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화 〉 교국으로 #7
* * *
보통 사제들이나 입을 법한 새까만 사제복에, 황금 실로 수를 놓은 검은 휘장을 목에 두른 중년의 남자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남자가 손에 등불을 들고 있었던 덕분에 갸름한 얼굴이나, 몸에 걸친 옷을 볼 수 있었다.
“ 누구시죠? ”
“ 아, 처음 뵙겠습니다. 부끄럽지만 이 교국에서 왕이라 불리는 리노 클레멘스라고 합니다. ”
목에 두른 휘장이 특이했을 뿐, 동네 목사님 같은 인상이라 보통 성직자인줄 알았는데… 교왕이라.
나는 내심 당혹을 금치 못하면서도, 단상에 등불을 두고 다가오는 남자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 지온 크라우저입니다. 교국의 왕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
“ 왕이라. 들을 때 마다 참 부끄러운 말입니다. 하지만 교국 사람이 아닌 분께는 이만큼 알기 쉬운 말도 없으니……. ”
교왕 리노는 곁으로 다가오자마자 내 손을 잡으며 연신 허리를 굽혔다.
말이나 태도가 왕이라 보기엔 너무 소탈해서 무심코 긴장이 풀릴 정도였다.
만약 지금 보여주는 모습이 다 계산된 행동이라면 아주 소름이 돋을 것만 같았다.
묘하게 꼼꼼한 손길이 찝찝하기는 했지만… 별 것 아니겠지.
“ 어찌 되었던, 이렇게 이른 시간에 오시게 해서 죄송할 따름입니다. 본래 손님을 모실 때는 그에 맞춰야 하는 것이 예의이거늘……. ”
“ 괜찮습니다. 조용히 만나는 것은 저도 바라는 바였고, 쓸데없는 잡음이 생기면 서로가 곤란할 테니까요. ”
“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
교왕은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내 옆자리에 앉았다.
등불이 오른 단상을 바라보고 나란히 앉아 있으니 기분이 참 묘했다.
마치 몇 번 발 들인 적도 없던 바에 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 소문은 익히 들었습니다. 소테른 왕국의 마스터를 훌륭히 지지해 주시는 분이 계시다고요. ”
“ …그렇습니까? 막상 부끄러운 일들을 많이 저질렀는데도 평이 참 좋군요. ”
나는 낯간지러운 칭찬에 머쓱함을 느끼며 최대한 겸손하게 답했다.
다른 나라 왕 앞에서 어깨에 힘주고 다닐 만큼 미치지도 않았지만, 무엇보다 왕의 소탈한 모습에 존경을 느꼈기 때문이다.
만약 은근히 화를 내도록 부추겼다면 나 또한 자연스럽게 목소리에 날이 섰겠지.
그 후에도 잠시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다, 교왕이 먼저 낯빛을 굳히며 낮은 목소리를 냈다.
“ 음. 크라우저 님도 이미 들어 아시겠지만, 직접 은총을 받는 이들은 특별합니다. 그 수가 극히 적어, 대륙 전체를 뒤져봐도 찾아내는 것이 결코 쉽지는 않습니다. 은총을 받았다 하더라도 그를 모르고 살다 눈을 감은 이들도 있을 테고요. ”
“ 예. 저희에게 축복을 내려 준 사제님께 들었습니다. ”
“ 그리고, 또 그 능력이 천차만별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희 교국 사람의 입장에선 능력에 따라 우열을 가리지 않습니다. 어떤 은총이던 간에, 신이 직접 손을 대었다는 점이 가장 중요하니까요. ”
설령 은총의 효과가 별 것 아니라 하더라도, 신성한 존재와 끈이 이어졌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교왕은 신을 모시는 사람으로서 그 점에 주목했고, 다른 교국의 성직자들도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밝혔다.
“ 어찌 보면 계시를 받았다는 것과 같다는 겁니까? ”
“ 그렇게 볼 수도 있고, 또 이해하기 쉽게 말씀드리자면… 신의 은총을 받은 이는 신의 아들이라 보시면 될 겁니다. 물론 엄밀히 말하면 다르지만, 간략하게 이해하시는 데에는 도움이 되겠지요. ”
어찌 보면 왕의 아들이 특별한 취급을 받는 것과 비슷한 걸까.
나는 애매모호했던 관계가 좀 더 뚜렷해지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성한 존재의 아들같이 여긴다면 이들이 호들갑을 떠는 것도 당연했다.
내 입장에서는 충분히 이해가 되는 설명이었다.
교왕은 제법 말을 길게 해서 숨이 찼는지, 짧게 숨을 고르고 말을 이어나갔다.
“ 그래서 본래 은총을 지니고 나신 분을 우리 교국 사람이 찾게 될 경우, 초대를 해서 최대한 예우를 하려 애씁니다. 성직의 길을 걷고 싶다면 당연히 환영하며, 선을 넘지 않는 한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도록 조그마한 도움이라도 드리려고요. 하지만……. ”
말꼬리를 흐리며 입을 다문 교왕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고, 무거운 한숨이 굳게 닫힌 입술 사이로 새어나왔다.
