 본 적은 없지만, 수인국에서 직물을 직접 수입하는 곳이잖아. 그래서 한 번 둘러보고 사 보려고. ”
“ 아……. ”
수인국에서 수출하는 옷감은 비싸기는 하나 구하기가 몹시 까다로울 정도는 아니다.
그저 칼리우드 쪽에서 다른 영지 곳곳으로 옮기는 데 배달비가 붙어 더 비싸질 뿐이다.
하지만 직접 영지를 찾아가면 그 돈을 아낄 수 있었다.
“ 그런데… 혹시 직접 옷을 짜려고? 이제 대공이니까 사람을 시켜서 만들면 되지 않을까? ”
“ 그래도 되긴 한데… 내가 직접 해야 편할 것 같아서. ”
“ 직접 해야 편해? 왜? ”
헬레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얼른 답해보라는 듯 재촉했다.
더구나 묘하게 은근한 불안을 내비치기도 했다.
아마 지금도 고이 보존하고 있는 웨딩드레스처럼, 엘렌이나 이브에게 옷을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닐까 싶었겠지.
이는 어디까지나 내 생각일 뿐이지만, 혹여 이 생각이 정답이라면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고 말하고 싶다.
“ 좀 천박한 속옷을 만들고 입혀 보고 싶어서. ”
반쯤 위장이라고는 하나, 설령 부부 사이라 해도 꺼내기 어려울 만큼 천박한 목적을 거리낌 없이 입에 담았다.
흔히 정상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경멸을 할 법도 했다.
어처구니없어 할 수도 있었다.
그러니 내 말에 자연스레 관심을 끊을 거라 생각했다.
“ 아……. ”
그러나, 헬레나는 생각했던 모습과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다.
부끄럽다는 듯 얼굴을 붉힌 채 옅은 미소를 지었다.
“ 정말… 지온도 짐승이라니까. 이미 암캐선언까지 다 했는데도 부족해? ”
“ ……. ”
그래.
내 아내는 이 대륙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집착의 소유자고, 그런 만큼 보통 사람과 다르게 반응하는 게 당연했다.
은근히 기뻐하는 것도 모자라 강한 기대가 담긴 눈빛까지 띠고 있어, 더 할 말이 없었다.
더구나, 말을 잘못 꺼낸 탓일까.
나는 이 날, 평상시보다 달아오른 세 여자를 달래느라 조금 더 힘을 써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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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우드 공작가는 중립파의 거두다.
또한 이 왕국의 삼대 공작가중 하나이기도 하다.
조금 거창하게 말하면 이 나라의 권력을 사등분하는 주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었다.
중립파는 말 그대로 중립을 고수하는 이들이며, 큰 일이 없는 이상 제 영역만 지키는 것으로 유명한 이들이었다.
그래서 제 잇속을 차리고자 하는 귀족파들도 그들은 피해가는 편이었다. 건드리지 않으면 조용히 있을 뿐이었으니까.
이런 중립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연스레 그를 지킬 힘이 필요하기 마련인데, 중립파에게는 그럴 만한 힘이 있었다.
당장 몬스터와 마주보고 사는 리슬링 변경백도 중립파 중 한 사람이며, 그 외에도 제법 쟁쟁한 면면들이 많았다.
그런 중립파의 거두가 자리 잡은 곳에 엘렌과 헬레나, 그리고 나까지 셋이 향하고 있으니 기분이 참 묘했다.
이브는 연구를 하기 위해 영지에 남았지만 크게 서운해 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늘 나와 붙어 있으려는 두 여자에 비해 집착이 약한 수준이기도 했고, 본래 한 자리에 머무는 것이 익숙하기도 한 덕이다.
“ 음……. ”
화려한 영지다.
마차 창문 밖으로 보이는 칼리우드 공작령을 보자마자 그런 생각이 들었다.
건물이 화려하거나 치장을 한 사람이 많아서가 아니라, 은근히 느껴지는 그런 화려함이었다.
직물을 수입하는 영지라 그런가?
척 보기에도 빛이 나는 듯한 옷감을 쌓아두고 파는 가게나, 그를 옷이나 다른 것으로 만들어 파는 가게가 많았다.
그러니 화려하다 느낄 수밖에.
“ 크라우저 공작님께서 도착하셨다! ”
거리를 구경하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기에 내심 깜짝 놀랐다.
우리가 왔음을 알리는 우렁찬 외침을 듣고 나서야 거대한 저택을 눈앞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저택의 생김새는 크라우저 저택과 비슷했으나 미세한 차이가 있었다.
