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화 〉 교국으로 #6
* * *
“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
잔잔하기만 하던 노인의 눈동자가 덜덜 떨렸고, 어깨 위로 쏟아지던 눈부신 빛도 사라진 지 오래다.
나 아니면 노인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 같지만, 나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고작 질문 하나 던지는 것이 전부였다.
“ …으음, 죄송합니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느라 폐를 끼쳤군요. ”
“ 아… 그러셨군요. 저는 괜찮으니, 너무 개의치는 마십시오. ”
“ 배려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럼, 다시 축복을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노인은 그리 대답하며, 평화를 찾은 듯 흔들림 없는 눈빛과 함께 빛을 내기 시작했다.
그 후로는 막힘없이 축복을 주는 과정이 이루어져, 나를 포함한 넷 모두가 축복을 받게 되었다.
아이를 위한 축복이니만큼 이렇다 할 큰 변화의 낌새는 없었으나, 아래쪽이 좀 더 묵직해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여행의 피로 덕분에 처진 것일 수도 있겠지만, 혹여나 축복 때문이라면 참 미묘하기 짝이 없을 변화였다.
“ 지온… 크라우저 님이라고 하셨지요? 괜찮으시면… 잠시 안쪽에서 저와 이야기를 나눠 주실 수 있겠습니까? ”
축복을 건 뒤 옷매무새를 단정히 가다듬던 노인이 생각지 못한 말을 꺼냈다.
안쪽으로 가자는 것이 제법 긴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뜻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더구나 인자하기만 하던 얼굴에 제법 심각해 보이는 기색이 엿보이기도 했다.
“ 혹여… 무슨 큰 문제라도 있습니까? ”
“ 몸의 아픔이라면 어느 정도 알아보는 재주를 약간 길렀습니다만… 그렇다 해서 지온 크라우저 님의 몸이 아프다는 건 아닙니다. 그저 늙은 노인이 묻고 싶은 게 있을 뿐이지요. ”
“ 묻고 싶은 것이라……. ”
비록 대가를 주고받은 축복이라고는 하나, 노인은 시종일관 진심을 담아 임했다.
곁을 보조하는 사제들도 마찬가지였다.
단순히 돈만 받고 제 할 일만 한다는 생각으로는 이런 모습이 나오지 않았다.
그런 이들이기에 거짓말을 하는 것도, 무언가 수작을 부리는 것도 아니라 믿었다.
“ 알겠습니다. 안내해 주세요. ”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 뒤, 세 부인들을 먼저 여관으로 돌려보냈다.
나와 떨어지기 싫어 약하게 반발했지만 얌전히 말을 따르게 만들었다.
몇 년에 걸친 조련의 성과였다.
헬레나를 비롯한 부인들을 보낸 뒤, 노인의 등을 따라 대성당 뒤쪽의 작은 방으로 이동했다.
규모가 워낙 커서 그런지 제법 걷고 나서야 의자에 엉덩이를 붙일 수 있었다.
달그락.
노인은 상쾌한 향이 감도는 차 한 잔을 내놓고 나서야 천천히 운을 뗐다.
“ 혹여… 저 하늘의 높은 분들과 연이 있으십니까? ”
“ …예? ”
순간, 나는 헛바람을 삼킬 뻔한 것을 겨우 억눌렀다.
노인이 말하는 하늘의 높은 분은 신이 분명할 테고, 그 신과 안면이 있냐는 질문을 들은 탓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 인연 때문에 지금 이 자리에도 앉아 있는 것이니까.
신성력을 가진 사제는 신과 연을 맺은 것도 다 알 수 있는 걸까.
그렇다면 참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 하늘의 높은 분이라 하심은… 아마 신을 말씀하시는 거겠죠? ”
“ 예. 그렇습니다. ”
“ 그렇다면… 제 대답은 아니라고 답할 수밖에 없겠군요. 저는 대부분의 시간을 크라우저 공작령에서 지냈으며, 잠깐 영지 밖으로 나갈 일이 있었어도 신의 손길이 닿은 곳에 들른 적도 없습니다. ”
헬레나에게도 숨기고 있던 사실을 처음 보는 노인에게 밝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마도 속내가 빤히 보이는 거짓말이라 되겠지만, 그럼에도 최대한 태연하게 거짓을 내뱉었다.
“ 그런데… 그런 것을 묻는 이유가 뭡니까? ”
“ 다름이 아니라… 지온 크라우저 님의 몸에서 신의 축복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
“ 신의 축복이요? ”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인 것 마냥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몇 년 동안 피치 못할 사정으로 거짓말을 할 때가 종종 있었던 덕인지, 내가 생각해도 능청스럽기 짝이 없었다.
노인이 거짓과 진실을 판별하는 능력이 있다면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연기일 테지만, 다행히 눈치 채지 못한 듯 제 할 말을 이어나갔다.