사람을 미치게 하는 법 중 하나가 말을 하다 마는 것이라 하는데, 다행히 미칠 정도는 아니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상상이 간 덕이다.
“ 제가 왕국의, 그것도 공작의 반려이기에 쉽사리 편을 들 수 없다는 거겠죠. ”
“ …정확하십니다. 만약 제가 일개 신도의 입장이었다면 파문을 당하더라도 열과 성의를 다하겠지만, 교국의 사람들을 책임져야 하는 위치에 있어 그것도 어렵습니다. ”
“ 예. 그것도 이해합니다. 많은 사람을 책임지는 위치에 계시니, 함부로 결단을 내릴 수도, 그들을 버릴 수도 없으시겠지요. ”
어찌 보면 혜택을 주려는 척만 하는 낚시에 당한 꼴이었으나, 속이 부글부글 끓거나 크게 실망하지는 않았다.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는 이유도 있었고, 죽을 듯이 미안해하는 교왕을 보고 있자니 내가 다 미안할 지경이기도 했고.
다만.
“ 그저, 교왕께서 미안하게 생각하신다면… 은밀히 급 높은 성직자 몇 명만 파견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저희 공작령에도 수도원은 있고, 그곳을 지키는 성직자도 있으니까요. ”
“ 가능한 일이기는 합니다만… 그 정도로 괜찮으시겠습니까? ”
괜찮다마다.
나는 입꼬리를 슬그머니 들어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솜씨 좋은 성직자를 영지 안에 두면 큰 도움이 될 테니, 충분히 차고 넘친다고 생각했다.
“ 네. 충분합니다. 다만, 혹여 부족하다 여기신다면……. ”
.
은밀히 상급 성직자를 파견하고 이브의 신성력 연구에 협력할 것.
비록 비공식적이기는 하나 교왕의 입에서 나온 약속이었고, 그를 증명하는 문서까지 얻어냈다.
사실상 기밀과 같은 것이기에 공공연히 떠벌리고 다닐 수는 없어도 제법 큰 성과라 할 수 있었다.
더구나 뜻하지 않게 굴러들어온 떡과 같았기에 손해 본 것도 없었다.
“ 다음 파견이 일 년하고도 삼 개월 뒤였던가? ”
짐칸에서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는 지온 대신 마차를 몰던 헬레나가 중얼거렸다.
본래 하룻밤 정도는 더 쉬었다 갈 만도 했건만, 할 일이 없으니 곧장 떠나자는 지온의 말에 따른 결과였다.
덕분에 마차는 일찌감치 교국의 수도를 벗어나한적한 길 위를 구르고 있었다.
“ 네. 한 지역에 계속 뿌리박은 사람도 있지만, 보통은 삼 년 주기로 파견 지역을 바꾼다고 해요. ”
헬레나와 나란히 앉아 앞을 바라보던 이브가 답했다.
헬레나를 중심으로 왼쪽에 엘렌, 오른쪽에는 이브가 앉아 있었다.
본래 둘 중 하나는 잠든 지온의 곁에 있으려 했지만, 헬레나가 서슬 퍼런 눈으로 뜯어 말린 결과였다.
피곤한 사람을 고이 자게 내버려두자는 배려도 있으나, 단지 그 뿐만은 아니다.
마차를 모는 사이 다른 여자가 들러붙어 있는 꼴을 보기 싫다는 이유도 있었다.
“ 일 년하고도 삼 개월이라. 의심을 최대한 피하려면 언제부터 들이대는 게 좋을까? ”
“ 한 달 정도 뜸을 들인 뒤에, 조금씩 드나드는 게 좋겠죠. ”
“ 조금씩이라. 참 애매하면서도 맞는 말이야. ”
수도원은 사람의 눈길이 잘 미치지 않아 연구하기 좋은 환경이기는 해도, 평소에 잘 드나들지 않는 곳이다.
그렇기에 갑자기 왕래가 잦아지면 의심의 눈길을 살 가능성이 높았다.
헬레나와 엘렌은 그 점을 해결하고자 질문과 답을 주고받았다.
“ 그래도, 아예 발길을 끊은 게 아니라 다행이에요. 마침 아이를 위한 축복도 받았으니 그를 명분 삼아 조금씩 다니면 그럴 듯해 보이긴 하겠죠. ”
“ 으음. 아이를 명분으로 삼는다라……. ”
아이를 명분으로 삼는다. 아이조차 명분으로 삼는다.
헬레나는 엘렌이 무심코 중얼거린 그 한 마디가 무척 귀족적이라 생각했다.
정치적인 냄새가 다분하다 느꼈기 때문이다.
문득, 엘렌은 헬레나의 언짢은 기색을 감지하곤 어깨를 움찔거렸다.
무심코 선을 넘은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에급히 어떤 변명을 내야 좋을지를 두고 머리를 싸맸다.
헬레나는 그런 엘렌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피식 웃으며 말했다.
“ 엘렌. 뭘 그렇게 안절부절 못 하고 그래? ”
“ 네? 하지만, 그게……. ”
“ 괜찮아. 나쁜 생각도 아니잖아. 오히려 좋은걸 뭘 그래. ”
그저 성실했기에 공작가라는 거대한 덩치가 주는 압박감에서 버텼지만, 할 수 있다면 벗어버리고 싶다.