척 보아도 화려하기 짝이 없는 킬리네어 공작가의 저택에 비하면 수수하기만 했다.
그러나, 그 수수함에는 단정함이 있었다.
정원의 구조나 길, 마구간에 이르기까지… 정돈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쉽게 말하면 하나같이 칼각을 이루고 있었다.
규율이 엄격한 군대마냥.
다만, 군대… 군대라.
군대를 떠올리자 갑자기 구역질이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았다.
“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오늘, 이렇게 초대에 응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마차에서 내리기 무섭게 집사 같이 보이는 남자가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여태껏 보아왔던 집사 중 가장 젊은 남자였다.
보통 연륜이 느껴지는 집사들만 봤던지라 상당히 신선했다.
“ 저도 반가워요. 칼리우드 공작님은 건강하신가요? ”
“ 예. 걱정해 주신 덕분에 아직 정정하십니다. ”
“ 그거 다행이네요. 나라의 굳건한 기둥께서 정정하시다는 소식만큼 든든한 것도 없죠. ”
헬레나는 집사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혀에 기름칠이라도 한 듯 매끄럽게 대화를 이끌어 나갔다.
이럴 때 마다 정말 본성이 소극적인 게 맞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몇 분 정도 이야기를 나누다, 집사가 어깨를 흠칫 떨며 고개를 숙였다.
저도 모르게 대화에 집중하느라 대접을 소홀히 했다는 이유에서였다.
나나 엘렌, 심지어 대화를 이끈 헬레나도 잠시 시간을 빼앗겼다 해서 화를 낼 사람들은 아니나, 젊은 집사는 그를 모른다.
그 탓에 쓸데없이 비장한 각오를 다진 듯한 기색까지 풍겼다.
아마 말리지 않으면 죽음으로 사과하겠다는 소리까지 나올 듯싶었다.
“ 정말 죄송합니다. 이 죄는 반드시 어떻게든……. ”
“ 괜찮습니다. 개의치 마시고, 이제 저택 안으로 안내해 주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급한 일도 아니니까요. ”
그 탓에 집사를 달래느라 또 몇 분 정도를 들여야 했지만, 참 다행이라 생각했다.
이런 멍청한 일로 사람 하나 잡으면 황당한데다 찝찝하기까지 할 테니까.
그리고, 헬레나 같은 여자와 이야기를 나누면 자연스레 넋이 나갈 만도 했다.
익숙한 사람이 봐도 여전히 매력적이었으니까.
“ 우선 오늘 하루는 여독을 푸시고, 회의는 내일 점심식사 후에 진행될 예정입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
우리가 머물 객실 앞에 다다르자 집사가 정중하게 되물었다.
방금 전만 해도 묘하게 호들갑스럽던 남자가 맞나 싶을 만큼 깔끔한 태도였다.
혹시 이중인격이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 정도로.
어쨌든, 나로서는 나쁠 것이 없었기에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헬레나도 나와 뜻이 같은 듯 조용히 입을 다문 채였다.
“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
“ 이해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욕실은 방 안에 마련되어 있으며, 시중이 필요하실 때는 테이블 위에 놓인 종을 울리셔서……. ”
집사의 친절하면서도 장황한 설명을 듣고 있으려니, 이곳이 귀족 저택이 아니라 호텔이라는 착각이 잠깐 뇌리를 스쳤다.
공작을 대접하는 셈이니 당연하다 볼 수도 있겠지만, 태도나 말투가 딱 호텔 직원 같은 느낌이었다.
물론 그것이 나쁘다는 건 아니다.
오히려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저 어딘가 정형화된 구석이 없잖아 느껴질 뿐이었다.
마치 이 저택 곳곳에서 엿볼 수 있는 칼각마냥.
“ 제 설명은 여기까지입니다.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
“ 알겠습니다. 그리고 짐은 저희가 직접 풀어 둘 테니 사람을 보내실 필요는 없습니다. ”
“ …아, 예. 알겠습니다. ”
우리는 떨떠름하게 답한 집사가 떠나가기 무섭게 객실 안으로 발을 들였다.
찾아올 손님을 신경 쓴 티가 제법 짙게 느껴지는 방이었다.
빈틈없이 꼭 맞는 가구 배치나 각 잡힌 이불, 청소 상태를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객실 내부를 빠르게 쭉 훑은 뒤, 구석에 놓인 가구에 시선을 두며 말했다.
“ 우선 짐부터 풀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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