참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 그렇습니다. 극히 드물게 신의 은총을 타고나는 이들이 있는데, 신을 섬기는 자가 그 몸에 닿으면 자연스레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저희 교국의 오래된 문헌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지요. ”
“ 아. 그래서 축복을 내리시다말고……. ”
“ 예. 정말로 보통 분들과 다른 느낌이 손을 타고 전해지더군요. 실제로 경험하는 건 처음이라 깜짝 놀랐습니다. ”
신이라는 것이 진짜로 있는데다, 그 신을 모시며 신성력을 쓰는 성직자 사이에는 특별한 연관이 있어 보였다.
그렇지 않다면 노인이 말했던 문헌을 남길 리도 없었을 테지.
“ 저도 오늘에서야 신의 은총이 진짜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
“ 신을 모시는 이들 사이에선 제법 널리 퍼진 내용입니다만, 보통 분들은 잘 모르시지요. 참. 혹여 뭔가 자기가 특별하다는 걸 느끼셨을 때가 있으십니까? ”
“ 제가요? 제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특별하다 느낀 적은 많지만, 제가 특별하다 느낀 적은 없습니다. ”
하지만.
나는 잠시 말을 끊은 뒤, 굳이 말할 필요 없었던 어린 시절을 이야기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노인이 어떤 반응을 보일 지도 궁금했고, 내가 모르는 이야기를 들려줄지 모른다는 기대감도 있었다.
“ 으음… 그렇군요. ”
독을 먹고 살아난 이야기를 끝내자 노인 사제가 침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살아남은 것이 당연하다는 듯한 반응이었던지라, 내심 머쓱한 기분이 들었다.
“ 신의 은총을 받으신 분들은 다른 사람들과 확연히 다른 점이 있습니다. 지온 크라우저 님이 독을 먹고도 버틸 수 있게 도와준 강인한 생명력이 될 수도 있고, 저희 교국을 세우는 데 크게 일조하신 초대 교왕께서도 그러하셨지요. ”
“ 오. 교국의 시조께서도 은총을 받은 사람이었습니까? ”
“ 예. 지금도 남아있는 그분의 수기에 그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
내가 적당히 맞장구를 치며 묻자, 노인이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술술 내뱉었다.
덕분에 생전 연에도 없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 내용이 유익하고 말고를 떠나 듣는 것만으로도 눈이 트이는 느낌이었다.
그러다, 또 한 번 생각지도 못한 소리가 귀에 쏙 박혔다.
“ 혹, 교왕님께 지온 크라우저 님에 관한 보고를 올려도 되겠습니까? ” “ …예? ”
교왕에게 내 이야기를 한다.
그것은 곧 알리고 싶지 않았던 정보를 흘리겠다는 말과 같았다.
나로서는 찝찝하다 못해 불쾌하기 그지없는 상황이었다.
노인은 나의 불편한 기색을 읽었는지 황급히 변명을 덧붙였다.
“ 저희 교국은 은총을 받은 분을 특별하게 여깁니다. 신들이 내려주는 은총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라는 생각 때문이지요. 또, 신을 모시는 자로서 직접 신의 손길이 닿았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
급하지만 차분하다. 그 모순을 두 눈으로 보며 맥이 탁 풀리는 것을 느꼈다.
요컨대 신을 모시는 이로서 신의 손길을 받은 이는 제법 대우를 받는다고 한다.
개중에는 악한 이들 또한 있어 어느 정도 구분이 필요하다고는 하나, 대체로는.
“ 크흠! 알겠습니다. 알겠으니 일단 진정하시죠. ”
“ …으음. 실례를 범했습니다. ”
“ 실례까지는 아니니 괜찮습니다. 아무튼……. ”
노인은 그제야 끓어오른 열을 식히듯 작게 고개를 숙였고,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어떤 이득을 얻을 수 있을까 고민했다.
혼란을 목적으로 파견된 것이 아니니만큼 서로 등 돌리는 관계는 안 될 것 같았으니까.
“ 교왕께 알리는 것은 잠시 기다려 주시지요. 오늘 아내들과 상의를 해서, 내일 중으로 답을 드리겠습니다. ”
생각이 너무 길어도 좋은 답이 나오지는 않는다.
장고 끝에 악수 둔다는 속담도 있는 만큼결론을 질질 끌 필요는 없어 보였다.
고로 하루 정도면 충분하다는 뜻을 노인에게 전했다.
다행히 노인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에 동의하는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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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신의 은총이라 말하는 것을 얻었다 알려지는 것은 시간문제일 테지만, 그 이유는 숨길 수 있다.
노인 사제도 신이 관여했다고만 알고 있을 뿐, 그 자세한 이유를 모르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부인들이 여관방에 도착하자마자 성당에서 있었던 일을 알렸다.
오늘 처음 알았다는 것 마냥 놀라워하면서.
“ 하긴. 그럴 만도 해. 은총 정도는 받아야……. ”
이야기를 전부 끝마치자, 헬레나가 얼굴을 붉힌 채 중얼거렸다.
시선이 내 바지 쪽을 향하고 있어, 말을 흐렸음에도 무슨 말을 하는 지 훤히 들리는 것만 같았다.