헬레나는 지금도 그리 생각하고 있었고, 그렇기에 엘렌이 입에 담았던 한 마디를 마음에 두고 곱씹었다.
개인적인 감정은 둘째 치고라도, 엘렌이 내세운 명분이 몹시 그럴듯하게 들렸으니까.
“ …죄송해요. ”
“ 죄송하기는. 애초에 애가 태어나지도, 하물며 뱃속에 품지도 않았는데 무슨 상관이야. ”
엘렌의 어깨를 두드리는 헬레나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고, 엘렌은 그를 보고 나서야 한 고비 넘긴 듯 한숨을 내쉬었다.
무심코 날 선 반응을 보였으니 마음을 가라앉혀야지.
헬레나는 그리 생각하며 묵묵히 마차를 몰았다. 앞만 바라본 채 마차를 몰며 스스로를 가다듬으려 했다.
지온이 엮인 문제가 아니라면 차분한 성향이기에 가능한 생각이었다.
그러다, 헬레나는 문득 귀족의 아이로 태어나는 것이 어떤 의미일지 생각했다.
헬레나 스스로야 대를 이을 후계로서 교육을 받으며 부담만 느꼈을 뿐이었지만, 다른 아이들은 달랐다.
태생이 보통 사람과 다름을 알고, 미리 계급으로 인한 선을 그을 수 있음을 알고, 그로 인해 주제 모르고 콧대가 높은 이들도 있었다.
따로 교육을 하지 않는 이상 그러는 것이 보통이었다.
당장 헬레나가 숨통을 끊었던 케인 크라우저도 그런 성향이었다.
결국, 헬레나 크라우저는 다른 귀족 아이들과 사고방식 자체가 달랐다.
다만, 그렇기에 아이를 아이답게 기르는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 할 수 있었다.
“ 엘렌. 그렇게 풀 죽어 있을 거면 내 질문에 답이나 해 줘. 조금 민감한 질문이니까 이걸로 비긴 셈 치고. ”
헬레나가 풀 죽은 엘렌을 위로할 겸 호기심도 해소할 대화의 물꼬를 트자, 엘렌이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다크엘프가 대충 어떤 대접을 받고 살았는지 상상이 가니까 묻지는 않았는데, 이참에 네 옛날이야기나 한 번 해 줬으면 좋겠어. ”
“ 제… 옛날이야기요? ”
“ 응. 엘프의 교육방식이 어떤지 한 번 들려줘. ”
어색한 분위기가 점점 부드러워지기 시작하자, 가만히 쭈그려져 있던 이브도 귀를 쫑긋거리며 관심을 보였다.
못 들은 척 할 필요가 없고, 호기심을 드러내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옛 이야기라.
엘렌은 어색함에 몇 번 헛기침을 하고 나서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아마 인간이랑 별 차이는 없을 거에요. 갓 태어났을 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당연히 기억 안 나지만……. ”
엘프의 아이도 인간과 비슷한 과정을 거쳐 자라지만, 엘렌은 다크엘프였다.
그렇기에 젖 대신 약초즙을 먹고 자랐고, 말을 트고 걸을 수 있을 즈음에 정령마법을 배웠다.
다른 아이들에 비해 상당히 가혹한 환경이라는 문제가 있긴 했으나, 다행히굶어 죽지는 않았다.
부모의 정이 아예 없어진 것은 아니었던 덕이다.
그저 사춘기 아이가 부모와 부딪치며 열을 올리듯 서로 싸우던 때도 많았고, 동생이 태어나고 나서는 차별 받았을 뿐.
만약 지온이 이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면 동양인 부부 사이에 흑인 아이가 나왔다는 뜬금없는 생각을 떠올렸겠지만, 다행히 자고 있어 그럴 일은 없었다.
“ 골이 깊긴 하네. ”
“ 그랬죠. 그런데 이제 와서 보니까 다른 가정과 크게 차이는 없더라고요. 공작님이 말씀하신 어린 시절만 봤을 때는. ”
갑자기 연륜이 느껴지는 발언이 튀어나오자, 헬레나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새삼 경험 풍부한 여자 앞에서 삶을 주제로 젠 척 하는 것 같아 부끄러웠던 탓이다.
“ 그래도… 지금처럼 행복하지 않았으면 이렇게 별 생각 없이 털어놓지는 못했을 것 같아요. ”
“ …그래. 지금 행복하면 된 거지. ”
“ 네. ”
이번에는 엘렌이 어색해 하는 헬레나를 위해 여지를 주었고, 헬레나는 기다렸다는 듯 재빨리 그에 답했다.
덕분에 본의 아니게 묵직했던 분위기가 점점 밝아졌으나,
“ …또 도적인 것 같네요.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고 있어요. ”
짐마차를 노리고 도적떼가 다가온다는 소식을 접하곤, 세 여자가 입을 모아 한숨 쉬었다.
왜 교국 수도 근처에서 도적이 득실대는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생각과 함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