“ 아무튼, 내 입장에선 교왕과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해 보고 싶은데… 헬레나 생각은 어때? ”
“ 당연히 좋다고 생각해. 교국이 온전히 편을 들어주지는 않겠지만, 끈을 이어두면 쓸모가 있을 테니까. 더구나 먼저 손을 내민 건 교국 쪽이라 조금 유리하기도 하고. ”
노인이 내미는 손을 굳이 잡을 필요는 없지만, 잡아도 나쁠 건 없었다.
헬레나는 그 상황이 약간의 우위를 점하게 해 준다며, 내일이라도 노인을 만나 방문 의사를 밝히라 제안했다.
엘렌이나 이브도 그와 같은 생각을 하는 듯, 한 마디씩 거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 다만, 한 쪽 편을 들면 중립이 공허한 외침으로 격하될 뿐이라 너무 과한 지원은 기대 않는 게 좋을 거야. 종교적 신념에 따라 사는 교국의 인간들이라 해도 그 정도 생각은 할 수 있을 테니까. ”
교국이 할 수 있는 지원에는 한계가 있다.
평판과 보통 사람들에게 지지받는 그 영향력을 이용해 중립의 지위를 지키고는 있지만, 한 쪽 편을 들면 금세 기울어질 정도에 불과하다.
신의 은총을 받은 인간이 특별하다고는 하나, 국가를 걸 정도로 특별하지는 않다는 뜻이리라.
헬레나는 그 사실을 한 번 더 강조했고, 나도 그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럼 결론은 났네. 일단 만나보고 정하는 걸로. ”
제법 무거운 주제였으나 금방 결론이 났다.
어차피 이래저래 머리를 굴려봐야 답이 나오질 않으니, 일단 부딪혀보고 답을 주는 것이 현명했다.
적어도 이 방에 모인 이들은 다 그렇게 생각해서 이런 결론을 냈다.
결론이 났으니 무거운 분위기를 계속 끌고 갈 이유도 없었고, 노닥거리지 않을 이유도 없어졌다.
엘렌과 헬레나는 그를 알았는지 서로를 째려보며 눈치싸움을 버리다, 기다렸다는 듯 내게 안겨왔다.
이브는 늘 침착했기에 굴러가는 상황을 지켜보는 눈치였다.
그렇게 늘 하던 일을 마친 뒤, 날이 밝자마자 노인이 기다리고 있을 대성당으로 찾아가 조건을 걸었다.
알리는 것은 좋으나 왕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본래 한 나라의 귀족으로서, 하물며 그 나라의 최고 귀족으로서 중립국의 왕을 만나기는 어렵다.
자칫 그 왕국의 편을 들어준다며 주변 국가의 반감과 견제를 살 위험 때문이다.
그럼에도, 노인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왕에게 내 요구를 전하겠다고 했다.
제법 묵직한 안건을 보고나 논의도 없이 받아들이는 것을 보면 교국에서 제법 높은 위치에 있는 것 같았다.
아니라면 보고를 하거나 논의에 시간이 걸린다고 했겠지.
“ 왕께서 크라우저 님을 만나보겠다 하셨습니다. ”
“ 좋은 소식이군요. ”
그 날 오후.
노인은 대성당에서 기다리고 있던 내게 솔깃한 소식을 전했다.
왕의 입장에서는 몰래 만날 수밖에 없다고는 하는데, 나로서는 크게 상관없었다.
오히려 대놓고 만나다 시끄러워 지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
“ 언제, 어디로 가면 되겠습니까? ”
“ 괜찮으시다면… 내일 동이 트기 시작할 즈음, 이곳으로 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
새벽이라. 눈에 띄지 않고 만나려면 더없이 좋은 시간이라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더구나, 여러모로 고려해서 내놓은 시간일 테니 반대하기도 뭣했다.
조금 피곤하기는 하겠지만 그 정도는 감수해야겠지.
“ 알겠습니다. 약속하신 시간에 이 대성당으로 오겠습니다. 혹여 오해가 없도록 다른 분들께 미리 언질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 그렇게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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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대화를 마친 뒤, 새벽.
나는 약속했던 시간보다 조금 일찍 대성당에 도착해, 어두컴컴한 홀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어두운 밤에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었으나 나른함 때문인지 별 생각이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오늘은 일찌감치 잠에 들 걸 그랬나 싶은 후회가 뇌리를 스쳤다.
애매한 시간에 일어날 바에야 자지 않고 부인들이나 상대하자는 내 무지성이 낳은 참상이었다.
사람이 이래서 욕망에 휘둘리면 안 되는 걸까.
나는 드문드문 기억나는 불교의 가르침을 떠올리던 중, 점점 커져가는 발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다.
인기척이 점점 뚜렷하게 느껴지는 것을 보니, 이쪽으로 곧장 다가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실례합니다. ”
그리고, 마침내 발소리가 멎는 순간,
“ 실례합니다. ”
저 앞의 열린 문 사이로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어둠을 타고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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